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한 편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직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의 조직원 하나가 영상에 등장해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어느 모래밭 위에서 발을 굴렀다. 남자의 뒤에는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채 버려진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 무렵까지 두 국가 사이의 국경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던 곳들이었다. 다시 발을 구르며 이 조직원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만들었던 ‘사이크스 피코(Sykes-Picot)‘ 협정은 이제 이라크와시리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의 발아래 사라졌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마침내 끝났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국경선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선언을 강조라도 하듯 국경 초소가 폭파되는 장면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국경선들을 지워나갈 것이다."
- P282

 사이크스와 피코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915년 12월 런던,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한 젊은 영국인이 비밀리에 매일 프랑스 대사관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었다. 남자는 이제 곧 사라질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제작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들도 곧 적당한 때에 주권에 대한 현대식 정의와 함께 새로운 민족 국가로 탄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보수당 의원이자 기행문 작가였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는 런던 최고의 중동 지역 전문가로 영국 정부에 영입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 이후부터......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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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 지역을 돌았고 그렇게 여행을 하며 여러 권의 기행문도 출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발표했던 기행문은 『칼리프의 마지막 유산(The Caltiph‘s Last lertage) 이었다. 이슬람교의 율법학자를 흔히 ‘물라(Mullth)‘라 일컫는데, 사이크스의 모습을 본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물라(Mad Mullah)‘라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사이크스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간의 경력 덕에 중동 지역 정책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며 급기야 이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사이크스는 우선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서 비밀리에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 -Picot)를 만났다. 피코는 프랑스의 고위직외교관으로 어렸을 때부터 늘 나이보다 조숙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한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피코 본인도 레바논 지역 총영사 출신이었다. 각기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사이크스와 피코는 5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신하에 서로 힘을 합친다.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에 중동 지역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당시에는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들만 있었을 뿐 그 안에는 어떤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있었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제국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및러시아 제국 연합에 대항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의 표현처럼 오스만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려"하고 있었다. - P285

물론 그 제안이라는 건 전쟁 이후 중동 지역의 모래밭 위에 열강들이 멋대로 선을 긋고‘ 역시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새로운 국가들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수상 관저에서 회의가 있고 나서 얼마 뒤 사이크스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 대사관을 비밀리에 드나들며 피코와 만남을 가졌다.
1916년 1월 3일, 두 사람은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모래밭 위에 그어진 선‘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하이파(Haifa) 근처에서 시작되어페르시아 국경 근처인 키르쿠크(Kirkuk)까지 이어지며 선의 북쪽은 고랑스의 보호령, 남쪽은 영국령이 된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에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프랑스는 파란색 지역‘, 영국은 ‘붉은색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사이크스와 피코가 격렬히 충돌한 한 가지 쟁점은 바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성지(聖地, the Holy Land)의 관리 문제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영국이 하이파와 아크레(Acre) 두 항구를 차지하며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철도 주변 영토도 가져가는 데 합의했다. 팔레스타인의나머지 땅은 일단 그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공동 관리 구역이 될 것이었다.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북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사이크스와 피코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크게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그저 텅 빈 종이 위에 마음대로 지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둘의 작업은 기존 지도들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였는데, 이 제국의 행정 구역인 빌라예트(villayet)를 상세히 표시한 지도가 완성된 건 18년의 일이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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