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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 비포 유 ㅣ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4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책을 사 둔지는 오래되었으나, 그동안 e북 서재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던 녀석이다. 이제야 책을 펼쳐든 것은, 한동안 종이책을 읽느라 e북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이다. 아무래도 일단 책은 사놓고 보자는 습관은 좀체로 나아지질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 책을 사두었다는 '기억'은 하고 있었다. 샀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처음에는 서점을 구경하던 중 영화화도 되고 속편(<애프터 유>)도 나왔다고 하길래 그 정도면 괜찮은 소설인가? 생각하고 호기심을 가졌다. 마침 할인을 하는 이 소설을 영문으로 읽으려다가,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우선 국문으로 읽은 후에 영문을 보자는 생각으로 e북 책장을 뒤지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이를테면 번역된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의 경우, 일정한 임계점이 있다. 즉, 어느 부분까지 참고 읽어 나가면 그 이후부터는 술술 익힌다는 가독성의 흐름 말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커다란 바위를 언덕으로 올리는 시간은 다소 힘들고 지루하지만, 일단 정상에서 다시 바위를 굴릴 때에는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지면에 도달하는 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부터 별다른 고비 없이 그냥 쭉 읽어 나갈 수 있다. 분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휴일 하루를 고스란히 바치고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들지 못한 수고를 거쳐 끝까지 읽고 말았다.
사전에 일부러 다른 서평이나 정보를 접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중반까지는 영화 <언터처블> 같이 사지마비 환자와 간병인의 우정을 그린 내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이 책에서는 간병인이 여자였기 때문에 우정이 '사랑'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하면서. 더불어 부유한 상류층 남자와 평범하지만 가난한 여자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신데렐라의 요소를 약간은 가미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개 환자와 간병인 사이의 스토리 라인은 (1) 부유층의 잘나가던 A가 뜻밖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게 되고, (2)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다른 간병인들이 견뎌내지 못하여 자주 나가 떨어지자 또 인력을 구하게 되고, (3) 어느날 간병에 대한 경험이 없는 B가 면접을 보게 되는데, 면접관의 탐탁치 않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으로 시작한다. (4) 그런데 놀랍게도 이 B에게는 예전의 간병인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환자 A를 치유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물론 이 특별함은 A만이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 특유의 괴짜 같은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상류층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엉뚱함과 순진함 또는 무지일수도 있으며, 남다른 헌신일 수도 있다. (5) 어쨌든 몇 번의 크고 작은 실수와 좌충우돌로 인하여 둘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6) 마침내 간병인에 의해 환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둘은 이 관계를 진솔한 우정/사랑으로 승화시킨다는 패턴말이다. 이러한 패턴은 이 소설에서도 물론 적용이 된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억지 감동을 종용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기존의 패턴이 주는 예상된 감동에 한 가지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꺼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존엄사다. 루이자(B다)가 윌(A다)에게 체념보다는 희망을 갖도록,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도록, 절망보다는 행복을 느끼도록 고민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윌은 더이상 이런 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싹트게 된 사랑 앞에서도 죽음에 대한 의지를 거두지 않는 윌 앞에서 루이자는 오열한다. 그런 루이자에게 윌은 말한다.
"난 그걸로 안 돼요. 이, 내 세상은, 아무리 당신이 있더라도 모자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클라크, 당신이 오고 나서 내 삶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사랑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심연의 절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는 아무리해도 삶을 살아가기에는 모자라다는 말을 듣는다면,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고 비루해질 것인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그것은 자신의 욕심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지금과 같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은 그에게 무의미할뿐이다. 그는 살고 싶은 것이지, 죽지 않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채식주의자>의 언니가 영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고통은 애써 묵살한 채 '생명'이라는 말로 삶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휩싸인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선택을 과연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옳다고 느끼는 바에 따라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살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고통도 절망도 모두 그의 것임에도 내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달된 고통과 절망을 딛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만이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착시는 아닐까. 사랑이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조금더 내 곁에 두고 붙잡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이 나만의 이기적인 사랑과 행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인정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오늘도 나는 당신을 몇번이고 헤아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믿는 사랑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내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당신의 그 선택을 곱씹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덧: 책을 읽고는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꼭 눈물을 흘리며 울것만 같지만, 그래도 옛 애인의 결혼식장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윌과 빨간 드레스를 입은 루이자가 춤을 주는 모습과 모리셔스 섬에서 인도양을 바라보며 푸른 해변에 누워 따사로운 햇살 아래 미소짓고 있을 두 사람의 모습은 꼭 한번 이미지로 보고 싶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도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 61쪽
"그쪽은 그쪽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겠죠. 다들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 77쪽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찌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 79쪽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윌 곁에서 걷다 보니, 고르지 못한 이음새가 나올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소스라치는지,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잣은지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 92쪽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07쪽
그렇다고 내가 무슨 섹스에 환장한 여자라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어차피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었으니까. 다만 내 마음 속 어떤 뒤틀어진 한 조각이 나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 120쪽
정원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려면 나이가 좀 들어야 한다고들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위대한 삶의 순환고리 때문이리라.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을 지나고도 새로 싹을 틔우는 식물들의 부단한 낙관주의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매년 다른 모습을 보는 기쁨, 자연이 정원 구석구석을 한껏 활용해 아름다움을 뽐내는 방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롭다. 어떤 때는, 내 결혼생활에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북적거린다거나 할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어떤 때는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 141, 142쪽
간병인 일에서 가장 나쁜 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들어 올리고 청소를 하는 일도 아니고, 아득하지만 항상 코끝에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심지어 다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질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조차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하루 종일 누군가와 딱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 기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 310쪽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 363쪽
"여기서 자다 보면 그 친구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걸어 다니고 스키를 타고 별별 걸 다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 친구의 심리적 방어막이 걷히고 진심이 다 드러나서, 말 그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 내가 같이 앉아 있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나아질 리 없으니까 해줄 말이 하나도 없어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쥐고 사는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압니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만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 414쪽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 416쪽
이렇게 산다는 건 지치는 일이에요. 그 피로감은 AB가 결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정말로 그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도저히 볼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거기 함께 있어주는 거에요. 그 사람이 옳은지 당신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곳에 꼭 함께 있어주어야 해요. - 483쪽
나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멀어지는 그를 다시 불러오려고 키스를 했다.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우리 숨결이 섞이고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의 뺨에서 소금으로 맺히도록 키스를 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그의 아주 작은 입자들이 소화되고, 삼켜져서, 살아 있는 채로, 영원히,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 몸 아주 작은 한 조각까지 그의 몸에 밀착하고 싶었다. 내 의지로 그에게 무언가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내가 느낀 생명의 조각 마지막 하나까지 그에게 주어 어떻게든 살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없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 두려운 내 마음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쳐버릴 권리를 갖게 되어버린 거에요? 나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일에 발언권이 전혀 없는 거냐구요? - 490쪽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사는 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들을 당신에게 준 사람이 나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일말의 고통을 던 느낌이에요. -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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