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미스터북맨



 
20대가 될 때까지 나는 식물성 위주로만 먹는 편식을 했다. 반면에 내가 읽었던 책들은 축산전서에서 성경 · 무협지 · 추리소설 · 아동문학 전집 · 교과서까지 아주 잡다했다. 20대 에 군대를 가게 되면서 나는 잡식성으로 식성을 바꾸었다. 군대라는 환경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측면이 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고기맛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군대 시절 이후의 독서 범위는 문학과 인문학, 역사 등으로 상대적으로 순수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안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라면 그 중에서도 내가 흥미있어 하는 것이 순진무구, 천진난만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잡다했다. 30대에 들어서는 음식도 별로 가리지 않게 되었고 분야도 그다지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키는대로, 얻어걸리는대로 감사하며 먹고 읽었다.

 

나라는 인간은 잡하다. 내가 하는 일, 소설을 쓰는 일은 문학 안에서도 불순, 잡스러운 것에 속한다. 불순하다, 잡스럽다, 잡다하다, 잡종이다라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이 ‘잡, 잡, 잡’에서 힘을 느낀다. 나는 이종 간의 충돌, 혼합, 교잡이 새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믿고 순수하고 가녀린 화원의 꽃보다 더 생명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은 이런 내 생각을 굳건히 지지해 준다. 

 

나는 반드시 건전하고 고전적인 책을 읽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권하지도 않는다. 책의 하위문화에는 그에 걸맞는 매력적인 새로움과 강한 생명력이 있을 것이고 상위문화에는 기품과 깊이, 시간의 단련을 견뎌온 단단함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이 각자의 영역에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문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며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고 복제하는 가운데 진짜 문화가 된다. 진짜 문화가 되어야 좋은 문화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20대에 내가 읽고 가슴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책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외상죽음]    *가브리엘 바르가스 요사 [빤딸레온과 그의 위안부들]
크누트 함순
[굶주림]


군대에 다녀와서 장편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홍명희 : [임꺽정]               *박지원 [열하일기] 외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로버트 버튼 편 [천일야화]   *허먼 멜빌 [백경]         *귄터 그라스 [양철북]
장 폴 싸르트르 []

 

재미있게 읽은 시도 물론 있다. 시집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시인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정현종 이하 *고트프리트 벤파블로 네루다 *파울 첼란 *자크 프레베르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쉽게도 희곡은 마음에 맞는 작품을 많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가에 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페트 한트케 [관객 모독]  

으젠느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오태석 [초분]

 

그리고 워낙 재미있어서 한 번 집어들면 손에서 뗄 수 없던 명작들이 있었으니.

고우영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서유기] [일지매] [임꺽정] [십팔사략]

 

그리고 역시 한 번 손에 들면 놓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유쾌한 작가가 두 사람 있다.

에프라임 키숀 [가족] [돼지는 돼지다]    *로얼드 달 [] [세계 챔피언]

 

흥미롭고 짧으며 시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재미는 기본이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어가 사람이라고?] *프란츠 카프카 [변신]

 

근래에 읽은 인문학 관련 책에서 인상적인 필자는 빌 브라이슨이다. 대책없이 잡다한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참고로 지금 내 책상 위의 작은 서가에 꽂혀 있는 ‘잡스러운 책’의 제목을 쓰면 이런 식이다. [띄어쓰기·맞춤법 용례] [음식 상식 백 가지] [미식 소식이 오래 산다] [제주도 관광 정보 매거진] [내 몸의 신비] [벌거벗은 여자] [세상의 나무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음식에 관한 47가지 진실]... 책상 위에는 [먹지마, 위험해!]와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이 펼쳐져 있고 오른편에 있는 에어컨 박스 위 임시 서가 앞줄에는 [빠블로 네루다]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문학동네] [게으른 산행] [한국식품문화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하루만에 정복하는 부동산 재테크]가 꽂혀 있다. 뒷줄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학의 윤리] [역주 매천야록] [오늘의 SF걸작선] [하늘에서 본 지구] [우리말의 뿌리] [조선역사]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그 사람의 어깨 너머로 엿보이는 책의 제목을 통해 그 사람의 직업과 기질, 나이와 성향을 가늠하곤 했다. 누가 지금 이 목록을 읽는다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잡스러운 인간? 그렇다면 만족이다. 소설은 바로 잡의 장화니까. 어, 장화 아니고 정화(精華)다. 생각해 보니 장화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소설은 잡의 정화의 장화라고 하자.

 

   성석제님의 추천 테마책 보기 > "나는 잡식성이다"







 

 

 

성석제 /소설가.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며 소설을 쓰기 시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등의 창작집과 [재미나는 인생] 등의 짧은 소설, [인간의 힘] 등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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