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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상실의 시대>를 처름 읽은 게 아마 90년대초이니 그 후로 세월은 흘러흘러 무심하게 흘러 바다가 변해 들판이 되기도 하고 뭐 벽해상전이 되기도 하고하는 그러는 동안 하루키는 영영 잊고 지내다가 어느날 불현 듯 아니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여행에 관심이 생겨 <먼 북소리>를 읽게되고 <우천염천>을 펴게되고 그러다가 누구나 그렇듯이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 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듯이 수구초심으로 다시 돌아온 곳이 바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되겠다. 인생도 그런 것일 것이다. 공수래 공수거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니 끝과 시작이 붙어있는 윤회의 굴레 되겠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쩌고 저쩌고 이른바 혼성모방 운운하며 포스터모더니즘 논쟁을 유발했던 인물이 하루키상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흐름 그 와중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가 이인화, 장정일, 박일문 인 것 같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하루키하면 이 세명의 작가가 떠오른다. 그 셋중 이인화는 정말로 무모하게도 겁도 없이 <인간의 길> 같은 위험한 소설을 쓰다가 막강한 권력으로부터 매고 쓴 신산스러운 맛을 좀 봤을 테고 그런연유로 요즘은 노선을 조금 틀어 에니메이션이나 영화 시나리오 같은 곳으로 눈을 돌린 것 같다(줃어 듣자니 그렇다 하더라).
장정일은 처음에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작품으로 장정일은 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가 되었다. 28살이었지 싶다), <아담이 눈뜰 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등 꽤 괜찮은 시와 소설 쓰는 듯 하여 마음 설레이게 하였으나 자꾸만 점차로 야리꾸리하고 변태스런 것에 천착집착하여 굴을 파고 들어가더니만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박일문은 그후 여자문제로 한 차례 곤욕을 치른 듯한데 요즘도 소설을 쓰는지는 잘모르겠다. 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인이 그 옛날 학창시절 흐름한 막걸리 집에서 창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요도 아니고 중염불 비슷한 노래를 부르며 가객행세를 하고 있는 박일문을 만난적이 있었다. 그때 박씨는 중국 문화혁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각설하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유감스럽게도 30대 중반의 한심한 직장인에게는 별무감흥이다. 20대에 읽었다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늙으나 젊으나 변함없는 것이 있다. <1973년의 핀볼>에 등장하는 쌍둥이 경험은 대단히 부럽다는 생각이다. 똑같이 생긴 것 둘을 옆에 하나씩 끼고 침대에 누워 놀 수 있다는 건 역대 중국 황제들도 누리지 못한 호사다.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기분이다. 한심하지만 어쩌랴 영웅만 호색인가 이는 남자로 태어난 자가 지는 짐이니 일러 운명이라고도 한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