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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개인적 체험>외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몇 안 되는 존경할만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딱 한번밖에 읽어보지 않은 그의 책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서라거나 그가 단지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문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실은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여서 일수도 있고, 천황의 훈장을 거부한 소신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양심적 문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오에 겐자부로여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 눈을 끌어들인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읽는 인간(요무 닝겐)'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표현이 참으로 간명하고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책벌레’, '간서치', '호모 부커스' 등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여러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말들은 어쩐지 내게 바로 흡수되지 않았다. 나는 책을 갉아먹는 것과 읽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며, '바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덕무 처럼 책에 미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나를 가장 일반화 할 수 있는 학명 앞에 '북(책)'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큼의 허세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게 제대로 흡수되지 않던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마치 그림처럼 내 눈앞에 그려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책벌레도 간서치도 호모 부커스도 아니지만, 그냥 '읽는 인간'일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록을 포함하여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유년시절에 간직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읽는 만큼 성장한 나날들',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문체를 찾아서', '나를 지켜낸 책 읽기'라는 소제목들을 통해서도 그가 책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이른바 '삼부작'에 대한 배경을 풀어놓는다.
이 내용들은 모두 준쿠도 서점의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6개월간 한시적으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이라는 일종의 이벤트에서 강연한 내용을 취합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별칭에 맞게 그 서점에서는 저자가 읽었던 책들을 전시해놓고 다른 이들이 저자의 서재 일부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저자는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 몇 권을 강의 주제로 선택하였고, 그 내용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책을 서평으로서가 아니라 독서에 대한 개인의 회고로 맞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대중을 위한 강연이라고 해서 그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전에 대한 내 무지로 인해 몇몇 부분은 읽기 어렵거나 지루한 부분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나왔을 때는 '아, 이제 전형적인 고전 목록이 시작되는가?' 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적어도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다른 책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그러나 명작이 어디 그냥 일부 사람들에게만 명작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도 결국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평범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그가 다른 읽을 책을 다 소실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던 중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한 줄의 대사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부분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직 세상도, 지옥도 알 수 없는 나이에 신뢰를 위해서 기꺼이 두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 한 마디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포 시집>이나 <오든 시집> 같은 책에 영향을 받은 일화가 소개되는데 내가 읽어보지 않은 것이라 그가 자아를 형성하던 시절에 시에 대한 감수성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끌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쉽지는 않았다.
치열한 그의 독서기는 '재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본을 보고 원문과 대조하여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하여 그는 전신운동을 하듯 언어의 감각과 생각의 틀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동생에게 '사전을 공부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로 단어와 문장에 깊숙이 천착하였던 모습에서 그가 그야 말로 ‘읽는 인간’임을 확인하였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되짚어본 지난날의 인생과 책의 밀접한 관련성은 그가 문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연결고리, 즉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야 말로 생활 속에서 글의 의미를 자연히 체득하게 되는 방법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에 유행하는 '고전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책이 삶을 바꾼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을 팔면서 제시하는 목록 또한 따라가며 읽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들의 주장처럼 인생을 바꾸기 위해 또는 삶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그렇지만 독서 또한 무척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누군가를 획일적으로 찬양하는 광분과 배타성이 끔찍하듯이, 공통되고 보편적인 책의 목록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유사한 공감을 느끼며 그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도 어찌보면 끔찍하다. 저 사람의 삶의 목록이 있듯이, 내 삶의 목록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 길고 (다소) 지루한 강연을 통해서 바로 그 점, '인생을 통한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추천사를 쓴 어느 유명인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어수선한 독서에서 어느날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중 너무나도 우연히 한줄기 빛 같은 운명적인 문장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읽는 행위로 어느 정도 채워질 수 있는 삶일 수는 있겠지만, 읽는 대로 살기에, 그래서 읽는 것과 사는 것의 연결을 말하기에는 아직 나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한 줄입니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시작한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해라, 저도 지옥이라는 곳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아이들도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때가 있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겠어. 저는 다짐했습니다. - 21쪽
되돌아보면요, 지금 제게 저만의 언어 감각, 아울러 제대로 된 미의식이 있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은 아름답구나’와 같은 생각들을 포함해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지니는 견해 등 그 모든 것을 명백히 이 네 권의 책(<엘리엇>, <오든 시집>,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을 말한다)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책을 찾는 일, 책과 만나는 일이며, 제가 발견한 책을 집필해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장 처음 책들을 발견했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기틀이 되는 평면을 만듭니다. 그 뒤에는 이 책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죠. ‘이 책이 불러들이는 사람을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사람이 스승으로, 친구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감정도 있구나’, ‘이렇게 훌륭한 생각도 있구나’하고 책을 통해 느끼는 사이에 신기한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 32, 33쪽
책 한 권을 처음 읽을 때, 우리는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한 번 더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탐구’를 노스럽 프라이는 퀘스트(quest)라고 썼습니다)가 됩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되지요. 그것이 rereading, 한 번 더 읽는 까닭입니다. - 38쪽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이 역시 살아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죽은 지식의 집적을 말합니다. 대형 대학 강의실에서 열리는 지루한 개론 강의를 떠올려 주십시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 50쪽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는 프랑스어를 읽거나 영어를 읽으면서 갖춰졌습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도 주로 사전에 의지해 읽어가면서(공부하는 제게 간식을 주러 온 여동생이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지금 얇은 책을 읽는 거야, 아니면 두꺼운 책... 그러니까 사전을 읽는 거야?" 하고요) 제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그러니까 제 언어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메아리쳤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옮겨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새로운 언어와 만나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왕복, 감수성의 왕복, 지적인 것의 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 67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 82쪽
이니욘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사마스라는 남자의 부인인데, 늘 한탄하는 사람, 서글픈 사람입니다. 그 이니욘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I am like an atom...,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 블레이크는 신비로운 시에서도 이런 과학용어를 사용합니다.
A Nothing left in darkness; yet I am an identity: I wish & feel & weep & groan. Ah, terrible! terrible! ...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세계 속의 일개 원자, 외롭다. 나는 그런 존재다). A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암흑 속에서 잊히고 사라진다. 그다음이 엄청나죠, yet I am an identity... 요즘은 아이덴티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요, 나는 ‘하나의 개인으로 실재하는 자신’과 같다. I wish---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바라고, 느낀다(feel) 울고(weep) 그리고 신음한다(groan). 그렇게 새카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두렵고(terrible), 두렵다’라는 시구. - 107, 108쪽
젊었을 때는 슬픔이 격렬합니다. 난폭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슬픔도 온화해지고 고요해진다고, 실제로 마흔 대여섯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 하나가, "아니, 그렇지 않아"라고 편지에 써 보냈죠. "젊은 시절 격렬했던 슬픔은 분명 어느 연령이 되면 고요한 슬픔이 된다, 온화한 슬픔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이번에는 고요해야 할 슬픔이 거꾸로 더 광포하고 격렬한 슬픔이 된다. 그렇게 역전되어 자네에게 돌아올 거다"라고 경고하는 편지였죠. - 120쪽
일본 불교의 지옥과는 다르죠. 불교의 지옥은 거기에 빠진 영혼이라 해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지옥에서 꿈틀거리는 자들에게 거미줄을 내려뜨려주면 죽은 자가 그걸 잡고 올라옵니다. 올라오면 극락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 한번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이 ‘제3의 장소’인 연옥을 발견했죠. ‘제3의 장소’라는 표현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에 대한 타협점으로 생각해낸 것인데, 이건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을 빈정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옥은 민중에게 크게 환영받습니다. 르 고흐는 연옥이 탄생하고 백 년이 조금 지나 단테라는 시적 천재가 나타났고, 그가 훌륭히 이를 묘사해준 것은 행운이었다고 썼습니다. - 138쪽
연옥의 섬 낮은 곳은 연옥의 산에 올라 자신을 깨끗이 할 여행을 떠날 사람들이, 고행에 들어서기 전에 준비 비슷한 걸 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을 오르며 수행을 거듭하는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산 자의 세계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열렬한 기도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달라고 신께 빌면, 거기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는 천국에 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 138, 139쪽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 년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책을 읽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관계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153쪽
여기서 잠깐, 제 ‘인생의 습관’이 된 독서의 기본 원리를 밝혀두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야나기다 구니오라는 민속학자의 책을 읽고 그 뒤로 제가 쭉 해온 방법인데요, ‘배우기, 외우기, 나아가 깨닫기’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우다(まなぶ, 마나부)’라는 단어는 옛말인 ‘흉내 내다(まねぶ, 마네부)’와 어원이 같아요. 선생님 말씀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렇게 습득한 것을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자전거 타는 걸 몸으로 기억하듯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타인에게 배워서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깨닫기’입니다. - 197쪽
저는 이 세 가지 단어의 연결 고리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무슨 책을 읽든지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문학 책을 읽으면서도 특히 시가 어렵다고 느낄 때면, 우선 그걸 외우기로 했습니다. 이토 시즈오의 어려운 시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한 줄 한 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시를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의미를 자력으로 깨닫게 된 것이죠. - 197, 198쪽
제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고 했던 건, 제 소설이 점차 역사와 현실을 등지고, 말하자면 자기류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게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그런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준 책입니다.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것을 계기로, 문학적인 것과 일체 연을 끊을 생각이어서 다른 분야의 책만 읽고 있었는데,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는 풍부하고 폭넓으며 우수한 세계문학 작품의 전망을 통째로 드러내는 책이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푹 빠져온 저로서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저의 문학 서적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 219쪽
저는 일본의 전쟁 전후의 민주주의 체계의 사회에서 보수나 혁신을 떠나서 정치가, 정치 활동가,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훌륭하고 위대할수록 성직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얼굴을 상실한 예를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기에 사이드가 언제나 세속적인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었던 아라파트가 UN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사이드는 그를 도와 헌신적으로 일하는 동지였지만, 오슬로 합의 등을 계기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과정에는(아라파트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지도자가 어느새 현세적인, 세속적인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 224, 225쪽
사이드는 ‘자신이 자연인가 역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비코나이븐 할둔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자기 형성(selfmaking)’이 역사의 기본이라 믿고, 역사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 편에 서겠노라고 말합니다. "저 자신이 뼛속 깊이 세속적, 현세적인 인간이기에"라고 사이드는 자신이야말로 세속적인 인간(secular person)임을 강조합니다. - 225쪽
사이드는 만년에, 자신이 사라져간다는 생각에는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사이드는 계속해서 자기 형성을 해나가길 바랐어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생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고 한다면, 백혈병진단을 받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예순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중기’였고, 자신이 ‘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언제나 남겨지는 것들에 흥미를 가져왔다"고 사이드는 말합니다. "나는 말로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흥미가 있다. 분명하게 침묵하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그 자체가 스타일의 한 양상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다"고 사이드는 미발표 노트에 썼습니다. "우리는 메시지와 신호의 사람들이다"라고 그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말합니다. 과묵하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가 음악의 절제라고 부르는 부분은 ‘암시를 포함한 침묵’이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과 아울러, 정치적인 것이나 그 밖의 희망이 없는 가운데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 232쪽
나아가 "저 불확실한 고향 상실의 영역"에서 "우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곤란함을 손에 쥐고, 어찌 되었든 도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드러냅니다. - 232쪽
긴 안목으로 보면 희망은 있다. 저는 이에 찬성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 긴 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분명 죽겠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이다. ‘후기 스타일’의 성과는 죽음 뒤로 던져두는 것도 가능하다. 눈앞의 작업을 대단원의 막으로 간주하고 긴박하게 이를 해낸 예술가들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역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러한 확신에 그야말로 연대감과 따뜻한 감정, 말하자면 다시금 우정(優情)을 느끼며, 저는 저의 ‘만년’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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