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이 지난번 페이퍼에 쓴 호계서원 복설 추진 확약식 사진이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떼로 혹은 갓쓰고 혹은 유건쓰고 도포입고 행차하는 이런 사진을 보면 놀라고 신기해 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무슨 이슬람 복장한 사람들을 보듯 이상하게 보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아니면 무슨 고고학적 발견 비슷한 놀라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구나. 용케도 안 죽고 남아있네...너 어느 별에서 왔니????? 저분들은 어버이연합 뭐 그런분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양반문화, 유교문화, 안동문화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문화적 상품은 이 것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조치가 필요한데 그건 소생 능력밖의 일이다. 하여튼간에 이건 소생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 저 돼지 놈이 되지못한 이상한 소리를 꿀꿀거리고 있네생각하시는 분들도 너무 노여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두가지는 바로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다. 조상 제사 잘 받드는 것과 손님을 기꺼이 접대하는 것이 양반문화의 핵심이다.

 

접빈객(接賓客) 관련하여서는 임청각 생치(生雉)다리 이야기가 유명하다. 임청각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다. 안동댐 인근 낙동가가에 위치한 임청각 고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로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이다. 석주의 의병운동, 독립운동으로 이미 가세가 기울었고, 그후에는 석주가 가산을 정리해 상해 임시정부로 가버리자 남은 식솔들의 생계는 절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임청각을 출입하는 손님은 줄어들지 않았으니, 양반 법도에 접빈객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여 생각해낸 것이 생치(生雉)다리다. 생치란 살아있는 꿩이란 말이다. 어쨌든 없는 살림에도 임청각을 찾는 손님들 밥상에는 매 끼니마다 고기반찬이 꼭 하나 올라갔는데 그것이 바로 생꿩다리였다. 요리하지 않은 생꿩다리를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주인이 말한다.“차린 건 없지만... 접구(接口)라도 하시지요.” 그러면 손님은 젓가락으로 생꿩다리를 한번 뒤집어 놓은 것으로 먹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생치다리는 계속 재활용되어 다음 손님상에도, 그 다음 손님상에도 올랐고, 손님들은 모두 젓가락질로 생치다리를 뒤집으며 접구하는 시늉을 했다. 손님들도 모두 임청각의 사정을 아는 것이다. 접구란 음식을 아주 조금 먹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허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형식이 없다면 내용 홀로 어찌 존재할 것이며, 틀이 없다면 그 속의 모양이 찌그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봉제사(奉祭祀)란 제사를 받드는 것인데, 제사는 흔히 4대까지 지낸다. 이른바 사대봉사(四代奉祀). 그러니까 우리할배의 제사는 아버지, . 손자, 증손자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고손자대에 이르면 신주를 땅에 묻어버리고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방귀 꽤나 뀌는 반가에는 불천위(不遷位)라는 것이 있다. 불천위란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자자손손 영원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신주를 땅에 묻지않고 사당에 모신다. 불천위를 모시기 위해서는 신주와 신주를 모신 함인 감실, 그리고 감실을 봉안하고 제사상을 갖추어 제사를 모실수 있는 사당이 필수적이다.

 

당연히 아무나 불천위가 될 수는 없다. 나라에 큰 공헌이 있거나 도덕성과 덕망이 높은 분들만 가능하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유림에서 중론을 모아 발의하는 경우도 있다. 퇴계는 물론이고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고 있는 서애, 학봉, 우복, 한강, 여헌, 갈암, 대산, 정재 같은 분들은 모두 불천위다. 불천위는 보통 한 문중의 방계종파의 중시조가 된다. 이 불천위를 모시는 제사는 그야말로 큰 행사다. 학봉 불천위 제사의 경우 유건쓰고 도포입은 사람이 수십명에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모두 백여명에 이른다. 안동의 불천위 제사는 텔레비전 전통문화 어쩌고 하는 프로에 가끔 방송되기도 한다.

 

제사가 마치 없어져야할 악습이요 폐단처럼 인식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사 준비에 여성노동이 착취되는 것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다. 또 조상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재고의 필요가 있다. 직장인들은 평일 멀리 움직이기 어렵다. 꼭 자정넘어 지낼 필요도 없다. 저녁 식사 전에 간단히 식을 올리고 모두 둘러앉아 만찬을 함께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잘 다듬으면 충분히 모두가 즐거운 잔치 혹은 축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크리스마스나 초파일이나 모두 결국은 제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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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5-07-2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매일 등하교길에 지나치던 곳이 바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이었지요.(저는 처음 1년은 제 모교가 있던 용상동에서 자취를 했고, 나중 2년은 안동댐 아래 동네인 와룡면에서 용상동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답니다.) 생치다리 얘기는 옛날에도 한 번 들었었는데 지금 다시 들어도 여전히 새롭네요.

불천위 제사는 (훌륭한 조상님 덕분에) 저희 집안에서도 모시는데, 임금님의 친필이 종갓집 뒷편 사당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지요. 저희 집안에서도 1년에 한 번씩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면 전국 각지에서 많이들 고향으로 내려오시고, 아직도 갓쓰고 도포입고 제사 지내시는 어르신들도 제법 많답니다.

문득 지난 6월 초에 서울 사는 지인들과 함께 2박 3일 동안 `안동 투어` 다녀온 기억도 나네요. 그 때 도산서원, 퇴계종택, 이육사 문학관, 농암고택 등지를 거쳐 안동댐까지 둘러보고 왔는데, 중앙선 기찻길이 일제시대때 `임청각` 앞으로 빙 둘러 지나가게 된 기막힌 사연을 지인들한테 들려줬던 생각도 나네요.

제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는 `학봉`의 직계 종손도 있고, 퇴계의 후손, 서애의 후손들도 많답니다. 삼봉(정도전)의 후손들도 더러 있구요. 어디든 사정은 비슷하겠지만 특히 안동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함부로 집안 자랑 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일쑤여서 늘 서로 알게 모르게 조심하기도 하지요.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붉은돼지 2015-07-2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거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쓴 거 같은 느낌이 ^^;;;;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선대 고향은 안동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집안사정으로 저만 외가인 내앞에서
컸는데, 어쩌다 한번 내앞에 가봐도 기억이 하나도 안납니다.

집에 큰형님은 옛날에 학봉 종손하고 내앞 종가에서 같이 놀기도
했다고 하더군요...저는 어릴 때 아버지로 부터 학봉할배와 우리집
불천위 할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지긋지긋하니 오히려 반감이 생기더군요

가만보면 안동 일대 그 손바닥만한 동네에 무슨 그런 양반입네하는
집안은 또 그리 많은지 서로 잘난체하며 조상 팔아먹고 사는 거 같아
아버지 말씀은 거의 콧등으로도 안듣고 그랬는데

이제는 아버지도 벌써 돌아가시고 저도 나이 먹어 저런 이야기들이
문득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이제는 들을 데가 없군요 ㅜㅜ

oren 2015-07-30 12:37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 님의 외가가 바로 내앞이었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 고향은 경북 영양인데 저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안동으로 나왔답니다.(제 고향 영양은 산골 오지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문인들은 많이 배출했답니다. 흔히 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 김주영 등을 꼽지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영양과 안동을 이어주는 도로는 소위 `신작로`로 불리는 흙먼지 풀풀 나는 자갈길이었고, 고달픈 자취생활 틈틈이 고향을 다녀올라치면 `내앞`은 어김없이 지나가게 되어 있었지요. 요즘도 가끔씩 고향에 오갈 때 `내앞`을 지날 때면 그저 잠시나마 곁눈질이라도 건넨답니다. ㅎㅎ

저랑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녀석은 뒤늦게 알고 보니 내앞에 있는 `종가집`이 바로 `저 집`이더라구요. 강 건너에 있는 멋진 정자(백운정)도 `저 꺼`라고 하구요. 어쩄든 그 친구는 대학에 들어와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재미를 붙인 끝에 과외를 참 열심히 받았었지요. 과외선생님은 `한양에서도 알아주는 영감님들`이었고, 그 친구가 배우는 과목들은 주로 한자로 쓰여진 `사서 오경`들이었지요. 결국 그 친구는 7년 전쯤에 `국립 서울대 정교수`로 부임해서 `가문`을 부끄럽지 않게 하더군요.
* * *
그 친구를 본 지가 어느새 서너 해는 훌쩍 지난 듯하여 오늘 문득 검색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마침 붉은돼지 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양반 문화`를 소개하느라 바쁜 소식이 하나 올라오네요. ㅎㅎ
☞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608780

붉은돼지 2015-07-30 13:2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전에 오렌 님의 희랍고전 이야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영양이 고향이시군요..정말 산골이죠..ㅎㅎㅎㅎ 영양 석보는 이문열의 고향으로 더 알려진 것 같습니다. 서울대 교수되신 그 친구분은 운천종가 둘째분이라고 하니, 아마도 내앞 작은 종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운천은 학봉의 형님인 귀봉의 아드님으로 나오더군요. 저도 조금 헷갈려요. 내앞에 가면 청계공의 큰 종가나 귀봉 작은 종가나 뭐 거의 붙어 있고, 또 학봉 종가는 검제에 따로 있고 하니 뭔 종가가 이리 많은지....보통 불천위로 모시게 되면 종가가 되니 그리 되는 모양입니다. ..

학봉의 이름이 이렇게 높이 난 것은 아마도 그 후손들 중 잘 되신 분들이 많아 학봉을 현창한 덕분도 있는 듯 합니다. 작고하신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이 내앞 출신이고, 현재 내앞 큰종가 종손도 아마 포스텍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성취의 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transient-guest 2015-07-30 0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 살면 제사/한국명절/미국명절이 모두 섞여버리는 어려움과 안타까움이 있어요. 많이들 미국명절에 한국조상을 대입하는 식으로 치루기도 하고요. 저는 위의 말씀에서 위패를 사당에 모시는게 참 좋네요. 집 뒷뜰에 작은 공간이 있어 그곳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면 늘 삶과 죽음, 공존에 대한 것들을 떠올릴 것 같고, 내 직계조상을 기억하기도 좋을 듯 합니다만, 좀 무섭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네요.ㅎㅎ

붉은돼지 2015-07-30 10:06   좋아요 0 | URL
미국명절에 한국조상 대입하는 식으로도 하는군요...
뜰 있는 집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서 사당을 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한국에선 보통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는 관계로....
그리고 저는....별채로 작은 개인 도서관을 하나 지었으면 하는 바램을 품고있습니다...^^

만병통치약 2015-08-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계서원이 학봉선생과 서애 선생 (순서무관합니다 ㅋㅋ) 서열문제로 조금 씨끄러웠다까지만 알고 있는데 잘 해결되었나 봅니다. ^^ / 책에서 보던 내용을 사진으로 보니 신기하네요

붉은돼지 2015-08-02 12:28   좋아요 0 | URL
일종의 의전이죠..
사실 요즘도 공식적인 행사에서 이 의전때문에
말썽이 새기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서애가 왼편에 앉는 것이 맞는 거 같아요
일국의 총리로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그 노심초사를 생각하면요

학봉도 물론 진주성에서 순국하지만 원죄?가 없다 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