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남극을 향해

인듀어런스 호의 상륙 예정지는 위해 동쪽의 바셀 만(灣)이었다. 하지만 배가 웨들해의 강한 해류에 휩쓸린다면 그들은 얼음과 더불어 서쪽의 파머 반도로 가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얼음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
그건 항해에 나선 섀클턴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12월 5일 아침에 사우스 조지아 섬을 출발한 인듀어런스 호는 이틀 뒤에 처음으로 부빙군을 만났다. 이후 6주 동안 배는 부빙군을 피해 멀리 돌기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바다를 무려 250㎢나 뒤덮고 있는 엄청난 부빙군을 만난 적도 있었다. - P29

"얼음에 갇혔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여전히 단단함 길이 열릴 징후가 전혀 없음."
"물길이 다시 막혔음.".
"여전히 단단함."

3주 동안 대원들의 일기는 온통 이런 내용들로 채워졌다. 얼어붙은 부빙군을 바람이 쪼개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도 더 이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얼음에 갇힌 인듀어런스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부빙군과 함께 표류했다. 섀클턴이 그톡록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기어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 P38

배는 육지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고 겨울은 점점 더 다가왔다. 남극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과학자와 선원들은 남극 탐험을 함께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남극의 겨울을 함께 보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갔다." 섀클턴은 이렇게 적었다. "여름이 너무 짧았다…… 물개가 사라졌고 새들도 떠났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먼 수평선에 아직 육지가 보였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로 갈 수가 없다."

2월24일, 섀클턴은 항해 중단을 명령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음에 붙박힌 인듀어런스 호는 더 이상 배이기를 포기한 채 대원들의 월동기지가 되었다. 이제 좋건 싫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섀클턴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이번 탐험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 그리고 전쟁중인 유럽, 이번에 실패하면 남극 탐험에 나설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게 분명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탐험을 재개할 수도 있겠지만, 섀클턴은 날이 갈수록 그것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P38


조타수인 허버트 허드슨은 가장 가까운 송신기지가 있는 포클랜드로부터 무선 신호를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당시의 무선 기술은 그런 ‘기적‘ 을 허락하지 않았다. 탐험대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8

*3부 침몰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졌다. 남극 겨울의 으스스한 고요와 기나긴 어둠이 주는 독특한 심리적 영향을 섀클턴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대원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쾌적한 숙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섀클턴은 맥니쉬를 시켜서 갑판 사이에 있는 창고를 선실로 개조했다. 3월 11일에 새로운 숙소로 거처를 옮긴 대원들은 그곳을 ‘리츠(고급 호텔 경영자 시저 리츠의 이름을 딴 것-역주)‘ 라고 불렀다. 대략 1.8mX1.5m 크기의 작은 선실마다 두명이 들어갔으며, 각각의 방에는 ‘빌라봉(물이 새지 않는 곳)‘, ‘앵커리지(은둔처)‘,  ‘세일러스 레스트(선원 휴게실)‘ 와 같은 다양한 이름들이 붙었다.

리츠는 따뜻했으며 아늑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크린, 와일드, 마츤, 워슬리는 리츠보다 훨씬 추운 일반 선원용 선실에 머물렀다. 섀클턴 역시 선장실에 그
대로 남았는데, 그곳은 인듀어런스 호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다. - P50

5월 1일, 태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앞으로 4개월 동안은 해를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원들의 바깥 활동이 중단되면서 온갖 종류의 오락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새로운놀이를 하나 만들 때면 리츠 전체가 온통 시끌벅적하게 변하곤 했다. 5월말엔 모든 대원들이 겨울의 광기에 굴복하여 머리를 바짝 깎으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헐리는 그 순간을사진에 담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남극의 겨울밤은 대원들로 하여금 이 거친 세계로 모험을 떠난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은 동화처럼 신비로웠고, 밤하늘의 완벽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밝은 빛을 내뿜었다. 가끔은수평선 위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오로라가 나타나기도 했다.

대원들의 일기를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찾아볼수 있다. 매일매일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이 스트레스를 주긴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될 만한 마찰이나 불화는 없었다. "서로 관심 분야가 다르고 대원 대부분의 개성이 뚜렷하며 생활방식도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오들리는 일기에 적었다.
- P53

섀클턴은 규율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그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졌다.
대원들은 그의 말이 ‘명령‘ 이어서라기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늘 정했으며, 의복을 비롯한 모든 물품을 선발대나 고급 대원들보다 일반 대원들에게 먼저 배분했다. "일반 대원의 물품이 먼저 떨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라고 워슬리는 일기에 적었다. - P54

"배가 견딜 수 없을 거야, 선장."
작은 선실 안을 왔다갔다하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아.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고, 단 며칠이 될 수도 있어.....…."

워슬리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언젠가 이 배를 정말로 버려야 하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어쩌면 섀클턴보다도 훨씬 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조만간 다가올 사태를 이미 알고 있었고, 와일드 역시 같은 생각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회의를 끝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 P58

그날 저녁, 갑판에 있던 몇몇 선원들이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다. 어디선가 황제 펭귄 8 마리가 배를 향해 조용히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황제 펭귄들이 함께 몰려다니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잠시 배를 바라보던 펭귄들은 갑자기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섬뜩하고 기분 나쁜 소리로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불길한 통곡 소리였다." 워슬리는 이때의 기분을 이렇게 적었다.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치 펭귄들이 인듀어런스 호를 위해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았다.
"저 소리 들었나?" 대원들 가운데 가장 미신적인 맥리오드가 낙담한 표정으로 맥클린에게 말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긴 틀렸어." - P75

10월 27일 오후 4시. 온종일 거세게 밀어닥치던 압력이 마침내 최고조에 달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며 쓰러지는 순간, 거대한 얼음이 키와 선미재를 맹수처럼 난폭하게 찢어버렸다. 갑판이 부서져 나가고 용골이 쪼개졌다.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배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P75

오후 5시,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들을 대피시키고 모든 물품들을 얼음 위로 내렸다. 갑판 위에서 있던 섀클턴은 떨어져 나간 엔진이 바닥에 구르는 것을 기관실 위창을 통해 말없이 지켜보았다.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섀클턴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록했다. "뱃사람에게 배는 바다에 떠있는 집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명을 지르고 부서지고 온 몸에 지독한상처를 입으면서, 인듀어런스 호는 천천히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헐리는 이미 물에 잠긴 리츠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온갖소리들로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 속에서도 휴게실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리고 있었다. - P76

섀클턴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그는 인듀어런스 호의 푸른 함기를 높이 들어올렸고, 얼음 위의 대원들은 다들 그 깃발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인듀어런스 호의 붉은 비상등이 마지막 인사처럼 조용히 깜박거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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