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수녀원의 정식명칭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다. 교구청의 김요한 주교가 이름을 지었다. 마가레트 수녀는 12세기라인강 언덕의 자연동굴안에 들어 있던 피에타 수녀원 소속이었다. 아들의 사체를 무릎에 얹고 죄 없는 세상을 간구하던 마리아의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 그 수녀원의 서원이자 일과였다. -<저만치 혼자서> 중에서 - P215
도라지꽃 하얀색의 먼 저쪽에서 삶이 죽음에 스며 있다는 늙은 수녀의 환상은 죽음 안에 신생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다가 김요한 주교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신학생 시절에 기숙사 뒷산에 도라지는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김요한 주교는 그 하얀색을 떠올렸다. 하얀색이 아니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색이었다. 색은 멀리서 흔들리면서 다가왔다. 색은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시간과 공간을 흘러서 사람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자진하고 있었다. 김요한 주교는 도라지꽃에 대한 늙은 수녀의 환상에 대해서 아무런 사목 지침을내놓지 않았다. 김요한 주교는 젊은 부제들에게 말했다. _주보에 실린 [도라지꽃 속으로]는 글이 맑더군. 글이 아니라 물이야. 다들 읽어봐. - P222
손안나 수녀는 도라지수녀원에 들어올 때 여든 살이었다. 들어오던 날 손안나 수녀는 차에서 내려서 부축받지 않고 마당을걸어왔다. 걸어올 때, 손안나 수녀는 아무런 중량이 없이 땅을스치는 것 같았다. 몸이 마르고 키가 작아져서 수도복이 헐렁했다. 검버섯이 얼굴을 덮었고 두 볼에 살이 빠져서 입술이 벌어졌다. 손안나 수녀는 이가 빠진 입을 늘 손으로 가렸고, 묵언했다. 손안나 수녀는 서른 살에 종신서원하고 미군 기지촌 성당과 시립병원,보건소, 급식소, 탁아소에서 일했다. 성당을 청소했고, 고아원과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 P225
맑고 서늘한 날에 손안나 수녀의 정신은 온전했다.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이 고이거나 옥죄지 않아서 마음이 마르고 가벼웠다. 지나간 시간들은 스쳐가기는 했으나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은 다시 앞으로 펼쳐져 있는 듯했는데, 그 앞쪽의 시간을 건너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날, 손안나 수녀는 지팡이 없이 수녀원 뜰을 산책했다. - P229
고해성사와 주일 아침 일곱시 미사를 마치고, 장분도 신부는도라지수녀원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도라지수녀원까지는 조개무덤 앞을 지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장분도 신부는자전거를 타고 갔다. 조개 무덤 앞을 지날 때, 장분도 신부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조개 무덤을 향해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았다. - P234
김루시아 수녀와 손안나 수녀는 둘 다 불면증이 깊었다. 몸이 살아서 병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의식은 물러가지 않았고, 그 속으로 어둠이 번져서 잠과 깸은 구분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잠과 깸이 겉돌았고 벽시계가 재깍거리면서 그어둠을 찔렀다. 김루시아 수녀가 사무실 직원에게 부탁해서 벽시계를 떼어냈다. 어둠 속에서 비상호출벨 불빛 두 개가 깜박거렸다. 늪에서 잠들었던 가창오리들이 갑자기 깨어나서 날아올랐다. - P236
그것이 새어나온 아침에 김루시아 수녀는, 아, 짧게 비명을삼키면서 자리에서 몸을 꼬부렸다.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옆침대의 손안나 수녀는 냄새를 맡고 돌아누웠다. 돌아누워주는것이 예절이라는 것을 손안나 수녀는 알았고, 김루시아 수녀도손안나 수녀가 베푸는 예절을 알고 있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대소변을 지린 속옷을 세탁부에게 주지 않고 손수 빨았다. 김루시아 수녀는 빨랫감을 비닐백에 넣고 복도 벽에 의지해서 목욕실로 갔다. 거기서 김루시아 수녀는 몸을 씻었다. 몸이 남 같아서, 자신의 몸이 젊었을 때 나환자촌에서 씻겨주던 환자들의 몸처럼 느껴졌다. 몸과, 그 몸을 씻기는 또다른 몸이 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거기서 속옷을 빨았다. 더럽혀진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는 편의를 김루시아 수녀는 배우지 못했다. - P241
김루시아 수녀는 독방을 쓴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부활 주간의 첫째 날이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아침에 복도 바닥에 쓰러진사체로 발견되었다. 환자복 차림이었고 옷이 젖어 있었다. 침대에 오물이 묻어 있었고 빨랫줄에는 L자 속옷이 널려 있었다. 새벽에 대변을 지려 목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속옷을 빨아서 뒷마당 빨랫줄에 널고 다시 병실로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쓰러진 것이었다. - P247
김루시아 수녀를 묻은 오후에 장분도 신부는 손안나 수녀의알아들을 수 없는 죄를 고백받고 사하여주었다. 저녁에 장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어촌마을로 돌아갔다. 썰물의 갯벌에서 석양이 퍼덕였다. 조개 무덤 앞을 지날 때장분도 신부는 자전거에서내려 성호를 그었다. 밤에 김요한 주교가 장분도 신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요한 주교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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