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잠시 후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그런 반성조차 전혀 없는 뻔뻔함으로 할머니?하고 부르면 할머니는 언제나 응, 하는 평온한 대답을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평온하게 대답할 것을아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할머니를 부르는 내 마음에는불안함이나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조금 전 우리 사이에 오간 못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말들과 실쭉한 얼굴이아예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평온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넘치는 관용속에서 자랐고, 내 못됨에 대해서 별다르게 반성하지 않았다.
*그렇다. ‘관용‘ 이 말이 눈에 딱 들어온다 우리 외할머니에게도 그런면이 있으셨다. 무슨 말이건 하면 "그랬나?" 하며 대꾸해주시던. 엄마에게선 결코 볼수 없었던... 아버지 병구완에 바쁜 엄마 대신 우릴 키우시고 살림을 맡으셨던 외할머니 생각난다. 마지막 몇 년을 저 아래 합천의 요양병원에서 지내시다 돌아가셨는데도 가보지 못한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 P179
환한 웃음과 시무룩한 한숨 사이 정도에 불과한 할머니의 작은 감정 표현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마도 모종의 동화과정이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그속상한 얼굴 정도로 마음이 잦아들고, 좋아서 깔깔대고흥분하다가도 할머니를 보면 또 그 환하게 웃고 있는얼굴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는 식이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정신없이 치달리던 내 감정의전류계는 할머니라는 거울을 통해 좀 더 느긋하고 묵직해졌다. - P188
그런데 그다음에 하셨던 말씀은, 친구가 이전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근데! 거 뭐 될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를 좀 더 문어체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근데 상담대학원 갔다고 해서 꼭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 듣던 나도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말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친구는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빠는 언제나 좋은 아버지였지만, 그날 해주신 말씀은 가장 중요한 말씀이었어. 대학원에 합격해서 기뻤지만, 사실 완전히 좋기만 한 건 아니었거든. 내가 무슨일을 한 건가, 애들 키우면서 이 공부를 내가 끝까지 할수 있을까? 난 두려웠어. 대학원만 다니고 상담사는 되지 못할까 봐서 정말 두려웠다고. 근데 아빠는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아셨던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뻐하시면서도 ‘거 뭐 될 필요는 없다‘라고 하신 거지. 그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정말로 편안해지고, 그래 결과야 어찌되든 한번 해보자고 용기가 솟았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함께 울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훌쩍훌쩍 울면서 산길을 걸었다.
*나도 그렇던데..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했지만, 딱히 취업을 할수 있단 생각은 안했는데, 죽어라 공부하고 썩히기 아깝다고 왜 취직안하냐고 그런말 듣고나니 용기가 오히려 꺾여서 지원서 내볼 생각도 안하게 됐다. 아이 씨... 나두 저런말해주시는 아버지 갖구싶네. 나두 저런말 해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근데... 역시 기대와 격려는 무서운거야! - P199
할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챕터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내 몸에 늘어가는 주름살과 검버섯이 반갑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년의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프거나 두려울 것이 없다.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궁극의아름다움이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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