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소설은 <퀴즈쇼>와 <살인자의 기억법> 밖에 읽지 않았다. 얼마전 그의 산문 <보다>를 다시 한번 읽으면서 문득 그의 다른 소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예전부터 익히 들어 익숙한 제목의 책부터 구해 읽었다. 


처음에는 소설 속 화자인 동규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증상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이들은 동규와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인 제이만은 동규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상황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과 연결시키며 읽었다. 유년시절 두 소년의 깊고 유일한 관계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규가 제이와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느낀 이후,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제이가 자신의 생각을 매번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불통 또는 오해의 상황에서 동규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시도를 접은 채, 제이가 예측한 것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동규에게서 선택적 함구증이 사라지고 비로소 언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둘 사이의 소통은 말을 하지 못할 때보다 원활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였던 친구는 점차 이질적인 둘로 분리된다. 동규의 이사로 연결의 끈이 점점 얇아져만 가는 둘 사이에 예전에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추억의 실존이 무너져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을 주워기른 엄마에게 버림받은 채로 동네를 떠나지 않고 있는 제이를 방문하는 동규는 두 개의 거울을 마주놓은 채 그곳을 지나가는 악마를 잡겠다는 제이의 낯선 행동을 보게 된다. 이 황당하고 부질없는 행동은 동규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침내 몰래 동규를 미행하던 어른들에 의해 제이는 그가 악마를 잡기에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던 날에 붙들려가고 만다. 본의 아니게 밀고자가 되어버린 동규는 그렇게 유년시절과 제이로부터 단절되어 버린다.

  

소설의 중반쯤으로 접어 들었을 때에는 제이가 독방에 갇힌 이후 얻게 된 신비한 깨달음 혹은 감각(그는 사육용 개들을 구하기 위하여 개장수들의 자동차 타이어를 찢다가 걸려 보육원 독방에 갇히게 된다)이 바로 사물이 갖는 느낌을 읽을 수 있는 설정이어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은 더이상 동규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부터 펼쳐질 제이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동규-제이, 사물-제이의 소통관계가 매우 닮아 있다. 동규가 말을 하게 되면서 시들어진 둘의 소통이, 제이의 신비한 감각을 통해 재편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동규와 제이가 갖고 있던 문제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사물은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제이는 그 사물의 말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제이가 동규를 잘못 이해했던 것과 동일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제이는 큐브를 부수어버림으로써 그 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목란을 빼낸다. 그는 큐브의 목소리를, 진동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들은 것이 정말 큐브의 목소리였을까.


목란을 매개로 하여 제이를 다시 만나게 된 동규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연상시키며 폭주족의 리더가 되어 있는 제이를 흠모하는 한편 질투하기 시작한다. 제이를 좋아하는 목란에 대한 양가적 감정 또한 동규의 이러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예전에 하나였던 친구는 이제 점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규는 막상 제이의 곁을 떠나지도 못한 채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이를 저버리게 된다. 삼일절 폭주에서 경찰에 그의 행방을 알리고 만 것이다. 이후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동규는 제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한다. 마침내 대교 위에 설치된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그대로 돌진하다가 제이는 대교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제이의 신비함은 그 장소에 있던 많은 이들이 그가 난간 밖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소설의 말미에는 화자가 동규에서 작가로 바뀐다. 작가는 우연히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제 인터뷰하면서 소설을 구성한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부분이 사실인지 아니면 작가의 허구적 장치인지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세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첫부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이 부분은 알라딘에서 미리보기로 볼 수 있다). 


1부가 시작되기에 앞서 작가는 마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내려온 밧줄을 타고 올라간 어린 조수의 몸뚱아리가 이리저리 흩어져 땅에 떨어진다. 그것을 양동이에 담은 마술사는 다시 조수를 살려낸다. 이 마술에 제대로 속은 어린 황제는 옆에 있던 내시를 토막내어 다시 살려내라 한다. 참혹한 광경을 참지 못한 마술사는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자 밧줄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버린다. 마술사는 밧줄만 남긴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 짧은 이야기의 말미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신비로움이 사라져버린 너무나도 사실적이면서 잔혹한 현실 속에 남겨진 우리는, 그리고 동규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 말고도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 26쪽

말을 못하는 나와 그런 나를 이해하는 제이 사이에는 다른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굳어가는 말, 입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한 채 종유석처럼 굳어가는 그 무엇을 제이는 즉각 알아차렸다. 제이는 나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어서,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제이가 내 모든 심증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세 번 안에는 알아맞힐 수 있었다. 가끔 제이가 바보처럼 엉뚱한 예측을 계속하면 내 쪽에서 의지를 접거나 내가 원했던 것을 제이가 원하는 쪽으로 바꿔치워버렸다. 그랬다. 자신을 속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 33, 34쪽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거에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73쪽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 73쪽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 134쪽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나무를 베기 전에 나무에게 용서를 구했대. 그들은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던 거야. 나무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들은 나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돼. 평생 보던 나무를 없앤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아. 그들에겐 화폐가 없었어. 사물과 그들은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었어.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의식이 너의 참인식을 가로막았고 그 때문에 너는 큐브를 느낄 수 없었을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음의 눈을 열고 주변을 깊이 살펴. 사람들이 하는 뻔한 말을 믿지 마. 그래야 너 자신을 구할 수 있어. 넌 소중하니까." - 138, 139쪽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존재하지 않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그 순간 제이가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시간이 바다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 160쪽

어린 수컷들은 가슴을 내밀어 용기를 과시하고자 한다. 용기,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일소에 부치는 허세에서 온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허세와 광기를 구별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광기의 제이가 그들 위에 설 수 있었다. - 160,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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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전성철 지음 / 아이지엠세계경영연구원(IGMbooks)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인 전성철은 지금과 같이 미국로스쿨이나 미국변호사가 유행하기 훨씬 전에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고 파트너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고 있다. 우리 법조계에 이른바 미국변호사의 붐을 일으킨 개척자 정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안녕하십니까 전성철입니다>와 함께 대학교 다닐 때 읽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책 표지가 다소 낯설어서 내가 읽었던 책이 맞는지 잠시 고민을 했었다.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면서 확인해봤더니 10년이 지나서 다시 개정판이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나이에 이제와서 또 이 책을 읽을 이유를 딱히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미래에 대한 비장한 다짐을 했던 내 궁상맞은 대학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추억을 되새길겸해서 다시 책을 펴보았다(별 것으로 다 추억을...)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은 그의 고난과 역경, 성공에 대한 일종의 회고를 담고 있는데, 책의 구성도 그의 삶의 족적을 시간적 순서대로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 '너무나 야무진 꿈'에서는 리드&프리스트(Reid&Priest)라는 미국의 로펌에서 4년만에 최단기이자 최초로 파트너가 된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면서 대학생때 그가 '법적인 사고'에 매료되고 그로 인해 로스쿨에 도전하기 시작한 순간을 그려낸다. 두 번째 이야기 '불행으로 위장된 축복'에서는 무작정 미네소타에 자리를 잡고 여러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로스쿨 입시에 도전하여 마침내 입학하게 되는 이야기를, 세 번째 이야기 '로스쿨 이방인'에서는 로스쿨 유일의 외국인이자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미국인들 틈에서 인정받으며 성공적으로 학업을 이어 나갔는지를 그려낸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성적이 그리 출중하지 않던 그가 어떻게 우수한 미국인 학생들도 취업하기 힘들다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좌절을 딛고 자기만의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여 로펌의 파트너로 성공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전에 내가 정말 이런 책을 읽고 미래를 꿈꾸었나?'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내 기억속에는 긍정적으로 기억되어 있는, 스무 살의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지금에 와서 다시 같은 책을 접했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만큼 삶에 대한 생각이나 시선, 내가 체감하는 사회 분위기가 달려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공이라는 것의 결과가 아닌 과정도 살펴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말을 빌려 그가 이 책에 언급해 놓은 성공을 향한 지난날의 경험이나 방법은 내 입장에서는 '나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저자는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매우 크게 성공한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지금의 내 관점에서 보면 그 성공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마냥 긍정적인 평가만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한 권의 책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읽게 된 <법적인 사고(Legal Reasoning)>라는 책에 매료되어 법적인 사고를 가르쳐주는 미국 로스쿨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그가 느낀 운명적인 순간을 제3자인 내가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 권의 책이 운명처럼 다가왔고 법적인 사고를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 로스쿨을 가야겠다는 쓴 것은 지난날을 너무 감상적으로 회고한 단편적인 도식화는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곳곳에 언급해 놓은 "미국에서도 변호사는 인기가 매우 좋은 직업이다. 힘들긴 해도 자유직업이고 사회적 지위와 상당한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1972년 한국은 아직도 가난하고 닫힌 나라였으며 대학 졸업자의 대부분이 취직을 못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꿈이었다", "다행히 번역병으로 일하게 되어 영어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노력하면 내 시간도 제법 만들 수 있었다", "군에 입대한 지 1년 정도 지난 후 미국의 형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의 영주권을 신청해주십사 하는 편지였다"라고 언급한 부분을 보면, 그가 미국변호사를 도전하게 된 계기나 배경에는 법적인 사고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소 세속적인 욕망을 생략한 채 법적인 사고에 대한 순수함만을 강조한다는 점은 과거 자신의 선택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나답게 사는 것'을 강조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그로 하여금 미국 변호사가 되게끔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라는 굳은 신념을 느끼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성공은 순수한 '꿈'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적 의미의 입신양명과 자아실현이 결합된 것으로 보였다. 서울대 출신의 우수한 인재인 그는 졸업과 동시에 굴지의 피혁회사에 취업을 하였다. 그렇게 1년을 다니다가 미국 회사의 지사에 있는 선배의 제안에 이직을 한다.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조건임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로스쿨을 준비한다. 여기에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의 심리가 담겨 있다. "이런 달콤함에 만족할 수 있는가, 나의 미래가 이런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가 매료되었다던 '법적인 사고'라기 보다는 전통적인 '입신양명'의 관념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입신양명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것에 뛰어든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내 관점에서 그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면이 많아 보였다. 꿈을 찾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지만, 그가 작고 사소한 일을 끈기 있게 해내는 장면을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단돈 700달러를 들고 미네소타에 도착한 그는 '난킹(남경)'이라는 중국식당에서 버스보이(bus-boy)라 불리는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육체적 피로로 3일을 앓다가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다. 생활을 해야 하고 시험준비 할 돈도 필요한 그는 이어서 빵공장에 취직을 한다. 이 일도 얼마 하지 못하고 발전소 야적장 경비를 한다. 8시간 서서 일하는 육체노동보다는 야간 근무가 쉽고 시간활용도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것도 석 달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라며 택시 기사를 한다. 그렇게 3주 정도 일을 하다가 접촉사고를 내서 택시 기사도 그만 둔다. 그리고 은행에 취직하고, 저녁때는 와이키키라는 식당 웨이터로 취직하고, 미국인 친구와 창업하기로 하다가 우체국에 취직하고... 이런 식이다. 물론 나 역시도 성실함과 노오력만을 강조하는 꼰대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건 좀 심하다 싶다. 큰 꿈을 위해서 이런 사소한 것들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택시기사에서 CEO 1만명의 스승이 되기까지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가슴 벅찬 이야기"라는 카피의 정체는 무엇인가.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대목이다. "나는 벌어놓은 돈도 물론 없고 도와줄 부모도 안 계셨다. 그러니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만일 공부할 생각이 있으면 우선 아내가 있어야 했다. 이른바 '마누라 장학금'이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내 눈을 의심했다. '마누라 장학금'이라고 하셨나? 그러면 자기는 공부하고 마누라는 돈 벌면서 자기 뒷바라지를 하라는 것인가? 70년대 한국의 삶의 방식이 다분히 가부장적이었고 가장의 성공에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노골적인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들 부부사이에 일방의 희생에 대한 어떠한 의견의 합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남편의 성공을 위해 아내가 희생하는 일이 지금 시점에서도 훈훈한 미담으로 전달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간행물 윤리위원회가 지정한 '청소년 권장도서'란 말이다.

기억이라는 것, 회고라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추접한 것은 감추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려는 습성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빗댄 조언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조심하고 살피고 삼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름 20대때 좋은 기억으로 읽었던 책을 이제와서 부정하거나, 그의 성공과 업적을 비난하거나, 그의 조언에 대해 비아냥 대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개정판이라고 한다면 현 시점의 젊은이들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재편집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그가 강조했던 이거 한 가지만은 남겨두자. 바로, 나답게 사는 것. 그의 성공 스토리에 매료될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 없이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이 아닌) 개인적 성공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덧: '국제변호사'라는 용어는 잘못된 용어임이 그동안 수차례 언급되었다. international 하게 변호할 수 있는 국제변호사란 없다. '미국변호사'로 고쳐야 한다. 여전히 70년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법서사', '행정서사'와 같이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는 개정판에서 고쳤어야 한다. "~할 군번은 아니다"라는 표현은 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대한 지 몇 십년이 지나셨을텐데, 아직도...


그러면서 삶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답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화려한 성공도 해보고, 참담한 실패도 경험하면서 이런저런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다 본 황혼의 남자의 마음속에 찾아온 깨달음이다. 마치 새벽에 동이 터오듯이 서서히 조용히 마음속을 확실하게 점령하게 된 그런 믿음 말이다. - 8쪽

마지막 날쯤 될 때 결국 이 모든 질문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착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결국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답이 결국 내 마음을 결정지어주었다. 나는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기다리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편안하고 미래가 뻔한 삶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힘들더라도 꿈을 가지고 고생하며 노력하며 도전하며 살아야 행복을 느끼는 스타일이란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그것이 나 아닌가? 나는 행복보다는 보람을, 평안보다는 도전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면서 커오지 않았는가? 결론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는 가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사는 법이다.’ - 82쪽

나는 인생을 살면서 이 위장된 축복의 의미를 너무나 여러 번 느꼈다. 요즘도 나는 내가 특별히 게으르지도 않고 나쁜 마음도 없었는데 일이 잘못될 때면 언제나 거기에 위장된 축복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코 절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진지하게 나에게 닥친 고난을 감당하고자 노력한다. - 89, 90쪽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내가 그런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데도 어떤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뜻이 있고 도리어 무엇인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계기라는 것이다. 도둑질을 한다든지 남을 해친다든지 마약을 한다든지 하는 나쁜 짓을 한 결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은 예외로 치자. 그러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나쁜 일들은 대부분의 경우 미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된다. - 127쪽

나는 로스쿨에 다니면서 체르니 교수의 이 말을 얼마나 여러 번 떠올렸는지 모른다. 정말 지독하게 맞는 말이었다. 로스쿨은 머리를 뜯어고치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은 로스쿨이 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로스쿨에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법을 찾는 법을 배울 뿐이다. 로스쿨을 졸업할 즈음에 학생들 중 실제 물권법, 채권법 등 각 분야의 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충 골격 정도 밖에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요하면 법을 찾으면 되기 때문에 법에 대해 모르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로스쿨은 쉽게 이야기해서 3년 동안 머리를 수술한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바꿔 끼우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법적인 사고를 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수술하는 것이다. 그곳이 로스쿨이다. - 173, 174쪽

나는 이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에 한 달쯤 노출되고 나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체르니 교수가 우리의 머리를 ‘뜯어고친다’고 한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생존을 위해 머리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분석적, 논리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가혹한 질문에 즉각즉각 두뇌 회전을 극대화하여 순발력 있게 논리적으로 답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매일매일 3년 동안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으면 어지간한 사람도 강심장이 되면서 머리도 뜯어고쳐진다. 그러지 못하면 한마디로 살아남지를 못하는 것이다. - 182, 183쪽

그렇다면 ‘변호사 같이 쓴다(write like a lawyer)’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마디로 한다면 단어 수를 줄인다는 의미, 즉 할 말은 다 하지만 최소한의 단어로 한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을수록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고 의미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 204, 205쪽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확실히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다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 화려한 것, 영광스러운 것, 빛나는 것, 그 모든 것의 뒤안에는 엄청난 고통과 눈물과 땀이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 218쪽

나는 이 세상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공짜 같은데 자세히 보면 절대 공짜가 아니다. 나는 인생은 진지하게, 열심히,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219쪽

나는 내 적성에 맞는 길을 택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토록 희열과 만족을 느낀다면 나는 무조건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또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나는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삶을 신나게, 경쟁력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자기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불행히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기의 적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 사는데, 그것은 많은 경우 그것을 알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은 데서 온다. -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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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산문은 대체적으로는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실생활과 관계된 생각이나 예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다수의 짧은 글을 모아놓은 형식이어서 소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맥락을 잡고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쉬어도 무방하다. 반면, 각각의 에피소드는 즐겁게 몰입하여 읽게 되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조각들을 모은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단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하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작년에 이미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제목을 보고 '분명히 읽은 책이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라며 스스로 했던 질문과 그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답답함이 다시 책을 펴게 만들었다(혹시 예전에 메모해놓은 것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감상 없이 밑줄 그은 문장 몇 줄을 모아놓은 것 뿐이었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의 글들은 각 부나 장마다 포괄적인 제목을 달아 두고는 하는데, 이 책에는 각 부에 해당하는 제목이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4부로 나눈 이유가 유사한 주제의 모음인지, 글을 써간 시간의 순서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후반보다 초반에 드러난 사건(저자의 초등학교나 대학 또는 대학원 때의 에피소드)이나 예시가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볼 때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글을 엮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하긴, 2년 남짓 쓴 글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모아진 글을 또다시 유사한 주제나 시간의 순서로 분류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구성이야 어쨌든 이 책에 실린 글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하루도 안되는 시간동안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가독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앞서 산문의 장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독서방식에 대한 장점 뿐만이 아니라, 산문 그 자체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비유나 암시 없이 작가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을 찾으며 반가워하거나 새로운 시각에 공감하며 즐거움을 얻는 일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혜택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초반에 집중이 잘 되어서였는지 1부와 2부에 있는 글에 공감이 많이 갔다. 1부에는 상대적으로 부(富)나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태와 이를 관리하고 있는 부유한 이들의 관계를 마르셀 에메의 소설에 빗대어 설명한 '시간 도둑',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가 약탈적 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모된 세태를 이야기 하는 '자유 아닌 자유', 무소유라는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도 부자들의 옵션이 되고 있다는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이제는 일반화 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비정규 노동이라는 현상을 다룬 '숙련 노동자 미스 김'이 그러하다.


한편, 책의 제목인 <보다>에 걸맞게 많은 에피소드에서는 영화를 통한 사회의 단상들도 많이 눈에 띤다. <설국열차>에 탄 가상적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우리 사회상을 해부한 '머리칸과 꼬리칸', <신세계>에 드러난 두 아버지를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연계시킨 '부자 아빠의 죽음', <비포 미드나잇>과 저자 자신의 옛 추억을 연계하여 사랑을 대하는 20대와 40대를 회고한 '부다페스트의 여인',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심리적으로 분석한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필요해', <마스터>에 빗대어 부모의 경계를 벗어나는 자녀의 성장을 설명한 '나쁜 부모 사랑하기', <그래비티>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펼쳐낸 '어차피 죽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을 통해 <로마 위드 러브>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아마추어의 한계라는 메세지를 극복을 설명한 '샤워부스에서 노래하기', 저자의 단편소설 <비상구>가 영화화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미래의 영화를 표절하다', <관상>을 통하여 인생에 있어 자기실현적 암시 필요성을 이야기 한 '앞에서 날아오는 돌', <변호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를 통해 가족의 미래상을 짐작해본 '아버지의 미래' 등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장면장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그것 또는 유사한 묶음들을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의 심리로 연결시켜나가는 탁월함에 감탄을 하며 책을 읽었다.


덧: 책을 다 읽고 재미 삼아서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쳤던 부분과 비교를 해봤다. 방금 막 책을 다 읽었음에도 놀랍게도 예전에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해 놓은 것 중에서는 '이런 글이 있었나?'할 정도로 생소한 문장들이 있었고, 이번에 반정도는 예전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라는 동일인이 같은 글을 읽고 있지만 그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공감가는 부분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나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밑줄을 그었던 문장에 이번에 또 밑줄을 그은 경우이다. 이것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함없이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로,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단상들이 아니라 일관되게 나를 이끄는 이 글들을 잘 간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뉴욕에서 유행하는 ‘폰 스택(Phone Stack)’ 게임을 소개했다. 룰은 간단하다. 고급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할 때 모두의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는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것이다. 이 게임은 얼핏 보기에는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대화와 식사에 집중하자는 건전한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파워 게임의 면모도 있다. 더 오랜 시간 스마트폰에 무심할수록 더 힘이 강한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들이 스마트폰으로부터 멀어지는 사이, 지위가 낮은 이들의 스마트폰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사회적 약자는 ‘중요한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의 타격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 12, 14쪽

자본주의사회의 마케팅이라는 것은 고객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면 고객에게 이미 있을 것이다. 아직 안 샀다는 것은 아직 그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18, 20쪽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후예들은 원주민의 땅을 차지할 자유를 찾아 총을 들고 서부로 향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자유가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라면 서부로 향한 이들의 자유는 약탈의 권리를 의미한다. 자유가 이렇게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한 사회에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세계관이 진리가 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가치가 ‘자유’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 20쪽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57, 58쪽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 사십대에 다다른 셀린(줄리 델피)은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이번에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건가요?"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나는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녀를 만나리가는 확신도 없이 무작정 부다페스트행 기차레 다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행동은 스물여덟 살에게나 어울린다. 그럼 사십대의 남자에게는 무엇이 어울리나?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극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영화 보기, 달콤쌉싸름한 회고담 늘어놓기, 그러다 혼자 괜히 쓸쓸한 기분에 젖어 맥주 마시기, 그리고 글쓰기.
이십대는 몸으로, 사십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이제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찍을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내가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었을 또다른 삶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 67, 68쪽

서연은 제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바꾸려는 여자다. 그래서 늘 자기를 속인다. 옛 남자를 찾아간 이유는 오직 아버지에게 집을 지어주려는 효심의 발로이고 옛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는 것은 오직 그 남자의 패션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 74, 75쪽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고 병든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당당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75쪽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90, 91쪽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이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 93쪽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기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 115, 116쪽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안나 카레리나 1>, 문학동네, 2010)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컬럼비아 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 대답한다. - 125, 128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 184, 185쪽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208, 209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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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책장에 꽂혀 있는 노란색 표지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 촌스러운 글씨체로 쓰여진 제목을 보고는 이색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점 수기'를 소설로 낸다는 것 말이다. 도대체 토익 만점 수기라는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적어도 토익 만점을 예찬하거나 나는 '토익 공부를 이렇게 했다'라는 평범한 노하우 따위를 소설화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히려 토익이 지배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약간 비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기대를 하며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느 정도 맞은 것 같다.   

한국 대학생들처럼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일상 생활에서 쓸 일도 없고, 취업을 해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필요한 영어 능력이라는 조건은 모든 취업자들 앞에 공통적으로 놓인 '허들'이 되어버렸다. 학교, 도서관, 커피숍과 같이 젊은 이들이 다니는 모든 장소에서 토익/토플과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는 것이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어느 학교에 다니든 무엇을 전공하든 토익은 삶의 필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은 갖추어야 지원이라도 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미국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ETS의 돈벌이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영어가 아닌 다른 스펙으로도 취업이 가능하다고, 이런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또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적용되는 이처럼 견고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이 소설은 토익 590점이라는 점수에 어디 한 군데도 제대로 지원해볼 기회도 찾지 못한 주인공이 남들보다 늦게 호주 브리스번으로 영어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만약 그가 평범하게 어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영어 능력을 향상시켰다면 별다른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생활 자체를 어학연수 겸 여행삼아 머물기로 한 주인공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들(자발적 인질이 되어 마리화나 농장에서 숙식하며 영어를 배운다거나, 평양냉면만 먹는 기이한 외국인에게 우연히 한국어 강습을 하게 된다거나, 완벽한 발음을 갖춘 전적 토익 성우 부부를 만나기 위하여 바나나 농장의 일꾼을 하는 등)과 그 사건들을 겪는 중에 확인되는 토익 만점을 향한 주인공의 끈기와 집념은 웃음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자아내게 한다. 

목차도 독특하다. 리스닝 컴프리헨션, 토익 리스닝 대해부, 보통이 아닌 발음, (바나나만 파는 게 아니실 텐데요), 토익 완전정복이라는 총 5개의 장에서 주인공이 토익, 특히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리스닝 해결을 위해 어떤 전략을 짜냈는지에 대한 흐름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토익을 위한 공부 계획이나 공부 방법의 순서를 보여주고 있지만, 각 장을 채우고 있는 에피소드에 대응하는 주인공의 공부 방식은 황당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하다. 눈 앞에 그려지는 상황을 리스닝 Part 1에 맞추어 (a), (b), (c), (d) 네 개의 보기로 바꾼다거나, 보기를 만들면서 함정을 만들어 스스로를 출제자의 시선과 일치시킨다거나, 외국인과의 대화를 Part 2에 맞춘다거나, 외국인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Part 3의 문제를 연상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호주에서의 평범하지 않은 경험들은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게 된다. 이미 같이 사는 외국인들이 인정할 정도로 충분한 의사소통능력을 지녔음에도 805점 이라는 모의테스트 점수에 충격을 받고 가출을 하여 전직 성우들의 집에서 잡일을 해서라도 보다 정확한 발음의 영어를 배우겠다는 주인공의 집착에 외국인 친구는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라며 의아해 한다. 정작 영어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테스트의 증표가 되어버린 이 나라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렇게 고대하던 토익 만점을 받고 "야, 요즘 토익 만점은 ‘나 눈 두 개 달렸소’하는 것과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보니 막상 잃은 것이 있다. 주인공의 성취에 마냥 기뻐하며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것 혹은 그렇게 밖에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 고작 영어 점수라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다소 극단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잃는 것이 비단 이 소설의 주인공만은 아닐 것이다. 스펙의 대명사인 토익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토익 문제집과 영자 신문, 늘 귀에 꼽고 다니는 리스닝 파일로 무장한 우리는 만족할 점수를 얻게 되기까지의 삶의 공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 드디어 입사 면접을 보기 위하여 면접관들 앞에 선 주인공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좋은 배경과 뛰어난 스펙으로 무장된 다른 지원자들보다 당차고 강한 인상을 풍기기까지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토익 만점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과거와 남들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택한 토익 공부가 영어가 아니라 영어를 곁들인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정여울 작가의 해설처럼 호주에서의 경험은 그가 스스로 꿈꾸는 모습을, "‘두 눈 달린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토익 점수를 올리긴 하지만, 결코 ‘토익스러운 삶’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완성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덧. 책 말미에 실린 정여울 작가의 작품해설은 정말 탁월하다.

"그건 ‘캐첩통 이데올로기’에 빠졌기 때문이야. 한번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지."
스티브가 말했다. 입에서 연기가 폴폴 새어나왔다.
"인간의 용도는 뭐라고 생각하나?" - 12쪽

"도대체 이 모기들은 뭣 때문에 있는 건가." 나는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what are these mosquitoes for?’라는 문장이 뒤따랐다. 여덟 살짜리의 문장이다. ‘모기가 뭣 때문에 있냐?’니.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유치하다면 유치한 질문이다.
영어로 사고하면 이 점이 쓸 만하다. 천진무구한 질문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어린애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머릿속에 낕 때와 오물이 벗겨지는 것이다.
지금 내 나이에 순진무구한 사고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신축 아파트를 보면 "분양가는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물고기를 보면 "회쳐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소와 돼지를 보면 스테이크나 햄버거를 떠올린다. 데이트 중인 커플을 보면 "같이 잤군" 하며 이상한 상상을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 109쪽

한국어에 없다고 이 세상에 정말 없는 건 아니다. 한국어로만 사고하는 한 그것을 깨우치기란 대단히 어렵다. - 110쪽

다른 빗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짠맛이 난다. 보나마나 이건 아버지의 눈물.
2년 전, 앞마당에서 기도하며 흘린 눈물이라고 추정된다. 아버지가 남몰래 우셨구나,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의 눈물은 구름이 되어 지구를 열세 바퀴 돌다가 지금 내게 떨어졌다. 그 빗물 맛을 좀더 음미해본다. 아버지에겐 식도염이 있구나, 나는 분석했다.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빗방울은 저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건 신기했지만, 각 빗방울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들어대니 조금 피곤했다. - 146쪽

우리는 함께 빗방울의 사연을 들었다. 어느 빗방울이건 과거가 있다. 모두 비가 되기 전에 사연 많은 액체였던 것이다. 한때 강물이었던 놈이 가장 흔하다. 눈물, 침, 피, 심지어 오줌이었던 빗방울도 있다. 스티브와 나는 입을 벌려 그 빗방울들의 맛을 보았다. - 147쪽

그쯤에서 토익에 대한 비판은 그만뒀다. 그들과 논쟁을 벌일 마음은 없다. 토익시험은 정말 쓰레기인가. 미국인들 돈벌이 수단인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속내를 떠보기 전에 내 속부터 떠볼 일이었다.
990점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벌렁벌렁 뛴다. 토익위원회에게 전형료를 갈취당한대도 상관없다. 2년 뒤에 성적이 말소되어도 상관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990점을 따보고 싶다. 토익의 위대한 점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일종의 스포츠다. 모든 수험생들을 목마르게 해서 끝없이 달리게 한다. - 170쪽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 208쪽

안방에서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온다. 중간 중간 호흡이 약해졌다. 흡, 하고 숨이 끊기는 때도 있다. 걱정이 되어서 문을 열려고 하면 다시 숨이 이어졌다. 정말 실날같은 호흡이었다. 나는 생닭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닭을 수돗물에 헹궜다.
목이 잘리고, 내장도 다 빠진 생닭.
그 물컹한 몸통을 오래도록 주물렀다. 왠지 아버지를 목욕시키는 기분이었다. 욕탕 안에서 "이런 인생밖에 못 살았다"라고 아버지가 말하고, 나는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닦아주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기왕이면, 떳떳한 사회인이 되어서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닦아주고 싶다. - 249쪽

야, 요즘 토익 만점은 ‘나 눈 두 개 달렸소’하는 것과 같아.
나는 후배에게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268쪽

성공학이나 처세술로 상징되던 ‘자기계발(self-development) 인력’은 이제 훨씬 강력하고 체계적이며 집단적인 관리를 요구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self-empowering subject)’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분위기가 강요하는 허구적 자아 이미지이지만 개개인들이 그 강력한 상징조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제는 너무도 절박한 ‘현실’로 굳어져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토익 점수로 상징되는 스펙은 곧 인권지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토익 점수가 만점 정도는 되어주어야 ‘눈이 두 개 달린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청년에게 너무도 절박한 과제로 다가오는 토익 점수 올리기는 그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는 방식이기도 하다. 낮은 토익 점수로는 취직은커녕 사람구실도 할 수 없어 쫓기듯이 한국을 떠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토익 점수가 아니라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이다. - 282, 283쪽(정여울, 작품해설)

이 작품에서 ‘토익’은 인간의 능력을 점수로 환산하고 인간의 권리를 등수로 환산하는 세계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청년이 꿈꾸는 자신의 모습은, ‘두 눈 달린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토익 점수를 올리긴 하지만, 결코 ‘토익스러운 삶’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루미나티를 조심해!’라는 요코의 마지막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 296쪽(정여울, 작품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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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개인적 체험>외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몇 안 되는 존경할만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딱 한번밖에 읽어보지 않은 그의 책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서라거나 그가 단지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문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실은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여서 일수도 있고, 천황의 훈장을 거부한 소신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양심적 문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오에 겐자부로여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 눈을 끌어들인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읽는 인간(요무 닝겐)'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표현이 참으로 간명하고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책벌레’, '간서치', '호모 부커스' 등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여러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말들은 어쩐지 내게 바로 흡수되지 않았다. 나는 책을 갉아먹는 것과 읽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며, '바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덕무 처럼 책에 미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나를 가장 일반화 할 수 있는 학명 앞에 '북(책)'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큼의 허세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게 제대로 흡수되지 않던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마치 그림처럼 내 눈앞에 그려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책벌레도 간서치도 호모 부커스도 아니지만, 그냥 '읽는 인간'일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록을 포함하여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유년시절에 간직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읽는 만큼 성장한 나날들',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문체를 찾아서', '나를 지켜낸 책 읽기'라는 소제목들을 통해서도 그가 책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이른바 '삼부작'에 대한 배경을 풀어놓는다.

 

이 내용들은 모두 준쿠도 서점의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6개월간 한시적으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이라는 일종의 이벤트에서 강연한 내용을 취합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별칭에 맞게 그 서점에서는 저자가 읽었던 책들을 전시해놓고 다른 이들이 저자의 서재 일부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저자는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 몇 권을 강의 주제로 선택하였고, 그 내용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책을 서평으로서가 아니라 독서에 대한 개인의 회고로 맞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대중을 위한 강연이라고 해서 그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전에 대한 내 무지로 인해 몇몇 부분은 읽기 어렵거나 지루한 부분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나왔을 때는 '아, 이제 전형적인 고전 목록이 시작되는가?' 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적어도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다른 책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그러나 명작이 어디 그냥 일부 사람들에게만 명작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도 결국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평범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그가 다른 읽을 책을 다 소실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던 중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한 줄의 대사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부분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직 세상도, 지옥도 알 수 없는 나이에 신뢰를 위해서 기꺼이 두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 한 마디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포 시집>이나 <오든 시집> 같은 책에 영향을 받은 일화가 소개되는데 내가 읽어보지 않은 것이라 그가 자아를 형성하던 시절에 시에 대한 감수성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끌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쉽지는 않았다.

 

치열한 그의 독서기는 '재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본을 보고 원문과 대조하여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하여 그는 전신운동을 하듯 언어의 감각과 생각의 틀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동생에게 '사전을 공부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로 단어와 문장에 깊숙이 천착하였던 모습에서 그가 그야 말로 ‘읽는 인간’임을 확인하였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되짚어본 지난날의 인생과 책의 밀접한 관련성은 그가 문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연결고리, 즉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야 말로 생활 속에서 글의 의미를 자연히 체득하게 되는 방법임은 분명한 것 같다. 렇게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에 유행하는 '고전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책이 삶을 바꾼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을 팔면서 제시하는 목록 또한 따라가며 읽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들의 주장처럼 인생을 바꾸기 위해 또는 삶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그렇지만 독서 또한 무척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누군가를 획일적으로 찬양하는 광분과 배타성이 끔찍하듯이, 공통되고 보편적인 책의 목록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유사한 공감을 느끼며 그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도 어찌보면 끔찍하다. 저 사람의 삶의 목록이 있듯이, 내 삶의 목록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 길고 (다소) 지루한 강연을 통해서 바로 그 점, '인생을 통한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추천사를 쓴 어느 유명인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어수선한 독서에서 어느날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중 너무나도 우연히 한줄기 빛 같은 운명적인 문장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읽는 행위로 어느 정도 채워질 수 있는 삶일 수는 있겠지만, 읽는 대로 살기에, 그래서 읽는 것과 사는 것의 연결을 말하기에는 아직 나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한 줄입니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시작한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해라, 저도 지옥이라는 곳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아이들도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때가 있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겠어. 저는 다짐했습니다. - 21쪽

되돌아보면요, 지금 제게 저만의 언어 감각, 아울러 제대로 된 미의식이 있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은 아름답구나’와 같은 생각들을 포함해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지니는 견해 등 그 모든 것을 명백히 이 네 권의 책(<엘리엇>, <오든 시집>,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을 말한다)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책을 찾는 일, 책과 만나는 일이며, 제가 발견한 책을 집필해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장 처음 책들을 발견했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기틀이 되는 평면을 만듭니다. 그 뒤에는 이 책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죠. ‘이 책이 불러들이는 사람을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사람이 스승으로, 친구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감정도 있구나’, ‘이렇게 훌륭한 생각도 있구나’하고 책을 통해 느끼는 사이에 신기한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 32, 33쪽

책 한 권을 처음 읽을 때, 우리는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한 번 더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탐구’를 노스럽 프라이는 퀘스트(quest)라고 썼습니다)가 됩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되지요. 그것이 rereading, 한 번 더 읽는 까닭입니다. - 38쪽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이 역시 살아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죽은 지식의 집적을 말합니다. 대형 대학 강의실에서 열리는 지루한 개론 강의를 떠올려 주십시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 50쪽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는 프랑스어를 읽거나 영어를 읽으면서 갖춰졌습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도 주로 사전에 의지해 읽어가면서(공부하는 제게 간식을 주러 온 여동생이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지금 얇은 책을 읽는 거야, 아니면 두꺼운 책... 그러니까 사전을 읽는 거야?" 하고요) 제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그러니까 제 언어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메아리쳤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옮겨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새로운 언어와 만나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왕복, 감수성의 왕복, 지적인 것의 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 67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 82쪽

이니욘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사마스라는 남자의 부인인데, 늘 한탄하는 사람, 서글픈 사람입니다. 그 이니욘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I am like an atom...,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 블레이크는 신비로운 시에서도 이런 과학용어를 사용합니다.

A Nothing left in darkness; yet I am an identity: I wish & feel & weep & groan. Ah, terrible! terrible! ...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세계 속의 일개 원자, 외롭다. 나는 그런 존재다). A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암흑 속에서 잊히고 사라진다. 그다음이 엄청나죠, yet I am an identity... 요즘은 아이덴티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요, 나는 ‘하나의 개인으로 실재하는 자신’과 같다. I wish---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바라고, 느낀다(feel) 울고(weep) 그리고 신음한다(groan). 그렇게 새카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두렵고(terrible), 두렵다’라는 시구. - 107, 108쪽

젊었을 때는 슬픔이 격렬합니다. 난폭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슬픔도 온화해지고 고요해진다고, 실제로 마흔 대여섯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 하나가, "아니, 그렇지 않아"라고 편지에 써 보냈죠. "젊은 시절 격렬했던 슬픔은 분명 어느 연령이 되면 고요한 슬픔이 된다, 온화한 슬픔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이번에는 고요해야 할 슬픔이 거꾸로 더 광포하고 격렬한 슬픔이 된다. 그렇게 역전되어 자네에게 돌아올 거다"라고 경고하는 편지였죠. - 120쪽

일본 불교의 지옥과는 다르죠. 불교의 지옥은 거기에 빠진 영혼이라 해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지옥에서 꿈틀거리는 자들에게 거미줄을 내려뜨려주면 죽은 자가 그걸 잡고 올라옵니다. 올라오면 극락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 한번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이 ‘제3의 장소’인 연옥을 발견했죠. ‘제3의 장소’라는 표현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에 대한 타협점으로 생각해낸 것인데, 이건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을 빈정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옥은 민중에게 크게 환영받습니다. 르 고흐는 연옥이 탄생하고 백 년이 조금 지나 단테라는 시적 천재가 나타났고, 그가 훌륭히 이를 묘사해준 것은 행운이었다고 썼습니다. - 138쪽

연옥의 섬 낮은 곳은 연옥의 산에 올라 자신을 깨끗이 할 여행을 떠날 사람들이, 고행에 들어서기 전에 준비 비슷한 걸 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을 오르며 수행을 거듭하는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산 자의 세계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열렬한 기도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달라고 신께 빌면, 거기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는 천국에 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 138, 139쪽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 년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책을 읽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관계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153쪽

여기서 잠깐, 제 ‘인생의 습관’이 된 독서의 기본 원리를 밝혀두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야나기다 구니오라는 민속학자의 책을 읽고 그 뒤로 제가 쭉 해온 방법인데요, ‘배우기, 외우기, 나아가 깨닫기’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우다(まなぶ, 마나부)’라는 단어는 옛말인 ‘흉내 내다(まねぶ, 마네부)’와 어원이 같아요. 선생님 말씀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렇게 습득한 것을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자전거 타는 걸 몸으로 기억하듯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타인에게 배워서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깨닫기’입니다. - 197쪽

저는 이 세 가지 단어의 연결 고리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무슨 책을 읽든지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문학 책을 읽으면서도 특히 시가 어렵다고 느낄 때면, 우선 그걸 외우기로 했습니다. 이토 시즈오의 어려운 시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한 줄 한 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시를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의미를 자력으로 깨닫게 된 것이죠. - 197, 198쪽

제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고 했던 건, 제 소설이 점차 역사와 현실을 등지고, 말하자면 자기류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게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그런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준 책입니다.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것을 계기로, 문학적인 것과 일체 연을 끊을 생각이어서 다른 분야의 책만 읽고 있었는데,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는 풍부하고 폭넓으며 우수한 세계문학 작품의 전망을 통째로 드러내는 책이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푹 빠져온 저로서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저의 문학 서적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 219쪽

저는 일본의 전쟁 전후의 민주주의 체계의 사회에서 보수나 혁신을 떠나서 정치가, 정치 활동가,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훌륭하고 위대할수록 성직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얼굴을 상실한 예를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기에 사이드가 언제나 세속적인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었던 아라파트가 UN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사이드는 그를 도와 헌신적으로 일하는 동지였지만, 오슬로 합의 등을 계기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과정에는(아라파트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지도자가 어느새 현세적인, 세속적인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 224, 225쪽

사이드는 ‘자신이 자연인가 역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비코나이븐 할둔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자기 형성(selfmaking)’이 역사의 기본이라 믿고, 역사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 편에 서겠노라고 말합니다.
"저 자신이 뼛속 깊이 세속적, 현세적인 인간이기에"라고 사이드는 자신이야말로 세속적인 인간(secular person)임을 강조합니다. - 225쪽

사이드는 만년에, 자신이 사라져간다는 생각에는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사이드는 계속해서 자기 형성을 해나가길 바랐어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생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고 한다면, 백혈병진단을 받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예순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중기’였고, 자신이 ‘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언제나 남겨지는 것들에 흥미를 가져왔다"고 사이드는 말합니다. "나는 말로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흥미가 있다. 분명하게 침묵하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그 자체가 스타일의 한 양상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다"고 사이드는 미발표 노트에 썼습니다. "우리는 메시지와 신호의 사람들이다"라고 그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말합니다. 과묵하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가 음악의 절제라고 부르는 부분은 ‘암시를 포함한 침묵’이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과 아울러, 정치적인 것이나 그 밖의 희망이 없는 가운데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 232쪽

나아가 "저 불확실한 고향 상실의 영역"에서 "우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곤란함을 손에 쥐고, 어찌 되었든 도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드러냅니다. - 232쪽

긴 안목으로 보면 희망은 있다. 저는 이에 찬성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 긴 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분명 죽겠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이다. ‘후기 스타일’의 성과는 죽음 뒤로 던져두는 것도 가능하다. 눈앞의 작업을 대단원의 막으로 간주하고 긴박하게 이를 해낸 예술가들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역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러한 확신에 그야말로 연대감과 따뜻한 감정, 말하자면 다시금 우정(優情)을 느끼며, 저는 저의 ‘만년’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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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9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인생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동의하지만,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믿지 않아요. 독서를 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겠지만, 그것이 삶 전체를 바꿀만한 큰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책이 삶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요인을 간과하고, 마치 책이 만능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붉은눈 2016-07-29 16:03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책의 영향력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책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파편 중 하나일 뿐이지요. 그런데 어설픈 독서가들이 책의 효용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삶과의 일치, 인생의 변화, 심지어 성공을 들먹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