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일시적인 일탈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그 방에는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책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녔다. 집으로 갈 때면 아쉬움에 입이 말랐다. 아이들과 저녁을먹으면서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도 작업실의 빈 공간을떠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중에서 - P154

속살거림은 십여 분간 지속되다가 사라져버렸다. 집안은 고요속에 휩싸였다. 나는 주춤주춤 거실로 나갔다. 그때 어떤 한기가느껴졌다. 그곳에 누군가 남아 있었다. K의 마지막 여자.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하고 정물처럼 누워만 있던 여자. 그여자는 긴 스커트 아래서 뭉개진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은 걸음으로 작업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검게 그을린발, 덜덜 떨리는 두 손,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 일그러진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키며 물러섰다. 여자는 나였다. K는 나를 본떠서 여자를 그린 것이다. 여자는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한아 <일시적인 일탈> 중에서 - P163

그날 나는 지각을 했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로 호출당했다. 담임은 나를 보자마자 엎드리라고 말한 다음 항상 들고 다니는, 끝을 잘라낸 하키 스틱으로 엉덩이를 다섯 번쯤 내리쳤다. 지각이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 쓰라린 엉덩이를 잡고 억울해하며 일어섰을 때 담임은 씹던 껌을 뱉듯 말했다.
"죽은 줄 알았잖아, 새끼가."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서는 그날 아침 사고가 나자마자 반별로 강북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을 조사했고, 그중 그때까지 등교하지 않은 학생들은 따로 분류해서 교무실에서 자체적으로 생사확인을 하던 중이었다.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중에서 - P186

"그날 넌 뭘 하고 있었어?"
아야가 물었을 때 머릿속에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어떤 장면이 선명하게 재생됐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밤, 나는 군대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밤새 틀어놓는 당직실 텔레비전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들이받는 비행기를 목격했다. 한 대, 그리고또한 대,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이라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뻔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내 뒤에서 라면을 먹던 당직사관은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씨발,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냐? 그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와 다음다음날로 예정된 휴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휴가는 취소되었고 전쟁은 시작됐다. 그 전쟁이 이후 이십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루하게 이어질 거라고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던 때였다.
"군대에 있었어."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중에서
- P189

아야에게 책갈피는 2011년 3월에 끼워져 있었다. 당시 그녀는이미 일본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나와 비슷하게 텔레비전으로 고국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파스타를 먹고 있었어. 누가 CNN 뉴스를 틀어놨는데, 갑자기 밑에 NHK 자막이 뜨기 시작하는 거야. 왜일본 뉴스 화면을 받고 있지?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하더니 곧 브레이킹 뉴스 표시가 나타났어. M8.4 QUAKE HITS JAPAN. 우중충한 색깔의 바다에서 하얀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어,
그래, 쓰나미, 파스타를 감아쥔 포크가 너무 흔들려서 순간적으로 나는 저 지진이 일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카고에까지 영향을미치고 있는 건가 싶었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는 거였어. 식탁이 흔들릴 만큼.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중에서 - P190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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