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관료들은 과거 세 곳의 오스만 제국 동쪽 행정 지역, 즉 빌라예트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자신들의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영국이 원래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던 이 지역은 이제 이라크가 되었고 북쪽 지역과 모술에는 쿠르드족이, 서쪽 지역과 이라크 중심부 및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종파 중 수니파가, 그리고 남쪽 지역과 바스라에는 시아파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이 세 지역에 공통된 정체성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스라는 페르시아만과 남쪽으론 인도를 향하고 있었고, 바그다드는 동쪽으로 페르시아와 이어져 있었으며, 모술은 서쪽의 터키와 시리아를 마주보고 있었다. 차이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구나 종교적 구성만 보더라도 쿠르드족, 터키 쪽에서 흘러들어왔으며 네스토리우스(Nestorian)파라고도 불리는 아시리아 기독교인 (AssyrianChristian), 바그다드에서 제일 비중이 큰 단일 민족인 유대인, 신자르산맥(Mount Sinjar)에 모여 살고 있는 야지디(Yazidi)족, 거기에 투르크멘(Turkoman), 아르메니아(Aremenian), 칼데아(Chaldean), 사비아(Salbean) 및 페르시아인들까지 더해져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 민족이었지만 그들 역시 종교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와 소수인 수니파로 갈라져 있었다.
영국은 이라크로 통일된 이 나라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왕을 내세우는 것이라 생각했고, ‘메카의 수호자‘의 아들이자 지난 전쟁에서 아랍 봉기를 이끌었던 파이살 왕자를 후보로 염두에 두었다. 시리아의 왕으로 잠시 옹립되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쫓겨난 상태였던 파이살 왕자는 당시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라크의 왕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찬성표가 무려 96퍼센트를 차지했다. 더 놀라운 건 투표에 참여한 국민들 대다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 P2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년 여름, 한 편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직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의 조직원 하나가 영상에 등장해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어느 모래밭 위에서 발을 굴렀다. 남자의 뒤에는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채 버려진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 무렵까지 두 국가 사이의 국경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던 곳들이었다. 다시 발을 구르며 이 조직원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만들었던 ‘사이크스 피코(Sykes-Picot)‘ 협정은 이제 이라크와시리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의 발아래 사라졌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마침내 끝났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국경선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선언을 강조라도 하듯 국경 초소가 폭파되는 장면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국경선들을 지워나갈 것이다."
- P282

 사이크스와 피코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915년 12월 런던,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한 젊은 영국인이 비밀리에 매일 프랑스 대사관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었다. 남자는 이제 곧 사라질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제작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들도 곧 적당한 때에 주권에 대한 현대식 정의와 함께 새로운 민족 국가로 탄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보수당 의원이자 기행문 작가였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는 런던 최고의 중동 지역 전문가로 영국 정부에 영입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 이후부터...... - P284

......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 지역을 돌았고 그렇게 여행을 하며 여러 권의 기행문도 출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발표했던 기행문은 『칼리프의 마지막 유산(The Caltiph‘s Last lertage) 이었다. 이슬람교의 율법학자를 흔히 ‘물라(Mullth)‘라 일컫는데, 사이크스의 모습을 본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물라(Mad Mullah)‘라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사이크스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간의 경력 덕에 중동 지역 정책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며 급기야 이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사이크스는 우선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서 비밀리에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 -Picot)를 만났다. 피코는 프랑스의 고위직외교관으로 어렸을 때부터 늘 나이보다 조숙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한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피코 본인도 레바논 지역 총영사 출신이었다. 각기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사이크스와 피코는 5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신하에 서로 힘을 합친다.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에 중동 지역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당시에는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들만 있었을 뿐 그 안에는 어떤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있었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제국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및러시아 제국 연합에 대항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의 표현처럼 오스만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려"하고 있었다. - P285

물론 그 제안이라는 건 전쟁 이후 중동 지역의 모래밭 위에 열강들이 멋대로 선을 긋고‘ 역시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새로운 국가들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수상 관저에서 회의가 있고 나서 얼마 뒤 사이크스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 대사관을 비밀리에 드나들며 피코와 만남을 가졌다.
1916년 1월 3일, 두 사람은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모래밭 위에 그어진 선‘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하이파(Haifa) 근처에서 시작되어페르시아 국경 근처인 키르쿠크(Kirkuk)까지 이어지며 선의 북쪽은 고랑스의 보호령, 남쪽은 영국령이 된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에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프랑스는 파란색 지역‘, 영국은 ‘붉은색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사이크스와 피코가 격렬히 충돌한 한 가지 쟁점은 바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성지(聖地, the Holy Land)의 관리 문제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영국이 하이파와 아크레(Acre) 두 항구를 차지하며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철도 주변 영토도 가져가는 데 합의했다. 팔레스타인의나머지 땅은 일단 그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공동 관리 구역이 될 것이었다.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북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사이크스와 피코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크게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그저 텅 빈 종이 위에 마음대로 지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둘의 작업은 기존 지도들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였는데, 이 제국의 행정 구역인 빌라예트(villayet)를 상세히 표시한 지도가 완성된 건 18년의 일이었다. - P2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로의 힘을 합친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자신들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고 서방측이 제시하는 보편적 가치와 기준에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은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면서 이른바 미국의 주도적 위치와 ‘일방주의‘ 에도 대항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지정학적 결속에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에너지 자원이다. 한때 마르크스(Marx)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념으로 뭉쳤던 두 나라는 이제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다.
- P196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시작되고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 질서를 관리하는 미국의 방식을 전 세계는 별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2008년 금융위기의 대재앙은 다름 아닌 미국 경제의 심장부를, 아니 중국의 표현처럼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을 강타하고 말았다. 국가 혹은 공산당 같은 정당이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중국식 모형‘은 미국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경제가 2009년부터 위기를 벗어나 다시회복세에 접어들게 해준 핵심 동력이었고,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미국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 역사적인 분수령" 이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은 중국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 P201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한 전략 분석가는 『중국의 꿈: 미국 이후 시대의 강대국의 조건과 전략적 준비 ( 同时代的大同思惟)이라는 책을 펴냈다. 중국에서 큰 화제가 된 이 책은 미·중 양국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 경제의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중국은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바로 세계의 공장‘ 역할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세계 철강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책임지는 최대 생산국이며 알루미늄과 컴퓨터, 반도체는 물론 전기자동차와 풍력 발전기 제작에 꼭 필요한 희토류 생산량 규모 역시 세계 최대다. 2011년에서 2013년까지의 3년간중국은 미국이 20세기의 100년 동안 소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멘트를 소비했다. 또한 외환보유고도 충분해서 중국 인민은행의 국가외환관리국(国家外管理局)은 모두 3조 달러 규모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3분의 1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다.
또한 중국 정부가 수출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경제 변화를 모색함에 따라 중국은 빠르게 소비자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2000년당시 중국에서는 190만 대, 미국에서는 1,730만 대의 자동차가 팔렸다. 그런데 2019년에는 그 숫자가 2,500만 대와 1,700만 대로 크게 역전되었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2002년 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Syndrome, SARS), 즉 급성호흡기증후군이 유행했을 당시 전 세계GDP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퍼센트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16퍼센트로 증가했다. 이는 중국이 자국의 경제력만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규모다.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틴과 시진핑은 지난 14개월 동안 이미 여섯 차례나 회동을 가졌고 2014년 5월 상하이 회동이  일곱 번째 만남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어느 논평가의 말처럼 "서방측과의 협력이라는 과거의 장밋빛 꿈"은 "서방측이 러시아의 국제적인 고립을 획책함으로써"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런 러시아에게 중국은 또 다른 대안이었다. "우리는 해당 지역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모두에서 똑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푸틴의 말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자신들이 "일극 체제"라 부르는 미국이 "절대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적 체제는 물론 비정부 기구며 활동가들이 사주하는 체제 변동과 민주주의 확산 운동 모두에 힘을 합쳐 대항하기로 했다. 양국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건 다극화 체제, 그리고 무엇보다 자국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각자의 "절대적 주권" 이었다.‘
양국의 논의사항들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막대한 규모에 이를 수도 있는 천연가스 거래 건이었다. 협상은 지난 10년간 지루하게 계속 이어져왔지만 이젠 어떻게든 매듭을 짓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중국은 환경오염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앞으로 천연가스를 더 많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벗어나 보다 다양한 시장을 필요로 했던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며 국제 전략과 경제 문제 모두에 있어 좀 더 상호 협력이 가능한 새로운 국가에 자국의 미래를 걸어야 했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나라였으며, 그 덕에 경제 관리 및 이른바 ‘베이징 콘센서스(Beijing consensus)‘라 하는국가 주도형 자본주의를 앞세운 중국 경제 모형의 가치도 크게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 P182


러시아의 동진 정책은 에너지 자원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시작은 250억 달러를 들이고 2,800마일(약 4,506킬로미터 옮긴이)에 걸쳐 건설한 동시베리아-태평양(Eastern Siberia - Pacifie Ocean. ESPO)송유관이었다. 2018년 러시아는 아시아 지역에 185만 배럴의 석유를공급했고 그중 3분의 2 이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2005년까지만해도 러시아 석유 수출량의 불과 5퍼센트가 중국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30퍼센트 가까이에 이르며,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중국최대의 석유 공급처가 되었다. 양국의 석유 거래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중국은 향후 25년 동안 계속해서 석유를 공급받기로 하고 로즈네프트에 800억 달러의 선금을 이미 지급했다.
이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위협할 만한 요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러시아는 한때 갈등의 중심이 되었던 동쪽 국경 지대에서 인구가 적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골라 중국 국민들이 계속 이주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 국경선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 있지 않은 이 극동의 오지에 혈통적으로 중국계에 속하는 합법, 그리고 불법 이민자들이 약200만 명에서 500만 명 이상 모여들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물론 그숫자를 훨씬 더 낮게 보는 쪽도 있지만, 어쨌든 수치에 상관없이 푸틴은 이 지역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한 근처에 남아 있는 소수의 러시아계 국민들이 결국 중국계 국민들에게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 P185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교류와 중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적극받아들이고 있다. 자신들의 독재 정치 체제를 바꾸는 데 베이징은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선거 방식을 비판하거나 인권운동가들을 지원할 의사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의 정부 관료들은자신들이 살았던 시절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러시아어로 모든 사업들을 진행해오고 있지만 중국이 갖는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중국의 존재감이 빠르게 커지고 중국에 대한 의존도 또한 늘어나면서 이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상황이다. 일반 국민들의 경우는 오히려 중국의 이런 영향력과 농지 인수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의구심과 원망을 동시에 품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우려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계속해서 지원과 도움을 약속함으로써 이들 국가가 중국과 지나치게 가까와지는 걸 경계한다. - P192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중국에게는 미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장이다. 무역 전쟁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2018년, 중국은 러시아에 350억 달러 규모의 상품을 수출했지만 미국으로의 수출 규모는 4,100억 달러에 달했다.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러시아와의 금융 거래에 대한 제재 조치가 실시되었을 때에도 중국의 주요 은행들은 그 조치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얼마 되지 않는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달러화 체제 및 국제 자본 시장에서 제외되는 상황을 감수할 순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거래는 얼마 되지 않는 특별한 은행들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2019년 12월 2일을 기점으로 좀 더 또렷이 드러났다.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틴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거듭나려는 자신의 야심찬 목표를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 모스크바와 워싱턴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불안했다 해도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협력 관계나 의사소통 창구들은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미국정보부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여겨지는 스노든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이상 오바마가 푸틴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결국 2013년에 예정되어 있었던 정상회담은 취소되었고 나중에 오바마는 여기에 쐐기를 박듯 러시아가 그저 "특정 지역의 강대국"일 뿐이라며 폄하하는발언까지 하게 된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와 서방측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이른바 ‘유라시아 경제연합(Eurasian EconomicUnion)‘, 즉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새로운 독립국들을 러시아의 주도하에 하나로 묶겠다는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그렇게 하면 관세 제도가 하나로 합쳐지고 경제 구역 역시 하나로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47

 그렇지만 우크라이나는 같은 시기에 유럽연합과 더 큰 규모의 경제적 통합을 위한 ‘연계‘ 협약을 논의 중이었고, 그것이 성사되면 우크라이나 경제에는 큰 개혁이 일어날 터였다. 유라시아 경제연합과 유럽연합과의 연계 협약은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라 절대 양립될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르게 통일된 관세 제도 두 가지가 우크라이나에 동시에 적용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일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합의한다면 푸틴이 주도하는 유라시아 경제연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이 합의에 이를 경우엔 중요한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하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 사이의 논의는 지정학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진행되었다. 서방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그저 유럽연합과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해관계 당사자들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입장에서의 우크라이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훗날 확인했던 것처럼 "핵심적" 이해관계의 당사자였다. 러시아 측 주장에 따르면 키예프 공국 시절은 물론 1654년 카자크족이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일부였다. 푸틴은 이런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우크라이나는 아예 독립된 국가라고 볼 수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일부 영토가 동유럽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결국 러시아에서 양보해준 것이 아닌가?" 나중에 그는 러시아 내전 당시 어느 백 러시아군 사령관이 했던 말까지 인용했다.
- P148

" 대(大)러시아와 소(小)러시아가 있다. 물론 여기서의 소러시아는 우크라이나다. (...) 다른 어느 누구도 이 둘의 관계에 끼어들 수 없다. 이는 언제나 러시아가 직접 알아서 처리해온 문제였다. "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영망진창이었고 도처에 부패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부패의 정점에는 다름 아닌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고 물러났던 이 전직 권투 선수는 정치라는 경기장에 또 한 번 뛰어들어 재경기를 치른 끝에 2010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3년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정에 합의하려 했고 러시아측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는 즉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으로부터 다시 등을 돌렸는데, 그 대가는 러시아가 제공하는 15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격분했다. 2013년 말 50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키예프 독립광장에 몰려들어 유럽연합과의 협정 포기에 항의했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부정부패와 러시아의 간섭에 대항하려 했다.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12월의 추운 날씨 속에서 미국 국무부 유럽담당 차관보 빅토리아 눌런드(Victoria Nuland)는 시위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자를 나누어주고 사람들을 독려했으며 상원 의원 존 매케인역시 광장의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에 대해 모스크바에서는 시위대를
"신자치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2014년 2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 P149

당장에라도 내전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세 명의 유럽 외무부 장관이 서둘러 우크라이나로 날아와 야누코비치와 야당 정치인들을 설득해 새롭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했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 정부는 붕괴 중이었고 야누코비치의 경호 부대도 모습을 감췄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도주해버렸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즉시 새로운 과도 정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과도 정부의 첫 번째 조치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당시까지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러시아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방, 특히 동부 지방과 크림 반도에는 이미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실수는 바로 철회되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유럽 측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를 가로막고 나섰겠지만 그 정부가 이미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는 전해졌다. "푸틴의 말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러시아 남부 도시 소치(Sochi)의 눈 덮인 산맥에서는 2014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소비에트 붕괴의 망령에서 완전히 돌아온 러시아를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였고 이 행사의 주역은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개회식에서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헌사가 장대한 음악과 함께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여러 국가 원수들이 내빈으로 참석했고 그중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나 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은 참석하지 않았고, 러시아 측의 귀빈인 에드워드 스노든도 그 자리에 없었으며, 오바마 행정부가 규탄했던 러시아의 동성애 관련 새 법률도 문제가 되었다.
미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토안보부 장관을 역임했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총장이 된 재닛 나폴리타노(Janel Napolitano)였다. - P150

그리고 올림픽의 영광과 환희가 빛나던 어느 순간 러시아 정부, 그러니까 아마도 푸틴을 중심으로 했을 측근들은 결단을 내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비상사태 대책에 의거하여 러시아의 비공식 전투 부대는 흑해로 뻗어 있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크림 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준군사 조직의 등장은 크림 반도에 살고 있는 ‘억압받는‘ 러시아 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는 곧 크림 반도를 자신들 손아귀에 넣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림 반도는 여름철의 화창한 아열대성 기후 덕분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이, 그 후엔 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수많은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도 즐겨 찾는 휴양지였다. 그런데 1954년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는 이 크림반도를 연방 소속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에게 갑작스럽게 양도했다. 표면적으로는 카자크족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충성을 맹세한1654년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지 300주년이되는 해를 축하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당시 흐루쇼프는 1년 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후 벌어지고 있던 권력 투쟁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확실한 지지가 필요한 입장이었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크림 반도를 선물로 내주었다 해서 주권과 관련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별개의 국가로 갈라지고 나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제는 그저 휴양지나 과거의 향수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 반도의 항구 도시세바스토폴(Sevastopol)은 러시아 해군이 사용할 수 있는 흑해 유일의부동항(不東港)으로 당시 우크라이나와 일종의 임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 P151


2014년 3월 중순 크림 반도에서는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국민 투표가 시행되었고 그중 대략 95퍼센트가 러시아와 합병되는 속에 표류줬다. 이튿날 푸틴은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재통일‘을 발표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과 유럽현합 측은 러시아가 유럽이 승인한 경계선을 넘어섰다고 선언하며 제재를 결의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의 이런 일방적인 합병 조치에 격렬히 저항했다. 러시아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합의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가져가는 대신 영토 보존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해당 각서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서방측이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 정변‘으로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정부가 전복되었으니 지금의 정부와 양해각서 내용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분리주의자들과 준군사 조직, 그리고 휴가를 받은 러시아정규군 병사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돈바스에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최대의 공업 중심지이며 특히 방위 산업 부문에서 러시아 경제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었다. 러시아와의합병을 지지하는 분리주의 세력은 도시 여러 곳을 점령했고 우크라이나 내란은 이제 러시아의 지원 및 직접적 개입을 통해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했다.
2014년 7월 16일부터 미국은 러시아의 금융, 국방, 그리고 에너지부문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경제적으로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유럽 측이 여기에 동조할지는 아직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17일, 분리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 공군기로 여기고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지대공 미사일로 공격해 격추시킨 비행기가 실은 민간 항공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전 세계는 큰 충격을 받는다. -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