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가 나를 평양호텔 로비까지 데려다주었다. 로비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도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손을 잡은 채 시간을 마냥 흘려보냈다. "고모가 곧 또 올게. 다음에 평양 오면 더 많이 이야기하자. 선화랑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선화는 몇 번이나 안녕이라고 인사하면서 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선화를 호텔 바깥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선화를 쫓아내듯이 돌려보냈다. 선화는 아빠와 함께 걸음을 떼면서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것이 선화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 P134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큰 책임감이 밀려왔다. 언젠가 어머니가 몸져눕는다면, 어머니에게 치매가온다면 어떨까.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 어떨지는 오롯이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의 감정, 나의 도량 그리고 나의 경제력에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완벽하게 간호하려는 어머니를 보조하면서내 삶은 이미 파탄 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 P139
아버지는 "왜 못 죽게 해. 이런 몸이 됐는데 어째서 죽으면안 돼"냐며 나를 몰아붙였다.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흥분해서 심각한 얼굴로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영희가 아버지! 하고 부를 사람이 없잖아. 그럼 내가 쓸쓸해. 영희 아버지는 하나뿐인데, 다른 사람은 될 수없는데.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곤란해. 그러니까 영희를 위해 조금만 더 힘내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아버지를 향해 필사적으로호소했다. "그렇구나, 알았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울었다. 수년간의 스트레스를 단번에 분출하는 듯한 소리였다. 나도 함께 소리 높여 울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침대 옆에 올라가 낮잠을 잤다. 자기곁에 눕는 마흔 넘은 딸을 보면서 아버지는 다시없을 만큼 기뻐했다. 더 이상 죽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 P144
사방에서 빵빵 총소리가 들리니까. 제주 아낙들이 많이 죽었어. 학교 운동장에다 강제로 끌어내서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두두두. 끔찍하지. . • <수프와 이데올로기> 중에서
어머니가 입원 중인 병실 침대에 누워 제주4.3사건의 체험을이야기했다. 이때 어머니는 돌연 생생하게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목격한 내용, 1948년 4월 3일 이후 마을에서 일어난 살육의현장, 잔혹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큰아버지와 그 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제주4.3사건의 생존자임을 알리며 <수프와이데올로기>가 시작된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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