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뉴시스(대구/경북) 인터넷판에 <학봉 후손이라 죄송합니다> 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다음은 발췌한 내용이다. “자신을 의성김씨 34세손 학봉후손으로 밝힌 김씨는 27일 한 인터넷매체 기고를 통해 임란역사문화공원 조성을 위해 학봉(김성일)과 서애(류성룡) 문중에 각 100억원씩 200억원을 지원받게 돼 후손으로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 사업은 특정 문중을 위한 특례라는 시비 속에 시민단체의 반발 등으로 1년이상 파행을 겪어왔으나 안동시는 사업방향을 일부 수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결국 관련 예산의 의회승인을 이끌어냈다. 안동시는 “임란 극복의 주역인 자랑스러운 인물을 기리고 후손의 충의를 다지기 위해 의지를 갖고 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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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모르겠지만 학봉과 서애라고 하니 두 문중간 사이에 근 사백년을 끌어온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유명한 논쟁이 생각난다. 조선은 16세기 말에 이르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의 성리학설과 학통을 계승한 이른바 ‘영남학파’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학파의 시조격인 퇴계의 수제자로는 흔히 서애(류성룡)과 학봉(김성일)을 꼽는다. 서애와 학봉의 뒤를 이어 우복 정경세,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유치명 등으로 학통은 이어진다.
1573년 퇴계를 배향하기 위한 여강서원을 세워졌고, 1625년에 이 서원에 서애와 학봉을 추가로 배향하게 되면서 퇴계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서애측은 벼슬이 영의정이라는 이유, 학봉측은 나이가 연상이라는 이유로 각각 퇴계의 왼편을 주장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자 당시 영남 유림의 좌장격인 우복 정경세가 견수와 절석을 설파한다. 연치(年齒)의 차는 견수(絹隋)에 미치지 못하나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는 것이다. 서애측의 승리. 그 뒤 여강서원은 숙종으로부터 호계서원의 편액을 받는다.
견수(絹隋)의 차라는 것은 예법에 나이가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않고 조금 뒤쳐저 따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학봉은 서애보다 4살 연상이니 견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고, 절석(絶席)이란 서애는 영의정, 곧 일국의 총리요, 학봉은 관찰사를 지냈을 뿐이니, 영의정과 같은 고위직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여러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별도의 전용석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1805년 영남유림에서 서애와 학봉, 한강(정구)과 여헌(장현광), 이른바 영남 사현(四賢)을 문묘에 종사키로 조정에 청원하는 과정에서 다시 서애와 학봉의 순서문제가 제기 되었고, 양 문중의 싸움으로 인해 결국 영남 사현의 문묘종사는 기각되었다.
1812년 학봉측에서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을 추가로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대산은 학봉 계열이다. 이에 대해서 서애측은 적극 반대하였고 결국 호계서원과 절연하고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겨버렸다.
2013년 경북도청 강당에서 열린 호계서원 복설 추진 확약식에서 양 문중은 호계서원을 안동시 성곡동 안동 야외민속박물관 일대에 복설 이건하고 서애를 왼쪽에 학복을 오른쪽에 배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안동 유림이 병유 혹은 병파(서애 지지파)와 호유 혹은 호파(학봉 지지파)로 나누어 시비를 따지기 시작한지 근 400년만이다.
안동식 유머에 이런 게 있다. 안동 어느 곳에 유생들이 모였다. 한 선비가 다른 선비에게 묻는다. “귀공은 호유이오니까? 병유이오니까?” 선비 왈 “소생은 어느쪽도 아니요. 중립이요.” 그러자 처음 선비가 하는 말 “흥, 상놈이었구먼”하고 비웃으며 총총히 가벼렸다는 이야기.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