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었을 때, 늦은 밤 전철을 기다리며 여자친구와 벤치에앉아 있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때도 그랬다. 아주 짧았으니까줄곧 우리를 주시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텐데 어느 틈엔가 곁에 온 노인이 지팡이로 내 다리를 세게쳤다. 노인은 잔뜩 화가 나서 더러운 년들이라고 욕을 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화가 난 것은 우리였는데 한편으론 무서웠다. 왜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우리가 할아버지한테 뭐 했어요? 했냐고! 여자친구가 악에 받쳐 소리칠 때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노인과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는 승객들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 P17
우리는 수영은 못하고 해변을 걷기만 하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밤의 바다는 추울 테고 일 년 사이 더 늙어있을 우리에게 호기나 오기 같은 건, 충동적인 농담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걷다가 쓸모없는 것들을 잔뜩 주울지도 모른다. 예쁜 소라껍데기를 하나 주워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워온 소라 껍데기를 서랍 속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꺼내 귀에 갖다대고 파도 소리를 듣고 또 서로에게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P37
우리의 긴 드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도 반장은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말 있어?" 내가 묻자 반장이 장난스럽게 운전대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진짜 용서 안 해줄 거야?"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구하지 않을 용서 아니었냐고 내가 용서를 해준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고. 나는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반장이 어떤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렇게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원하는 답을 해주기가 싫어졌다. 어릴때에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미움만 받았던 기억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상처가 됐다. 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반장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졌다. 어쩌면 나도 그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친, 진짜." 반장은 짜증난다는 듯이 거칠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서는 있는 힘껏 문을 쾅 닫고 떠났다. <굴 드라이브> - P69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등골을 타고 땀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느껴졌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지하철역까지 곧게 뻗은 차도 대신 샛길처럼 나 있는 주택가 골목을 택했다. 백 미터 남짓 되는 그 골목은 적갈색의 벽돌로 된 연립주택이 대부분으로 내가 사는 동네와 분위기가 아주 비슷했다. 모퉁이를 돌면 우리집이 나올 것만 같았다.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인지 집 앞에쓰레기봉투를 내놓은 곳이 많았다. 골목 가득 희미하게 지린내가났다. 나는 냄새에 질색하며 도망치듯 빠르게 달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골목 입구 쪽에 있는 헌옷 수거함앞으로 갔다. 손바닥에 눅진하게 배어난 땀을 닦은 후 그녀가 준카디건을 그 안에 넣었다. 수거함이 꽉 차 있어서 힘으로 욱여넣어야 했다.<결로> - P93
하지만 유코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모두 조금씩취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중에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유코도남자도 나의 여정을 죽은 친구를 대신해 떠나온 것으로 오해하고있었다.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어떤 빌미가 되었을까. 누군가 원진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원진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원진에게도 옳지 못하다. 그런데도 그런 자책감이 들 때가 있다. - P111
"원진이가 죽었어요." 유코는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죽으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내가 대착없이 우는 동안 유코는 아무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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