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몇 개월 전부터 유럽 대륙에 위협적인 징후를 드러낸 19XX년의 어느 봄날 오후, 구스타프 아센바흐 또는 50세 생일 이래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라 불리는 작가는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거리에 있는 집을 나와 홀로 상당히 멀리까지 산책했다. 그는 오전 내내 극도의 주의력과 통찰력,
예리하고 정확한 의지를 요구하는 까다롭고 위험한 작업에 몰두한 탓에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 P9

-제 3장

 바로 옆에서 폴란드말이 들렸다.
아직 성인이라 할 수 없는 청소년들 몇 명이 가정교사인지안내원인지 모를 사람의 인솔 아래 등나무 테이블 주변에 모여 있었다.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소녀 세 명과 열네 살가량의 긴 머리 소년 한 명이었다.
 아센바흐는 완벽하게 잘생긴 소년의 모습에 감탄했다. 우아하게 내성적이고 창백한 얼굴이 벌꿀빛의 머리카락에 에워싸여 있었다. 오뚝한코, 사랑스러운 입, 기품 있으면서도 더없이 아름답고 진지한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상을 연상시켰다. 한 - P49

없이 순수하게 완벽한 모습은 유일무이하게 개성적인 매력을 발산해 자연에서도 조각 예술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성공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남매들을 보살피고옷을 입히는 관점이 명백히 대립되는 게 눈에 띄었다. 세 여자아이 중 맏이는 이미 어른이 다 된 것 같았는데, 다들 하나같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옷차림이 근엄하고 정숙했다. 소녀들은 수녀복처럼 아무런 장식 없이 밋밋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청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일부러 몸에 맞지 않게 재단한 듯 싶었으며 흰 옷깃만이 유일하게 밝은색이었다. 이런 복장은 어떤 식으로든 몸매에 대한 호감을 일깨우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방해했다. 머리에 매끄럽게 꼭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얼굴을 더욱 수녀처럼 공허하고 무표정하게 보이도록 했다. 어머니가 소녀들을 그런 식으로 꾸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소녀들에게는 바람직하다고 여긴 듯한 교육적인 엄격함을 소년에게는 적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정다감한 애정만이 소년의 존재를 결정지은 게 분명해 보였다. 감히 소년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가위를 댈 엄두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 P50

소년은 유리문을 지나 식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조용히누나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걸음을 내딛는 상체의 자세, 무릎의 움직임, 흰색 구두를 신은 발의 동작이 무척 우아하고 경쾌했으며 유연하면서도 당당했다.
 테이블로 가는 길에 두번 고개를 돌려 홀 안을 둘러보고는 어린애답게 수줍어하며눈을 치켜떴다가 내리뜨는 모습이 더욱 아름다웠다. 소년은 부드럽게 녹아드는 말투로 나지막이 한마디 웅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아셴바흐의 시선에 소년의 옆얼굴이 정확히 보였고, 아셴바흐는 진실로 신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에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깜짝 놀랐다. 그날 소년은 블라우스 스타일의 흰색과 파란색 줄무늬 상의를 입고 있었다.  - P56

좋아, 좋아! 이따금 예술가가 빼어난 걸작 앞에서 열광과 황홀함을 표현하듯 아센바흐 역시 전문가답게 냉정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나를 기다린 건 분명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어. 네가 이곳에 있는 한 나도 여기있겠어! 하지만 아셴바흐는 종업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을 가로질러 넓은 테라스를 내려갔다. 그리고 곧장 잔교를 건너 호텔 손님들을 위한 전용 해변으로 향했다.  - P57

소년은 바다와 직각을 이루는 오두막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이좋게 즐기는 러시아인 가족을 보자마자 짜증스러운 경멸의 먹구름이 소년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마가 침울하게 흐려지고 입이 삐쭉 올라가고 분노로 입술이 일그러지면서 볼까지 이지러졌다. 눈썹이 심하게 주름지는 바람에 눈이 움푹 들어간 듯 보이고, 그 아래에서 증오의 표현이 심술궂고 음울하게 뿜어져 나왔다. 소년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한 번 더 위협적으로 뒤돌아보고는 격렬하게 뿌리치듯 어깨를 돌려 적들을 등졌다.
일종의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는지 아니면 깜짝 놀라서였는지는 몰라도 존중심과 수치심 같은 것이 아셴바흐로 하여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 P60

 "타지우! 타지우!" 소년은 해변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물살을 가르며 달려왔다. 저항하는 물을 두 발로 첨벙첨벙 내젓자 거품이 일었다. 남성이 되려는 문턱에 있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냉담하고 생기 넘치는 형체가 곱슬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가녀린 신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 깊은 하늘과 바닷속에서 나타났다. 자연으 - P63

로부터 솟아나서 자연을 벗어났다. 그 광경은 신비적인 상상을 일깨웠다. 형식이 생겨나고 신들이 탄생한 태초의 시학과도 같았다. 아셴바흐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그 노래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여기가 참 좋아서 여기 머물러야겠다고 재차 마음먹었다. - P64

 아셴바흐는 소년을 쳐다보지 않고 책을 몇 쪽 읽었지만, 소년이 거기 누워 있으며 고개만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면 그 경탄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거의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마치 휴식을 취하는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도 거기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귀한 인간의 형상에 줄곧 주의를 기울였다. 스스로를 희생하며 정신 속에서 아름다움을 낳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소유한 자에게 느끼는 감동적인 애정,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애정이 아셴바흐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뭉클하게 했다. - P64

 오래 걸을수록 바다 공기가 시로코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혐오스러운 상태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상태는 아셴바흐를 흥분시키는 동시에 지치게 만들었다. 곤혹스럽게도 땀이 줄줄 흘렀다. 눈이 침침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아셴바흐는 북적거리는 상가 골목을 피해 다리를 건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는 걸인들이 괴로울 정도로 달라붙었으며, 운하의 역겨운 냄새가 숨 막혔다.
베네치아의 안쪽에는 사람들에게 잊혀서 마법에 걸린 듯한분위기의 장소들이 있다. 그런 곳들 가운데 하나인 조용한 광장에 이르러 아셴바흐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깨달았다. - P66

체류지를 한 번 더 옮기는 의미를 살리려면 즉각 움직여야 했다. 아센바흐는 체류지를 옮기기로 결정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까운 곤돌라 선착장에서 곤돌라를 타고 미로처럼 엉킨 칙칙한 운하를 따라갔다. 사자 조각상이 양쪽에서 엄호하는 운치 있는 대리석 발코니 아래를 통과하고, 미끌미끌한 성벽 모퉁이를 돌고, 슬퍼하는 듯한 궁전의정면을 지났다. 궁전 정면은 산 마르코로 이어졌으며,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물에 커다란 회사의 간판들을 비추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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