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거듭나려는 자신의 야심찬 목표를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 모스크바와 워싱턴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불안했다 해도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협력 관계나 의사소통 창구들은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미국정보부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여겨지는 스노든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이상 오바마가 푸틴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결국 2013년에 예정되어 있었던 정상회담은 취소되었고 나중에 오바마는 여기에 쐐기를 박듯 러시아가 그저 "특정 지역의 강대국"일 뿐이라며 폄하하는발언까지 하게 된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와 서방측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이른바 ‘유라시아 경제연합(Eurasian EconomicUnion)‘, 즉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새로운 독립국들을 러시아의 주도하에 하나로 묶겠다는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그렇게 하면 관세 제도가 하나로 합쳐지고 경제 구역 역시 하나로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47

 그렇지만 우크라이나는 같은 시기에 유럽연합과 더 큰 규모의 경제적 통합을 위한 ‘연계‘ 협약을 논의 중이었고, 그것이 성사되면 우크라이나 경제에는 큰 개혁이 일어날 터였다. 유라시아 경제연합과 유럽연합과의 연계 협약은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라 절대 양립될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르게 통일된 관세 제도 두 가지가 우크라이나에 동시에 적용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일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합의한다면 푸틴이 주도하는 유라시아 경제연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이 합의에 이를 경우엔 중요한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하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 사이의 논의는 지정학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진행되었다. 서방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그저 유럽연합과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해관계 당사자들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입장에서의 우크라이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훗날 확인했던 것처럼 "핵심적" 이해관계의 당사자였다. 러시아 측 주장에 따르면 키예프 공국 시절은 물론 1654년 카자크족이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일부였다. 푸틴은 이런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우크라이나는 아예 독립된 국가라고 볼 수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일부 영토가 동유럽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결국 러시아에서 양보해준 것이 아닌가?" 나중에 그는 러시아 내전 당시 어느 백 러시아군 사령관이 했던 말까지 인용했다.
- P148

" 대(大)러시아와 소(小)러시아가 있다. 물론 여기서의 소러시아는 우크라이나다. (...) 다른 어느 누구도 이 둘의 관계에 끼어들 수 없다. 이는 언제나 러시아가 직접 알아서 처리해온 문제였다. "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영망진창이었고 도처에 부패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부패의 정점에는 다름 아닌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고 물러났던 이 전직 권투 선수는 정치라는 경기장에 또 한 번 뛰어들어 재경기를 치른 끝에 2010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3년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정에 합의하려 했고 러시아측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는 즉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으로부터 다시 등을 돌렸는데, 그 대가는 러시아가 제공하는 15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격분했다. 2013년 말 50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키예프 독립광장에 몰려들어 유럽연합과의 협정 포기에 항의했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부정부패와 러시아의 간섭에 대항하려 했다.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12월의 추운 날씨 속에서 미국 국무부 유럽담당 차관보 빅토리아 눌런드(Victoria Nuland)는 시위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자를 나누어주고 사람들을 독려했으며 상원 의원 존 매케인역시 광장의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에 대해 모스크바에서는 시위대를
"신자치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2014년 2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 P149

당장에라도 내전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세 명의 유럽 외무부 장관이 서둘러 우크라이나로 날아와 야누코비치와 야당 정치인들을 설득해 새롭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했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 정부는 붕괴 중이었고 야누코비치의 경호 부대도 모습을 감췄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도주해버렸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즉시 새로운 과도 정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과도 정부의 첫 번째 조치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당시까지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러시아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방, 특히 동부 지방과 크림 반도에는 이미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실수는 바로 철회되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유럽 측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를 가로막고 나섰겠지만 그 정부가 이미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는 전해졌다. "푸틴의 말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러시아 남부 도시 소치(Sochi)의 눈 덮인 산맥에서는 2014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소비에트 붕괴의 망령에서 완전히 돌아온 러시아를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였고 이 행사의 주역은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개회식에서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헌사가 장대한 음악과 함께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여러 국가 원수들이 내빈으로 참석했고 그중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나 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은 참석하지 않았고, 러시아 측의 귀빈인 에드워드 스노든도 그 자리에 없었으며, 오바마 행정부가 규탄했던 러시아의 동성애 관련 새 법률도 문제가 되었다.
미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토안보부 장관을 역임했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총장이 된 재닛 나폴리타노(Janel Napolitano)였다. - P150

그리고 올림픽의 영광과 환희가 빛나던 어느 순간 러시아 정부, 그러니까 아마도 푸틴을 중심으로 했을 측근들은 결단을 내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비상사태 대책에 의거하여 러시아의 비공식 전투 부대는 흑해로 뻗어 있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크림 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준군사 조직의 등장은 크림 반도에 살고 있는 ‘억압받는‘ 러시아 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는 곧 크림 반도를 자신들 손아귀에 넣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림 반도는 여름철의 화창한 아열대성 기후 덕분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이, 그 후엔 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수많은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도 즐겨 찾는 휴양지였다. 그런데 1954년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는 이 크림반도를 연방 소속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에게 갑작스럽게 양도했다. 표면적으로는 카자크족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충성을 맹세한1654년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지 300주년이되는 해를 축하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당시 흐루쇼프는 1년 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후 벌어지고 있던 권력 투쟁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확실한 지지가 필요한 입장이었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크림 반도를 선물로 내주었다 해서 주권과 관련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별개의 국가로 갈라지고 나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제는 그저 휴양지나 과거의 향수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 반도의 항구 도시세바스토폴(Sevastopol)은 러시아 해군이 사용할 수 있는 흑해 유일의부동항(不東港)으로 당시 우크라이나와 일종의 임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 P151


2014년 3월 중순 크림 반도에서는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국민 투표가 시행되었고 그중 대략 95퍼센트가 러시아와 합병되는 속에 표류줬다. 이튿날 푸틴은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재통일‘을 발표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과 유럽현합 측은 러시아가 유럽이 승인한 경계선을 넘어섰다고 선언하며 제재를 결의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의 이런 일방적인 합병 조치에 격렬히 저항했다. 러시아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합의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가져가는 대신 영토 보존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해당 각서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서방측이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 정변‘으로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정부가 전복되었으니 지금의 정부와 양해각서 내용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분리주의자들과 준군사 조직, 그리고 휴가를 받은 러시아정규군 병사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돈바스에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최대의 공업 중심지이며 특히 방위 산업 부문에서 러시아 경제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었다. 러시아와의합병을 지지하는 분리주의 세력은 도시 여러 곳을 점령했고 우크라이나 내란은 이제 러시아의 지원 및 직접적 개입을 통해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했다.
2014년 7월 16일부터 미국은 러시아의 금융, 국방, 그리고 에너지부문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경제적으로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유럽 측이 여기에 동조할지는 아직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17일, 분리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 공군기로 여기고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지대공 미사일로 공격해 격추시킨 비행기가 실은 민간 항공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전 세계는 큰 충격을 받는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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