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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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고등학교 시절인 것 같다. 다시한번 그러니까 그게 20년이 조금 넘었다. 생각해 보면 세월 참 빨리 지나갔다. 세월유수란 말이 옛시인의 허사는 진정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그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아 풀숲을 뒤적여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때 고등학교 시절엔 라디오도 꽤 듣고 그랬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매일 저녁 10시쯤 되면 무슨 공익광고협의회 같은 데서 청소년 선도 광고 같은 것을 방송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바로 본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 것이다. 고때의 방송내용을 오랜 옛기억을 더듬더듬어 생각나는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틀린지도 모른다. 여하튼 내 기억에는 요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 여러분은 헤르만 헷세의 소설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이야기’를 읽어보셨습니까?……어쩌고 저쩌고(크눌프가 젊음을 낭비하며 호랑방탕하게 살았다는 요지의 이야기가 나옴)…크눌프는 눈덮인 산속에서 젊음은 결코 충동적인 낭만만은 아니라고 절규하며 죽어갑니다……어쩌고 저쩌고(그러니까 청소년 여러분도 젊을 때 되나마나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요지의 이야기가 이어짐. 그리고 시간이 늦었으니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은 빨리 집으로 귀가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음)……”  

이 방송을 수십번 아니 - 총명하지 못한 내 머리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 수백번쯤은 들은 것 같다. 그래서 그때도 혼자서 나름 독서인이었던 나는 냉큼 크눌프를 사서 읽었는데 이게 뭔가 방송멘트하고 책 내용은 조금 틀려먹었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요 며칠 감기로 좀 아팠다. 지난 토요일 일요일 계속 누워있었는데, 그래도 좀 살만은 했는지 가만히 누워있기가 심심해서 뭐 쉽게 읽을 만한게 없을까 책장을 뒤적이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크눌프를 잡았다. 책도 얇고 행간도 넉넉하고 위에서 말한 그 옛날 방송멘트도 불현듯 생각나고 해서 읽어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건 여담인데, 본인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미스터노 페이퍼백 시리즈를 좋아한다. 책이 표지 디자인도 멋지구리 예쁘고 또 가볍고 작아서 좋은데 - 책정리나 이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책이 가벼운 건 무척 중요하다 - 다만 행간이 너무 좁아 읽기에 눈알이 다소 아프다는 단점이 있다. 미스타노 세계문학전집에 비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행간이 시원시원하고 목록이 다양해서 좋은 것 같다. 말인즉슨 둘다 좋다는 이야기)  

역시 헤세의 소설은 뭐랄까 아늑하고 포근하고 또 쓸쓸하고 슬프다. 깊이가 없다는 비평도 있는 듯 하지만 편안하고 감흥도 있다. 어쨌든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며 재독한 결과, 크눌프가 눈덮인 산속에서 죽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 삶을 후회하고 절규하며 죽어간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듯한 자유롭고도 쓸쓸한 크눌프의 삶도 의미있는 삶이었다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듣고 편안하게 두눈을 감은 것이다. 절규하며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말하자면 노장의 무위사상과도 일맥이 서로 통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때 그 방송원고를 쓴 사람은 과연 책을 읽어보고 쓴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누구 아는 사람없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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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경 2010-04-2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로 위의 글... 저와 (너무나도) 똑같은 경험이신 것 같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옛날 그 유명한(?) 멘트 "젊음은 충동적인 낭만만은 아니라고 절규하며 죽어갑니다..."를 찾아 보다가 우연히 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잘은 모르오나 동시대인으로 생각되어 몇 자 남기고 갑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