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중한
쉬는 날, 일중독 증세가 있는 우리 부부는 하루를 비우려고 애를 씁니다.
한 방법으로 집과 일터를 떠나는 것이지요.
타임머신을 타고 - 사실은 자동차를 타고 - 유년의 뜰로 돌아갑니다.
친정어머니의 형제는 1남4녀였지요. 모두들 결혼을 해서 두 명에서 많게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외사촌 이종사촌을 합치면 스무 명이 넘었어요.
다 고만고만해서 방학하기가 무섭게 모두들 외갓집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사업을 하시던 저희 집은 그래도 형편이 나았지만 이모부가 초등학교 교사와 전매청 공무원이었던 이모네는 살기가 좀 어려웠어요.
그래서 방학이면 입 하나 덜기 위해 모두들 외갓집으로 갔던 것이지요. 외갓집은 엄청 부자였거든요.
그러나 부잣집이라고 밥을 먹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큰 이모는 지금 연세가 아흔 살이 넘으셨는데 당시에는 드물게 일본유학생이랑 신식 결혼식을 올렸지만 자녀 한 명도 없이 당시에는 꿈꾸기도 어렵던 ‘이혼’ 이라는 것을 했어요.
충격을 받으신 외할아버지는 나머지 딸들을 ‘대충’ 결혼시키기에 이릅니다.
우리 어머니는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인데 외할아버지는 혼수를 해주기 싫어서 가난한 집을 골라서 시집을 보내셨고, 우리 친가는 부잣집 딸이니 혼수를 많이 해오리라 기대를 하고 며느리를 보았어요. 그러니 그 사이에서 어머니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지금 보니 친가와 외가가 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어요.
두 사돈이 가끔 장에서 만났다는 겁니다. 외할아버지는 양반이셨지만 부지런하셔서 당대에 일가를 이루셨고 친할아버지는 양반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셔서 몸을 부리기를 싫어하셨답니다. 그러니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돈간이셨겠지요.
아무튼 그런 형편이었으니 외할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외손주들이 반갑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외숙모님은 우리들을 거두어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아가며 쌀밥을 해먹입니다. 들키는 날에는 ‘손이 헤퍼서 나중에 빌어먹을 년’이라는 욕설을 듣기도 하지요.
그리고 개학날이 다가오면 서너 마리 닭을 잡아서 삼계탕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제 유년의 추억의 주인공인 외숙모님도 두어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외사촌, 이종사촌들이 한자리에 모였드랬습니다.
모두들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이제 나이 들어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외숙모가 가시고 난 외갓집을 외사촌 동생 혼자서 지키고 있습니다.
1932년에 지은 이 집은 아직도 끄덕없어 보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집인지요.
노후를 준비하면서 이곳에 작은 땅을 마련한 것은 저의 이런 추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개발이 덜된 탓에 아직도 그 시절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쭉 뻗은 신작로, 강가의 미루나무, 다슬기 줍던 강, 과수원......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 저는 유년의 뜰로 돌아갑니다.
남편은 근처에 심어놓은 매실 나무를 돌보러 가고,
저는 낮에는 비어있는 외갓집 마루에서 이렇게 망중한 중입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써야 하는 일도, 자존심 상하는 일도, 그래서 마음을 싸안고 남 모르게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 그것은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