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부 기관의 검열을 거쳐 일본 부모님 손에도착한 오빠들의 편지에는 ‘영광스러운 조국과 경애하는 김일성수령님의 사랑 아래 면학에 힘쓰고 있습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빠들의 진심을 들을 방법은 없었다.
언젠가 평양에 방문했을 때 오빠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다른 평양시민에 비해 대우를받았어?"
"하루에 계란 하나는 먹었나? 그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배가고파 쓰러질 것 같아서 공부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생각만 했지."
건화 오빠가 오사카 사투리로 대답했다.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귀국자‘들은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원주민‘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영희였으면 한 달도 못 버티지."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오빠들의 웃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 상황이 웃지 못할 코미디 같아서 그만 할말을 잃었다.


---1960년대에 북한주민들이 굶고 있었던건 이해한다 해도 아직도 굶고 있는건 이해를 해야하는건지...연일 쏘아대는 미사일은 북한주민들의 고혈이 아닐런지! - P34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며 가난한 거리의 대명사였던 이카이노에서 자라면서도 오빠들과 나는 데미그라스소스라든가 햄버그같은 요리에 익숙했다. 집에서 양식을 먹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를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란 오빠들이 북한의 식생활을 견딜 수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 북송당시 열네 살이었던 셋째 오빠 건민은 매운 음식을 싫어해서 김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그 당시에는 모르셨을테지... - P35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량 배급으로 배를 채우는 건 어림도 없는일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돈을 마련하고 물물교환을 하고 친척에게 의지하고 연줄을 써서 살아남았다. 절도와 사기도 횡행하는 가운데, 북에 친척도 연출도 없는 귀국자는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이 전부 북으로 건너가 일본과 연이 끊긴 귀국자는 실로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 P40

아이들을 북에 보냈다고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세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졸업한 다음에 건강히 일할 수
있도록,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웃는 얼굴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겠노라 다짐했다. 손주들이 태어나자 어머니의 결심은 신념이 되고, 다시 집념이 되었다. 무언가에 쓴 것처럼 소포를 보내고 북을방문하는 어머니에 아버지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P41

오로지 3층 내 방에서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방에는 교과서말고는 북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 사진도 북에서 받아온 선물도 장식하지 않았다. 벽에는 뉴욕 지하철노선도를 붙이고 책장에는 해외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잡지, 연극, 영화 관련 서적들을 채워 넣었다. 음악은 대부분 재즈, 클래식, 샹송, 영화음악, 팝송 등 서양음악이었고 일본과 한국 가요도 있었다.
2층에 올라가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고, 3층 내방에 도착하면 마치 공산권의 감시 체제를 뚫고 자본주의국가에당도한 기분이었다. 나는 2층 복도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베를린장벽‘이라 명명하고 2층을 동독, 3층을 서독이라 불렀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그 이름에 찬성했다. 당시 우리 중 누구도 베를린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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