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의 요리와 침대에서의 잠자리까지 모든 것은아빠의 사랑이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나는 아주 일찍부터섹스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잠자리를 질색하지는 않았지만 참아내야 하는 것쯤으로본 것 같다. 한 번도 육체적인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여자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너희 아빠 정열적인 남자였어." "아빠는 언제나 준비가 돼있었어. 하룻밤에 여자 열 명이랑도 잘 수 있었을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고 어떤 남자 옆에 눕기 위해서는 그 남자를진짜로 진짜로 사랑해야만 하는구나. 그러지 않으면이 모든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구나. 열여섯 살,
처음으로 순결을 위협받았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 P37

때마다 짜증이 치밀 정도로 계속되는 머리와 몸의 전쟁을느꼈고 조용히 엄마의 자비를 빌었다. 하지만 엄마, 내가이 사람을 정말 정말로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아는 건 나도 몸이 달았고 이 남자가 날 밀어붙이고있다는 것, 끈질기게 조르고 있다는 것뿐이야. 골목에서, 공원 벤치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방에서 엄마가 뒤척이며누워 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전쟁터에 나와 있는 것같아...... 하지만 나에겐 지원군이 없어.

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진짜 사랑하는지어떻게 아냐고? 그냥 아는 거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이 문장은 시나이 문자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계승되었다.  - P38

엄마가 드러커 아줌마에게 창부라고 하고 1년 뒤에드러커네는 이 건물에서 나갔고 그 아파트에 네티러바인이 들어왔다. 드러커네가 이사 가고 네티가 이사 온낮은 기억에 없다. 트럭이나 봉고차가 들어와 가구 식기옷가지 들을 내가고 들여오는 장면도 없다. 사람들도 집도마치 아파트에서 증발하듯 싹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이 그공간을 차지했을 뿐이다. 나는 애착이 절대적이지 않고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아주 어린시절에 알게 되었다.  - P51

엄마는 맞은편에 앉은 나를 찬찬히 훑어본다. "그래서우리 잘난 딸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엄마는 황당한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입이 떡 벌어졌고눈은 딱한 사람 보듯 연민으로 가득 찼다. 내가 방금 한말이 하도 무식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주무기인 말발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천천히 주억거리더니 말한다. "아까 그 꼬마가 한 말을해줘야겠구나. ‘아줌마 완전히 반대로 아시네요." - P70

 네티는 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물론 레이스도 많았다. 어딜 가나 네티가 짠 레이스가 있었다.
네티는 재능이 출중한 레이스 기술자였다. 사실릭 러바인을 만난 곳도 일하던 레이스 공장이었다.
레이스 실로 옷과 침대보는 물론 드레스와 코트까지 뜰실력이 됐지만 그걸로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대신 인형베갯잇, 의자 등받이 덮개 같은 소품을 짜서 아파트를화사하고 앙증맞게 꾸미곤 했다.  - P80

나는 열네 살이 되었고 네티의 레이스는 나의 내면세계성장에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이듬해였고 내가 우리 집 비상계단에 밤늦게까지 앉아서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 분위기는 딱 영안실 같았다. 엄마의 비애는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유일한 안식처였다.
- P85

아빠는 11월 말 새벽 네 시에 돌아가셨다. 아빠가입원했던 병원에서 다섯 시 반에 전보가 왔다. 아빠는산소텐트에 일주일 동안 들어가 있었고 의사들은 최선을다해 생명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기대하지 않았다.
아빠는 닷새 동안 세 번의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마지막발작이 아빠의 생명을 앗아갔다. 쉰 살이었다. 그때엄마는 마흔여섯, 오빠는 열아홉, 나는 열세 살이었다. - P96

초인종이 울렸을 때 가장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튀어나간 사람은 오빠였다. 엄마가 오빠 뒤를 따랐고 내가그 뒤에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손바닥만 한 전실에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오빠는 문 앞에 서서 60와트전구가 비추는 연노란색 종이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손톱이 박힐 정도로 오빠의 팔목을 세게움켜쥐면서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셨지? 그렇지, 그런거지?" 오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곡소리가터져나왔다.
"아악."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아, 하느님."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또 소리를 질렀다.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고 샘물처럼 솟아올라서 복도를가득 메웠고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거실로 흘러들어 - P96

두 개의 침실 벽에 부딪혔고 우리 모두를 떠내려가게 했다.
그날 낮과 밤에 흐느끼는 여자들과 충격받은 얼굴을한 남자들이 우리 엄마를 에워쌌다. 엄마는 머리를쥐어뜯고 살갗을 찢고 몇 번씩 혼절했다. 누구도 감히엄마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엄마는 기이한 투명 막 안에홀로 격리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엄마 주변을 에워쌌지만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엄마는 마법에걸렸다. 귀신에 홀려 있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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