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많은 걸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재삼 삼삼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미 읽어보신 독자제위들께옵서는 당근지사로 아시겠지만 문국진 박사는 1925년생으로 올해로 꼭 만80세이다. 그 연세에 아직까지 글을 쓰신다니 존경스럽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취미나 개인적 관심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 전문가 못지 않은 일가를 이루었으며 여러권의 저서를 내고 하다니 실로 본인이 본 받아 따르고자 하는 바 사표 비슷하다. 사표는 그저 사표일 뿐이지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표를 쓰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사표 이야기를 하다보니 뜬금없이 사표가 쓰고 싶어진다. 사표 던지고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책이나 읽고 잠오면 자고 그러고 살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어디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던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런 이야기 되겠다.
신체 추형장애라는 것이 있단다.(요즘같이 복잡 다단한 어지러운 세상에 뭔들 없겠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들의 동경이나 원망을 모르는 바 아니니 그런 정신장애가 생긴다고 별 이상할 것은 없다. 누구나 조금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고(본인은 돌출형 구강구조 - 튀어나온 입 - 로 수년간 남몰래 고민해 왔고, 유년에는 놀림도 당하고 했던 것이니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 고민에서 벗어났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남들에게 좀 더 예쁘게 보일려고 노력한다. 미에 대한 선망은 인지상정을 떠나 인간의 본능이다는 생각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무엇이든지 도를 넘어서는 것이 문제다. 물론 콤플렉스가 자기개발의 동력이 되는 수도 있겠지만, 근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선풍기 아줌마나 마이클 잭슨의 예에서 보듯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수도 있다. 불현 듯 어느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발생한 에너지가 자기발전의 동력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자기파괴의 마력으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리라. 이름하여 주화입마!!!
대학교 땐가 언젠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성형수술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100분 토론 비슷한 난상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술자리 토론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시끄럽기는 엄청 시끄러워 호떡집에 불난듯이 와자지끌 소란하지만 대개는 결론없이 흐지부지 지리멸렬, 잘하면 싸우기 일쑤고 나중에는 술에 취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누가 떵을 싸 발랐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고...... 한마디로 한심하게 그리 되는 그런 것인데....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날의 성형수술에 대한 토론에서는 아마도 ‘신체발부 수지부모형’의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였던 것 같고, (물론 기형에 대한 성형에는 모두 찬성이었다) 미용내지는 외모 컴플렉스의 극복방안으로서의 성형수술을 지지하는 일부 성형옹호론자들의 반론도 만만하지는 않았던 것인데 나름대로 일리도 있고 나아가 삼사도 있을 법 했던 것이다. 성형을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우리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올바른 가치관과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외모의 변화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행정진을 통한 정신의 고양에서 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본인의 이러한 생각은 과거 단발령에 반발하여 상투를 붙잡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내 목을 쳐라 의연히 외치던 구한말 양반들의 고루한 사상과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왠지 그 먼지먹은 외침에 자꾸만 애정이 간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램브란트의 ‘눈먼 삼손(p200)’을 꼽겠다. 사랑과 배신(이 두 단어는 서로 이웃하고 사는 경우가 많아 어울리는 면도 있다. 사랑과 야망, 사랑과 영혼 등도 자주 쓰이고는 있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배신과 이웃할 때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것 같다.)으로 점철된 성서속 영웅의 비극적 말로를 그린 그림은 그 치명적인 배신의 정신적 고통이 눈알이 뽑히는 육체적 고통으로 표현된 듯 하기도 하다. 눈알이 찔리며 고통에 몸을 뒤틀고 얼굴을 오만상 찡그리고 있는 삼손의 얼굴을 보며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해봤다. 연이나 마음의 상처 어쩌고 하면서 센티하게 주절거리고 있지만 여하튼 눈알이 찔리는 고통은 정말 엄청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자의 말처럼 쇼크사를 일으킬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알이 안 찔릴려면 여자를 사귈 때 조심해야 한다. 데릴라 같은 나쁜 여자를 사귀게 되면 인생이 비극적으로 된다.
흔히 빛과 영혼의 화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램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느끼지만 그의 그림속에는 빛이 있다. 눈이 부신 그런 환한 빛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하며 은은한 빛. 영화 <퐁네프의 연인>에서 줄리에트 비노쉬(실명의 위기에 처한 인생 막가는 처녀화가로 나온다. 물론 아시겠지만)가 그렇게도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멋대로 짐작해 본다. 자신의 실명이 램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회복될 수도 있다는 희망과 소원을 가져본 것이리라. 삼손의 고통스런 얼굴과 대조적으로 데릴라는 한 손에는 커다란 엿장수 가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삼손의 머리에서 짜른 머리터레기를 휘날리며 비웃는지 조금 바보스런 얼굴로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다.(자고로 여자 때문에 망한 영웅호걸들이 수다하거니와 큰일을 할려면 김유신처럼 말목아지를 단칼에 베어야만 하겠지만, 독자나 관객은 김유신보다는 사랑의 배신으로 피 흘리며 쓰러지는 영웅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 슬픈이야기에서 독자나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그런 말이다..) 삼손의 팔을 잡고 있는 병사나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의 겁먹은 듯한 표정도 재미있다. 독자제위들의 집중적인 감상을 권하는 바이 올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