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김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특별한 애착을 갖고 책들을 쌓아놓거나 분류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책은 자료나 사전, 일종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에요. 광부의 장비가 곡괭이나 삽, 플래시 그런 것이듯 이 방에는 나의 도구들이 있어요.”, “저는 각종 언어 영어, 독일어, 한문, 국어사전과 우리나라의 여러 법전을 가지고 있지요. 한문 사전을 주로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여가가 있을 때는 한자의 글자를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쓰려면 외국어, 특히 한문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전은 이해가 가는데 법전은 어디에 써먹는지 자뭇 궁금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김훈의 서재에는 단국대에서 나온 <한한대사전>도 보인다. 몇십년간 <이규태 코너>를 쓴 이규태나 요즘 조선일보에 <세설신어(世設新語)>를 쓰고 있는 정민같은 분들을 보면 정말 도구로서의 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고한 이규태는 월급의 1/3을 도서구입비로 지출했다고 한다.) 가끔 인터넷으로 정민의 세설신어를 보는데 현 세태에 딱 맞아떨어지는 옛일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내어 한편의 깔끔한 칼럼을 완성해 내는지 그 솜씨가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나만은 요즘 들어서는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뭐 뼈에 사무칠 그런 정도는 아니고... 공부는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릴 때 억지로라도 공부를 많이 시켜야 된다는 그런 주의는 당연 아니다. 소생도 소생의 어린 여식에게 공부를 강요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다. 소생이 중학교 다닐 때 방학만 되면 아버지의 강권에 어쩔수 없이 향교에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다. 머리 허연 할아버지들 틈에 끼여 아침마다 맹자며, 논어며, 고문진보며 이런 것들을 배웠다. 할배들로부터 어린 넘이 참 기특하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향교 수업은 아마 아침 7시~8시까지 였던 것 같다. 7시까지 향교에 가려면 집에서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 한없이 달달한 꿀잠을 원없이 잘 수 있는 방학인데, 그 피같은 꿀잠을 포기하고 새벽마다 향교에 다니려니 정말 곧 죽을 지경이었다. 배우는 한문이 중학생에게는 어려운 수준이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니 공부가 잘 될리 없다. 그래도 그때 주워 들은 공력으로도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한문 좀 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허!

 

고등학교 진학하고는 향교에는 안다녔는데 역시 어릴 때 배운 게 무서운지 나중에 대학졸업 즈음에 취직준비를 할 때 갑자기 한문공부가 하고 싶어져서 취업 준비하면서 틈틈이 <논어집주>를 각주까지 한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완독한 적이 있다. 한 1년 걸렸던 것 같다. 논어 완독이 취업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지만 심적 안정에 보탬이 되었는지 어쨌든 취업이 되었고, 직장에 다니고 부터는 다시 한문과는 영영 빠이빠이가 되었다.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쉬지않고 한문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은 집구석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문집들도 무슨 글하는 선비마냥 술술술 읽고 했을텐데... 하는 헛된 생각을 해본다. 해본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다.

 

오늘 <곁에 두는 세계사>, <19세기 영남학파의 종장 – 정재 류치명의 삶과 학문>을 구입했다.  <곁에 두는 세계사>는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구와 같은 책이다. 소생이 뭐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취미로 서재질을 해도 나름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역사 관련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잘 정리된 연표가 있었으면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던 차이다. 가격이 좀 나가지만 차일피일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 김훈의 말마따나 도구라고 하면 역시 사전이 그중 으뜸이다. 소생 필생의 과업이 또 많지만 그 중 하나는 단국대학교에서 나온 <한한대사전>을 완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4권을 구입했다. 본편 1권, 2권, 3권과 색인 1권이다. 권당 10만원이다. 억소리 난다. 색인도 5만원이다. 색인포함 총 16권이다. 155만원. 허허허. 그만큼의 소용이 있을지는 역시 미지수다.

 

 

 

 

 

 

 

 

 

 

 

 

 

 

알라딘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퇴계학파 인물시리즈라는 책이 무려 15권이나 나온 것을 알았다. 한문이나 한학에 대한 향수가 밀려와 그중 하나를 구입했다. 그것이 <19세기 영남학파의 종장 – 정재 류치명의 삶과 학문>이다.

 

 

 

 

 

 

 

 

 

 

 

 

 

 

소설가 이인화의 본명은 류철균이다. 논란이 되었던 2000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시인의 별>을 보면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 물의 골짜기 어쩌고 하는 작가의 고향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물의 골짜기란 한자로 수곡(水谷)이고 물의 마을이란 한글로 무실이다. 이인화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선대의 고향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의 무실마을이다. 임하댐 건설로 마을은 이미 오래전에 수몰되었다. 물속으로 사라진 물의 마을 무실. 고택들은 뜯어서 구미 해평으로 옮겼다. 이인화는 전주류씨 수곡파이고 퇴계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의 거두 정재 류치명은 이인화의 직계조상이 된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도 류치명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인몽의 아내가 도망친 곳이 류치명의 집이고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부사영감도 류치명이다.

 

 

 

 

 

 

 

 

 

 

 

 

 

 

양반이라고 하면 당파싸움으로 나라 말아먹은 추물 취급을 하고 영남학파니 안동이니 하면 무턱대고 보수 꼴통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것 같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떠나 조선이 500년을 버틴 것은 성리학을 한 양반사대부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사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지방도 단연 안동이다. 소위 빨갱이가 되어 월북한 인사들도 많았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안동사람은 아니지만 (이인화의 고향 무실에서 산봉우리 하나 넘으면 바로 영양 석보다.) 역시 공산주의자로 전쟁 중에 월북했다. 처자식 버리고 떠나는 심사가 오죽했으리오마는 빨갱이 새끼로 낙인찍힌 이문열과 그 가족들은 혹독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는 그 비극적인 가족사의 기록이다.

 

 

 

 

 

 

 

 

 

 

 

 

 

 

 

이문열은 영양 석보의 재령 이씨다. 이문열의 조상인 갈암 이현일은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큰 선비다. 영남학파의 학통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에서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등등을 거쳐 정재 류치명에 이른다. 영남학파는 학문적으로는 퇴계의 학문을 계승했고 정치적으로는 남인이었다. 영남 남인들은 영정조이후로는 정권에서 완전 소외된다. 그 소외에 대한 반동이 항일 구국운동으로 분출되었을 지도 모른다. 또 정권에의 소외가 학문적 성취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권력 투쟁에서 완전 퇴출로 상처입은 자존심은 비록 누추한 지방에 거처하지만 심오한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는 학같이 고고하고 꼬장한 선비상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자신들은 권력을 놓고 승냥이처럼 서로 물어뜯고 이전투구하는 탐관오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니 어쩌면 학문에 매진하는 척하면서도 항상 중앙정계로의 복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한낱 포말로 스러진 영남남인들의 정치적 야망에 대한 진혼곡이자 자기연민의 애가에 다름아닌 것이다.

 

 

추신 1.

김훈 관련 자료를 찾으려고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를 검색했더니 지식인의 서재가 업데이트 되었다. 한분이 추가되었다. 금회 인터뷰어는 천병희다. 천병희의 서재도 김훈의 서재와 비슷한 맥락이다. 천병희 편의 타이틀은 “천병희의 서재는 작업장이다.”이고, 김훈 편의 타이틀은 “김훈의 서재는 막장이다.”이다. 지식인들이 추천하는 내 인생의 책들은 주요 관심사항이어서 목록을 꼼꼼이 체크하며 본다. 여기서 소생은 귀중한 책을 처음 접하기도 하고 지식인의 소개로 재발견하게되는 반가운 책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번 천병희의 추천도서는 반 이상이 본인의 번역서들이어서 약간 실망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천병희 선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제외하고 과연 무슨 책을 추천할 수 있겠는가.

 

 

추신 2.

오늘 두권을 주문하니 오만원이 넘었다. 짜잔... 드디어 복불복 도전의 기회가 다시 왔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전에 삼세번 어쩌고 하면서 세 번만 하고 그만한다고 했는데 오늘까지 포함해서 다섯 번도 넘은 것 같다. 당근 당첨된 적은 없다. 오늘은 간도 크게 5만 마일리지에 도전했다. 역시 꽝이다. 소심한 넘이 대범한 척 할려니 뭐가 잘 안되고 속이 쓰리다. 간이 자꾸만 땡땡 부어오르는지 불뚝 오기가 생길려고 한다. 깜량을 모르고 쓸데없이 오기부리면 끝이 안좋은데 하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새 발이 질퍽한 늪속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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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6-05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해외구매라서 이런 저런 혜택은 거의 못 누리고 삽니다만.ㅎㅎ 그나저나 붉은돼지님도 참 대단한 책사랑을 보여주시네요.ㅎ 한학교육을 받은 부분은 부럽기 그지없구요. 아직도 한자를 좀 알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한데, 이젠 어렵네요.

붉은돼지 2015-06-05 10:20   좋아요 0 | URL
한자 공부는 지금부터 하셔도 될 듯합니다. 뭐, 공부는 평생..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다죠 ^^
해외구매에는 복불복 이런 게 없는 모양입니다. 안타깝습니다요..ㅎㅎㅎㅎ
저는 언젠가는 고액마일리지에 꼭 당첨될 것만 같아요..ㅋㅋㅋ

[그장소] 2015-07-1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옥편놓고 사전놓고 말뿌리 찾다 하루가 온통 가는 날들이 있곤하는데,저는 있는 것도 소화 못하는 주제라 이런 책 덥썩 사는 분 서재는 어떨까..마구 궁금과 부러움이...^^ 도전하신 것에 응답이 꼭 있으시길 응원놓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