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마재의 경우

 

   소 X 한 놈 - 서정주

왼 마을에서도 品行方正키로 으뜸가는 총각놈이었는데, 머리숱도 제일 짙고, 두 개 앞이빨도 사람 좋게 큼직하고, 씨름도 할라면이사 언제나 상씨름밖에는 못하던 아주 썩 좋은 놈이었는데, 거짓말도 에누리도 영 할 줄 모르는 숫하디 숫한 놈이었는데, <소 X 한 놈>이라는 소문이 나더니만 밤 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저의 집 그 암소의 두 뿔 사이에 봄 진달래 꽃다발을 매어 달고 다니더니, 어느 밤 무슨 어둠발엔지 그 암소하고 둘이서 그만 영영 사라져 버렸다. “四更이면 우리 소 누깔엔 참 이뿐 눈물이 고인다.” 누구보고 언젠가 그러더라나. 아마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 그 발자취에서도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틀림없는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

 

위 시는 미당의 시집 <질마재 신화> 중 일편이다. 일찍이 곽재구가 극찬했듯이 질마재 신화에 등재된 시편들은 그야말로 편편이 절창이요 알알이 주옥같은 시편들이다. 일독을 강권하는 바입니다. <질마재 신화>는 아마 단행본 시집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미당시전집1>에 그 전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 희랍의 경우, 하나.

 

유피테르(제우스)의 아내 유노(헤라)가 어느날 문득 올림포스 산상에서 아르고스 땅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날이 흐린 것도 아닌데 이상한 구름이 잔뜩 끼여있는 것이다. 헤라의 단련된 촉이 발동한다. 단숨에 지상으로 내려와 구름을 흩어버리고 확인해 보니 아니나다를까 제우스가 강가에 누워있고 그 옆에는 눈부시게 흰 암소가 한 마리 서있다.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사실인즉슨 간통의 현장인 것이다. 구름으로 장막을 치고 강가에서 달콤한 연애에 빠져있던 제우스는 구름이 걷히자 급한 마음에 애인을 흰 암소로 변신시킨 것이다. 그 암소가 바로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다. 단수 높은 헤라는 모른 척하고 이 아름다운 암소가 누구의 것인지 물었다. 제우스는 엉겁결에 대지에서 태어난 소라고 거짓말을 하자 헤라는 암소를 자신에게 선물로 달라고 졸라서 암소를 손에 넣는다. 뒤가 구린 제우스로서는 거부할 명분이 없어 결국 애인을 본부인의 손에 넘기고 말았다.

 

헤라는 백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에게 암소를 맡겨 단단히 감시하게 했다. 소로 변한 이오의 시련은 참담했다. 목에 사슬을 차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쓴 맛이 나는 풀을 뜯어먹고 건초도 깔리지 않은 거친 땅바닥에서 잠을 자야했다. 제우스가 애인의 고초에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이오를 구해오게 한다. 헤르메스는 갈대피리로 아르고스의 혼을 빼고 최면장으로 결국 100개의 눈을 모두 감게 만든 후에 아르고스의 목을 베어버렸다. 후에 헤라는 아르고스의 백개의 눈을 수습하여 자신의 신조(神鳥)인 공작의 깃과 꼬리에 달아주었다. 지금도 공작이 날개를 펼치면 별처럼 반짝이는 아르고스의 보석같은 눈을 볼 수 있다. 100개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고스에게서 벗어났지만 이오의 고난을 계속된다. 헤라가 보낸 등에 떼가 이오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혔다. 덕분에 그녀는 미쳐 날뛰며 세상을 떠돌게 되는데, 그리스를 가로질려 내달렸고, 만의 연안을 따라서도 달렸다. 그 만은 이오니아 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유럽 연안과 아시아 연안을 분리시키는 해협을 건너갔다. 그 해협에는 <암소의 건널목>을 뜻하는 보스포로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시아에 건너와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방황을 계속 하다가 결국 이집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오의 발광과 방황이 끝난 것은 나일강에 이르러서였다. 이 강가에서 이오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제우스를 원망하면서 이 환난을 거두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지성이었으니 감천했을 것이다. 천상에서 이 탄원을 받은 제우스는 헤라에게 이제는 그만 이오에게 내린 벌을 거두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다시는 이오와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틱스강에 대고 맹세를 했다. 헤라의 분이 풀리자 이오는 암소에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일 강변에서 이오는 제우스의 아들 에파포스를 낳았다. 임신한 몸으로 등에에 시달리며 혼 천지를 미쳐 돌아다녔으니 그 고난의 자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에파포스는 후일 장성하여 이집트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 이오는 이집트에서 이시스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끝이 좋아서 다행이다.

 

 

3. 희랍의 경우, 둘

 

질마재 신화에는 <소 X 한 놈>이 등장하지만 희랍신화에는 <소하고 한 X>이 나온다. 사연은 이렇다. 애인을 예쁜 암소로 둔갑시킨 전력이 있는 제우스가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멋진 황소로 둔갑하여 여자에게 접근했다. 제우스는 어느날 눈같이 새하얀 털의 늠름한 황소로 변신하여 에우로페를 유혹했다. 황소가 된 제우스는 처녀를 등에 업고 온 유럽 땅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크레타 섬에 상륙하여 본색을 드러내고 에우로페와 사랑을 나눈다. 이 때는 용케도 헤라의 눈에 띄지 않은 모양이다. 이 에우로페가 낳은 아들이 미노스다.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온의 양자로 자랐다. 아스테리온이 죽자 배다른 형제들과 왕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미노스는 신들이 왕국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주장하면서 포세이돈에게 이렇게 빌었다. “이 크레타 섬이 신들이 저 미노스에게 내린 땅이라면, 포세이돈 신이여 그 징표를 내려주소서. 파도를 가르시고 황소 한 마리를 섬으로 오르게 하소서. 왕국이 서는 날 그 소를 잡아 포세이돈 신을 섬기는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탄원을 접수한 포세이돈이 미노스를 어여삐 여겨 바다로부터 황소 한 마리를 섬으로 보내주었고 미노스는 해신의 이 징표로 말미암아 별다른 저항없이 왕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미노스는 왕위에 오른 뒤 이 황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 그 황소는 아주 훌륭한 황소여서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 자신의 가축들 사이에 들여보낸 것이다. 신을 능멸한 죄는 엄중했다. 미노스는 황소를 자신의 가축들 사이로 들여보냈지만 포세이돈은 황소를 미노스의 가계로 들여보냈다.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에게 욕정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황소를 향한 욕정을 주체하지 못한 파시파에는 마침 크레타에 와 있던 당대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이달로스는 파시파에는 위해서 깜쪽같은 가짜 암소를 만들었다. 가짜 소는 두꺼운 나무로 만들었는데 안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비어있고 겉은 암소 가죽으로 덮었으며 발굽에는 발통이 달려있어 이동이 가능했다. 그리고 가짜소의 엉덩이에는 장정 주먹이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파시파에는 발가벗고 가짜 소의 안으로 들어갔다. 소의 앞다리는 두팔을 끼우기 좋았고 뒷다리 부분에는 두 다리를 끼워넣기에 알맞았다. 파시파에가 가짜소 안에 들어가서 엎드리고 있자 이윽고 황소가 다가왔고 파시파에가 간절히 원했던 결합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 사람 몸에 황소 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해괴하도다.

 

미노스왕은 이 부끄러운 소대가리 괴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라비린토스(미궁)을 만들게 했다. 후일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속에서 소대가리를 때려죽이고 아리아드네와 함게 크레타를 탈출하지만 귀국 도중에 테세우스는 은인인 아리아드네를 내다버린다. 그 벌인가. 아티카의 연안에 도착했을 때 테세우스는 검은 돛을 내리고 흰 돛을 올리는 것을 잊어버려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죽은 줄 알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바다는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게해라고 불린다. 후에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또 다른 딸 파이드라를 아내로 맞이하고, 파이드라는 테세우스 전처의 아들인 히폴리노스를 사모하여 구애하다가 거절당하자 자살해 죽으면서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거짓 유언을 하고, 이를 믿은 테세우스는 아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아들은 저주를 받아 죽는다. 이 이야기는 소생이 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편 다이달로스는 파시파에의 해괴한 간음을 방조한 죄와 미로의 탈출 방법을 아리아드네에게 누설한 죄로 미노스에 의해 자신이 만든 미궁에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갇히게 된다.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밀랍과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 미궁을 탈출한다. 아들 이카로스는 태양에 가까이 가고싶은 욕심에 과욕을 부리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으면서 그만 추락하여 죽는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시칠리아섬에 도착해서 카미코스의 왕 코칼로스의 궁전에 몸을 숨긴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를 쫓아 시칠리아까지 갔지만 결국 다이달로스의 구하기 위한 코칼로스의 계략으로 코칼로스의 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4. 추신, 제우스를 위한 변명

 

인간 남녀가 만나 혼인을 하고 서로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기로 굳은 서약을 하고 끝가지 의리를 지켜 살아본들 50년을 넘기 어렵다.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둘러보고 살펴보면 배우자와의 맹세를 지키면서 한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과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혼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소생은 이혼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은 털끝 만큼도 없다.) 결혼 생활 중에 배우자 몰래 각자의 불타는 욕망을 쫓아 내달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희랍의 신들은 흔히 인격신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나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유일신과는 완전 다르다. 희랍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이 희노애락의 출렁이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희랍의 신에게 삶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고 몸은 결코 죽지않으면서 또 건강하다. 천년만년 어떻게 한 배우자만 바라보고 살 수 있겠는가. 소생이 올림포스의 관혼상제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이혼의 제도가 있었다면 제우스와 헤라는 벌써 이혼했을 것이다. 이혼은 신들에게는 금지 사항인지 신화를 아무리 뒤져봐도 신들이 이혼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제우스를 바람둥이, 난봉꾼, 호색한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제우스가 자신의 신전에 거대한 하렘을 만들었나? 삼천궁녀를 거느렸나? 신들 중의 신인 올림포스의 주신(主神)임에도 죽지육림에서 헐떡인 것은 아니라는 이이기다.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도 모르는 세월동안 십수 건의 외도가 있었을 뿐이다. 수학적으로 계산해도 제우스는 평균적인 인간 남성에 비하자면 훨씬 순수한 배우자인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희랍의 신들처럼 불사의 몸으로 수천 년을 살 수 있고, 더불어 그들이 가진 권능의 만분지일만한 능력이라도 갖고 있다면, 제우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 실로 명약관화하고 명명백백하다. 남자든 여자든간에 말이다. 그런 인간들이 제우스를 가리켜 바람둥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희랍 신들의 한때는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신상들과 신전들은 깨어지고 잘라져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혹은 부서져서 이끼긴 돌덩이가 되어 폐허를 뒹굴거나 흙속에 묻혀 잊혀졌을 터인데, 소생이 이제와서 올림포스의 주신인 제우스에게 무슨 은혜를 입은 것이 있다고 그를 위해 구질한 변명을 구구절절하겠는가. 다만 늙고 눈먼 시인들이 전해 준 오래전 희랍 신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그들의 애증과 애환에 감정이입이 되어서인지 문득 제우스가 호색한, 난봉꾼, 바람둥이라 불리워 지는 것이 조금 안타까워 몇 자 남기는 것이다. 누구나 남의 눈의 티끌은 쉽게 보나 제눈에 박힌 들보는 보지 못하는 법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5-07-1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신화라고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신을 해석하려는 시도라고만 생각했는데, 님의 시선은 독특하지만 그래도 재밌네요~^^

붉은돼지 2015-07-12 18:13   좋아요 1 | URL
제우스에 대한 제 생각은 신화 속의 소와 관련한 대목들을 읽다가 그냥 문득 떠오른 것이어서 한번 적어봤습니다.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7-12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 제우스를 바람둥이, 난봉꾼, 호색한이라고 흉보고는 했는데..... 찔립니다..

붉은돼지 2015-07-12 18:10   좋아요 1 | URL
저도 뭐 손가락질하며 흉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조금 부러워하는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음.....

cyrus 2015-07-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우스 입장에서는 난봉꾼의 대명사로만 알려진 게 상당히 억울할거예요. 그리스 신화를 끝까지 읽어보면 제우스만 바람을 피운 게 아니니까요. 아프로디테가 오늘날에는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졌지만, 신화 속에서는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몰래 군신 아레스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올림포스이 신들이 보는 앞에 들통이 나서 망신을 당하잖아요.

붉은돼지 2015-07-13 10:32   좋아요 0 | URL
올림포스의 그 분들은 요즘은 뭐하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로마를 세우고 지탱해온 한 축 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퇴출당한 이후로 소식이 없군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