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를 만든 민족은 많지만 ‘자기 ‘를만들었던 민족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시유(施釉) 후 섭씨1,200~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본벌 구이를 하는 자기를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했다. - P272
청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발달한 특이한 자기이고 유럽에서는 18세기 중국의 영향으로 겨우 자기가 등장한다"는 설명에 이어 "도자기는 흙과 불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도자기를 이해할 때는 기술과 미(美)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는데, ‘기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아, 어렵겠다" 는 생각이 엄습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마이센 같은 어여쁜 찻잔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어떤 왕과 귀족들이 아끼고 사용했느냐 같은 것이었는데, 수업은서양이 아닌 동양 도자에 관한 것이고 유물로서의 도자기에 대한 것이었으니 내 생각과는 왜 거리가 있었다. - P272
그 잔을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릇 사치는 돈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식기는 최대한 좋은 걸 쓰려고한다. 그건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 같은 것. 최근에 읽은여행작가 김남희 에세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도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먹더라도 예쁜 그릇을 꺼내제대로 차려 먹는 것이 최소한의 디그니티(dignity)를 지켜준다는 그 이야기에, 아마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백퍼센트 공감! 이건 혼자 살지 않아도 식구들이없는 시간 홀로 밥을 먹을 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딸아이든 아들이든 예쁜 그릇에 반찬, 국, 밥을 담아 먹게 했다. 취직하여 서울에서 혼자 있는 딸아이에게도 혼자 예쁘게 담아 먹으라고 어여쁜 백자세트 그릇을 사서 보내고 열심히 모아 두었던 앤티크 찻잔들도 여럿 보내주었다. 가끔 퇴근 후 저녁 상 차림 사진을 보내오는데 짬짬이 예쁘게 담아 먹는 모습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안심이 되곤한다. 이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우리딸도 공감하는 모양이다. 딸램이 읽고 나에게빌려준 책이기 때문에 안다! 한 권의 책을 딸과 돌려 읽으며 감정의 공유도 경험한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 P279
화려하고 섬세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잘 깨지지 않는만만한 그릇 역시 참으로 귀한 존재. 사람 사귐도 그렇지않나, 나는 생각해 본다. 다루기 조심스럽고 까다로워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들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항상 곁에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결국 오래 남아 곁을 지켜주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 P280
청춘이란 그렇게 서슬 푸른 것이다. 지금은 부드럽고푸근한 정요 백자 같은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모난 성미에 정 맞아 보기도 하고, 싸늘한 성정 때문에 미움받기도 해보아서 이제는 그만 동글고 눅진하게 살고 싶은, 40대란 뭐, 그런 시기인 것이다. - P281
약을 먹어야만 잠들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생길때도 있고, 걱정 많고 항상 신경이 칼끝 같은 성격이 원망스러울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는 또 다른 의사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이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신 인생에서 그 성격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성격 덕이라는걸. - P291
알고 보니 나는 이미 라틴어 단어를 꽤 많이 접했었다. 학교의 문장(紋에는 ‘veritas lux mea(리타스 룩스 메아)‘ (진리는 나의 빛)라고 적혀 있었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외치는 ‘carpediem (카르페 디엠)‘(순간을 즐겨라)‘이라는말도 익숙했으며, 미술사 수업 시간엔 서양 옛 그림의 주요 주제인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vanitas(와니타스)‘(허무)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전 라틴어에서 v는 영어와 w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마지막 문장,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덧없는 이름뿐.) - P302
매시간 학생들이 제출한 퀴즈 답안과 과제를 꼼꼼하게 고쳐서 돌려주곤 했던 선생님은, ‘Angelus‘ (천사)의 격 변화를 설명하던 날 라틴어와 한국어 가사가 함께 적힌 악보를나눠주며 [파니스앙젤리쿠스]를 가르쳐주었다. 가사를 한줄 한 줄 번역해 주며 학생들에게 합창하게 했던 그는, 짖궂은 학생들의 요청에 큰망설임 없이 강단에 서서 직접 그노래를 불렀다.
Panis angelicus 천사의 양식 fit panis hominum; 인간의 양식 되고 Dat panis coelicus 천상의 양식 figuris terminum: 주님의 형상을 완성하네Ores mirabilis! 오! 묘한 신비여! Manducat Dominum 주님을 먹는다네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 P304
다소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러나 진지하게 그는노래했다. 신(神)의 언어인 라틴어로 그가 주님의 양식을 노래할 때 나는 정신의 고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각, 조물주의 커다란 손이 하늘로 들어올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교수 자리가 날지 불확실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서양 고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심한 시간강사와, 졸업 후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쓸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 가의를 듣겠다 마음 먹은 학생들...... 그 낡고 허름한 지상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 P305
교양이란 학식과는 다르다.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생(生)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 - P308
Sapiens nihil facit invitus nihil iratus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하지 않는다. - P308
아무리 낡고 지루하다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수업이 그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히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되었다. - P324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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