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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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나이에 이런 시를 웅얼거리는 건 조금 낯간지러운 일이다. 그리고 사실 본인은 강은교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강은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페이퍼에 뭐 올릴 만한 시가 없나 생각하다가 문득 이 시가 생각났을 뿐이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처럼 어떤 영화에서 이 시가 소개되었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인은 1945년생이니 환갑이 지났다. 과거에는 여류(女流)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 여류시인이니 여류화가니, 여류작가니.....  - 요즘은 그런 말은 어디로 멀리 가버렸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류가 있었다면 남류(男流)도 있었을 텐데, 남류라고 말해놓고 보니 생뚱맞고 또 웃긴다. 남류란 것이 원래 없었으니 여류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모양이다. 여류라는 발언이 다분히 성차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멋있는 구석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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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06-04-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가만 생각해 보니 위 시가 영화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소설 같은 데 소개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있잖은가..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에서 마종기의 '연가'를 인용했듯이 작은 글씨로 시의 한구절 혹은 전문을 인용하고 소설의 처음 혹은 한 장이 시작되는 그런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