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고시텔에서 영자와 일년동안 동거했다. 그때 나는9급 지방 행정직 시험에 재수하고 있었고, 영자는 9급 지방 보건직 시험에 재수하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합격해서 경상북도내륙 산골 마장면 면사무소로 내려왔고 영자는 또 떨어졌다. 영자가 지금 노량진에서 삼수하고 있는지, 노량진을 떠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P150

쇠바퀴 수천 개가 철로 위를 굴렀다. 열차의 소음은 박자나고저가 없는 이명같았는데, 한강을 건널 때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철교와 강물 사이의 공간에서 두 박자로 울렸다. 두 박자는상행선을 따라서 멀어졌고 하행선을 따라서 다가왔다. - P151

금니가 가난을 말해주지 않더라도, 이영자가 이 세상에서 영덩이를 붙일 땅 한 뼘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사람은 서서만은살 수 없고 엉덩이를 붙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이영자를 보고서 알았다. 이영자는 나의 먼 혈족 같기도 했고 눈앞을막아선 절벽 같기도 했다. 아마 그런 느낌들이 이영자와의 동거쪽으로 내 마음을 몰아갔던 것이지 싶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 언저리일 것이다. - P166

마장면에서 단풍 든 숲을 바라보면서 나는 때때로 영자를 생각했는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보니 영자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았다. 영자의 알바는 서너 가지쯤 되었는데, 두어 달에 한 번씩 일이 바뀌었다. 영자는 박리다매형 대형 식당에서 식재료를 분류해서 다듬는 일을 하고 한 시간에 오천원을 받았다.
광개토고시텔 일층에 있는 식당이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면서노점상이 철거되는 현장을 본 식당이었다.  - P178

창문에 매달린 조롱박 열매에 붉은 물이 들 무렵에 9급 발표가 났다. 나는 붙고 영자는 또 떨어져서 동거는 끝났다. 떠날 때, 영자는 조롱박 넝쿨을 걷어서 일층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학원에서 마련한 합격자 축하 회식에서 돌아오다가일층 쓰레기통에 버려진 조롱박 넝쿨을 보고 영자가 떠났음을직감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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