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미스터북맨



 
20대가 될 때까지 나는 식물성 위주로만 먹는 편식을 했다. 반면에 내가 읽었던 책들은 축산전서에서 성경 · 무협지 · 추리소설 · 아동문학 전집 · 교과서까지 아주 잡다했다. 20대 에 군대를 가게 되면서 나는 잡식성으로 식성을 바꾸었다. 군대라는 환경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측면이 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고기맛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군대 시절 이후의 독서 범위는 문학과 인문학, 역사 등으로 상대적으로 순수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안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라면 그 중에서도 내가 흥미있어 하는 것이 순진무구, 천진난만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잡다했다. 30대에 들어서는 음식도 별로 가리지 않게 되었고 분야도 그다지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키는대로, 얻어걸리는대로 감사하며 먹고 읽었다.

 

나라는 인간은 잡하다. 내가 하는 일, 소설을 쓰는 일은 문학 안에서도 불순, 잡스러운 것에 속한다. 불순하다, 잡스럽다, 잡다하다, 잡종이다라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이 ‘잡, 잡, 잡’에서 힘을 느낀다. 나는 이종 간의 충돌, 혼합, 교잡이 새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믿고 순수하고 가녀린 화원의 꽃보다 더 생명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은 이런 내 생각을 굳건히 지지해 준다. 

 

나는 반드시 건전하고 고전적인 책을 읽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권하지도 않는다. 책의 하위문화에는 그에 걸맞는 매력적인 새로움과 강한 생명력이 있을 것이고 상위문화에는 기품과 깊이, 시간의 단련을 견뎌온 단단함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이 각자의 영역에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문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며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고 복제하는 가운데 진짜 문화가 된다. 진짜 문화가 되어야 좋은 문화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20대에 내가 읽고 가슴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책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외상죽음]    *가브리엘 바르가스 요사 [빤딸레온과 그의 위안부들]
크누트 함순
[굶주림]


군대에 다녀와서 장편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홍명희 : [임꺽정]               *박지원 [열하일기] 외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로버트 버튼 편 [천일야화]   *허먼 멜빌 [백경]         *귄터 그라스 [양철북]
장 폴 싸르트르 []

 

재미있게 읽은 시도 물론 있다. 시집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시인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정현종 이하 *고트프리트 벤파블로 네루다 *파울 첼란 *자크 프레베르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쉽게도 희곡은 마음에 맞는 작품을 많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가에 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페트 한트케 [관객 모독]  

으젠느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오태석 [초분]

 

그리고 워낙 재미있어서 한 번 집어들면 손에서 뗄 수 없던 명작들이 있었으니.

고우영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서유기] [일지매] [임꺽정] [십팔사략]

 

그리고 역시 한 번 손에 들면 놓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유쾌한 작가가 두 사람 있다.

에프라임 키숀 [가족] [돼지는 돼지다]    *로얼드 달 [] [세계 챔피언]

 

흥미롭고 짧으며 시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재미는 기본이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어가 사람이라고?] *프란츠 카프카 [변신]

 

근래에 읽은 인문학 관련 책에서 인상적인 필자는 빌 브라이슨이다. 대책없이 잡다한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참고로 지금 내 책상 위의 작은 서가에 꽂혀 있는 ‘잡스러운 책’의 제목을 쓰면 이런 식이다. [띄어쓰기·맞춤법 용례] [음식 상식 백 가지] [미식 소식이 오래 산다] [제주도 관광 정보 매거진] [내 몸의 신비] [벌거벗은 여자] [세상의 나무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음식에 관한 47가지 진실]... 책상 위에는 [먹지마, 위험해!]와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이 펼쳐져 있고 오른편에 있는 에어컨 박스 위 임시 서가 앞줄에는 [빠블로 네루다]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문학동네] [게으른 산행] [한국식품문화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하루만에 정복하는 부동산 재테크]가 꽂혀 있다. 뒷줄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학의 윤리] [역주 매천야록] [오늘의 SF걸작선] [하늘에서 본 지구] [우리말의 뿌리] [조선역사]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 사람의 어깨 너머로 엿보이는 책의 제목을 통해 그 사람의 직업과 기질, 나이와 성향을 가늠하곤 했다. 누가 지금 이 목록을 읽는다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잡스러운 인간? 그렇다면 만족이다. 소설은 바로 잡의 장화니까. 어, 장화 아니고 정화(精華)다. 생각해 보니 장화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설은 잡의 정화의 장화라고 하자.

 

   성석제님의 추천 테마책 보기 > "나는 잡식성이다"







 

 

 

성석제 /소설가.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며 소설을 쓰기 시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등의 창작집과 [재미나는 인생] 등의 짧은 소설, [인간의 힘] 등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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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놀자 > 책정리 달인들의 노하우 10가지

 많이 읽기로 유명한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을 이고 이사를 다니다 결국엔 지하1층, 지상 3층 규모 의 빌딩을 사들여 서가 전용으로 꾸몄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고양이 빌딩’이다.

“책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1) 분류 공식의 노예가 되지 말라〓개인 서가를 정리하면서 도서관의 분류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 도서관의 분류법은 전문적이어서 일반인은 책을 찾는데 오히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연역적이 아니라 귀납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2) 모든 책은 3가지로 분류하라〓책을 중요도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한다. 1종은 바로 곁에 두지 않으면 작업 효율이 떨어지는 책이다. 2종은 가끔 찾아보는 중요한 책, 3종은 더이상 찾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책이다. 1종은 책상 위나 옆의 책장에 둔다. 2종은 서재의 책장에 꽂아두고 3종은 상자에 담아 다락방이나 베란다 등 빈 공간에 둔다.

(3) 책이 많을 땐 간단한 분류 코드를 만들라〓1종과 2종의 경우 문학,경제와 경영, 철학, 실용서적 등 취향대로 5, 6개 범주로 나눠 선반을 달리해 정리한다.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책이 100권을 넘으면 다시 소장르나 저자의 국적 등 1, 2개의 하위 분류 코드를 활용해 분류한다.

(4) 꺼낸 책을 다시 꽂을 때는 왼쪽부터 꽂아 나간다〓꺼냈던 자리에 꽂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왼쪽부터 꽂아나가면 오른쪽 끝부분 책들은 이용 빈도가 낮은 책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책장이 가득 차면 오른쪽 끝부터 빼내 1종은 2종 책장으로, 2종은 3종 상자로 옮기면 된다.

(5) 서재 결혼시킬 땐〓결혼해 부부의 서가를 합쳐야 할 때는 우선 책의 분류 방식에 합의해야 한다. 합의가 어려울 경우 분류법이 까다로운 쪽을 따르는 것이 좋다. 깐깐한 분류법을 따르던 사람은 허술한 분류 체계에서는 책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이 2권 있으면 책의 여백에메모를 해놓은 것 등 ‘사연’이 있는 책을 살린다.

(6)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의 구분〓읽은 책은 읽은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읽지 않은 책들은 읽고 싶은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 독서 취향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알 수 있다. 아니면 읽지 않은 책은 책의 제목이 거꾸로 읽히도록 뒤집어 꽂아두면 “저 책을 빨리 읽어 바로 꽂아두어야지” 하는 압력도 받을 수 있다.

(7) 독서를 장려하려면 책을 한군데 모으지 말라〓책이 가까이 있어야 읽게 된다. 서재를 중심으로 정리하되 TV나 거실 소파 옆, 화장실, 식탁 등에 책을 놔둔다. 화장실에는 가벼운 시집, 침대 옆에는 단편소설, 식탁옆에는 가벼운 상식책, 거실에는 중장편 소설책이 좋다.

(8) 책장은 비싼 걸로 충분히 준비한다〓책장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책을 사다 꽂아두고 싶은 생각이 든다. 또 책장을 비워놓아야 책을 사고 싶어진다. 그래야 읽게 된다.

(9) 책 잘 버리기〓내게 필요없는 책들도 요긴하게 읽어줄 사람들이 많다. 초중고교 도서관이나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공부방, 고아원, 장애인 시설, 낙도의 학교 등에 기증한다. 초중고교 단위로 매월 혹은 분기별로 여는 벼룩시장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증정본은 보내준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부분을 떼낸 후 버리는 것이 예의다. 버리지 않고 특정 기관에 기증할 때는 서명 밑에 간단한 사유를 적는다.

(10) 정기 간행물은 목차만 떼낸 후 버린다〓논문집, 월간지, 주간지 등은 필요한 부분만 분철하고 목차를 떼내 파일에 정리한 후 나머지는 버린다. 언제 어디에 실렸는지만 알면 인터넷에서 찾아 보면 된다.

참고〓이어령 교수, 헨리 페트로스키의 ‘서가에 꽂힌 책’, 하야시 하루히코의 ‘정리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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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유교적으로 늙어가는 악마에게

유교적으로 늙어가는 악마에게
- 그대의 전향서에 장문의 박수를 보내며

밤길쟁이

앎은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낡은 진리. 앎과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오래된 도덕적 요구. 이 속에서 나는 유교의 향기를 발견합니다. 사회학에서는 합리화를 이야기할 때, 막스 베버를 맨 앞에 놓습니다. 고전 사회학의 가장 커다란 화두는 중세사회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종종 베버와 함께 이야기 되는 맑스와 뒤르켐은 이분 모델을 받아들였습니다. 봉건에서 자본제로,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뭐 그런 식으로 그들의 자신의 시대를 이해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런 모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프로세스, 합리성의 도래로 파악했습니다. 합리성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주어진 시공간내의 구성원들에게 보편타당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마법의 세계로부터의 탈피도 이 중 하나입니다. 이 과정에서 베버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바울의 구절을 기독교적 합리성의 일부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종교를 분석하면서 중국의 종교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했습니다. 베버는 중국의 상층집단이 고도의 합리성을 지닌 유교에 의해 정신적으로 통일되어있다면, 하층집단은 도교적 신비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지요. 그는 그것을 마법의 정원(garden of magic)이라고 비판하는 투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야기를 여기서 장황하게 떠벌리는가 하면, 중국에 관한 베버의 이 분석은 한국사회의 정신구조를 분석하는데 여전히 유효함을 지닌다는 나의 확신 비슷한 감정 때문입니다.

한 문학평론에서 황순원 선생의 글을 비판하는 글을 읽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황순원 선생이 문학적 샤머니티에 투신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 평론가는 "『학마을 사람들』에서 성삼이와 덕배로 대표되는 이념적 대립을 학이라는 샤마니티로 해소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나는 이 비판이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 비판은 단지 황순원 선생의 작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흥길 선생의『장마』에서 국군과 인민군 아들을 둔 집은 ‘구렁이’라는 샤머니즘적 소재를 통해서 화해를 하게 됩니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하며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뚝 선 황석영 선생의『손님』마저도 귀신들과 열두번째 마당인 뒷풀이를 통해서 이념적 갈등과 피로 얼룩진 폭력적 과거를 침묵의 현실과 화해시킵니다. 샤머니즘 같은 비합리성이 유일한 화해의 수단이 되는것입니다.

나는 유교는 대단히 높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유교의 놀라운 점은 기본적으로 신을 거부하고 인간 중심적인 윤리를 제시한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怪力亂神’의 것을 내게 묻지 말라는 공자의 말은 이런 합리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둘째 합리성은 ‘君子不器’ 테제로 대표됩니다. 유교적 합리성의 타자, 즉 비합리성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밖의 마법세계에의 투신입니다. 샤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가치에 대한 입장의 비일관성입니다. 유교적 가치 합리성이란 한 사회에서 늘 일정하게 주어진 가치에 따라서 삶을 조직하는 힘입니다. 내가 앎과 삶을 일치시키라는 요구에서 유교적 문사들의 향기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의 좌파 지식인들을 향해서 김규항과 바람구두를 비롯해 많은 지식인들이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장한 언어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도 이런 유교적 무의식의 발로겠지요. 이것은 우리 문학이 보여주는 애매한 이념적 화해의 풍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주로 신유학이라고 불리는 주자학을 그 이념을 삼은 사대부들을 '문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유교적 합리성의 명제를 장인, 무인에 대한 차별과 중세적 정치질서와  옹호하는 보수적인 철학으로 소화시켰지요. 때문에 이 명제는 도구 합리성에 대한 문사계급의 무관심과 같은 폐혜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교의 이런 태도가 인간의 가치를 목적으로 두는 가치합리성 우위의 사고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유교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주의입니다. 이 또한 우리 사고의 중요한 원형일것입니다. 삶과 앎을 일치시키라는 20세기의 혁명적 정치 지형도 속에서 동북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더 이상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가 정신우월주의의 전통이 우리의 사고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 것은 아닐껍니다. 여전히 우리 지식인들은 앎을 중심으로 삶을 통합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런 정신우월주의가 지식인이 가지는 기본적인 망탈레테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도 이런 사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 편견에서 나온 시각일지 모르지만, 지금 자신의 영역에 충실하지 않고 왜 거리로, 힘든 운동판으로 나가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지식인들을 다그쳐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발언 자격에 대한 고의적인 폄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전업작가를 비루한 것으로보는 구두의 시선도 여기서 멀지 않았겠지요. 저희 학교의 학내에도 '먹물'들을 지독히 싫어하는 '먹물'들이 있습니다.(이렇게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폼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가나 있지요) 다른 좌파적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매도는 때로 김규항 같은 모순적인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의 거만한 자격에 대한 물음, 혹은 삶과 앎을 일치시키고 있지 않은데 대한 유교적 비판은 제게 추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제게 '추함'이란 '자기성찰의 결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합리성은 이런 유교적 합리성과는 대단히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목적합리성이란 곧 시장합리성입니다. 오늘날 목적합리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곳은 시장이니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시장은 분명 형식 합리성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문제는 시장합리성, 이 목적합리성을 전 사회적으로 확대시켰을 때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란 시장 합리성의 확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시장의 원리를 대체하려 했던 역사적 실험의 결과를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시장을 핵심으로 했던 사회보다도 덜 바람직하지 않았는가ㅡ. 이것이 주는 정치적 허탈성ㅡ. 시장 패러다임을 부정했을 때 나타난 특권계층의 등장도 보았습니다. 좀 재수없는 얘기입니다만, 서울대는 마켓을 통해 성원을 충원하고 김일성 대학은 특권을 통해 성원을 충원합니다. 시장은 형식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실질적 자유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위대했지만 이것은 형식적 자유바저도 박탈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주의적 정의는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스템이라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동유럽의 공산당원이라고 불리었던 특권계층들은 1991년을 계기로 증권거래소 소장으로 명함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역사는 뼈아픈 것입니다.

나는 합리성을 연구했던 막스 베버가 관료제를 주목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베버는 두 가지 관료제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는 가산관료제로 동양의 왕정에서 나타나는 관료제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베버의 연구과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버의 관심은 이런 관료제가 아니라 근대 관료제에 있었습니다.  근대 관료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권력의 비대칭적 배분이라고 할 수 있는 위계, 즉 히라키입니다. 조직은 크게 보아 히라키적거나 네트웍형일 수 있습니다. 둘 다 그 나름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네트웍 조직은 고비용 저효율의 조직이지만 때로 정치학의 '결빙테제'(기존의 정당이 고착되어 있으면 새 정당이 나타나기 어렵다는)를 부술정도의 파괴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상파울로 시장의 브라질 노동자당의 당선이 바로 네트웍 조직과 민주적 조직의 역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들은 시장 후보를 정하는데 2박 3일 엠티 토론을 통해 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네트웍 조직만의 강점이지요. 저는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가장 주요한 이유가 브라질 노동자당이 정치조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 사회 조직의 80%는 기업조직입니다. 정치조직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영학이 오늘날 세익스피어와 공자 맹자 노자 같은 고전을 대체하는 교양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껍니다. 경영학은 사회에 나가면 정말 쓸모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기업조직은 사실상 히라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있습니다. 왜 관료제적 지배가 합법적 지배를 구축했는가? 이것이 임의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히라키적 관료 제도는 문서화에 따른 규칙의 일관성유지와 임의성의 배제로 특징지어집니다. 이른바 문서주의지요. 이것은 또 이것대로의 명암이 있습니다. 명이란 이런 조직이야말로 근대적 도구 합리성을 가장 잘 구현한다는 것이겠지요. 암의 측면은 효용성과 계산가능성의 과도한 강조로 우리 삶의 황폐화하게 한다는 것일껍니다.

베버 자신은 이런 관료제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료제로 표상되는 근대적 합리성은 철의 감옥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전통의 족쇄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법적 합리성의 핵심기도 합니다. 현대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합리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양가적 감정이란 괴로운 것입니다. 나는 이 양가적 감정이 베버의 사상에 그렇게도 긴 비관의 그림자를 드리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부분은 과도하게  법적 합리성을 구현하고 있느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비합리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이원성이 문학에는 물론, 이념과 사상,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믿습니다. 이런 이원성은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지식인들이라는 모순적 존재를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념적 갈등과 이념의 현실화에 대한 강박으로 말입니다. 나는 지식인들이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이념적 대립이 문학적 샤머니즘으로, 혹은 불꽃폭투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념의 현실화 역시 그렇습니다. 나는 또한 글쓰는 사람이 노동자가 되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사명은 각자 각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버는 기본적으로 칸티안(Kantian)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제한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의 정치철학을 강의하면서 '판단력'이라는 개념에 탁월한 해석을 붙입니다. 판단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확장된 정신입니다. 확장된 정신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판단력의 핵심은 타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인겁니다. 아렌트는 칸트를 인용하면서 판단의 핵심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능력이라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버마스가 이야기 해왔던 공공 영역은 바로 그 기회를 제공합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토크빌이 원자화된 사회라고 이야기했던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볼 기회가 없어지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설 수 도 없게 됩니다. 공공영역의 축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공적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토론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현실’박탈이라고 과격하게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보고 듣는 것입다. 개인이 자신의 경험과 시야에만 집중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들을 외면하게 됩니다. 즉 현실을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토크빌이 말한 원자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전부 자신의 문제만을 보고 있다면 아렌트가 말했던 공공영역은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어주는 현실로써 공공영역이 사라지고 가짜 현실이 그것을 대체하게 됩니다. 그 가짜 현실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이데올로기' 입니다. 아렌트가 나찌즘을 분석하며 “이데올로기는 현실보다 더 논리적이다.”라는 말을 한 것 도 이런 맥락입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을 뺏은 독재정권은 개인들에게 이데올로기라는 가짜 현실을 던집니다. 독재정권이 사람들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모임이 공공영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와 그대와 나는 이제 이념의 화해나 그 현실화를 자신 내부의 진실성이나 샤머니즘이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 찾아야 할 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 서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1990년대에 우리는 80년대에 '노동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지식인'을 자처하며 노동자 계급과 연애하고 결혼했던 많은 지식인들의 이혼을 보아야 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식인의 짝사랑은 유토피아는 고사하고, 지금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어떤 시도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지식인이 노동자가 되려는 노력보다, 노동자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식인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마 지식인이 이 이상의 어떤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일개 지식인이 왜 그 이상을 해야 합니까? 지식인은 예수 그리스도나 체 게바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안의 신성을 구현한 성자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이름없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글쟁이들, 그대와 나는 모두 역사적 오류의 산물입니다. 이들은 실수를 범하는 나약한 인간들일 뿐입니다. 이들이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신문, 잡지, 출판, 글쓰기를 통해서 공공 영역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먹물'의 장난이라거나 비루한 것으로 생각하는 '먹물' 아닌척 하는 먹물들에게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선자의 악취와 더불어 결여된 자기성찰과 과대망상, 즉 추함을 느끼게 됩니다.

글이 길었습니다. 이제 이 산만한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그대를 향해 착륙시키겠습니다. 구두! 당신이 가진 유일한 진실성은 자신의 진실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절망도, 슬픔도 진실하지 않다고 몰아붙임으로써 진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적어도 이런 위선에 빠질 위험이 적은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자격 운운하며 당신이 속해있는 지식인이라는 집단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전향서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긍정할만한 변화라고 느낍니다.  당신에게 화살처럼 박힌 문장은 그대가 지식인임을 반증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공공 영역의 관점에서 오만과 완고함과 단일한 시선이 깨져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그대의 자기 고백에 나는 박수를 보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알고있다' 라고 합니다. 구두는 이제 자신이 지식인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내게는 지식인으로서의 그대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굽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두, 지식인을 '먹물' 이라고 비난하는 일은 더 이상 지식인의 몫이 아닙니다.

늙어가면서 좋은 악마가, 지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5/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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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하라. 악마는 늙었다"고 했던 제 글에 대해 한 친구가 보내준 답신입니다. 이 겨울에 오랫동안 밤길 걸으며 이야기하고픈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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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퍼온글] All About Jazz 선정-2005년 BEST


 
Let Freedom Ring!
Denys Baptiste
(Dune)

 
Amazon River
Hendrik Meurkens
(Blue Toukan Music)

 
Leaves of Grass
The Fred Hersch
Ensemble
(Palmetto)
New York School
Tom Christensen
(Playscape Recording)

 
Day Is Done
Brad Mehldau Trio
(Nonesuch)
The Way Up
Pat Metheny Group
(Nonesuch)

 
Flow
Terence Blanchard
(Blue Note)
Shelf-Life
Uri Caine
(W&W)

 
Una Nave
Guillermo Klein
(Sunnyside)
Bebo de Cuba
Bebo Valdes
(Call 54 Records)

 
Oceana
Ben Monder
(Sunnyside)
The Relatives
Jeff Parker
(Thrill Jockey)

 
Shade of Jade
Marc Johnson
(ECM)
Check-In
Roberto Magris
Europlane
(Soul Note)

 
Notes from the Heart
Ulf Wakenius
(ACT)
Keystone
Dave Douglas
(Green Leaf)
Mosquito/See Through
The Necks
(ReR Megacorp)
Into The Barn
Manuel Mangis
Gruppe 6
(Ha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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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퍼온글] 10명의 음악평론가들이 뽑은 2005년 베스트 음반 [2]

달콤쌉싸름한 감성파 포크의 절정, 제임스 블런트 <Back To Bedlam>

원용민/ 대중음악평론가·월간 <52street> 편집장

처음 이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만 해도 제임스 블런트는 독특한 팔세토의 목소리를 지닌 신인 가수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2004년 말 첫 싱글 <High>가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오르면서, 그가 영국 왕궁 근위대 장교로 복무했고 그 이전엔 코소보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견되기도 한 직업군인이었다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화제를 모았지만 그건 단순한 이야깃거리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싱글 <Wisemen>이 또다시 좋은 반응을 얻은 데 이어 2005년 7월, 세 번째 싱글 <You’re Beautiful>과 앨범 <Back To Bedlam>이 싱글과 앨범 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하자 그를 보는 음악계의 시선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단에서는 그에게 ‘벡과 엘리엇 스미스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라는 찬사를 퍼붓기에 바빴고 버진 라디오에서 실시한 ‘역대 최고의 노래 500곡’이라는 설문에서 히트 싱글 <You’re Beautiful>이 당당히 10위에 올랐을 만큼 대중의 호응도 뜨겁다. 제임스 블런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라디오헤드와 콜드플레이, 킨 등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일군의 영국 록 밴드들 그리고 배들리 드론 보이 같은 솔로 뮤지션에 이르는 영국 아티스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서정미를 음악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담아낸 인상적인 노랫말과 듣는 순간 곧바로 빠져들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에 포크와 팝, 록 등의 음악적 요소를 가미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덧붙여 강한 흡인력을 지닌 달콤쌉싸름한 목소리 역시 최고의 매력 포인트. 1월 초 현재 <You’re Beautiful>이 여전히 영국 싱글 차트 20위권에 머물고 있는 가운데 네 번째 싱글인 <Goodbye My Lover>가 9위를 기록하며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는 등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Beck To Bedlam>은 왜 그가 2005년 영국 음악계가 수확한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꼽히는지 잘 보여주는 음반이다.

BEST MUSIC 10(라이선스 발매 음반에 한함)

1. 제임스 블런트 <Back To Bedlam>(워너뮤직)
2. 존 레전드 <Get Lifted>(소니BMG)
3. 잭 존슨 <In Between Dreams>(유니버설뮤직)
4. 콜드플레이 <X&Y>(EMI)
5. 개빈 디그로 <Chariot Stripped>(소니BMG)
6. 제이미 컬럼 <Catching Tales>(유니버설뮤직)
7. 머라이어 캐리 <The Emancipation Of Mimi>(유니버설뮤직)
8. 두번째 달 <2nd Moon>(라임라이트뮤직)
9. 클래지콰이 <Color Your Soul>(Fluxus)
10. 시스템 오브 어 다운 <Hypnotize>(소니BMG)

팝,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의 절묘한 강약 조절, 파이스트 <Let It Die>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대중음악웹진 [weiv](www.weiv.co.kr) 편집위원

캐나다 여성 싱어송라이터 파이스트(Leslie Feist)의 ‘메이저’ 데뷔 음반이다. 2004년 캐나다에서 마이너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뒤 컬트적 인기와 평단의 호평에 힘입어 2005년 전세계로 확대, 발매되었다. 10대 때 펑크 로커로 활동한 파이스트는 성대 이상이란 음악적 금치산 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골방에서 기타를 뚱땅거리다 연주와 작곡에 눈을 뜨고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또 거짓말처럼 성대가 회복된 덕분에 세션 보컬리스트로 활약해왔다.

<Let It Die>는 내밀한 자기고백과 차분한 사운드로 갈무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싱어송라이터의 큰 줄기에 속한다. 하지만 팝, 재즈, 인디 록, 포크, 프렌치 팝, 트립합, 보사노바, R&B, 디스코 등 상이한 장르의 줄기들과 다채롭게 접목하고 있어서 폭넓은 유전인자를 함유하고 있다. 쉽게 비유하면 에바 캐시디 혹은 케렌 앤의 음악을 분방하고 인디적으로 업그레이드한 음반이다.

보사노바 스타일의 <Gatekeeper>, 사디(Sade)풍의 R&B <One Evening>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이종(異種) 음악 스타일을 개성적으로 소화해 이종(移種)한 곡들이다. 이는 전반부의 자작곡 가운데 팝, 재즈, 가스펠을 발랄하게 결합한 <Mushaboom>이, 후반부의 커버곡 중에서는 비지스의 디스코 넘버를 포크와 재즈로 버무리고 콜레스테롤을 낮춘 <Inside and Out>과 론 섹스미스의 숨은 명곡을 춤추기 좋게 데친 <Secret Heart>가 대표적이다.

크게 싱어송라이터, 보컬 재즈, 로파이 인디를 꼭지점으로 하는 이 음반의 사운드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파이스트의 보컬이다. 간유리로 덧씌운 듯 다소 탁하고 허스키한 그녀의 보컬은 변화무쌍하면서도 묘한 일관성을 지닌 음반 전체의 무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관계’에 관한 가사와 맞물려 마음 깊은 곳의 연한 속살을 건드리며 아련한 통증을 남긴다. 그래서 이곳저곳의 ‘2005년의 음반’ 리스트에 빠짐없이 오르내릴 음반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곁에 둘 만한 몇 안 되는 음반 중 하나다.

BEST MUSIC 10(라이선스 발매 음반에 한함)

1. 파이스트 <Let It Die>(유니버설뮤직)
2. 피오나 애플 <Extraordinary Machine>(소니BMG)
3. 넬리 매케이 <Get Away From Me>(소니BMG)
4. 몽구스 <Dancing Zoo>(비트볼)
5. 다미엔 라이스 <O>(워너뮤직)
6. 더 짜르 <Goodbye>(파스텔뮤직)
7. 일스 <Blinking Lights And Other Revelations>(서울음반)
8. 스왈로우 <Aresco>(CJ 뮤직)
9. 눈뜨고 코베인 <Pop To The People>(비트볼)
10. 양병집 <넋두리>(리듬온, 재발매), 한대수 <The Box>(서울음반, 재발매 전집)

마침내 완성된 미완성의 전설, 브라이언 윌슨 <Smile>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대중음악웹진 IZM(www.izm.co.kr) 편집장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대중음악의 천재로 불리는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음악적 실험의 결정판 그리고 매카트니과의 음악 경쟁에 방점을 찍기 위해 1966년 하반기 또는 1967년 상반기에 <Smile>이란 제목의 앨범을 기획했다. 작품은 4개월에 걸쳐 만든 곡 <Good vibrations>를 시작으로 잘 진행된 듯했지만 그 무렵 브라이언 윌슨의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약물중독으로 중도에 작업은 전면 중단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수록하려고 했던 한곡(<Mrs O’Leary’s cow>)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소방수 모자를 쓰고 스튜디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뒤로 <Smile>은 입에서만 떠돌고 형체는 없는 미완성의 미궁으로 영원히 빠져버렸다. 그는 비치 보이스 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4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하게 흘렀다. 환갑이 훨씬 넘은 2004년에 브라이언 윌슨은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기획, 하지만 반드시 끝을 봐야 했던 음악적 비전의 실현에 들어가, 마침내 <Smile>은 38년 만에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최고의 ‘역사적 지각’ 작품인 셈. 살기 전에는 죽어도 못 볼 것 같았던 미완성이 완성으로 바뀐 벅찬 감격, 그 최고의 발굴에 음악관계자들은 흥분했다. ‘결코 발표되지 않았던 가장 유명한 팝 음악 앨범’이라고 한 <뉴스위크>는 그 기쁨을 ‘Found!’라는 말로 대신했다. 브라이언 윌슨은 영국에서 먼저 공연으로 작품을 소개,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에 만들어져 이미 소개된 <Surf’s up> <Cabin essence> <Heroes and villains> 그리고 <Good vibrations>를 위시해 <Roll plymouth rock> <I’m in the great shape> <Old master painter/You are my sunshine>은 클래식, 민요, 성가, 블루스, 서프 뮤직 등 브라이언 윌슨의 믿기지 않는 광대한 음악적 팔레트를 웅변한다. 물론 비치 보이스의 특장인 보컬 하모니는 그대로 살렸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지평이 얼마나 넓고 끝이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천재성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일정한 도식과 히트 방정식에 감염된 요즘 음악계는 ‘대중음악도 이렇게 만들어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60년대에 대한 추억과 회고가 아닌 지금 음악계에 대한 경고장이다(앨범은 본고장에서는 2004년 가을에 발매되었으나 국내에서는 2005년에 나왔다).

BEST MUSIC 10(라이선스 발매 음반에 한함)

1. 브라이언 윌슨 <Smile>(워너뮤직)
2. 피더 <Pushing The Senses>(포니캐년)
3. 롤링 스톤스 <A Bigger Bang>(EMI)
4. 부카 킹스 <The Renaissance>(T엔터테인먼트)
5. 원도연 <V.1>(강앤뮤직)
6. 로라 베어스 <Year Of Meteors>(워너뮤직)
7. 토리 에이모스 <The Beekeeper>(소니BMG)
8. 시아라 <The Goodies>(소니BMG)
9. 두번째 달 <2nd Moon>(라임라이트뮤직)
10. 거미 <For The Bloom>(YG엔터테인먼트)

새트리아니-바이-페트루치가 펼치는 궁극의 기타 배틀, G-3 <Live In Tokyo>

전영혁/ KBS-FM <전영혁의 음악세계> DJ

최악의 음반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5년은 역으로 내실있는 좋은 앨범들이 많았다. 10편의 리스트 외에도 에릭 존슨, 브라이언 브롬버그, 드림씨어터, 마젤란, 쉐도우 갤러리, 라크리모사, 시구르 로스, 팻 메시니 그리고 일본 아티스트인 히로미와 프라이드 프라이드 등의 앨범이 좋았다. 한편 The Bird, J-Breaker, Prelude, 곽윤찬, 송영주, 서지나 Omega3, 강인오 등의 신선한 국내 앨범들도 많았고 <위대한 손기정>(살타첼로/피터 쉰들러), <독도를 위한 기도>(마이클 호페) 같은, 우리가 해야 할 음악을 부끄럽게도 외국 뮤지션들이 대신 발표하기도 했다.

기타로 세계를 평정하겠다는 G-3는 오래전 퓨전 3인방(존 맥러플린, 파코 데 루치아, 알 디 메올라)이 펼쳤던 <Friday Night In SanFrancisco>의 일렉트릭판이라 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일렉트릭 기타의 무림 고수들로 군림하고 있는 조 사트리아니, 스티브 바이, 에릭 존슨, 잉베이 맘스틴, 존 페트루치 등이 의기투합하여 펼치고 있는 G-3 시리즈의 3탄이다.

물론 올해의 앨범은 G-3의 <Live In Tokyo>다. 조 사트리아니, 스티브 바이, 존 페트루치로 펼쳐진 이 실황 앨범은(베이시스트 빌리 쉬한, 드러머 마이크 포트노이 협연) 기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록기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지망생에게도 출중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두장의 CD에 존 페트루치(2곡), 스티브 바이(3곡), 조 사트리아니(3곡), The G-3 Jam(3곡) 등 총 108분의 러닝타임(콘서트 완판)을 담았다. 앨범의 백미는 당연히 The G-3 Jam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Foxey Lady>, ZZ Top의 <La Grange>,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 등 3곡의 잼은 청자를 무아지경으로 안내한다.

<Live In Concert> <Live In Denver> <Live In Tokyo>까지 G-3 라이브는 CD로 들어도 좋지만 AV로 보고 들으면 그 감흥은 배가 된다. CD는 모두 국내 발매되었으며 DVD도 수입되어 있다. 아예 모두 컬렉션해두면 폭발적인 사운드를 즐기시는 분들에게 두고두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것이다.

BEST MUSIC 10

1. G-3 <Live In Tokyo>(소니BMG)
2. 얀 가바렉 <In Praise Of Dreams>(수입)
3. 사비나 야나토우 <Sumiglia>(수입)
4. 찰스 로이드 <Jumping The Creek>(수입)
5. 아릴르 안데르센 <Electra>(수입)
6. 마이클 갈라소 <High Lines>(수입)
7. 이언 앤더슨 <Plays Orchestral Jethro Tull>(수입)
8. 존 웨튼, 제프리 다운즈 <Icon>(수입)
9. 스티브 헤킷 <Metamorpheus>(수입)
10. 영화 <코러스> O.S.T(워너뮤직)

힙합의 최전선이 들려주는 물 흐르는 듯한 사운드, 카니예 웨스트 <Late Registration>

최민우/ 대중음악평론가·대중음악웹진 <weiv>(www.weiv.co.kr) 편집장

오늘날 미국의 힙합 신은― 예전 로큰롤이 그랬듯― 가장 야심만만하고 건방지며 탁월한 감각을 지닌 뮤지션들이 군웅할거하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유행이 빠르고 경쟁도 치열하며 그들이 겪는 성공과 몰락의 일대기는 고드름처럼 뾰족한 그래프를 그린다. 시카고 출신의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카니예 웨스트는 그 살벌하고 화려한 경쟁 속에서 2004년과 2005년을 온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제이-지(Jay-Z)와 같은 유명 힙합 뮤지션의 곡을 프로듀스하면서 인정받아온 그가 2004년 자신의 첫 데뷔 음반 <Collage Dropout>을 발매했을 때 사람들은 이 음반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음반의 내용물은 출중했다.

그러나 <Late Registration>을 듣다보면 <Collage Dropout>이 마치 습작에 불과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만약 좋은 음반의 조건이 다양한 시도를 일관성있게 조직하면서 그것들을 대중적 감성과 조화하는 것이라면 <Late Registration>은 2005년에 발매된 음반들 중 이 조건을 가장 만족스럽게 구현한다. 그를 유명 프로듀서로 만든 재기 넘치던 ‘샘플 장난’이 줄어든 대신 이른바 ‘클래식 솔’(classic soul)에서나 느낄 수 있던 느긋하고 흥겨운 감흥에 만화경처럼 화려한 사운드와 비트가 정교하게 맞물린다. 듣는 이들은 행복해진다. 랩·힙합의 영역을 넘어서는 거대한 팬을 거느리기에 모자람이 없으며, 힙합이 우리 시대의 가장 창의적이고 생기 넘치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음반.

BEST MUSIC 10(라이선스 발매 음반에 한함)

1. 카니예 웨스트 <Late Registration>(유니버설뮤직)
2. 시스템 오브 어 다운 <Mezmerize>/<Hypnotize>(소니BMG)
3. 블록 파티 <Silent Alarm>(서울음반)
4. M83 <Before The Dawn Heals Us>(와우뮤직)
5. 콜드플레이 <X&Y>(EMI)
6. 디페시 모드 <Playing The Angel>(EMI)
7. 하드-파이 <Stars Of CCTV>(워너뮤직)
8. 고릴라즈 <Demon Days>(EMI)
9. 피오나 애플 <Extraordinary Machine>(소니BMG)
10. 시구르 로스 <Takk>(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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