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 최신개정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이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가 그의 책 <디지로그>를 막 읽고 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을 보고는 다소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어령이라는 분도 별 수 없는지 이제 늙어서는 결국 종교로 회귀한다는 결과에 대한 한탄이나 노령의 나이지만 당당하게 끝까지 이성의 날카로운 끝자락에서 첨병의 역할을 하실 것 같은 분에 대한 알 수 없는 실망감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영적인 입장 변화를 굳이 책으로 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을까, 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이 책을 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읽고 나서 실망하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종교를 갖는 것에 반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왠지 그의 이전 책들을 읽으며 탄복했던 유연한 사고와 정교한 언어의 향연을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잠시 해외에 머무르던 중 우연히 그 지역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서가를 발견하였다. 며칠 간의 e북 독서에 눈이 피로하여 종이책이 너무도 반가웠지만, 한국어 책들 중에서 읽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가 교토대학교에서 홀로 지내면서 느꼈던 경험과 생각들을 적은 1부, 딸에게 발생한 문제들을 겪고 해결해 나아가면서 자신이 세례를 받게 이유를 설명한 2부, 한국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3부, 딸의 편지와 회고, 간증을 수록한 4부, 인터뷰를 수록한 5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1부에서만 예전의 이어령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영성은 경험이다. 아주 철저한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경험하지 않은 영성은 맹목적 추종일 뿐이다. 하지만 현 시대에 이성과 지성의 습득을 우리는 개인적 경험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 보다 시대적이고, 일반적이며, 사변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 책에서는 이것들을 혼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이것도 '통섭'인가?). 그의 표현대로 ‘예수쟁이’가 된 그의 글은 지성에 반하는 영성을 부정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맹목적 신앙에 대해 경고하고는 있지만, 이 개인적이고 회고적인 글은 지난 수십 년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글을 써왔던 한 이성적 인간의 회고적인 신앙간증일 뿐이다. 

물론 그의 간증을 비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는 단지 경험한대로 느낀대로 글을 쓴 것이며 그가 경험했던 아프고 놀라운 고통과 기적의 순간들 속에서 그가 느꼈어야 할 인간적 한계와 고뇌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재를 말하며 과거를 떠올리지만 그의 과거는 다시 그가 종교를 찾게 된 현재와 연결이 된다. 인생이라는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다시 맞추어 가듯 지금에 와서 생각보니 과거 순간들은 모두 연결되는 의미였던 것이다. 다만 독자로서 아쉬운 점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기 위하여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너무 많이 붙였다는 것이다.

70이 훌쩍 넘은 노인네가, 그것도 인문학자로서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개신교를 그렇게 비판했던 그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 많은 이들의 관심꺼리가 되었나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부터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나 실망에 대응하기 위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러면서 내내 자신은 지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지성과 이성을 갖추어 그것을 넘어서는 영성에까지 의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뇌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니체나 카뮈에 매료되어, 허무주의, 실존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성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않았겠지요" 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다보니, 대부분의 페이지에 녹아 있는 '나는 이성과 지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이런 주장은 흡사 자기변명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냥 영성에 관한 책을 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끝까지 이성과 지성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탑을 허물기 싫어서였을까?

제목인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것이 ‘전환’이 아닌 ‘확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글을 읽다보니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홀로 자신으로 침잠하는 것은 평면상 하나의 작은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더 깊은 고뇌와 성찰로 들어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가 제목에서부터 지성과 영성을 이분화 해놓았으면서 이 둘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지성을 기반으로 영성에 의지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냥 개신교 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글을 썼다면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처럼 좋아하는 신앙 에세이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고 황혼이 땅으로 내려앉으면 빛과 어둠의 경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는 그레이존의 노을이 뜹니다.”라는 그의 말을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혼미함으로 이해하려 한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 13, 14쪽

멕시코 감독이 만든 영화 <21그램>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인간 영혼의 무게는 라면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스 병원에서는 임종직전의 말기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 온즈(35.gm)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2년 반 뒤에도 임종직전의 다섯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보았더니 역시 영혼의 평균 무게는 1온즈(28.4gm)였다는 겁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봅니다.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나는 어깨 위의 쌀 한 자루 무게와 내 머릿속 영혼의 무게를 의학실험을 하듯이 예민한 저울로 번갈아 재고 있었던 겁니다. 분노가 치밀었지요. 그것이 영혼을 저울로 달고 있는 과학자들을 향한 것이었는지 너무나도 빈약한 내 영혼에 대한 것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웃음이 연민이 되고 연민이 분노로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 23, 24쪽

무신론자들도 기도를 드린다는 모순 어법을 그때 찾았습니다. 쌀 한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그때 처음으로 저울질해보았습니다. 빛의 무게, 향기의 무게, 공기의 무게, 영혼의 무게는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 25, 26쪽

나는 나무들을 자유로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가 있듯이 이국의 모든 풍경과 뉴스와 그 이방의 사람들을 아무 부담 없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토생활을 하는 지금의 내 행복입니다. 도구가 아닌 존재의 나무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나하나의 이파리에 묻어나는 여름과 그리고 조금씩 물들어가는 겨울의 죽음들이 보입니다. - 57쪽

바람이 불면 미친 듯이 나무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나무 이파리 하나하나가 말갈퀴처럼 흔들릴 때 비로소 나무는 무엇으로도 풀이할 수 없는 나무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난 그때부터 새로 만나는 사람과 새로 구한 물건들로 나에게도 개목거리의 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쓰레기통을 비우고 또 비워도 하루치씩 온갖 생의 찌꺼기들이 쌓여갑니다.
미구에 쓰레기가 될 물건들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의 끈입니다.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리워 치와와 같은 애완용 개목걸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저 많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 57, 58쪽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것을 견디지 못하지요. 그래서 무엇인가 의미를 채우려고 기를 씁니다. 일기를 쓴다는 것, 그것도 결국 빈 종이의 하얀 공백을 문자로, 의미로 메워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에이하브 선장이 흰 고래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 평생 목숨 걸고 쫓아다닌 것은 작가가 원고지의 흰 공백을 죽이기 위해 일생 동안 글을 써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평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예리한 펜의 창으로도 그 흰 공백의 심장을 꿰뚫을 수 없었기에 나는 매이 ㄹ공일의 그 바다에서 익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59, 60쪽

하늘에서 축복처럼 내려주신 눈 내리는 교토의 벌판을 바라보면서 헛기침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봅니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아무리 부정해도 내 가족 내 고향 말고 은둔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할퀴고 침뱉고 아우성쳐도 눈도 한국말로 내리는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꽤 잘난 체하는 컨실리언스(통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도 토포필리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가. 모든 생명체를 관통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깊은 애정. 가위 바위 보의 문명론을 탈고했으니 내 DNA에 찍혀진 토포필리아에 내 몸을 맡겨야 한다.
한국말로 내리는 설경을 보기 위해서 어서 짐을 싸자. - 113쪽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 속에 삽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신 그 지적들을 거두어 가지 마시기를 진실로 기도합니다. - 122쪽

제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옛 바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속에 묻혀 있던 영성이 이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술가적 기질과 초월적 영성의 기질이 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 152쪽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 152쪽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에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153쪽

로맹 롤랑(Romain Roalland)은 인생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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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기생수 애장판 (전8권/완결)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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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보고 싶어 뒤적이다가 골랐다. 일본 만화를 '쫌 봤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익히 많이 들었던 책이라 진작부터 보고 싶었지만, (손 발에 눈 달린) 이런 그림체를 좋아하지는 않는터라 그동안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일종의 슬럼프가 생겼고 그에 따른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하여 만화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중 완결된 만화책을 찾다보니 이 책 <기생수>가 걸려 들었다. 


작가가 이 만화를 일본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것이 90년대 초반이고, 이후 2-3년에 걸쳐 완결되었다고 해도, 발간된지는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일본도 그랬던 것 같은데, 9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에콜로지'에 대한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환경보전을 둘러싼 국제적인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환경정책이나 환경법의 연혁상으로는 1992년 리우회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하였고, 의제 21과 더불어 '기후변화협약'이나 '생물다양성협약'이 체결된 것도 이 때이다. 만화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국제환경조약 얘기를 해서 이상하기는 하지만, 모든 작품은 시대적 산물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만화 역시 한창 에콜로지에 대한 논의가 치열했던 그 시기에 발행되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이유도 모른 채 어느날 기생수가 등장한다. 인간의 뇌에 침투해서 그 인간을 숙주로 조정하며, 숙주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을 잡아 먹는다. 이것만으로는 괴기만화 혹은 영화 <연가시>와 같은 류의 재난 만화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종'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생존에 맞물린 살육에 대한 선과 악의 모호성이 그 뒤를 따라온다. 분명 기생수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며 숙주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살육일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살육은 거시적으로 보면 지구적 관점에서의 개체에 대한 균형 유지일수도 있다.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고 오염된 지구, 인간들에 의해 지배 혹은 멸종된 동식물들의 처참함을 생각한다면, 기생수라는 천적으로 통하여 인간의 개체수를 자연발생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일부 지각을 갖춘 기생수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기생수는 왜 존재할까? 기생수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인간을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과 기생수가 공생할 수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실험이 시작되고, 기생수 집단들은 마침내 작은 지역을 거점화하는데 성공한다. 기반을 확보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생수와의 공생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 공존에 대한 질문에 인간은 군대를 동원하여 기생수를 박멸 혹은 멸종시키는 것으로 답한다.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동물이 식물을 먹는 것,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 먹이사슬에서 생존을 위한 살육에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면서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에 해가 된다면 '악'이 된다. 얼마전 읽은 <종의 기원>에서의 유진처럼 본능적이고 태생적인 사이코패스의 살인에 대해서는 그것을 '악'이라고 명명하는데는 주저함이 없지만, 단순히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살육이 아니라 유희를 위하여 또는 보다 편한 식육을 위하여 비윤리적으로 행해지는 사냥이나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협한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현재와 이 책이 발간되었을 과거와의 시간차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분명 생각할 여지를 많이 제공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 외부적 상황에서만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점이었다. 주인공 신이치는 기생수가 뇌로 침투하지 못한채 오른팔에 침투하여 본의 아니게 기생수와 공생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선을 지키고 악을 섬멸하기 위하여) 기생수와 싸우고 그의 팔에 기생하는 '오른쪽이'는 신이치의 의지대로 다른 기생수들을 죽인다. 그러나 신이치는 그런 오른쪽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른쪽이가 변형을 해서 다른 사람의 차를 열거나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을 슬쩍하는 것을 더욱 크게 문제 삼는다. 기생수를 통해 그 기생수의 동족을 살해하면서도 그것이 악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신이치에게는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작가는 기생수와의 최후의 결투에서 그의 생명을 끊는 것을 주저하는 신이치 보여준다. 신이치를 통하여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가 강조하는 '그것'이 과연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본질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의문은 단 하나... 기생생물이 존재하는 의미에요. 대체 무엇 때문에..."
"간단한 것 아닌가? 지구에 있어서 인간은 `독소`가 된 거지. 그래서 `중화제`가 필요해진 거고." - 3권 95, 96쪽

"비관적인 미래상을 보이며 `조금만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하고 협박하면서 효과를 얻는 방법도 있지만, 저는 도리거 `이렇게 하면 이만큼 아름다운 세상이 옵니다` 하며 아름답고 이상적인 미래를 보이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은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겠지요." - 4권 102쪽

"다른 생물을 예로 들어봐야 허사겠지만... 인간과 가축들도 공존하고 있잖아! 물론 대등하진 않지. 돼지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일방적으로 자기들을 잡아먹는 괴물일 뿐이야. 인간들 자신도 거창하게 떠들어대고 있잖아? `지구의 모든 생물은 공존해야 한다` 개중에는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 같은 말도 안되는 슬로건도 있고." - 5권 97, 98쪽

"난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이 만든 법률이니 도덕을 들먹이면 곤란해."
"그래도 내 손이라구!"
"신이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사소한 거 가지고 고민하지 말자. 내가 살기 위해 내가 한 짓이야. 알겠어? 너와 나는 협력관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종이 다른 생명체다. 각각이 종이 갖는 성질을 되도록 존경하고, 자기측의 이념을 강요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후, 우리의 공동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 그건 우선 `살아남는` 거야. 안 그래?" - 6권 13쪽

"이번은 너희들의 승리라고 해도 좋다. `살상`에 관해서는 지구상에 인간을 능가할 생물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들이 지금 들고 있는 도구는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해. 즉... 생물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 7권 182쪽
"너희들의 진짜 역할은... `솎아내기`야. 조금만 더 있으면 온 인류가 알게 되겠지. 인간의 수를 당장 줄여야 한다는 것을..." - 183쪽
"좀 더 있으면 `살인`보다 `쓰레기 투기`가 훨씬 중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우리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호하려 들지도 몰라. 너희들은 자신의 `천적`을 좀더 존중할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이 천적은 아름다운 대자연의 피라미드 정상에 우뚝 선다! 인간보다 위에! 그러므로써 균형을 회복된다! 지구상의 누군가가 문득 생각한거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고..." - 184쪽

"인간 한 종의 번영보다 생물 전체를 생각해! 그래야 만물의 영장이다! 정의를 위한다고 떠들어대는 인간! 이 이상의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 7권 186쪽
"인간에 기생하여 생물 전체의 균형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우리에 비하면...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 아니... 기생수다!" - 187쪽

`누가 정하지? 인간과... 그밖의 생명의 기준은 누가 정해주는데?` - 8권 179쪽
"이놈은 인간과는 다른 생물이야. 인간의 편익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
`나는 지금... 인간으로서 터무니없는 중죄를 범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롭다고 그 생물에게 살 권리가 없다는 건가? 인간에게 해롭다 해도 지구 전체로 보면 도리어...` - 180쪽
"생물은 때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때로는 죽인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아니 상대를 자신이라는 `종`의 잣대로 재면서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211쪽
"다른 생물의 마음을 아는 체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다른 생물들은 무엇도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령 전혀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해야 할 동거인임에는 틀림없다.다른 생물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멸망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인간 개인의 만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게 전부니까. 인간의 잣대로 인간 자신을 비하해봤자 의미는 없다." -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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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6-2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덕분에 이런 장르의 만화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기생수...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예측이 안 되었지만요 ^^
 
[전자책] 애프터 유 : 전 세계를 사로잡은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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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맨틱 소설을 읽었는데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끝을 냈어야 했는데, 그 기쁨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지말아야 할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속편을 사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로 후회한다. 다시 어제로 돌아가서 이 책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단순히 책 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속편을 읽는 내내 밀려들었던 짜증이 오히려 전편을 읽은 후에 남았던 감동까지 싸그리 뭉게져버렸기 때문이다. 전편만한 속편이 없다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계의 강한 속설이지만, 이 책은 정말 그렇다.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읽을 때 소설의 제목을 '당신을 만나기/알기 전의 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는 윌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속편의 제목을 <에프터 유(After You)>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두 편의 소설, 즉 비포와 에프터의 기준점인 유(you)는 윌이 아니라, '윌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법상 이 인칭대명사가 죽음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전편과 속편은 각각 윌의 죽음 이전의 나(루이자)와 그 이후의 내 모습을 나누어 소설에 담은 셈이다. 독자로서 윌이 죽은 후에 홀로 남게 된 루이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독자들은 비록 소설이 끝난 후의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루이자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아픈 상처에도 불구하고, 윌의 바람대로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궁금증과 바람을 작가로서 해소해주려는 의도로 속편을 쓰겠다는 의도는 알겠으나,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가 전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운명을 접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스포 있습니다)


우선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다. 작가인 조조 모예스는 속편을 쓰는 동안 더글러스 케네디를 영접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허황된 설정들이 난무하다. 윌이 남긴 돈으로 얻은 아파트 옥상에서 술에 취한 채로 그를 그리워하다가 누군가의 등장에 놀라 루이자가 추락을 한다던지, 추락한 그를 병원까지 후송한 구급대원(샘)과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다던지, 어느날 갑자기 윌의 딸이라며 존재를 전혀 알지도 못했던 열 여섯살 짜리 소녀(릴리)가 등장해서 루이자에게 친부인 윌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다던지, 루이자가 단지 윌의 딸이라는 이유로 릴리를 보살피기 위해 헌신하며 그녀를 집으로 받아들이고 가출한 그녀를 찾아 헤메다가 직장에서 짤리고 너무나 가기 원했던 새 직장도 접는다던지, 릴리의 등장에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 완고한 트레이너 부인(윌의 어머니)이 받아들인다던지, 샘과의 애매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때쯤 샘이 총에 맞는 위기가 발생하고 이후 둘의 관계가 급물살을 탄다던지 하는 과도한 상황들은 읽는 내내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 만든다.


전편에서 매우 강한 비중이었던 윌이라는 주인공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이해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윌의 존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숨겨두었던 딸이 등장해야 하며, 그 딸은 열 여섯살 까지 가만히 있다가 우연히 본 신문에서 엄마가 자기를 욕할 때 그렇게 부르짓던 아빠 '윌 트레이너'의 기사를 보고 갑자기 자신의 핏줄과 아빠의 인생을 궁금해하기 시작했으며, 얘는 곧장 할아버지, 할머니인 트레이너 부부를 찾지 않고 간병인인 루이자에게 왔어야 했는가? 왜 루이자는 릴리와의 동질성을 통해 윌의 부재를 재확인 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가 릴리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과 같은 과도한 개입을 하는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읽다 보면 문체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같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전편과 속편의 번역 문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이 작가의 문체가 변한 것인지, 번역자가 바뀌어서 그런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 설정 자체의 난잡함은 차치하더라도, 전편에 비하여 상당히 가독성이 떨어진다던가 읽다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문장과 말투가 있는 것으로 보면 조심스럽게 번역자에게 원인을 돌려본다. 일부는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지만 굳이 원서를 사서 원문과 대조해보면서 따지고 싶지는 않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작가는 속편 또한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샘의 피격 장면이나 맨 마지막 루이자의 집 옥상에서 벌린 '새 출발 서클'의 수료식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모여 기쁨과 환호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면, 마지막 공항에서 루이자의 뉴욕행 출국 장면은 헐리우드 영화에 꼭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장면들이다. 이런 진부한 장면들을 굳이 이 소설에서 또 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동화를 보면 그 마지막은 항상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두 사람이 사랑을 얻게 되기까지의 희열은 동화 속에서 설정된 위기의 극복을 통해 극대화되며 그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행복하게 살았는지에 대해 서술하자면, <슈렉2>에서 보여주었던 너무나도 현실적인 결혼 생활과 일상의 권태로움 정도일텐데 이것으로 감동을 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로서 그 쉽지 않은 길을 감행한 시도는 좋았으나, 잡다하고 복잡한 관계와 설정에 밀려 작가가 도대체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다시는 로맨스 소설의 속편들은 읽지 않을 생각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사건이 자꾸만 떠오르고, 불면의 밤이 계속되며, 머릿속으로 그 사건을 끊임없이 되뇐다.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필요한 말을 한 것인지, 상황을 바꿀 수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다른 대처를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 46쪽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여러 단어가 입에서 맴돌았다. 윌과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 세상 어떤 사람과도 다르게 그 사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준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몸에 구멍이 난 듯 고통스럽고,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부재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 애가 어떻게 이해할까? - 126쪽

아이들은 참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없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에서 다음 질문이 나오고, 시선에서는 희미하게 탐색하는 기미가 보였다. - 127쪽

우리 모두 슬픔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길 원하고 있었다. 이 죽은 사람들의 지하세계에서 우리의 심장 절반을 거의 잃은 채, 또는 작은 도자기 항아리에 갇힌 채 지내는 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 216쪽

"그 우울한 일자리에 들러붙어서 불평이나 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모험을 하지 않고, 언니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 대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 318쪽

"있잖아, 네 아빠가 잊지 못할 말을 해줬어. `그거 한 가지로 당신을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 329쪽

"젠장, 루! 우린 모두 도넛이에요! 누나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걸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누나뿐만 아니라 조카를 보면서 평생 마음 아프지 않은 줄 알아요? 그게 어떤 건지 모르는 줄 알아요? 대답은 하나뿐이에요. 그걸 날마다 보며 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요. 그러니 뭐든 닥치는 대로 몸을 던지고 멍드는건 걱정하지 말아요." - 411쪽

"우리 모임 이름이 새 출발 서클이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항상 잃어버린 이들을 함께 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이 작은 모임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그들을 짊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짐이 아니라는 것,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를 선물처럼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억과 슬픔, 작은 승리를 서로 나누면서 배운 것은 슬퍼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도 되고 화를 내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감정을, 오랫동안 느껴도 괜찮습니다. 모두 자신만의 여정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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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6-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프터 유는 도전하지 않는걸로... ^^
 
[전자책]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4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책을 사 둔지는 오래되었으나, 그동안 e북 서재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던 녀석이다. 이제야 책을 펼쳐든 것은, 한동안 종이책을 읽느라 e북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이다. 아무래도 일단 책은 사놓고 보자는 습관은 좀체로 나아지질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 책을 사두었다는 '기억'은 하고 있었다. 샀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처음에는 서점을 구경하던 중 영화화도 되고 속편(<애프터 유>)도 나왔다고 하길래 그 정도면 괜찮은 소설인가? 생각하고 호기심을 가졌다. 마침 할인을 하는 이 소설을 영문으로 읽으려다가,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우선 국문으로 읽은 후에 영문을 보자는 생각으로 e북 책장을 뒤지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이를테면 번역된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의 경우, 일정한 임계점이 있다. 즉, 어느 부분까지 참고 읽어 나가면 그 이후부터는 술술 익힌다는 가독성의 흐름 말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커다란 바위를 언덕으로 올리는 시간은 다소 힘들고 지루하지만, 일단 정상에서 다시 바위를 굴릴 때에는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지면에 도달하는 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부터 별다른 고비 없이 그냥 쭉 읽어 나갈 수 있다. 분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휴일 하루를 고스란히 바치고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들지 못한 수고를 거쳐 끝까지 읽고 말았다.


사전에 일부러 다른 서평이나 정보를 접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중반까지는 영화 <언터처블> 같이 사지마비 환자와 간병인의 우정을 그린 내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이 책에서는 간병인이 여자였기 때문에 우정이 '사랑'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하면서. 더불어 부유한 상류층 남자와 평범하지만 가난한 여자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신데렐라의 요소를 약간은 가미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개 환자와 간병인 사이의 스토리 라인은 (1) 부유층의 잘나가던 A가 뜻밖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게 되고, (2)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다른 간병인들이 견뎌내지 못하여 자주 나가 떨어지자 또 인력을 구하게 되고, (3) 어느날 간병에 대한 경험이 없는 B가 면접을 보게 되는데, 면접관의 탐탁치 않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으로 시작한다. (4) 그런데 놀랍게도 이 B에게는 예전의 간병인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환자 A를 치유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물론 이 특별함은 A만이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 특유의 괴짜 같은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상류층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엉뚱함과 순진함 또는 무지일수도 있으며, 남다른 헌신일 수도 있다. (5) 어쨌든 몇 번의 크고 작은 실수와 좌충우돌로 인하여 둘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6) 마침내 간병인에 의해 환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둘은 이 관계를 진솔한 우정/사랑으로 승화시킨다는 패턴말이다. 이러한 패턴은 이 소설에서도 물론 적용이 된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억지 감동을 종용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기존의 패턴이 주는 예상된 감동에 한 가지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꺼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존엄사다. 루이자(B다)가 윌(A다)에게 체념보다는 희망을 갖도록,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도록, 절망보다는 행복을 느끼도록 고민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윌은 더이상 이런 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싹트게 된 사랑 앞에서도 죽음에 대한 의지를 거두지 않는 윌 앞에서 루이자는 오열한다. 그런 루이자에게 윌은 말한다. 


"난 그걸로 안 돼요. 이, 내 세상은, 아무리 당신이 있더라도 모자라. 진심으로 말하지만 클라크, 당신이 오고 나서 내 삶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에요."


사랑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심연의 절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는 아무리해도 삶을 살아가기에는 모자라다는 말을 듣는다면,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고 비루해질 것인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그것은 자신의 욕심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지금과 같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은 그에게 무의미할뿐이다. 그는 살고 싶은 것이지, 죽지 않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채식주의자>의 언니가 영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고통은 애써 묵살한 채 '생명'이라는 말로 삶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휩싸인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선택을 과연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옳다고 느끼는 바에 따라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살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고통도 절망도 모두 그의 것임에도 내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달된 고통과 절망을 딛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만이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착시는 아닐까. 사랑이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조금더 내 곁에 두고 붙잡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이 나만의 이기적인 사랑과 행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인정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오늘도 나는 당신을 몇번이고 헤아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믿는 사랑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내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당신의 그 선택을 곱씹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덧: 책을 읽고는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꼭 눈물을 흘리며 울것만 같지만, 그래도 옛 애인의 결혼식장에서 멋있게 차려입은 윌과 빨간 드레스를 입은 루이자가 춤을 주는 모습과 모리셔스 섬에서 인도양을 바라보며 푸른 해변에 누워 따사로운 햇살 아래 미소짓고 있을 두 사람의 모습은 꼭 한번 이미지로 보고 싶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도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 61쪽

"그쪽은 그쪽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겠죠. 다들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 77쪽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찌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 79쪽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윌 곁에서 걷다 보니, 고르지 못한 이음새가 나올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소스라치는지,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잣은지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 92쪽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07쪽

그렇다고 내가 무슨 섹스에 환장한 여자라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어차피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었으니까. 다만 내 마음 속 어떤 뒤틀어진 한 조각이 나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 120쪽

정원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려면 나이가 좀 들어야 한다고들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위대한 삶의 순환고리 때문이리라.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을 지나고도 새로 싹을 틔우는 식물들의 부단한 낙관주의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매년 다른 모습을 보는 기쁨, 자연이 정원 구석구석을 한껏 활용해 아름다움을 뽐내는 방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롭다. 어떤 때는, 내 결혼생활에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북적거린다거나 할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어떤 때는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 141, 142쪽

간병인 일에서 가장 나쁜 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들어 올리고 청소를 하는 일도 아니고, 아득하지만 항상 코끝에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심지어 다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질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조차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하루 종일 누군가와 딱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 기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 310쪽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 363쪽

"여기서 자다 보면 그 친구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걸어 다니고 스키를 타고 별별 걸 다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 친구의 심리적 방어막이 걷히고 진심이 다 드러나서, 말 그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 내가 같이 앉아 있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나아질 리 없으니까 해줄 말이 하나도 없어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쥐고 사는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압니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만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 414쪽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 416쪽

이렇게 산다는 건 지치는 일이에요. 그 피로감은 AB가 결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정말로 그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도저히 볼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거기 함께 있어주는 거에요. 그 사람이 옳은지 당신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곳에 꼭 함께 있어주어야 해요. - 483쪽

나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멀어지는 그를 다시 불러오려고 키스를 했다.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우리 숨결이 섞이고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의 뺨에서 소금으로 맺히도록 키스를 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그의 아주 작은 입자들이 소화되고, 삼켜져서, 살아 있는 채로, 영원히,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 몸 아주 작은 한 조각까지 그의 몸에 밀착하고 싶었다. 내 의지로 그에게 무언가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내가 느낀 생명의 조각 마지막 하나까지 그에게 주어 어떻게든 살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없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 두려운 내 마음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쳐버릴 권리를 갖게 되어버린 거에요? 나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일에 발언권이 전혀 없는 거냐구요? - 490쪽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사는 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들을 당신에게 준 사람이 나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일말의 고통을 던 느낌이에요. -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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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0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다가 말았는데, 이야기의 분량이 조금이라도 적었더라면 끝까지 읽었을 겁니다.

붉은눈 2016-06-21 09:46   좋아요 0 | URL
네,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좀 지지부진하게 늘여가는 부분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저는 후반 부분이 더 좋았는데, 평이한 서술이라고는 해도 거기까지 읽기가 다소 지루하기면도 있구요. 에필로그도 쓰다가 만듯한 느낌도 들고 그렇습니다. 괜찮긴 한데, `간만에 읽은 로맨스 소설치고는...` 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겠네요.

희망여행 2016-06-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세포가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읽기에도 전개가 뻔한 책이었지만 생명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해 볼만 하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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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은 물론이고, TV에서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지도 꽤 된 것 같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언론사(방송사와 신문사)의 뉴스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예전처럼 뉴스를 보거나 듣기 위한 시간을 고스란히 남겨두지도 않게 되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고 뉴스를 검색하고 그것에 대한 짤막한 느낌을 정리하며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뉴스에 대한 책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을까만은, '나쁜 뉴스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현 상태를 한번 들여다 보고 싶은 생각에 이 책을 골랐다.


부제가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제목이 대답해준다. '나쁜 뉴스'이니까. 뉴스에 대한 불신은 고스란히 해당 언론사로 연계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는 희망없는 이들을 버리고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도 충분히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맥락과 다른 의견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9시 뉴스에서, 종이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점점 돌아서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페이스북에서 미디어오늘의 기사들을 받아보고 있지만, 미디어오늘이라는 언론사가 매체비평지인지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언론을 취재하는 언론사' 미디어오늘의 기자인 저자가 국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의 원인을 해부한 책이다. 그렇기에 기자와 대중 사이에서 위치하여 뉴스에 대한 양방향적 고민을 제기할 수 있다.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고(기레기와 찌라시 전성시대), 뉴스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며(뉴스란 무엇인가), 뉴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갖는 방법을 제안하고(나쁜 뉴스 가려내기, 초중고급편), 앞으로 뉴스의 미래에 대한 과제를 제시한다(뉴스의 미래, 짐승 뉴스 전성시대).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 본질, 관점, 과제가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이 있고, 왜곡된 언론사들의 기사와 침묵이라는 횡포를 비판하는 다른 매체(기사나 팟캐스트)를 보고 들었다면 이미 알고 있거나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하다. 가려웠던 곳을 긁어준다기 보다는 그 가려움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정도? 


초반에는 연예 뉴스를 통해 정부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감추려 한다는 음모론, 정부에 대한 조선과 한겨레의 시각 차, 바이라인(by-line)없는 낚시성 짜집기와 어뷰징 기사의 등장 이유, 언론이 구사하지 못하는 드라마(미생, 송곳)의 언어에 대하여 다룬다. 이어서 뉴스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상과의 차별성을 그 본질로 제시한다. 하지만 불분명한 연결고리 제시, 기사의 청탁, 데스크의 보도 누락과 같은 현실적인 한계로 인하여 뉴스가 뉴스가 아니게 되는 상황을 첨부한다. 특히 나쁜 뉴스 가려내기에서는 영화 <내부자들>이나 세월호, 위안부 문제가 발발했을 때의 여론을 마사지하는 물타기 수법("문제를 제기한 놈이 나쁜 놈이다", "돈 더 받아 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다 똑같은 놈들!", "지들끼리도 싸우는 걸 보니 뭔가 있구먼!"), 반세기 계속되어 온 '빨갱이' 프레임 등을 사례화 유형화 하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한다.


나쁜 뉴스는 기레기 기자, 데스크, 정부가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기도 하지만, 기업이 배후를 조정하는 데에서 발생된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론산업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각 언론사의 지배구조를 통하여 그들이 풀어내는 뉴스에 대한 관점과 의도, 편향성을 짚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후반부에서는 언론산업을 통하여 언론사의 지배구조, 뉴스 전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유통에 대해서 다룬다. 광고라는 스폰서를 피할 수 없는 언론사의 현실, 이미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을 중심으로 재편된 유통 구조를 설명하면서 오마이뉴스, 국민TV, GO발뉴스, 뉴스타파와 같은 대안언론들이 그 영역을 더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언론사가 어뷰징에 집중하고 트래픽을 강조할수록 멀쩡한 기사를 쓰던 기자들도 클릭 수에 얽매이게 된다. 열심히 취재해서 쓴 심층 취재 기사는 조회 수가 별로 안 나오고, 대충 베껴 쓴 기사의 조회 수가 폭발하면 허무해진다. - 55쪽

언론이 약자들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이 사회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가진 자의 것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가치를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할 필요성이 적다. 이미 즉물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 세력의 언어는 매우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예컨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서울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인 상황을 설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보수의 언어는 깔끔하다. 불법 점거, 이 한마디면 된다. 실제 조선일보는 이런 언어로 사안을 설명했다. 보수 언론들은 2015년 11월에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를 묘사하며 `폭력` `불법`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불법과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에 기초한 매우 명료한 설명이다.
반면에 진보의 언어는 복잡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점거 농성을 하는 상황이 왜 불법이 아닌 합법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왜 이들이 불법을 각오하고라도 점거를 할 수밖에 없는지 또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귀에 잘 안 들어온다. - 63쪽

기자에게는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공감하고 분노하길 바라며, 자신의 기사가 널리 회자되어 군중이 벌떼같이 일어나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자신의 기사가 `펜의 힘`을 갖길 바라는 것이다. - 73쪽

그러나 언론이 `팩트를 추구해야 한다`는 명제와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명제는 분명 다른 말이다. 팩트는 말 그대로 어떤 사건에 대한 `5W1H`, 그리고 이 정보에 살을 붙인 또 다른 사실관계를 뜻한다. 이때 사실관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같은 팩트도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기사나 방송에서 보는 뉴스들은 현실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사실이다. - 125, 126쪽

반면에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은 2015년 9월 21일 열린 `중앙 50년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아젠다 키핑(agenda-keeping)을 강조했다.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는 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을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JTBC는 200일간 세월호 참사를 메인 뉴스로 다뤘고 4대강 문제 역시 반년 가까이 보도했다. 대중들에게 중요한 의제를 던지는 `세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의제가 되도록 만드는 `키핑`이다.
이 키핑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은 언론과 미디어가 강조하고 싶은 의제나 정보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이들을 재구성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뉴스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틀을 뜻한다. - 128, 129쪽

기사는 가설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가설이 팩트를 바탕으로 잘 엮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사 안의 문장을 무작정 사실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문장을 해체해 원인과 결과로 나누고, 인과관계의 끈을 이어 주는 조건이 합리적인지 살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답은 텍스트 안에 있다. - 148쪽

정치학에는 `Two faces of power`라는 개념이 있다. 권력에는 두 가지 속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언론의 힘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언론과 미디어가 어떤 뉴스를 생산했느냐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진짜 미디어의 힘든 보도하지 않는 데 있다.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흔히 명시적인 힘에 집중돼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남을 강제하는 `명시적` 권력은 눈에 잘 띄는 힘이다. 언론도 이런 명시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이슈를 의제로 설정하고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사안을 인식하도록 보도하는 힘이다.
반대로 `묵시적` 권력도 있다. 바로 침묵의 힘이다. 이는 사회 지배 계층에게 불리한 이슈는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라 부른다.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결정한다`는 뜻이다. 언론은 이런 묵시적 권력을 가진 대표적 집단이다. 즉, 언론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언제든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 - 151, 152쪽

이제 뉴스는 고양이와도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는 유통이 생산을 장악한 뉴스 시장의 현재를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일수록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뉴스를 보는 통로는 스마트폰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가장 큰 특징은 말 그대로 모바일(mobile)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을 투자해서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습관적으로 아침 신문을 펼치거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9시 뉴스를 보는 어른들도 있지만, 젊은 세대는 출퇴근길이나 이동 중에 뉴스를 소비한다. 뉴스는 정해진 시간에 챙겨 보는 고정적인 일거리가 아니라 짬 나는 시간에 소비하는 여러 가지 콘텐츠 중 하나가 되어버린 셈이다. - 292, 293쪽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등장한 1세대 대안 언론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콘텐츠는 신선했으나 유통 경로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대안 언론으로 시작한 오마이뉴스, 한겨레를 더 이상 대안 언론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세대 다안 언론은 대부분 포털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포털의 뉴스 경로에 유입되지 못한 대안 언론들은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삐걱거렸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을 계기로 등장한 대표적인 대안 언론인 뉴스타파와 국민TV의 한계점도 유통이다. 뉴스타파는 유듀브와 시민방송 RTV로 유통되고, 국민TV는 유튜브와 팟캐스트 사이트 팟빵이 주요 유통 경로다. 대부분의 뉴스 소비가 포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기성 언론에 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좋은 보도를 내놓아도 `보는 사람만 보는` 방송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구조다.
결국 대다수의 대안 언론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통을 확장하는 모험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 324,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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