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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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P7

집사는 내가 흠뻑 젖은 잎사귀에 얼굴을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고, 얼마 후 우리는 밀림 한복판, 둥근 지붕 바로 밑의 빈터에 이르렀다. 육각형 판석을 깔아놓은 이 공간에는 낡아빠진 빨간색 터키 양탄자 한 장이 있고, 그 양탄자 위에는 활체어 하나가 있고, 누가 보아도 죽을병에 걸린 듯한 노인이 그 휠체어에 앉아서 다가오는 우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검은 눈동자 속에서 정열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까 현관 벽난로 선반 위의 초상화 속에서 보았던 칠흑처럼 새까맣고 직선적인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나머지 얼굴은 납으로 만든 가면 같다. 핏기없는 입술, 뾰족한 코,움푹 꺼진 관자놀이, 바깥쪽으로 벌어진 귓불, 모두가 임박한 죽음을 말해준다. - P12

"장군님이 원하신다면 가이거라는 놈을 쫓아드릴 수 있습니다. 정체가 뭐든, 어떤 일을 하는 놈이든 저한테 주실 수고비 말고도 돈이 조금 더 들겠죠 물론 그래봤자 장군님께는 아무 소득도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놈들은 벌써 장군님을 호구 명단에 올렸으니까요" - P20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금발 여자를 향해 모자를 살짝 기울인 후 남자를 따라 나갔다. 그는 오른발에 닿을락 말락 하게 지팡이를 살짝살짝흔들며 서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외투는 지나치게 화려한 말 등덮개를 재단하여 만든 것인데 어깨가 너무넓어 목이 셀러리 줄기처럼 가늘어 보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통이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우리는 한 블록 반쯤 그렇게 걸었다. 하일랜드 애비뉴에서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내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무심코 나를 돌아봤다가 갑자기 매섭게 곁눈질을 하고는 재빨리 외면했다. 녹색 불이 켜지자 우리는 하일랜드 애비뉴를 건너 한 블록 더 걸어갔다. 그가 긴 다리로 보폭을 넓혀 걷는 바람에 길모퉁이에 도착할 무렵에는 내가 20미터 가까이 뒤처졌다. - P33

오 분이 지나갔다. 그는 더 버티지 못했다. 배짱이 부족한 유형이다. 성냥을 긋고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희미한 그림자가 잔디밭을 밟으며 건너편 나무로 슬그머니 걸어갔다. 그러더니 보행로로 빠져나와 지팡이를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곧장내 쪽으로 걸어왔다. 휘파람이 덜덜 떨려 듣기가 거북했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는 3미터쯤 앞으로 지나가면서도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제 안전하니까.  물건을 버렸으니까.
나는 그가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라바바 한복판의 보행로를 따라 올라가 세번째 서양노송나무의 가지를 젖혀보았다. 포장한책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고함을 지르지않았다. - P35

물론 무엇이 들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묵직한 고급 장정본으로,질 좋은 종이에 수작업으로 조판하여 인쇄상태도 훌륭하다. 곳곳에 예술 흉내를 내는 사진이 지면을 가득 채웠다. 사진도 본문도 차마 입에담을 수 없는 쓰레기다. 새 책은 아니다. 앞쪽 면지에 날짜가 줄줄이 찍혔다. 빌려주는 책. 공들인 음란물을 취급하는 도서 대여점.
나는 책을 도로 싸서 좌석 뒤에 감춰두었다. 대로변에서 공공연하게이런 장사를 하다니, 뒷배가 든든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차 안에 앉아담배연기로 내 몸을 괴롭히면서 빗소리를 들으며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다. - P39

내가 산울타리의 빈틈을 지나서 정문을 가린 모퉁이를 돌아 달려갈 때쯤 가이거의 은신처는 다시 완벽한적막에휩싸였다.
문에는쇠고리를 입에 문 사자 모양의 노커가 있었다.손을 내밀어 쇠고리를 붙잡았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길고 거칠게 한숨을 내쉬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러더니 뭔가 털썩 쓰러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집안에서 황급히 달려가는 발소리,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 P43

나는 카멘에게서 눈을 떼고 가이거를 돌아보았다. 그는 양탄자의 술너머 방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져 있었고, 그 뒤로는 토템 기둥처럼 생긴 물건이 있었다. 옆모습이 독수리처럼 생겼는데 크고 둥근 눈알은 카메라 렌즈였다. 렌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자를 겨냥하고 있었다. 토템 기능의 측면에는 검게 변색된 플래시 전구가 달렸다. 가이거는 두툼한 펠트 밑창이 달린 중국식 슬리퍼를 신었고, 밑에는 검은색공단 파자마를 위에는 수놓은 중국식 상의를 입었는데 상의 앞부분이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를 바라보며 밝게 빛나는 유리 의안이 온몸에서유일하게 살아 있는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내가 충성을 들었던 세발 가운데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확실히 숨이 끊어진 뒤였다. - P46

제일 먼저 눈에 띈 변화는 벽에 걸렸던 비단 자수품 몇 점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갈색 회벽에 빈자리가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들어가서 다른 전등을 켰다. 토템 기둥을 살펴보았다. 기둥 밑에, 중국 양탄자 가장자리 너머 맨바닥에 다른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다. 가이거의 시신이 있던 곳이다. 가이거의 시신이 사라져버렸다. - P51

올즈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었나?"
"그래요. 스턴우드 댁 운전사. 어제 그 집에서 바로 저 차를 닦는 걸봤소." - P62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칸막이 문이 30센티미터쯤열렸다. 키 크고 잘생긴 흑발 청년이 가죽조끼 차림으로 내다보는데 안색이 창백하고 입을 앙다문 표정이다. 청년이 나를 보더니 황급히 문을닫았지만 나는 이미 칸막이 안에 여기저기 널린 나무상자들을 봐버린뒤였다. 상자마다 신문지를 깔고 책을 얼기설기 담아놓았다. 새로 산듯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상자를 바삐 옮겼다. 가이거의 상품들을 내보내는 모양이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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