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봐야 할 작품

저는 이응노 화백을 <군상>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볼때마다 놀랍습니다. 먼저 멀리서 보고 그다음 쭉 가까이가서 봐보세요. 각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구상화된 그들이 모여 하나의 추상으로 거듭납니다. 말년 10년에 집중된 군상 연작 중 하나이지요. 한땀 한땀 그렸을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노력과 정성이 대단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그리기 시작했다는군상 연작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세상이 긍정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스며 있기도 합니다.

*이응노, 군상, 1986 - P208

서양식으로 꾸민 여성들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쳐다봅니다. 뒤인물들의 수근거림이 들리는 것 같죠. 그림에 써 있는 글은 이렇습니다. "바라볼 때에 눈물이 앞을가리워마지 않노라. 빨리 반성하야 새옷을 벗고 직장으로직장으로, 제이국민의 현모가 되어주기를 원하노라." ~~~~~ 하지만 그와 동시에 편견에 가득 찬 눈으로 ‘양색시‘를 바라보는 무리의 사람들을 꼬집긷느 하죠. 화법으로 보장션 전통기법으로 그린 서양화 같은 느낌이고요.

*이응노, 거리풍경-양색시, 1946 - P222

전쟁마저 승화시키는 예술혼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피난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 <피난>을 보시죠. 짐을 머리에 이고 아이를 업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뒤에 보이는 기차에는 사람들이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올라타 있고요.
전쟁은 그저 아픔만을 낳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남쪽으로 피난 갔지만이응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게 되었는데요, 남북이 서로 다투는 사이 그의 아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맙니다. 이응노는 이후 수덕사 근처의 시골집에서 지내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응노 화백은 텅 빈 마음을 그림으로나마 승화합니다. 그저 계속해서 그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습니다.

*이응노, 피난, 1950 - P223

동양의 미학은 서양에 뒤처지지 않았다

이응노 화백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화가로서 이응노 화백의 삶은 이 시기를 기준으로 나뉘게 되죠. 예술의 중심지이자 현대미술의 심장이라할 수 있는 곳으로 오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환골탈태합니다.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양의 미학을 담은 콜라주 작품과 ‘문자추상‘ 등이 탄생했고 현재까지도그만의 아이덴티티가 됐습니다.

*이응노, 구성, 1964
*이응노, 구성, 1963 - P225

그런데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1967년 어느 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연락이 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아들이 북한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베를린으로 오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죠. 꿈만 같았습니다. 죽은 줄만 알고 살았던 아들이 살아 있다니 그 어느 아비가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후 몇 번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이응노는 간첩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옥살이를 하게 되죠. 그해 12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됩니다. - P231

1983년 이응노는 프랑스로 귀화합니다. 또 한 번의 누명을쓰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응노의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의 한국인들도 그를 만나기 꺼려 했죠. 그리고 1989년 1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지만 정부는 여전히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작가없는 전시회라는 어이없는 일이 생깁니다. ~~~
전시회가 성대하게 열린 그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작업하던 이응노는 쓰러졌습니다. 심장마비였죠. 병원으로 이송되어 잠시 회복하는 듯했지만 결국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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