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창으로 본 세계를 재현하는 화가와는 정반대의관점에서, 나는 철저한 관람객으로서 그림이라는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가가 제시한 세계를 내것으로 만들어서 나만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았다. 활자로 이루어져 있는 책이라는 또다른 창과 달리 색채와선, 형태로 이루어진 보다 명료하고 더 다채로운 세계. 그렇지만 책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여지가 충분한 세계. 지금도 그림을 볼 때면 창문을 생각한다. 활째 열린 커다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성세한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는 풍경이 연상된다. 그렇게 그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획기적인 창문이었다. - P23
중정이 아름다운 메트(MET)의 리먼컬렉션 전시실에 비스듬한 햇살이 서정적으로 내리쬐던 날, 그와 나란히 앉아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던 어느 오후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때의 고고학도는 안다.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 P37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치 않을 수 있겠냐고.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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