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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산문은 대체적으로는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실생활과 관계된 생각이나 예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다수의 짧은 글을 모아놓은 형식이어서 소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맥락을 잡고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쉬어도 무방하다. 반면, 각각의 에피소드는 즐겁게 몰입하여 읽게 되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조각들을 모은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단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하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작년에 이미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제목을 보고 '분명히 읽은 책이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라며 스스로 했던 질문과 그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답답함이 다시 책을 펴게 만들었다(혹시 예전에 메모해놓은 것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감상 없이 밑줄 그은 문장 몇 줄을 모아놓은 것 뿐이었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의 글들은 각 부나 장마다 포괄적인 제목을 달아 두고는 하는데, 이 책에는 각 부에 해당하는 제목이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4부로 나눈 이유가 유사한 주제의 모음인지, 글을 써간 시간의 순서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후반보다 초반에 드러난 사건(저자의 초등학교나 대학 또는 대학원 때의 에피소드)이나 예시가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볼 때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글을 엮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하긴, 2년 남짓 쓴 글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모아진 글을 또다시 유사한 주제나 시간의 순서로 분류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구성이야 어쨌든 이 책에 실린 글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하루도 안되는 시간동안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가독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앞서 산문의 장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독서방식에 대한 장점 뿐만이 아니라, 산문 그 자체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비유나 암시 없이 작가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을 찾으며 반가워하거나 새로운 시각에 공감하며 즐거움을 얻는 일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혜택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초반에 집중이 잘 되어서였는지 1부와 2부에 있는 글에 공감이 많이 갔다. 1부에는 상대적으로 부(富)나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태와 이를 관리하고 있는 부유한 이들의 관계를 마르셀 에메의 소설에 빗대어 설명한 '시간 도둑',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가 약탈적 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모된 세태를 이야기 하는 '자유 아닌 자유', 무소유라는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도 부자들의 옵션이 되고 있다는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이제는 일반화 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비정규 노동이라는 현상을 다룬 '숙련 노동자 미스 김'이 그러하다.
한편, 책의 제목인 <보다>에 걸맞게 많은 에피소드에서는 영화를 통한 사회의 단상들도 많이 눈에 띤다. <설국열차>에 탄 가상적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우리 사회상을 해부한 '머리칸과 꼬리칸', <신세계>에 드러난 두 아버지를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연계시킨 '부자 아빠의 죽음', <비포 미드나잇>과 저자 자신의 옛 추억을 연계하여 사랑을 대하는 20대와 40대를 회고한 '부다페스트의 여인',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심리적으로 분석한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필요해', <마스터>에 빗대어 부모의 경계를 벗어나는 자녀의 성장을 설명한 '나쁜 부모 사랑하기', <그래비티>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펼쳐낸 '어차피 죽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을 통해 <로마 위드 러브>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아마추어의 한계라는 메세지를 극복을 설명한 '샤워부스에서 노래하기', 저자의 단편소설 <비상구>가 영화화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미래의 영화를 표절하다', <관상>을 통하여 인생에 있어 자기실현적 암시 필요성을 이야기 한 '앞에서 날아오는 돌', <변호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를 통해 가족의 미래상을 짐작해본 '아버지의 미래' 등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장면장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그것 또는 유사한 묶음들을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의 심리로 연결시켜나가는 탁월함에 감탄을 하며 책을 읽었다.
덧: 책을 다 읽고 재미 삼아서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쳤던 부분과 비교를 해봤다. 방금 막 책을 다 읽었음에도 놀랍게도 예전에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해 놓은 것 중에서는 '이런 글이 있었나?'할 정도로 생소한 문장들이 있었고, 이번에 반정도는 예전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라는 동일인이 같은 글을 읽고 있지만 그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공감가는 부분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나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밑줄을 그었던 문장에 이번에 또 밑줄을 그은 경우이다. 이것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함없이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로,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단상들이 아니라 일관되게 나를 이끄는 이 글들을 잘 간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뉴욕에서 유행하는 ‘폰 스택(Phone Stack)’ 게임을 소개했다. 룰은 간단하다. 고급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할 때 모두의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는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것이다. 이 게임은 얼핏 보기에는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대화와 식사에 집중하자는 건전한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파워 게임의 면모도 있다. 더 오랜 시간 스마트폰에 무심할수록 더 힘이 강한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들이 스마트폰으로부터 멀어지는 사이, 지위가 낮은 이들의 스마트폰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사회적 약자는 ‘중요한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의 타격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 12, 14쪽
자본주의사회의 마케팅이라는 것은 고객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면 고객에게 이미 있을 것이다. 아직 안 샀다는 것은 아직 그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18, 20쪽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후예들은 원주민의 땅을 차지할 자유를 찾아 총을 들고 서부로 향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자유가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라면 서부로 향한 이들의 자유는 약탈의 권리를 의미한다. 자유가 이렇게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한 사회에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세계관이 진리가 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가치가 ‘자유’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 20쪽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57, 58쪽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 사십대에 다다른 셀린(줄리 델피)은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이번에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건가요?"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나는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녀를 만나리가는 확신도 없이 무작정 부다페스트행 기차레 다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행동은 스물여덟 살에게나 어울린다. 그럼 사십대의 남자에게는 무엇이 어울리나?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극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영화 보기, 달콤쌉싸름한 회고담 늘어놓기, 그러다 혼자 괜히 쓸쓸한 기분에 젖어 맥주 마시기, 그리고 글쓰기. 이십대는 몸으로, 사십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이제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찍을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내가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었을 또다른 삶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 67, 68쪽
서연은 제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바꾸려는 여자다. 그래서 늘 자기를 속인다. 옛 남자를 찾아간 이유는 오직 아버지에게 집을 지어주려는 효심의 발로이고 옛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는 것은 오직 그 남자의 패션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 74, 75쪽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고 병든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당당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75쪽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90, 91쪽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이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 93쪽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기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 115, 116쪽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안나 카레리나 1>, 문학동네, 2010)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컬럼비아 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 대답한다. - 125, 128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 184, 185쪽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208, 209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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