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보자면 20대 초반의 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이유가 왜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나는 소설가가 됐다. - P55

회사에서 소설을 쓰면 좋은 점은? 역시 회사 책상 앞에 앉아 회사 노트에다가 회사 볼펜으로 소설을 쓸 수 있으며 다 쓰게 되면회사 봉투에 넣어 회사의 비용으로 문학잡지사에 투고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마루야마 겐지가 불안감이감도는 회사 책상에앉아난생처음으로 소설을 쓰는 그 광경은애잔하기만 하다. 이건 고시 공부하듯이 절에 들어가 벼랑 끝에매달린 심정으로 소설을 쓰는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식의소설 쓰기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P56

지루한 봄과 여름을 견디려고 쓴 소설로 나 역시 큰 상금을 받게 됐다. 뭐, 첫 소설로 엄청난 인세를 벌어들인 톨킨, 롤링, 에코,
로이 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주머니에는 1,800만원짜리 수가 들어 있었다. 양재에서 안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주머니 속의 수표가 여간 신경쓰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1,800만원짜리 수표를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을타거나 길을 걸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 P61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하느라 지하철을 탈 때면 나는 늘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일자리가 있기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할수 있단 말인가! 가끔은 숙취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 3년 가까이 나는 그런 경이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 3년동안 나는 세상에는 이다지도 많은 직업이 있는데, 다른 일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글을 써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했었다.
아마도 소설을 거의 쓰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할 일이 많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 P63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 P66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렇게 빛나는 존재로, 또 제가 좋아하는 작가로 계속 계속 재미난 글 써 주세요!!! - P68

도착지점인 온정각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관절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눈은 젤리 상태가됐고 비닐이 벗 겨진 양말은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얼어가고 있었다. 나는 온정각 쪽의 길을 몰라 하마터면 인민군의 막사로 돌격할 뻔했는데,
다행히 화들짝 놀란 보초병들의 제지로 그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간신히, 겨우 등의 부사에 해당하는 자세로 어쨌든 결승점에 들어가고 난 뒤에야 나는 끼고 갔던 장갑 한 짝을 삼일포가는 길 어딘가에 흘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내가 독일에서사온 털장갑이었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온정리 야외 온천에 누워나는 독일에서 남한을 거쳐 북한 어딘가에 떨어진 그 빨간 털장갑의 기이한 운명을 한동안 생각했다. - P75

그럴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렇게 할 일이 없을 줄은 몰랐다. 대기업에 응시한다고 해도 뽑아줄리 만무했건만, 그런 꿈은커녕 취직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위인이었던지라 조금 난감하긴 했다.  - P78

그 다음날 오후였던가, 제비꽃 줄기는 점점 기울기 시작하더니 결국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제비꽃이 완전히 죽어가는 동안,
 대학까지 졸업한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어떤 힘이 제비꽃의 가느다란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는 것일까? 어떤 힘이 있어 나는 살아가고 있는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뒷산에 꽂아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땅에 꽂혀 있을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꽂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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