1 비좁은 도시를 겹겹이 덮은 구름층에 가려진 우윳빛의 겨울 해가 흐릿하고 빈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공지붕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길에 축축한 바람이 불었으며, 얼음도 아니고눈도 아닌 부드러운 우박 같은 것이 간간이 흩날렸다. 학교 수업이 끝났다. 수업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포석이 깔린 교정을 지나 격자 창살 교문 밖으로 우르르 떼 지어 몰려나왔다. 학생들은 좌우로 흩어져 갈라졌다. - P143
토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에는 듯 아팠다. 약간 비스듬한 눈썹을 찌푸린 채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갸웃 숙이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건 토니오특유의 표정이자 몸짓이었다. - P146
문제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하고 그 때문에 많이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불리하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열네 살 소년의 영혼은 이런 단순하고 가혹한 가르침을 이미 삶을 통해 터득했다. 소년은 이런 경험을 똑똑히 인지하고, 말하자면 마음속에 새기고 어떤 의미에서는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그 상황에 순응해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또한 토니오는그러한 가르침을 학교에서 강요하는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롭게 여겼다. - P147
이따금 토니오는 대략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해. 나를 바꾸고 싶지 않고 또 바꿀 수도 없어. 나는 주의가 산만하고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일들에 신경을 써, 입맞춤을 해주고 대충 음악으로 넘어가기보다는 적어도이런 나를 진지하게 꾸짖고 벌주는 게 당연해. 우리는 초록색마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집시가 아니라 예절 바른 사람들, 크뢰거 영사의 가족, 크뢰거 집안이라고・・・・・・ - P149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삶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이런 방식은 한스 한젠에 대한 사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니오가 한젠을 사랑한 건 무엇보다도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젠이 모든 면에서 자신과는 다르고 반대된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인 데다가 영웅처럼 승마와 체조와 수영을 하고 모두에게 인기 있는 활발한 소년이었다. 교사들은 한스 한젠에게 거의 애정어린 호의를 보였으며, 성을 뺀 채 이름만 불렀고, 온갖 방식으로 격려하고 장려했다. 학우들은 한젠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 P150
토니오 크뢰거는 한스 한젠처럼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망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스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길 고통스럽게 갈망했다. 토니오는 자신의 방식으로 천천히 진심을 다해 헌신하고 고뇌하는 애수 어린 방식으로 한스의 사랑을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애수는 토니오의 이국적인 외모에서 예상되는 그 어떤 격렬한 열정보다도 더 깊고 더 애타게 타오를 수 있었다. - P151
2 금발의 잉게 잉게보르크 홀름, 고딕식 분수가 여러 단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광장 옆에 사는 의사 홀름의 딸. 토니오 크뢰거가 열여섯 살 때 사랑한 사람은 금발의 잉게였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토니오는 잉게보르크 홀름을 이미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불빛 아래서 잉게를 보았다. 잉게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좀 거만하게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걸 보았다. - P160
그날 저녁 토니오 크뢰거는 잉게의 모습을 가슴속에 담아왔다. 굵게 땋은 금발, 웃음 짓는 길쭉하고 푸른 눈, 주근깨가 나고 윤곽이 부드러운 콧마루. 잉게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서 토니오는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잉게가 대수롭지 않은 말을 했을 때의 억양을 나지막이 흉내 내보려고 시도하고는 전율했다. 그동안의 경험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토니오는 이 사랑이 틀림없이 많은 고통과 고뇌, 굴욕을 안겨주고, 더욱이 평온을 파괴하고 마음을 선율로 채울 것이란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를 완성하고 차분하게 전체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토니오는 그 사랑을 기쁘게받아들였으며, 자신을 오롯이 사랑에 내맡기고 온마음을 다해 사랑을 가꾸었다. 사랑이 인간을 활기차고 풍성하게 해준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니오는 차분하게 전체를 마무리 짓는 대신 활기차고 풍성해지길 갈구했다. - P161
이런 생각을 하자 토니오 크뢰거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조여왔다. 우울하면서도 멋지게 유희하는 힘들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약동하는 걸 느끼는데, 자신이 갈망하는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이 쾌활하게 살며 그 힘들에 대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수심에 잠겨 닫힌 블라인드 앞에서 외로이 밖을 내다보는 척해도 토니오 크뢰거는 행복했다. 그때 토니오의 심장은 살아 숨 쉬었기 때문이다. 잉게보르크 홀름, 내 심장이 너를 위해 따뜻하고 슬프게 고동치고있어. 토니오의 영혼은 행복하게 자신을 부정하며, 경쾌하고오만할 정도로 평범하고 작은 금발의 잉게를 감싸 안았다. - P169
4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의 건강이 약화되는 것에 비례해 예술가 기질은 강화되었다. 그는 까다롭고 고상하고 정교하고 섬세해졌으며, 진부한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형식과 취향의 문제에서 극히 예민해졌다. 토니오 크뢰거가 등단했을 때 문단에서는 찬사와 환호가 쏟아졌다. 수준 높게 가다듬고 고뇌의 흔적과 재치가 가득한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예전에 교사들이 꾸짖으며 불렀던 이름, 호두나무와 분수와 바다에 보내는 최초의 시들에 서명했던 이름, 남쪽과 북쪽이 융합된 음향, 이국적인 분위기의 시민적인 이름은 탁월함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끈질기게 버티며 명예를 추구하는 보기 드문 근면성이 자신의 경험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끝까지 파헤치는 기질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 근면성은 까다롭고 예민한 취향과의 싸움에서 격렬한 고통을 겪으며 특이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 P176
리자베타, 내가 ‘인식의 혐오‘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의 사태를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정도로(그래서 절대로 화해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역겹게느껴지는 상태입니다. 덴마크 사람 햄릿, 이 전형적인 글쟁이가 바로 그런 경우죠. 알아야 하는 소명을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알아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햄릿은 알고 있었어요. 눈물 젖은 감정의 베일을 뚫고서 사태를 간파하고 인식하고 알아채고 관찰합니다. - P190
6 마음속에 품어둔 집이 있는 길을 올라가볼까? 아니, 내일 가자. 지금은 너무 졸려. 기차를 오래타고 왔더니 머리가 무거웠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아련하게천천히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3 년 동안 이따금 위장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토니오 크뢰거는 고향 집에 다시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경사진 골목길에 위치한 고향 집은 유서 깊은 고택이었고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꿈에서는 아버지도 아직 살아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아들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럴 때마다 토니오 크뢰거는 꾸중 듣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치 지금 감각을 현혹시키는데도 뚫고 나올 수 없는 그런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꿈속에서는 이게 망상인지 현실인지 묻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현실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다 결국 꿈에서 깨어난다.……. 토니오 크뢰거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북적거리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바람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인 채 밤에 묵을 호텔, 시내의 일급 호텔을 향해 몽유병자처럼 걸음을 옮겼다. - P202
유서 깊은 나지막한성문을 지나 항구를 따라 걷다가 어린 시절의 집을 향해 바람이 부는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갔다. 그 집은 300년 전부터 회색의 장중한 자태를 자랑하며 이웃집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박공지붕이 이웃집들보다 높이솟아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현관문 위의 반쯤 지워진 경건한 문구를 읽었다. 그러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지금 1층을 지나가다보면 어딘가 문 하나에서 귀 뒤에 펜을 꽂은 사무복 차림의 아버지가 나타나 그를 불러 세우고는 방탕한 삶을 산다고 근엄하게 추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버지가 그런다고 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아 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1층을 지났다. - P208
그곳은 아침 식사를 하던 방이었다. 아침에는 푸른색 벽지에 흰색 조각상들이 튀어나와 있는 위층의 커다란 식당이 아니라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 저기 저곳은 침실이었다.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저곳에서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인생을 즐기는 사교적인 부인으로 삶에 대한 애착이 많았었다. 나중에 아버지도 그 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훤칠한 키에 꼼꼼하고 생각이 깊고 조금 애수에 젖은 듯하고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고 다녔던 신사・・・・・…. 아버지가 임종하던 날, 토니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침대 발치에 앉아있었다. 무언의 강렬한 감정, 사랑과 고통에 숨김없이 자신을 내맡긴 채. 어머니, 아름답고 열정적인 어머니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래놓고 남쪽의 예술가와 저 멀리 떠나버렸다……….
하지만 저기 뒤편의 좀 작은 세 번째 방, 다른 방들처럼 책으로 가득하고 초라한 차림새의 직원이 지키고 있는 방은 오랜 세월 토니오 크뢰거 만의 방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거나 산책을 하고 나면지금처럼 그곳으로 돌아왔다. 한쪽 벽면에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토니오는 처음으로 쓴 은밀하고 어설픈 시들을 그 책상서랍에 보관했다.... 호두나무…………. 가슴 아릿한 애수가 밀려왔다. - P210
경찰관이 말을 이었다. "부모도 알 수 없고 신분도 확인할 길 없는 인물이 사기와 다른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지른 탓에 뮌헨 경찰이 뒤쫓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자가 덴마크로 도주 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토니오 크뢰거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런 반응은 주목을 끌었다. "뭐라고요? 아, 물론 아니겠지요!" 경찰관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하제 씨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끼어들었다.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제하제 씨는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경찰 공무원이 오로지 맡은 의무를 다할 뿐이라는사실을 헤아려주십시오. 손님이 어떤 식으로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무슨 서류라도 있으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신분을 밝혀서 이 사태를 끝내야하는 걸까? 내가 정체불명의 사기꾼이나 초록색 마차를 타고 유랑하는 집시가 아니라 크뢰거 영사의 아들, 크뢰거 집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제하제 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걸까? - P215
그날 아침은 황홀한 축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에 흠칫놀라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고 마법적인 빛, 기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묵는 방은 유리문과 발코니가 해협 쪽을 향해 있었고, 흰색의 얇은 망사 커튼을 통해 거실 공간과 침실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벽지는 부드러운 색상이고 엷은 색의 가벼운 가구들이 놓여 있어서 항상 밝고 친근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잠에 취한 눈에 비친 방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 더없이 환하고 화사하게 빛났다. 벽과 가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망사 커튼을 은은한 붉은빛으로 타오르게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향긋한 장밋빛으로 방 전체가 푹 감싸여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떠오르는 해가 빚어내는 현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며칠 동안 줄곧 흐리고 비가 왔다. 그런데 이제 연파랑 비단을 팽팽하게 펼쳐놓은 듯 하늘이 바다와 육지 위로 청명하게 어른어른 빛났다. 둥근 태양이 살며시 일렁이며 반짝이는바다 위로 장엄하게 떠올랐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름이 태양을 에워싼 채 가로질러 갔다. 바다가 태양 아래에서 전율하며 붉게 타오르든 듯 보였다...
*아~~~ 묘사가 넘 멋진 이 문장들! - P230
그때 별안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한스 한젠과 잉게보르크홀름이 홀을 가로질러 갔다.
토니오 크뢰거는 수영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한 터라 나른한 피곤함을 즐기며 의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다. 베란다와 바다를 향해 앉아서 훈제 연어를 얹은 토스트를 먹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들어왔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걸어 들어왔다. - P232
그래, 그들이 거기 있었다. 오늘 햇살을 받으며 토니오 크뢰거의 옆을 지나갔던 두 사람이 거기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들을 다시 보았다. 두 사람을 거의 동시에 알아보고는너무 기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스 한젠이 거기 있었다. - P239
내가 너희들을 잊었을까? 토니오 크뢰거는 물었다. 아니, 결코 잊지 않았어! 한스 너도 잊지 않았고, 금발의 잉게 너도 잊지 않았어! 내가 작품을 쓴 건 너희들 때문이었어. 그리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마다 혹시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하고 남몰래 두리번거렸지………. - P239
내가 너처럼 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올바르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규칙을 존중하고 질서를 준수하고 신과 세상과 한마음이 되어 소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둘 수 있다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평범함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칭송할 수 있다면! ………. 다시 한번 새로 시작할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을 거야. 다시 지금처럼 될 거야. 모든 게 또 지금처럼 이렇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헤매게 되어 있거든.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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