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소설은 <퀴즈쇼>와 <살인자의 기억법> 밖에 읽지 않았다. 얼마전 그의 산문 <보다>를 다시 한번 읽으면서 문득 그의 다른 소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예전부터 익히 들어 익숙한 제목의 책부터 구해 읽었다. 


처음에는 소설 속 화자인 동규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증상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이들은 동규와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인 제이만은 동규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상황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과 연결시키며 읽었다. 유년시절 두 소년의 깊고 유일한 관계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규가 제이와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느낀 이후,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제이가 자신의 생각을 매번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불통 또는 오해의 상황에서 동규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시도를 접은 채, 제이가 예측한 것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동규에게서 선택적 함구증이 사라지고 비로소 언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둘 사이의 소통은 말을 하지 못할 때보다 원활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였던 친구는 점차 이질적인 둘로 분리된다. 동규의 이사로 연결의 끈이 점점 얇아져만 가는 둘 사이에 예전에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추억의 실존이 무너져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을 주워기른 엄마에게 버림받은 채로 동네를 떠나지 않고 있는 제이를 방문하는 동규는 두 개의 거울을 마주놓은 채 그곳을 지나가는 악마를 잡겠다는 제이의 낯선 행동을 보게 된다. 이 황당하고 부질없는 행동은 동규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침내 몰래 동규를 미행하던 어른들에 의해 제이는 그가 악마를 잡기에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던 날에 붙들려가고 만다. 본의 아니게 밀고자가 되어버린 동규는 그렇게 유년시절과 제이로부터 단절되어 버린다.

  

소설의 중반쯤으로 접어 들었을 때에는 제이가 독방에 갇힌 이후 얻게 된 신비한 깨달음 혹은 감각(그는 사육용 개들을 구하기 위하여 개장수들의 자동차 타이어를 찢다가 걸려 보육원 독방에 갇히게 된다)이 바로 사물이 갖는 느낌을 읽을 수 있는 설정이어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은 더이상 동규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부터 펼쳐질 제이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동규-제이, 사물-제이의 소통관계가 매우 닮아 있다. 동규가 말을 하게 되면서 시들어진 둘의 소통이, 제이의 신비한 감각을 통해 재편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동규와 제이가 갖고 있던 문제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사물은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제이는 그 사물의 말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제이가 동규를 잘못 이해했던 것과 동일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제이는 큐브를 부수어버림으로써 그 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목란을 빼낸다. 그는 큐브의 목소리를, 진동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들은 것이 정말 큐브의 목소리였을까.


목란을 매개로 하여 제이를 다시 만나게 된 동규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연상시키며 폭주족의 리더가 되어 있는 제이를 흠모하는 한편 질투하기 시작한다. 제이를 좋아하는 목란에 대한 양가적 감정 또한 동규의 이러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예전에 하나였던 친구는 이제 점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규는 막상 제이의 곁을 떠나지도 못한 채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이를 저버리게 된다. 삼일절 폭주에서 경찰에 그의 행방을 알리고 만 것이다. 이후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동규는 제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한다. 마침내 대교 위에 설치된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그대로 돌진하다가 제이는 대교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제이의 신비함은 그 장소에 있던 많은 이들이 그가 난간 밖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소설의 말미에는 화자가 동규에서 작가로 바뀐다. 작가는 우연히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제 인터뷰하면서 소설을 구성한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부분이 사실인지 아니면 작가의 허구적 장치인지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세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첫부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이 부분은 알라딘에서 미리보기로 볼 수 있다). 


1부가 시작되기에 앞서 작가는 마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내려온 밧줄을 타고 올라간 어린 조수의 몸뚱아리가 이리저리 흩어져 땅에 떨어진다. 그것을 양동이에 담은 마술사는 다시 조수를 살려낸다. 이 마술에 제대로 속은 어린 황제는 옆에 있던 내시를 토막내어 다시 살려내라 한다. 참혹한 광경을 참지 못한 마술사는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자 밧줄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버린다. 마술사는 밧줄만 남긴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 짧은 이야기의 말미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신비로움이 사라져버린 너무나도 사실적이면서 잔혹한 현실 속에 남겨진 우리는, 그리고 동규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 말고도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 26쪽

말을 못하는 나와 그런 나를 이해하는 제이 사이에는 다른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굳어가는 말, 입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한 채 종유석처럼 굳어가는 그 무엇을 제이는 즉각 알아차렸다. 제이는 나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어서,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제이가 내 모든 심증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세 번 안에는 알아맞힐 수 있었다. 가끔 제이가 바보처럼 엉뚱한 예측을 계속하면 내 쪽에서 의지를 접거나 내가 원했던 것을 제이가 원하는 쪽으로 바꿔치워버렸다. 그랬다. 자신을 속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 33, 34쪽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거에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73쪽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 73쪽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 134쪽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나무를 베기 전에 나무에게 용서를 구했대. 그들은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던 거야. 나무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들은 나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돼. 평생 보던 나무를 없앤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아. 그들에겐 화폐가 없었어. 사물과 그들은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었어.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의식이 너의 참인식을 가로막았고 그 때문에 너는 큐브를 느낄 수 없었을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음의 눈을 열고 주변을 깊이 살펴. 사람들이 하는 뻔한 말을 믿지 마. 그래야 너 자신을 구할 수 있어. 넌 소중하니까." - 138, 139쪽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존재하지 않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그 순간 제이가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시간이 바다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 160쪽

어린 수컷들은 가슴을 내밀어 용기를 과시하고자 한다. 용기,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일소에 부치는 허세에서 온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허세와 광기를 구별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광기의 제이가 그들 위에 설 수 있었다. - 160,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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