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애프터 유 : 전 세계를 사로잡은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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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맨틱 소설을 읽었는데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끝을 냈어야 했는데, 그 기쁨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지말아야 할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속편을 사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로 후회한다. 다시 어제로 돌아가서 이 책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단순히 책 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속편을 읽는 내내 밀려들었던 짜증이 오히려 전편을 읽은 후에 남았던 감동까지 싸그리 뭉게져버렸기 때문이다. 전편만한 속편이 없다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계의 강한 속설이지만, 이 책은 정말 그렇다.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읽을 때 소설의 제목을 '당신을 만나기/알기 전의 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는 윌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속편의 제목을 <에프터 유(After You)>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두 편의 소설, 즉 비포와 에프터의 기준점인 유(you)는 윌이 아니라, '윌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법상 이 인칭대명사가 죽음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전편과 속편은 각각 윌의 죽음 이전의 나(루이자)와 그 이후의 내 모습을 나누어 소설에 담은 셈이다. 독자로서 윌이 죽은 후에 홀로 남게 된 루이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독자들은 비록 소설이 끝난 후의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루이자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아픈 상처에도 불구하고, 윌의 바람대로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궁금증과 바람을 작가로서 해소해주려는 의도로 속편을 쓰겠다는 의도는 알겠으나,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가 전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운명을 접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스포 있습니다)


우선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다. 작가인 조조 모예스는 속편을 쓰는 동안 더글러스 케네디를 영접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허황된 설정들이 난무하다. 윌이 남긴 돈으로 얻은 아파트 옥상에서 술에 취한 채로 그를 그리워하다가 누군가의 등장에 놀라 루이자가 추락을 한다던지, 추락한 그를 병원까지 후송한 구급대원(샘)과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다던지, 어느날 갑자기 윌의 딸이라며 존재를 전혀 알지도 못했던 열 여섯살 짜리 소녀(릴리)가 등장해서 루이자에게 친부인 윌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다던지, 루이자가 단지 윌의 딸이라는 이유로 릴리를 보살피기 위해 헌신하며 그녀를 집으로 받아들이고 가출한 그녀를 찾아 헤메다가 직장에서 짤리고 너무나 가기 원했던 새 직장도 접는다던지, 릴리의 등장에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 완고한 트레이너 부인(윌의 어머니)이 받아들인다던지, 샘과의 애매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때쯤 샘이 총에 맞는 위기가 발생하고 이후 둘의 관계가 급물살을 탄다던지 하는 과도한 상황들은 읽는 내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 만든다.


전편에서 매우 강한 비중이었던 윌이라는 주인공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이해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윌의 존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숨겨두었던 딸이 등장해야 하며, 그 딸은 열 여섯살 까지 가만히 있다가 우연히 본 신문에서 엄마가 자기를 욕할 때 그렇게 부르짓던 아빠 '윌 트레이너'의 기사를 보고 갑자기 자신의 핏줄과 아빠의 인생을 궁금해하기 시작했으며, 얘는 곧장 할아버지, 할머니인 트레이너 부부를 찾지 않고 간병인인 루이자에게 왔어야 했는가? 왜 루이자는 릴리와의 동질성을 통해 윌의 부재를 재확인 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가 릴리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과 같은 과도한 개입을 하는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읽다 보면 문체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같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전편과 속편의 번역 문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이 작가의 문체가 변한 것인지, 번역자가 바뀌어서 그런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 설정 자체의 난잡함은 차치하더라도, 전편에 비하여 상당히 가독성이 떨어진다던가 읽다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문장과 말투가 있는 것으로 보면 조심스럽게 번역자에게 원인을 돌려본다. 일부는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지만 굳이 원서를 사서 원문과 대조해보면서 따지고 싶지는 않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작가는 속편 또한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샘의 피격 장면이나 맨 마지막 루이자의 집 옥상에서 벌린 '새 출발 서클'의 수료식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모여 기쁨과 환호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면, 마지막 공항에서 루이자의 뉴욕행 출국 장면은 헐리우드 영화에 꼭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장면들이다. 이런 진부한 장면들을 굳이 이 소설에서 또 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동화를 보면 그 마지막은 항상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두 사람이 사랑을 얻게 되기까지의 희열은 동화 속에서 설정된 위기의 극복을 통해 극대화되며 그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행복하게 살았는지에 대해 서술하자면, <슈렉2>에서 보여주었던 너무나도 현실적인 결혼 생활과 일상의 권태로움 정도일텐데 이것으로 감동을 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로서 그 쉽지 않은 길을 감행한 시도는 좋았으나, 잡다하고 복잡한 관계와 설정에 밀려 작가가 도대체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다시는 로맨스 소설의 속편들은 읽지 않을 생각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사건이 자꾸만 떠오르고, 불면의 밤이 계속되며, 머릿속으로 그 사건을 끊임없이 되뇐다.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필요한 말을 한 것인지, 상황을 바꿀 수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다른 대처를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 46쪽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여러 단어가 입에서 맴돌았다. 윌과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 세상 어떤 사람과도 다르게 그 사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준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몸에 구멍이 난 듯 고통스럽고,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부재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 애가 어떻게 이해할까? - 126쪽

아이들은 참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없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에서 다음 질문이 나오고, 시선에서는 희미하게 탐색하는 기미가 보였다. - 127쪽

우리 모두 슬픔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길 원하고 있었다. 이 죽은 사람들의 지하세계에서 우리의 심장 절반을 거의 잃은 채, 또는 작은 도자기 항아리에 갇힌 채 지내는 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 216쪽

"그 우울한 일자리에 들러붙어서 불평이나 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모험을 하지 않고, 언니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 대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 318쪽

"있잖아, 네 아빠가 잊지 못할 말을 해줬어. `그거 한 가지로 당신을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 329쪽

"젠장, 루! 우린 모두 도넛이에요! 누나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걸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누나뿐만 아니라 조카를 보면서 평생 마음 아프지 않은 줄 알아요? 그게 어떤 건지 모르는 줄 알아요? 대답은 하나뿐이에요. 그걸 날마다 보며 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요. 그러니 뭐든 닥치는 대로 몸을 던지고 멍드는건 걱정하지 말아요." - 411쪽

"우리 모임 이름이 새 출발 서클이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항상 잃어버린 이들을 함께 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이 작은 모임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그들을 짊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짐이 아니라는 것,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를 선물처럼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억과 슬픔, 작은 승리를 서로 나누면서 배운 것은 슬퍼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도 되고 화를 내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오랫동안 느껴도 괜찮습니다. 모두 자신만의 여정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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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6-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프터 유는 도전하지 않는걸로... ^^
 
[전자책]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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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 둔지는 오래되었으나, 그동안 e북 서재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던 녀석이다. 이제야 책을 펼쳐든 것은, 한동안 종이책을 읽느라 e북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이다. 아무래도 일단 책은 사놓고 보자는 습관은 좀체로 나아지질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 책을 사두었다는 '기억'은 하고 있었다. 샀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처음에는 서점을 구경하던 중 영화화도 되고 속편(<애프터 유>)도 나왔다고 하길래 그 정도면 괜찮은 소설인가? 생각하고 호기심을 가졌다. 마침 할인을 하는 이 소설을 영문으로 읽으려다가,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우선 국문으로 읽은 후에 영문을 보자는 생각으로 e북 책장을 뒤지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이를테면 번역된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의 경우, 일정한 임계점이 있다. 즉, 어느 부분까지 참고 읽어 나가면 그 이후부터는 술술 익힌다는 가독성의 흐름 말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커다란 바위를 언덕으로 올리는 시간은 다소 힘들고 지루하지만, 일단 정상에서 다시 바위를 굴릴 때에는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지면에 도달하는 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부터 별다른 고비 없이 그냥 쭉 읽어 나갈 수 있다. 분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휴일 하루를 고스란히 바치고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들지 못한 수고를 거쳐 끝까지 읽고 말았다.


사전에 일부러 다른 서평이나 정보를 접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중반까지는 영화 <언터처블> 같이 사지마비 환자와 간병인의 우정을 그린 내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이 책에서는 간병인이 여자였기 때문에 우정이 '사랑'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하면서. 더불어 부유한 상류층 남자와 평범하지만 가난한 여자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신데렐라의 요소를 약간은 가미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개 환자와 간병인 사이의 스토리 라인은 (1) 부유층의 잘나가던 A가 뜻밖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게 되고, (2)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다른 간병인들이 견뎌내지 못하여 자주 나가 떨어지자 또 인력을 구하게 되고, (3) 어느날 간병에 대한 경험이 없는 B가 면접을 보게 되는데, 면접관의 탐탁치 않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으로 시작한다. (4) 그런데 놀랍게도 이 B에게는 예전의 간병인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환자 A를 치유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물론 이 특별함은 A만이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 특유의 괴짜 같은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상류층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엉뚱함과 순진함 또는 무지일수도 있으며, 남다른 헌신일 수도 있다. (5) 어쨌든 몇 번의 크고 작은 실수와 좌충우돌로 인하여 둘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6) 마침내 간병인에 의해 환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둘은 이 관계를 진솔한 우정/사랑으로 승화시킨다는 패턴말이다. 이러한 패턴은 이 소설에서도 물론 적용이 된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억지 감동을 종용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기존의 패턴이 주는 예상된 감동에 한 가지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꺼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존엄사다. 루이자(B다)가 윌(A다)에게 체념보다는 희망을 갖도록,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도록, 절망보다는 행복을 느끼도록 고민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윌은 더이상 이런 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싹트게 된 사랑 앞에서도 죽음에 대한 의지를 거두지 않는 윌 앞에서 루이자는 오열한다. 그런 루이자에게 윌은 말한다. 


"난 그걸로 안 돼요. 이, 내 세상은, 아무리 당신이 있더라도 모자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클라크, 당신이 오고 나서 내 삶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사랑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심연의 절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는 아무리해도 삶을 살아가기에는 모자라다는 말을 듣는다면,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고 비루해질 것인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그것은 자신의 욕심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지금과 같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은 그에게 무의미할뿐이다. 그는 살고 싶은 것이지, 죽지 않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채식주의자>의 언니가 영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고통은 애써 묵살한 채 '생명'이라는 말로 삶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휩싸인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선택을 과연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옳다고 느끼는 바에 따라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살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고통도 절망도 모두 그의 것임에도 내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달된 고통과 절망을 딛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만이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착시는 아닐까. 사랑이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조금더 내 곁에 두고 붙잡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이 나만의 이기적인 사랑과 행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인정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오늘도 나는 당신을 몇번이고 헤아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믿는 사랑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내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당신의 그 선택을 곱씹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덧: 책을 읽고는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꼭 눈물을 흘리며 울것만 같지만, 그래도 옛 애인의 결혼식장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윌과 빨간 드레스를 입은 루이자가 춤을 주는 모습과 모리셔스 섬에서 인도양을 바라보며 푸른 해변에 누워 따사로운 햇살 아래 미소짓고 있을 두 사람의 모습은 꼭 한번 이미지로 보고 싶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도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 61쪽

"그쪽은 그쪽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겠죠. 다들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 77쪽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찌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 79쪽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윌 곁에서 걷다 보니, 고르지 못한 이음새가 나올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소스라치는지,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잣은지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 92쪽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07쪽

그렇다고 내가 무슨 섹스에 환장한 여자라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어차피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었으니까. 다만 내 마음 속 어떤 뒤틀어진 한 조각이 나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 120쪽

정원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려면 나이가 좀 들어야 한다고들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위대한 삶의 순환고리 때문이리라.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을 지나고도 새로 싹을 틔우는 식물들의 부단한 낙관주의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매년 다른 모습을 보는 기쁨, 자연이 정원 구석구석을 한껏 활용해 아름다움을 뽐내는 방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롭다. 어떤 때는, 내 결혼생활에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북적거린다거나 할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어떤 때는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 141, 142쪽

간병인 일에서 가장 나쁜 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들어 올리고 청소를 하는 일도 아니고, 아득하지만 항상 코끝에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심지어 다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질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조차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하루 종일 누군가와 딱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 기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 310쪽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 363쪽

"여기서 자다 보면 그 친구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걸어 다니고 스키를 타고 별별 걸 다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 친구의 심리적 방어막이 걷히고 진심이 다 드러나서, 말 그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 내가 같이 앉아 있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나아질 리 없으니까 해줄 말이 하나도 없어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쥐고 사는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압니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만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 414쪽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 416쪽

이렇게 산다는 건 지치는 일이에요. 그 피로감은 AB가 결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정말로 그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도저히 볼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거기 함께 있어주는 거에요. 그 사람이 옳은지 당신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곳에 꼭 함께 있어주어야 해요. - 483쪽

나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멀어지는 그를 다시 불러오려고 키스를 했다.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우리 숨결이 섞이고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의 뺨에서 소금으로 맺히도록 키스를 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그의 아주 작은 입자들이 소화되고, 삼켜져서, 살아 있는 채로, 영원히,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 몸 아주 작은 한 조각까지 그의 몸에 밀착하고 싶었다. 내 의지로 그에게 무언가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내가 느낀 생명의 조각 마지막 하나까지 그에게 주어 어떻게든 살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없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 두려운 내 마음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쳐버릴 권리를 갖게 되어버린 거에요? 나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일에 발언권이 전혀 없는 거냐구요? - 490쪽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사는 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들을 당신에게 준 사람이 나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일말의 고통을 던 느낌이에요. -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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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0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다가 말았는데, 이야기의 분량이 조금이라도 적었더라면 끝까지 읽었을 겁니다.

붉은눈 2016-06-21 09:46   좋아요 0 | URL
네,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좀 지지부진하게 늘여가는 부분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저는 후반 부분이 더 좋았는데, 평이한 서술이라고는 해도 거기까지 읽기가 다소 지루하기면도 있구요. 에필로그도 쓰다가 만듯한 느낌도 들고 그렇습니다. 괜찮긴 한데, `간만에 읽은 로맨스 소설치고는...` 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겠네요.

희망여행 2016-06-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세포가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읽기에도 전개가 뻔한 책이었지만 생명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해 볼만 하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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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은 물론이고, TV에서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지도 꽤 된 것 같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언론사(방송사와 신문사)의 뉴스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예전처럼 뉴스를 보거나 듣기 위한 시간을 고스란히 남겨두지도 않게 되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고 뉴스를 검색하고 그것에 대한 짤막한 느낌을 정리하며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뉴스에 대한 책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을까만은, '나쁜 뉴스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현 상태를 한번 들여다 보고 싶은 생각에 이 책을 골랐다.


부제가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제목이 대답해준다. '나쁜 뉴스'이니까. 뉴스에 대한 불신은 고스란히 해당 언론사로 연계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는 희망없는 이들을 버리고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도 충분히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맥락과 다른 의견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9시 뉴스에서, 종이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점점 돌아서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페이스북에서 미디어오늘의 기사들을 받아보고 있지만, 미디어오늘이라는 언론사가 매체비평지인지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언론을 취재하는 언론사' 미디어오늘의 기자인 저자가 국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의 원인을 해부한 책이다. 그렇기에 기자와 대중 사이에서 위치하여 뉴스에 대한 양방향적 고민을 제기할 수 있다.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고(기레기와 찌라시 전성시대), 뉴스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며(뉴스란 무엇인가), 뉴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갖는 방법을 제안하고(나쁜 뉴스 가려내기, 초중고급편), 앞으로 뉴스의 미래에 대한 과제를 제시한다(뉴스의 미래, 짐승 뉴스 전성시대).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 본질, 관점, 과제가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이 있고, 왜곡된 언론사들의 기사와 침묵이라는 횡포를 비판하는 다른 매체(기사나 팟캐스트)를 보고 들었다면 이미 알고 있거나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하다. 가려웠던 곳을 긁어준다기 보다는 그 가려움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정도? 


초반에는 연예 뉴스를 통해 정부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감추려 한다는 음모론, 정부에 대한 조선과 한겨레의 시각 차, 바이라인(by-line)없는 낚시성 짜집기와 어뷰징 기사의 등장 이유, 언론이 구사하지 못하는 드라마(미생, 송곳)의 언어에 대하여 다룬다. 이어서 뉴스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상과의 차별성을 그 본질로 제시한다. 하지만 불분명한 연결고리 제시, 기사의 청탁, 데스크의 보도 누락과 같은 현실적인 한계로 인하여 뉴스가 뉴스가 아니게 되는 상황을 첨부한다. 특히 나쁜 뉴스 가려내기에서는 영화 <내부자들>이나 세월호, 위안부 문제가 발발했을 때의 여론을 마사지하는 물타기 수법("문제를 제기한 놈이 나쁜 놈이다", "돈 더 받아 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다 똑같은 놈들!", "지들끼리도 싸우는 걸 보니 뭔가 있구먼!"), 반세기 계속되어 온 '빨갱이' 프레임 등을 사례화 유형화 하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한다.


나쁜 뉴스는 기레기 기자, 데스크, 정부가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기도 하지만, 기업이 배후를 조정하는 데에서 발생된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론산업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각 언론사의 지배구조를 통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뉴스에 대한 관점과 의도, 편향성을 짚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후반부에서는 언론산업을 통하여 언론사의 지배구조, 뉴스 전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유통에 대해서 다룬다. 광고라는 스폰서를 피할 수 없는 언론사의 현실, 이미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을 중심으로 재편된 유통 구조를 설명하면서 오마이뉴스, 국민TV, GO발뉴스, 뉴스타파와 같은 대안언론들이 그 영역을 더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언론사가 어뷰징에 집중하고 트래픽을 강조할수록 멀쩡한 기사를 쓰던 기자들도 클릭 수에 얽매이게 된다. 열심히 취재해서 쓴 심층 취재 기사는 조회 수가 별로 안 나오고, 대충 베껴 쓴 기사의 조회 수가 폭발하면 허무해진다. - 55쪽

언론이 약자들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이 사회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가진 자의 것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가치를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할 필요성이 적다. 이미 즉물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 세력의 언어는 매우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예컨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서울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인 상황을 설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보수의 언어는 깔끔하다. 불법 점거, 이 한마디면 된다. 실제 조선일보는 이런 언어로 사안을 설명했다. 보수 언론들은 2015년 11월에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를 묘사하며 `폭력` `불법`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불법과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에 기초한 매우 명료한 설명이다.
반면에 진보의 언어는 복잡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점거 농성을 하는 상황이 왜 불법이 아닌 합법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왜 이들이 불법을 각오하고라도 점거를 할 수밖에 없는지 또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귀에 잘 안 들어온다. - 63쪽

기자에게는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공감하고 분노하길 바라며, 자신의 기사가 널리 회자되어 군중이 벌떼같이 일어나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자신의 기사가 `펜의 힘`을 갖길 바라는 것이다. - 73쪽

그러나 언론이 `팩트를 추구해야 한다`는 명제와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명제는 분명 다른 말이다. 팩트는 말 그대로 어떤 사건에 대한 `5W1H`, 그리고 이 정보에 살을 붙인 또 다른 사실관계를 뜻한다. 이때 사실관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팩트도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기사나 방송에서 보는 뉴스들은 현실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사실이다. - 125, 126쪽

반면에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은 2015년 9월 21일 열린 `중앙 50년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아젠다 키핑(agenda-keeping)을 강조했다.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는 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을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JTBC는 200일간 세월호 참사를 메인 뉴스로 다뤘고 4대강 문제 역시 반년 가까이 보도했다. 대중들에게 중요한 의제를 던지는 `세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의제가 되도록 만드는 `키핑`이다.
이 키핑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은 언론과 미디어가 강조하고 싶은 의제나 정보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이들을 재구성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뉴스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틀을 뜻한다. - 128, 129쪽

기사는 가설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가설이 팩트를 바탕으로 잘 엮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사 안의 문장을 무작정 사실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문장을 해체해 원인과 결과로 나누고, 인과관계의 끈을 이어 주는 조건이 합리적인지 살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답은 텍스트 안에 있다. - 148쪽

정치학에는 `Two faces of power`라는 개념이 있다. 권력에는 두 가지 속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언론의 힘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언론과 미디어가 어떤 뉴스를 생산했느냐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진짜 미디어의 힘든 보도하지 않는 데 있다.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흔히 명시적인 힘에 집중돼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남을 강제하는 `명시적` 권력은 눈에 잘 띄는 힘이다. 언론도 이런 명시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이슈를 의제로 설정하고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사안을 인식하도록 보도하는 힘이다.
반대로 `묵시적` 권력도 있다. 바로 침묵의 힘이다. 이는 사회 지배 계층에게 불리한 이슈는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라 부른다.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결정한다`는 뜻이다. 언론은 이런 묵시적 권력을 가진 대표적 집단이다. 즉, 언론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언제든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 - 151, 152쪽

이제 뉴스는 고양이와도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는 유통이 생산을 장악한 뉴스 시장의 현재를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일수록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뉴스를 보는 통로는 스마트폰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가장 큰 특징은 말 그대로 모바일(mobile)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을 투자해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습관적으로 아침 신문을 펼치거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9시 뉴스를 보는 어른들도 있지만, 젊은 세대는 출퇴근길이나 이동 중에 뉴스를 소비한다. 뉴스는 정해진 시간에 챙겨 보는 고정적인 일거리가 아니라 짬 나는 시간에 소비하는 여러 가지 콘텐츠 중 하나가 되어버린 셈이다. - 292, 293쪽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등장한 1세대 대안 언론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콘텐츠는 신선했으나 유통 경로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대안 언론으로 시작한 오마이뉴스, 한겨레를 더 이상 대안 언론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세대 다안 언론은 대부분 포털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포털의 뉴스 경로에 유입되지 못한 대안 언론들은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삐걱거렸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을 계기로 등장한 대표적인 대안 언론인 뉴스타파와 국민TV의 한계점도 유통이다. 뉴스타파는 유듀브와 시민방송 RTV로 유통되고, 국민TV는 유튜브와 팟캐스트 사이트 팟빵이 주요 유통 경로다. 대부분의 뉴스 소비가 포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기성 언론에 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좋은 보도를 내놓아도 `보는 사람만 보는` 방송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구조다.
결국 대다수의 대안 언론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통을 확장하는 모험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 324,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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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프로포즈
괴테 외 지음, 황내도 옮김 / 청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책정리하다가 발견했다. 한창 이런 류의 책이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책을 중심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유익한 교훈들을 모아놓은(나쁘게 말하면 '짜집기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이 책도 그런 분위기에 동참한(나쁘게 말하면 '편승한') 책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측면이 몇 군데 있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면,  

1. 책 표지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힌 것이 아니라 '괴테, 베르나르 베르베르 외 일화'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매우 인기 있을 때 편승하여 발간한 책인가 보다. 그렇다고 저자가 쓰여져야 할 부분에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독자들이 베르베르의 책인줄로 오해하고 구입할 여지가 있는 좋지 않은 마케팅이다. 

2. 제목 '어설픈 프로포즈'는 이 책 4장에 있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화 제목이기도 하다. 표지에는 괴테와 베르베르를 내세우더니 제목은 구로자와 아키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구로자와 아키라의 일화'라고 하던지. 모름지기 한 책의 제목이 되려면 그 제목이 책 전체의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을 절반 이상을 읽으면서 도대체 왜 '어설픈 프로포즈'가 제목인지를 알 수 없었다.


제목처럼 '어설픈' 구성의 책이다.

"이보게, 처음부터 대작을 쓰려고 하지 말게. 날개가 여물어야 날 수 있지 않겠나? 미래에나 가능한 대작을 꿈꾸지 말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써 보게. 그럼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작이 만들어져 있을 걸세. 날기에 앞서 날갯짓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는 괴테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 1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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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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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광고 문구처럼 "그녀가 돌아왔다!" (그리 끌리지 않은 책표지와 함께...) 


정유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28>이후 그의 소설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7년의 밤>에서 보여준 치밀한 서술과 묘사는 읽는 내내 계속 가슴이 뛰게 만들었다. 그녀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저수지와 댐은 실제 눈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그밖에도 등장인물의 생생한 말투와 행동은 외부의 시선으로 책을 읽던 나를 어느새 소설에 개입시켜 그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 감정적 동화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작가는 <종의 기원>에서도 여전한 흡입력으로 독자들을 소설의 한 가운데로 이끌지만, 전작에 비해서는 사건의 전개와 반전, 그에 따른 긴장감 같은 것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이것은 전작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하여 이야기 사이사이에 유머러스한 부분을 많이 삽입하였지만, <7년의 밤>이나 <28>과 같은 전작에서는 '악인(惡人)'에 대해 주된 이야기를 풀어 나갔고,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책을 읽기 전에 <종의 기원>의 '종(種)'을 '악(惡)'으로 치환하여 '악의 기원'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그때문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이것은 이분적으로 ('선(善)'이 아닌) '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종의기원>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서의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의미의 악인이 아니었다. 만약 통상적인 의미의 악인을 가정하였다면, 악인의 탄생에는 원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별다른 원인이 필요하지 않은, 즉 타고난 본성이 사이코패스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운명? 특수성? 돌연변이? 어떠한 것도 답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한 답은 바로 '생존'이다. 


'작가의 말'에서 인용하였듯이,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을 뿐이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악'이란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 지배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언제 발현되는가에 따라 그는 사회적인 악인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스토리를 '도덕성이 교육으로 습득되지 않는 어느 사이코패스가 결국에는 그 본성대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운명적으로 살인마가 되어 계속 살아간다', 라고 한 줄로 줄이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임을 알면서도, 그가 사이코패스임을 알면서도, 그가 결국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엄마는 아들을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를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적절한 관리와 통제(훈육, 약물)를 통하여 그를 평범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진은 엄마와 이모가 맞춰놓은 틀 안에서 관리받고 훈육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일종의 '폭력'이 작용한다. 약을 먹으라는 폭력, 규율을 지키라는 폭력,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폭력. 절망해야 할 상황에서 '핏줄의 저주'를 거부하지 못한 엄마는, 얼마 전 읽은 <채식주의자>에서 동생을 정신병원에 맡겨서라도 살게 하려 했던 언니과 겹쳐보인다. 평범하게 살도록 하는 것, 죽지 않고 계속 살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행위에 수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폭력이 유진의 생각과 행동에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직 그의 본성만을 탓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다가 몇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 중 가장 강한 의문은 작가가 과연 치유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성질을 유진에게 그대로 대입한 것인지였다. 중반 이후까지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생각들, 즉 유진은 사이코패스여서 정말 그런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유진은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맞선다. 종탑에서 형을 밀어 넘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 물론 형의 죽음 이후에 그려진 그의 담담함과 무심함은 놀랄만 하지만, 형과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당한 분노로 먼저 종탑에 올라간 형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미성숙한 소년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결국 형이 추락해서 사망하였지만 거기에 살인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유진의 회상과 독백만으로는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형의 죽음은 사이코패스로서 유진의 생존을 위한 것이나 살인이라는 흥분에 눈을 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로서의 악의 탄생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후반부 유진의 관점에서 서술된 형을 종탑에서 밀어버릴 때의 회상부분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은 유진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의붓형인 해진을 이전의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이코패스도 자신이 죽이기 쉬운 대상을 선별하였기 때문에 여성이 아닌 남성인 해진을 살해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나'로 서술되는 1인칭 시점에서(유진의 속마음까지 고스란히 노출되도록 서술하고 있는데도) 해진의 살해의도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바다로 뛰어들기 전의 최후에는 '생존'에 대한 방어적 기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의 본성이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를 훈육한 엄마와 이모의 잘못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의미 있는 일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실제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에서만 보자면) 살인이라는 결과와 살해라는 행위의 상관관계를 전적으로 유진에 내재된 사이코패스라는 본성에 의지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작가는 왜 (위의 의문들처럼) 불분명하게 남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일까. 작가가 의도한 소설 본연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사이코패스라는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이들(훈육과 의학)의 확고한 '관념'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임: 사소하지만(?) 정말 궁금한 또 하나의 의문은 이모가 죽을 때 왜 유진을 보며 "유민"이라고 했는지이다. 나는 이것이 후반부에 있을 반전의 복선인줄로만 알았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구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길...)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예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 67쪽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 68쪽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 135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 272쪽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 275쪽

나는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 308쪽

"나는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창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꼴이니까."
"수류탄을 쥐고 있다고 꼭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 330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 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 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거야.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 330, 331쪽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 379쪽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작가로서 충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었다. 두 번째 다시 쓸 때까지도 그렇다고 우겼다. 세 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대의 작가들,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통해,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 382쪽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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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2016-06-3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왜 이모가 죽기전에 유민이라고 말했는지 너무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