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 최신개정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이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가 그의 책 <디지로그>를 막 읽고 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을 보고는 다소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어령이라는 분도 별 수 없는지 이제 늙어서는 결국 종교로 회귀한다는 결과에 대한 한탄이나 노령의 나이지만 당당하게 끝까지 이성의 날카로운 끝자락에서 첨병의 역할을 하실 것 같은 분에 대한 알 수 없는 실망감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영적인 입장 변화를 굳이 책으로 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을까, 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이 책을 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읽고 나서 실망하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종교를 갖는 것에 반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왠지 그의 이전 책들을 읽으며 탄복했던 유연한 사고와 정교한 언어의 향연을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잠시 해외에 머무르던 중 우연히 그 지역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서가를 발견하였다. 며칠 간의 e북 독서에 눈이 피로하여 종이책이 너무도 반가웠지만, 한국어 책들 중에서 읽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가 교토대학교에서 홀로 지내면서 느꼈던 경험과 생각들을 적은 1부, 딸에게 발생한 문제들을 겪고 해결해 나아가면서 자신이 세례를 받게 이유를 설명한 2부, 한국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3부, 딸의 편지와 회고, 간증을 수록한 4부, 인터뷰를 수록한 5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1부에서만 예전의 이어령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영성은 경험이다. 아주 철저한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경험하지 않은 영성은 맹목적 추종일 뿐이다. 하지만 현 시대에 이성과 지성의 습득을 우리는 개인적 경험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 보다 시대적이고, 일반적이며, 사변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 책에서는 이것들을 혼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이것도 '통섭'인가?). 그의 표현대로 ‘예수쟁이’가 된 그의 글은 지성에 반하는 영성을 부정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맹목적 신앙에 대해 경고하고는 있지만, 이 개인적이고 회고적인 글은 지난 수십 년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글을 써왔던 한 이성적 인간의 회고적인 신앙간증일 뿐이다. 

물론 그의 간증을 비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는 단지 경험한대로 느낀대로 글을 쓴 것이며 그가 경험했던 아프고 놀라운 고통과 기적의 순간들 속에서 그가 느꼈어야 할 인간적 한계와 고뇌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재를 말하며 과거를 떠올리지만 그의 과거는 다시 그가 종교를 찾게 된 현재와 연결이 된다. 인생이라는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다시 맞추어 가듯 지금에 와서 생각보니 과거 순간들은 모두 연결되는 의미였던 것이다. 다만 독자로서 아쉬운 점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기 위하여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너무 많이 붙였다는 것이다.

70이 훌쩍 넘은 노인네가, 그것도 인문학자로서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개신교를 그렇게 비판했던 그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 많은 이들의 관심꺼리가 되었나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부터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나 실망에 대응하기 위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러면서 내내 자신은 지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지성과 이성을 갖추어 그것을 넘어서는 영성에까지 의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뇌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니체나 카뮈에 매료되어, 허무주의, 실존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성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않았겠지요" 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다보니, 대부분의 페이지에 녹아 있는 '나는 이성과 지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이런 주장은 흡사 자기변명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냥 영성에 관한 책을 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끝까지 이성과 지성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탑을 허물기 싫어서였을까?

제목인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것이 ‘전환’이 아닌 ‘확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글을 읽다보니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홀로 자신으로 침잠하는 것은 평면상 하나의 작은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더 깊은 고뇌와 성찰로 들어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가 제목에서부터 지성과 영성을 이분화 해놓았으면서 이 둘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지성을 기반으로 영성에 의지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냥 개신교 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글을 썼다면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처럼 좋아하는 신앙 에세이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고 황혼이 땅으로 내려앉으면 빛과 어둠의 경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는 그레이존의 노을이 뜹니다.”라는 그의 말을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혼미함으로 이해하려 한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 13, 14쪽

멕시코 감독이 만든 영화 <21그램>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인간 영혼의 무게는 라면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스 병원에서는 임종직전의 말기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 온즈(35.gm)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2년 반 뒤에도 임종직전의 다섯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보았더니 역시 영혼의 평균 무게는 1온즈(28.4gm)였다는 겁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봅니다.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나는 어깨 위의 쌀 한 자루 무게와 내 머릿속 영혼의 무게를 의학실험을 하듯이 예민한 저울로 번갈아 재고 있었던 겁니다. 분노가 치밀었지요. 그것이 영혼을 저울로 달고 있는 과학자들을 향한 것이었는지 너무나도 빈약한 내 영혼에 대한 것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웃음이 연민이 되고 연민이 분노로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 23, 24쪽

무신론자들도 기도를 드린다는 모순 어법을 그때 찾았습니다. 쌀 한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그때 처음으로 저울질해보았습니다. 빛의 무게, 향기의 무게, 공기의 무게, 영혼의 무게는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 25, 26쪽

나는 나무들을 자유로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가 있듯이 이국의 모든 풍경과 뉴스와 그 이방의 사람들을 아무 부담 없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토생활을 하는 지금의 내 행복입니다. 도구가 아닌 존재의 나무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나하나의 이파리에 묻어나는 여름과 그리고 조금씩 물들어가는 겨울의 죽음들이 보입니다. - 57쪽

바람이 불면 미친 듯이 나무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나무 이파리 하나하나가 말갈퀴처럼 흔들릴 때 비로소 나무는 무엇으로도 풀이할 수 없는 나무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난 그때부터 새로 만나는 사람과 새로 구한 물건들로 나에게도 개목거리의 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쓰레기통을 비우고 또 비워도 하루치씩 온갖 생의 찌꺼기들이 쌓여갑니다.
미구에 쓰레기가 될 물건들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의 끈입니다.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리워 치와와 같은 애완용 개목걸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저 많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 57, 58쪽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것을 견디지 못하지요. 그래서 무엇인가 의미를 채우려고 기를 씁니다. 일기를 쓴다는 것, 그것도 결국 빈 종이의 하얀 공백을 문자로, 의미로 메워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에이하브 선장이 흰 고래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 평생 목숨 걸고 쫓아다닌 것은 작가가 원고지의 흰 공백을 죽이기 위해 일생 동안 글을 써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평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예리한 펜의 창으로도 그 흰 공백의 심장을 꿰뚫을 수 없었기에 나는 매이 ㄹ공일의 그 바다에서 익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59, 60쪽

하늘에서 축복처럼 내려주신 눈 내리는 교토의 벌판을 바라보면서 헛기침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봅니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아무리 부정해도 내 가족 내 고향 말고 은둔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할퀴고 침뱉고 아우성쳐도 눈도 한국말로 내리는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꽤 잘난 체하는 컨실리언스(통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도 토포필리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가. 모든 생명체를 관통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깊은 애정. 가위 바위 보의 문명론을 탈고했으니 내 DNA에 찍혀진 토포필리아에 내 몸을 맡겨야 한다.
한국말로 내리는 설경을 보기 위해서 어서 짐을 싸자. - 113쪽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 속에 삽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신 그 지적들을 거두어 가지 마시기를 진실로 기도합니다. - 122쪽

제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옛 바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속에 묻혀 있던 영성이 이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술가적 기질과 초월적 영성의 기질이 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 152쪽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 152쪽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에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153쪽

로맹 롤랑(Romain Roalland)은 인생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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