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독 독
1998년 7월 와카야마시의 여름 축제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은 주민 67명이 독성이 강한 비소중독 증상을 보였으며, 이 가운데 어린이를 포함해 4명이 숨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체포된 47살의 주부 하야시 마스미는 살인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는데 11년이 지난 2009년 4월에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에서 최고재판소는 카레라이스에서 검출된 비소와 성분 특성이 같은 비소가 피고인의 자택에서 발견되었고 피고만이 카레를 만드는 냄비에 비소를 투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뚜껑을 열었다 닫는 등의 수상한 움직임이 목격된 점 등을 종합하면 하야시 피고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피해자와 유족이 바라는 동기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야시 피고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하야시 마스마는 변호인을 통해 공개한 메시지에서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범죄학자인 브라이언 마리너가 쓴《독살의 기록》을 보면 비소는 금속계 독극물로 계관석이라는 광석 표면에 자연발생한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되어 8세기에 중동의 연금술사가 이 광석에서 비소산화물 채취방법을 발견했고 이후 비소는 살인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독극물이 되었다. 독극물로 비소가 가장 많이 사용된 이유는 구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하얗고 냄새가 없는데다 맛도 거의 없어(달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밀가루나 설탕 또는 음료에 섞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비소는 유리공예나 염색 벽지용 인쇄잉크 제조에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체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된 것은 그 이전 황제가 유배된 세인트 헬레나 섬의 숙소의 초록벽지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벽지에 포함된 비소는 알신 가스로 서서히 방출되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황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전에 신문을 보니 스위스 어떤 연구팀은 나폴레옹이 사망전까지 20년간 입었던 바지 열두 벌을 비교해 체중 변화를 추정하고 이를 남성 위암 환자 270명의 체중 변화와 비교한 결과 두 수치가 정확히 일치한다며 독살설을 일축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인은 아직까지 논란중이지만 청나라 황제 광서제의 사인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2008년 11월 2일자 홍콩 문회보의 보도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비소에 의한 독살로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광서제는 1875년 4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지만 이모인 서태후가 오랜기간 수렴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1898년 강유위 등의 개혁파와 무술변법을 단행했으나 원세개 등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서태후에 의해 10여년간 유폐되었다가 1908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바로 다음날 서태후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문회보에 따르면 광서제의 사인과 관련하여 ‘서태후가 자신이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 고도 하고 또 어떤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광서제는 신체가 허약하여 병사했다’고 하는 등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도굴된 채 방치된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광서제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고 이후 모발과 유해에 대하여 5년간에 걸친 고도의 과학실험과 과학적 계산의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소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직전 황제 고종의 죽음에도 비소 독살설이 파다하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전의가 홍차에 비소를 넣어 고종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서제와 같이 명쾌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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