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2
레이먼드 웍스 지음, 박석훈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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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법론


"『국가론』에서 키케로는 자연법이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점, 자연법이 '상위' 법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는 점, 자연법이 이성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자연법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적'이다)을 부각시키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을 네 가지 범주, 즉 영원법(eternal law), 자연법(natural law), 신법(divine law), 인정법(human law)으로 구별한다. 영원법이란 신적 이성으로서 오로지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법이란 영원법이 이성적 피조물, 즉 인간에게 분여(分與)된 것으로서 이성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신법은 성경에 쓰인 계시를 통해 확인된다. 인정법은 인간이 그 이성에 힘입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자연법의 내용은 실천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의 원리들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원리들을 기준으로 인간의 행위가 합리적인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자연법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16-9)


"자연법의 세속화, 즉 자연법을 신으로부터 떼어놓는 작업에 대해 논하자면, 네덜란드 출신의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를 빼놓을 수 없다.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내용은 똑같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국제법 분과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법의 원리들은 법이 개인의 자연권(natural rights)을 침해했다는 논리로 (특히 미국 독립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원용되어왔다." "일부 사회계약론자들은 사회계약(social contract)에 터 잡아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구성하면서 자연법을 원용했다. 사회계약은 법적으로 엄밀히 보면 계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의 동의 없이는 다른 사람의 정치적 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사회계약론은 존 롤스(1921~2002)의 정의론을 비롯한 자유주의 사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22-4)


"홉스의 주장에 따르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계약만으로도 자연법론자들이 생각하는 불변의 자연법과 동일한 종류의 법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연 상태에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화(peace)가 첫 번째 자연법이어야 한다는 것이 홉스의 결론이다. 두 번째 자연법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한) 일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계약이고, 이는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홉스는 이러한 계약이 체결된다고 하여 곧바로 평화가 보장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화가 보장되려면 사람들이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홉스가 말하는 세번째 자연법이다." "홉스가 보기에, 계약으로 정한 서로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주권자에게 계약을 위반한 자를 응징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26-7)


"홉스의 구상과는 정반대로, 존 로크(1632~1704)는 사회계약 이전의 삶을 낙원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자연 상태에도 중요한 결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자연 상태에서는 소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달리 문제삼을 것이 없는 자연 상태의 유일한 결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일부 포기했다는 것이 (특히 『통치론』에서 나타나는) 로크의 생각이다." "로크가 보기에, 사회계약을 통해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연권이 보장되고 각자는 사적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홉스가 자연권이 자연법보다 먼저 존재하고 자연법은 자연권에서 도출된다고 했던 반면, 로크는 자연법, 즉 이성에서 자연권이 도출된다고 했다. 만인이 만물에 대한 자연권을 가진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라면, 로크는 자연권으로서의 자유권은 자연법과 그에 기초한 지시, 즉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에 의해 제한된다고 한다."(28-9)


"장 자크 루소(1712~78)의 이론에서는 사회계약에 견주어볼 때 자연법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홉스나 로크의 사회계약에 비하면 더욱더 추상적인 루소의 사회계약은 (그가 집필한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합의이며, 개인은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 루소가 '일반 의지(general will)'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개인들이 자유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국민 주권을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나아가 분할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일반 의지'가 이기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되어야만 한다." "일반의지를 지탱하는 사회계약은 특정 파벌이나 특정 계급의 이익에 맞서 사회 전체를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국가의 절대 권력과 개인의 권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29-31)


"19세기에 두 가지 강력한 반론이 등장하면서 자연법론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첫째는 법실증주의와 관련된 입장들로서 자연법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둘째는 도덕적 추론에는 합리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윤리학에서는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로 불리는) 입장으로서 자연법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면, 자연법의 원리는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따름이고, 그렇다면 이를 두고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에 쇠퇴했던 자연법론은 20세기에 부흥을 맞이한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유럽 인권 조약」, 「1959년 법의 지배에 관한 델리 선언」과 같은 선언에 담긴 인권에 관한 문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자연법을 법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헌법적 의미에서의 '상위법'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정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다."(32-3)


2 법실증주의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용어는 '내려진(laid down)' 또는 '세워진(poised)'이라는 뜻의 라틴어 'positum'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법실증주의자들은 법을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법'이나 '세워진 법'으로 이해한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법 효력의 밑절미에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쉽게 말해, (과학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법실증주의는, 법을 인간의 제정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자연법론의 입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법실증주의자치고 '있는 법'이 (연구와 분석을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있어야 할 법'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리 말해, '존재'(실제로 존재하는 것)와 '당위(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법실증주의자는 없다." "법실증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때까지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55-6)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은 제레미 벤담(1748~1832)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을 냉철한 이성을 통해 조명했다. 벤담이 보기에, 보통법은 언제나 불확정적이다. 불문법(unwritten law)은 본래 모호하고 불명확하기 마련인데, 불문법에 해당하는 보통법은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보통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명령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보통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벤담에게 그러한 체계적 접근이란 다름 아닌 법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법전이 있다면 법관의 권력은 현저히 제한될 것이다. 사법부의 기능은 법을 해석하는 일보다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이미 1804년에 2281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법전'이 공포되었던 대륙법계의 경우와는 달리, 영미법 국가에서 모든 법을 법전에 담아내기란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다."(57-9)


"벤담의 제자였던 존 오스틴(1790~1859)이 제기한 법학의 영역에 관한 이론은 '법이란 주권자의 명령'이라는 생각에서 그 핵심적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오스틴에 따르면, 명령이 아니라면 애초에 법이 아닌 것이며, 일반적인 명령만이 법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주권자가 내린 명령만이 '실정법'에 해당한다. 오스틴은 법을 명령으로 이해했으므로,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을 법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은 이를 제정한 주권자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스틴에 따르면, 제재란 주권자가 바라는 바를 준수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손해나 고통, 해악으로 정의된다.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 제재가 가해질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틴에 의하면, 최소한의 손해나 고통, 해악이 가해질 수 있다는 위협(threat)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제재가 부과될 가능성이 없어 한낱 바람을 표현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고 본다."(62-3)


"허버트 하트(1907~1992)의 법실증주의는 법을 대체로 강제라고 파악하는 벤담과 오스틴의 법실증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하트는 법을 해당 공동체에 실재하는 사회적 관행을 기술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하트는 공리주의와 오스틴과 벤담이 주장한 법명령설로부터 벗어난 법실증주의를 기획했다. 특히 법명령설에 대한 하트의 반박은, 법이란 총 든 강도의 명령, 즉 제재의 부과를 전제한 명령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하트의 이론의 핵심은, 법을 다루는 공직자들이 입법 절차를 규정한다고 인정하는 기본 규칙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규칙들 가운데 하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승인규칙(rule of recognition)이다. 승인규칙은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적 규칙이며,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은 이 승인규칙을 어떤 규칙이 실제로 규칙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효력 조건이나 기준을 명시한 규칙으로 인정한다."(68-71)


"칸트의 영향을 받은 한스 켈젠(1881~1873)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 같은 일정한 형식적 범주를 적용해야만 객관적인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즉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범주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규범(basic norm)과 같은 형식적 범주가 필요하다. 근본규범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법체계의 토대에 자리잡고 있다." "켈젠은 실정법의 규범들, 즉 누군가 행위 X를 저지르면 공직자는 그 행위를 저지른 자에게 제재 Y를 부과해야 함을 선언하는 '당위'만을 법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윤리적 요소 일체를 법으로부터 없애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켈젠은 '순수한(pure)' 법학을 통해 법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같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 켈젠이 보기에, 법의 목적이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폭력의 독점화(monopolization of force)이다."(78-9)


"허버트 하트 같은 '연성(soft)' 법실증주의자들은 도덕적 내용이나 가치가 법의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에 포함되거나 편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와 달리 조셉 라즈(1939~  )는 법이 자율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법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도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라즈에 따르면, 법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관습과 제도, 법체계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도에 대한 사실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하나의 사실이지, 결코 도덕적 판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즈는 '경성(hard)' 법실증주의자나 '배제적' 법실증주의자로 분류된다. '배제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라즈는 법을 통해 (도덕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법이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달리 말해, 법은 가장 중요한 행위 규범이며,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다."(85-6)


3 로널드 드워킨: 법은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로널드 드워킨(1931~2013)만큼이나 법실증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한 사람도 없다. 드워킨에 따르면, 〈법은 실제로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법률가와 법관이 하는 일은 민주 국가의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일과 다름없다.〉" "법관은 (논쟁적인 사안의) 해석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도덕적 주장과 유사한 논증들로 가득한 세계에 진입한다. 바로 이러한 법의 해석적 차원(interpretive dimension)은 드워킨 법이론의 근간을 이룬다." "드워킨이 보기에, 법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하트의 주장처럼) 오로지 규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아닌 기준도 포함된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을 맡은 법관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러한 (도덕적 또는 정치적) 기준들, 즉 원리(principle)와 정책(policy)을 논거로 삼게 될 것이다. 결국 드워킨의 법철학에는 법 원리와 도덕 원리를 구별 짓는 승인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과 정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96-102)


"드워킨은 법은 본질적으로 '해석적 현상'이라고 본다. 드워킨에 의하면, 모든 법적 문제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관은 정답을 찾아낼 의무를 진다. 법관이 찾은 해답이 정답이라면, 그 해답이 법관이 속한 사회의 제도적 역사와 헌법적 역사에 가장 잘 부합하고 도덕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워킨은, 법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이를 토대로 법실증주의를 논박한다. 권리를 공공복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사항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한 결론이 법관의 개인적 소신, 직관, 폭넓은 재량 등에 의해 좌우된다면, 개인의 권리는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이익보다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드워킨은 개인의 권리를 '법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데 더욱 적합한 이론을 구성해낸 것이다."(103-4)


"드워킨이 보기에, 관행주의(나 법실증주의)는 법의 효력 기준을 둘러싼 논쟁들로 말미암아 많이 망가지고 말았다. 법실증주의자들은 승인규칙을 통해 X가 법이라고 확인되면 그 사실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즉 규칙의 기원(pedigree)이 규칙의 효력(validity)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의 생각은 다르다. 승인규칙에 포함된 기준들만으로는 법의 효력 기초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이 '의미론적 독침(semantic sting)'에 찔려 있다고 비판한다. 즉 법실증주의자들이 법에 관해 벌이는 논쟁은, 알고 보면 '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둘러싼 의미론적 논쟁이라는 것이다." "드워킨은 이러한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어떤 주장이 타당한 경우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음에도 어쨌든 이러한 기준들이 존재해야만 유의미한 논쟁이 가능하다는 가정은 틀렸다는 것이다."(110-1)


4 권리와 정의


"(그 대상이 법적 권리이건 도덕적 권리이건 간에) 권리는 법과 법체계의 도처에 퍼져 있기에 법철학의 핵심 주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상은 법체계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가치에 해당하지만, 정의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법 자체를 초월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리란 무엇인가'에 응답하는 이론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첫번째 이론은 '의사설(will theory)'로 알려져 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실제로 보장된다는 뜻이다. 의사설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이 강조된다. 두번째 이론은 '이익설(interest theory)'로 불린다. 이에 따르면, 권리는 단순히 나의 선택 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특정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이익설이 더 나은 설명을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126-8)


# 이익설이 의사설을 반박하는 논리

1. '나의 권리'에는 다른 이가 내가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할 의무가 있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할 권리나 특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2. 권리에는 '실체적 권리'와 구별되는 '실체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특정한 권리를 선택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정치적·법적 논의에서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른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신문 기사를 읽어보라. 인권과 무관한 보도는 찾기 어렵다. 인권 개념은 ('자연권'의 형태로) 중세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지만, 17~18세기를 거치면서 인권은 종교적 색채에서 벗어나 이해되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적 운동에 해당한다. 이러한 운동의 밑절미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 있다. 즉 우리 각자는 인간으로서, 다시 말해 바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종교,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들을 부여받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권리들이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그러한 권리들이 '상위법'에 해당하는 자연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지 여부도 별다른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국제연합에서 1948년에 채택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인권을 보편적인 가치로 이해하고 보장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담겨 있다."(134-6)


"정의가 단순한 개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의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같은 것들은 같게, '다른 것들'은 다른 정도에 비례하여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다시 '교정적(corrective)' 정의와 '배분적(distributive)' 정의로 구분한다. 교정적 정의는, 법원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때 문제된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나눠주고자 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배분적 정의는 주로 (법관이 아니라) 입법자가 고려할 주제에 해당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는 정의를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의지〉로 규정한다." "즉 정의의 핵심 속성 세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중요한 존재라는 점, 누구나 일관되고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 누구나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143-4)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의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벤담식의 행위 공리주의─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그 행위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로 정해져야 한다─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좋음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아니라 경험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가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밀이나 벤담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좋아해야 마땅한' 것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공리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정도를 최대로 늘리는 일에 대해 논의한다.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개인의 선택권을 도외시하는 '좋음'에 관한 어떠한 이해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공리주의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유는, 정의의 기준을 따질 때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쉽게 와닿는 인간의 행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150-2)


"존 롤스(1921~2002)는 공리주의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며, 사회의 행복이 불평등을 통해 극대화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롤스에 따르면, 행복은 이익과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행복은 자존감(self-respect)과 같은 '사회적 기본 가치(primary social goods)'와 관련을 맺는다. 특히 정의의 문제는 행복의 문제에 앞선다고 롤스는 생각한다. 즉 오로지 어떤 쾌락이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그러한 쾌락이 가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문 자체가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토머스가 고문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리주의자들이 '무엇이 좋은지'를 기초로 '무엇이 옳은지'를 정의한다면, 롤스는 그와 반대로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옳은지'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다."(160-1)


5 법과 사회


"에밀 뒤르켐(1858~1917)은 사회는 어떻게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촉진하고 유지하는 데 법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나아가 뒤르켐은, 사회가 종교의 힘이 퇴색하고 집단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보함에 따라 법의 주안점이 형벌(punishment)보다는 배상(compensation)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형벌을 통해 집단의 도덕적 태도가 표명되는 것이고, 형벌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가 지속된다고 한다." "형벌은 뒤르켐이 이해하는 범죄의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즉 국가는 국가를 거스르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집단의식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형벌을 〈사회가 특정한 행위 규범을 위반한 사회 구성원에 대응하여 작동하는 조직을 매개로 경중을 나누어 부과하는 강렬한 반작용〉으로 정의한다."(176-9)


"막스 베버(1864~1920)는 사람들이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정당한 지배를 제시한다. 첫째, 전통적 지배(traditional domination)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규칙과 권력의 신성함을 통해 정당화된다고 여겨진다.〉 둘째, 카리스마적 지배(charismatic domination)는 〈한 개인의 아주 신성한 일에 대한 헌신, 엄청난 용기, 본받을 만한 성품〉에 기초한다. 셋째, 법적-합리적 지배(legal-rational domination)는 〈제정된 규칙의 합법성 및 그러한 규칙에 따라 권위를 갖게 된 자들의 명령권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물론 이 세번째 유형이 베버가 설명하는 법의 핵심 특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법적-합리적 권위라는 개념이 (법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는 법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베버의 가치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법적-합리적 지배와 현대 관료제 국가가 상호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184)


"카를 마르크스(1818~83)에 따르면, 법은 경제적 토대를 '반영'하며 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에서는 법이 필요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법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바로 국가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개혁적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법률도 지배 이데올로기나 지배계급의 이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을 띤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무한히 행사할 수는 없고, 사회적 세력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란 알고 보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한 것이다."(189)


6 비판적 법이론


"넓은 의미에서 비판적 법이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법이론가들은 오랜 기간 법철학의 핵심으로 여겨져온 이론적 기획들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또 비판적 법이론에서는 자연의 이치로 여겨지는 것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여성주의 법철학에서는 '남성중심사회(patriarchy)'가, 비판적 인종 이론에서는 '인종(race)'이, 비판법학에서는 '자유 시장(free market)'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메타 서사(metanarratives)'가 문제시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의 주된 목표는 법의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토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토대를 통해서는 법과 법체계가 제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을 다른 영역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분야로 여기는 생각에도 반대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법은 (정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이고 명확한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이 그러한 개념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206-7)


"1970년대에 미국에서 출현한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은 법체계의 기초에 놓여 있는 신념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첫째, 비판법학자들은 법은 체계가 아니며,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원리로 불린다. 둘째, 비판법학자들은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형태의 법적 추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형식주의(anti-formalism)의 원리로 불린다. 셋째, 비판법학자들은 인간 관계에 대한 유일하고 정합적인 견해가 법리로 요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비판법학자들은 법리를 통해 (대개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드러난다고 여기며, 그 가운데 어떠한 견해도 지배적일 만큼 정합적이거나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순(contradiction)의 원리로 불린다. 넷째, 비판법학자들은 (설령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법이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라 여길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주류(marginality)의 원리로 불린다."(222-3)


7 법을 이해하기: 아주 짧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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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8-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잘 모르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nana35 2022-08-29 21:14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 님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면 저에게도 기쁜 일이네요. 감사합니다.
 
종교개혁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1
피터 마셜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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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과 달리, 종교개혁은 '종교사'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교회사가들은 이념의 우위, 즉 현실을 변혁하는 새로운 신학과 세계관의 힘을 역설한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유행을 타는 사회학·문학 이론의 수용자들은 본능적으로 '해체'하고자 하고, 종교적 원칙이나 의례 형식 이면에 놓인 '실질적인' 정치적 동기, 계급에 기반한 동기, 경제적 동기 등을 분별해내려 한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시작하는 모든 접근법─근본적으로 근대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16세기와 17세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대단히 신성화되었고, 종교는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그렇기에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행위와 동기에서 '종교'를 말끔히 분리해내기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실 종교개혁이 역사에서 중대한 변혁적 계기였던 까닭은 이 모든 범주들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이다."(21)


1 종교개혁들


"(신학의 전체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루터의 '급진화'는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명석한 정통파 논적 요한 에크와 논쟁하는 가운데 훤히 드러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루터는 관례에 따라 교황에 맞서 공의회의 권위에 호소했다. 그러나 에크가 루터를 얀 후스에 빗대며 몰아붙이자 루터는 그 보헤미아 이단자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교황과 마찬가지로 공의회도 신앙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루터에게 오류가 없는 종교적 권위의 원천은 성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로 루터에게 후퇴란 없었다. 1520년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자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교황의 파문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특유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또한 루터는 일련의 팸플릿을 발행하여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규탄하고, 교회법에 순종할 필요성을 부인하고, 성사(聖事)의 수를 7개에서 3개로 줄이고, 황제와 독일 귀족에게 교회 개혁에 동참하라고 요청했다."(31)


"로마에 항거하는 것이 루터만의 소임은 아니었다. 루터는 어떠한 구체적인 의미에서도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선지자였고, 종교개혁은 초기부터 서로 별개의 복수 종교개혁들을 포함했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에서 활동한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배경이 더 탄탄했고 교회 내 몽매주의를 매섭게 비판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저술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루터와 비슷한 입장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 진리의 유일한 토대는 성서였고, 교황과 공의회의 권력은 허상이었다. 츠빙글리에게 '95개 논제'와 같은 순간은 1522년 사순절에 찾아왔다. 이때 그는 부활절 준비 기간에 육식을 삼가는 교회 규칙을 보란듯이 위반하는 소시지 식사를 주재했다. 그런 사안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루터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츠빙글리의 가르침에서도 중심 뼈대였고, 의심할 나위 없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중요한 요소였다."(34-5)


"1525년 이후 종교개혁은 '길들여졌고', 개혁은 점잖아졌다. 루터주의와 사회적 급진주의가 분리되자 당시 지지자들이 '복음주의'라 부르던 신앙을 제후들이 채택할 길이 열렸다." "루터주의가 종교적 개혁의 고동치는 심장박동을 잃어가는 사이에 탄생한 제2종교개혁의 탄생지는 예상 밖의 장소였다. 바로 스위스 연방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인구 1만여 명의) 도시 제네바였다." "법률가로 훈련받은 칼뱅은 1534년에 프랑스에서 신교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을 피해 달아나기 전까지 관례적인 학자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사실 (설교사 외에 어떠한 공식 직책도 없었던) 칼뱅은 제네바에서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칼뱅이 결국 성공한 주된 이유는 제네바 인구의 두 배가 넘는 망명자들이 16세기 중엽 수십 년간 이 도시에 정착하여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제네바 서쪽의 덩치 큰 이웃 프랑스에서 위그노라고 알려진 신교도들의 조직과 태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40-50)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58-61)


"17세기 후반에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공을 환영한 현지 가톨릭 소수집단이든 가톨릭교를 고수한다는 이유로 국왕 제임스 2세를 1688년에 폐위시킨 잉글랜드의 열렬한 반가톨릭 신교도들이든, 분명히 루이를 가톨릭의 대의와 동일시했다. 그보다 3년 전인 1685년에 루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에게 예배할 권리를 허용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써 정치적 절대주의와 종교적 승리주의를 결합하는 놀라운 실례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는 억압과 반란, 추방과 진실하지 않은 개종의 물결, 그리고 국경을 건너간 망명자들이 쓰라린 원한을 키우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였다. 한 세기 반 동안 종교개혁들은 유럽 정치생활과 문화생활의 주요 동력이었다. 종교개혁이 그 기능을 아직 다하지 않은 때에 계몽주의 시대가 동트기 시작했다."(68-70)


2 구원


"가톨릭교회가 신자들에게 '선행'을 실천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지난날 가르쳤거나 오늘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신교도뿐 아니라 일반 가톨릭교도 사이에서도 흔한 오해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역설한 대로, 구원은 권리가 아니라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이 자유롭게 자의로 죄인에게 '은총'을 제안한다고 보았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자격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호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은총 제안을 받아들일 때 의롭게 되었고, 하느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그 제안에 응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까다로운 점은 누군가 하느님의 초대에 토를 달지 않고 '네'하고 응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선행을 충분히 행했는지를 아는 일이었다. 중세 후기에 학구적 신학은 하느님은 인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73-4)


"청년 수도사 시절 루터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하느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수도생활이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고뇌했다." "그 위기를 해소한 촉매제는 성 바울로의 정경(正經) 서한, 특히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로마서 1장 17절)라는 말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한 결과로 하느님께서 여전히 완전한 죄인일지라도 개개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신다고 결론 내린 순간, 불안과 자기혐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하느님 계명의 역설적인 점은 그것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신시킨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저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신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실 거라는 '기쁜 소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루터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을 통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교리를 믿는다." "이제 구원은 참된 기독교 생활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75-6)


"사실 예정론을 다듬어 최종 형태를 내놓은 사람은 제네바에서 칼뱅을 계승한 테오도뤼스 베자(1519~1605)였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또는 '탈선' 이전부터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정해두었다고 결론 내렸으며, 이 교리는 '타락 전 예정설'이라는 위압적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더 밀고 나아가면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을 리 없고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결론, 즉 '제한 속죄'에 이른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했고, 어째서 겉보기에 무작위로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렸을까?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예정은 칼뱅주의 하느님의 전적인 초월성, 주권, 그리고 인간이 상상한 속박에서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궁극적 상징이었다. 가톨릭측은 그 교리가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든다고 비판했고, 16세기 후반에 일부 루터파도 그 비판에 얼마간 동의했다. 그들은 루터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예정은 인간 행위에 대한 신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79-80)


"칼뱅파만이, 더 넓게 말해 신교도만이 예정론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가톨릭권 유럽, 특히 프랑스는 얀선주의 현상─일종의 가톨릭 청교도주의─의 무대였다. 얀선주의는 네덜란드 신학자 코르넬리스 얀선(1585~1638)이 예수회의 루이스 데 몰리나를 공격한 데서 연원했는데, 몰리나는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예지로 인해 그 행위의 자유로운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얀선주의는 인간의 선행 역량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칼뱅주의와 공유하여 인간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 얀선주의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예수회를 매섭게 비판했고, 『팡세』에서 철학적 이성이 아닌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앎의 토대로 제시했다." "중요한 대중 운동이 되기엔 너무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너무 엄격했던 얀선주의는 가톨릭교를 '단일체'로 여기는 견해를 반박하는 사례, 그리고 종교개혁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사례다."(81-2)


"구원에는 개인의 운명보다, 심지어 지역 공동체의 운명보다도 넓은 차원이 있었다. 기독교 서사에는 결론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사건들은 성서의 묵시록 또는 그리스어로 아포칼립스(Apocalypse)에서 장관을 이루는 불투명한 이미지로 예언되었다. 묵시록은 신통찮은 시간표도 제공했다. 우주에서 그리스도에 적대하는 악마─적그리스도─가 1000년간 갇혀 지내다가 세상으로 풀려나고 결국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최후의 결전인 아마겟돈(Armageddon)을 벌인다는 시간표였다. 신자들에게 다짐하는 약속도 있었다. 세상이 파괴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가 1000년간 지상을 다스리는 지복천년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다가오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종교의 변두리에 있었던 괴짜들의 특권이 아니었다. 루터 본인이 〈말세의 혼돈의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96-7)


3 정치


"종교개혁에 제일 먼저 진지한 열정을 보인 지역 통치자들은 기존 국가의 군주들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픈 이들, 즉 황제의 명목상 종주권 아래 크기로 보나 실속으로 보나 왕국이라기엔 미흡한 독일 영지를 통치하던 제후들이었다. 그 연관성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일 제후들은 척 보기에도 루터의 대의를 받아들여 얻을 것이 많았다. 정치 면에서 그들은 자기 영토에 있는 교회의 행정을 통치기구에 통합하여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황제를 상대로 책략을 구사할 자유를 더 많이 주장할 수 있었다. 재정 면에서 그들은 (비교적) 떳떳한 마음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수도원의 땅과 기부금을 몰수하여 교회의 부를 강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터는 세속 권력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겼다. 이따금 '두 왕국론'이라 불리는 것에서 루터는 '하느님의 왕국'은 신께서 어련히 다스리실 테지만 교회 조직의 외형을 포함하는 '세속의 왕국'은 적법한 정치적 강제의 영역이라고 보았다."(106-8)


"종교개혁기는 유럽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이 거의 끊이지 않은 시대였고, 국가들이 영토 확장 또는 주권자의 명예와 영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서로 싸운 첫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전쟁이 한쪽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십중팔구 종전을 위해 교전국들이 문자 그대로 합의를 보아야 했다." "제국 내에서 양심의 자유와 사적 숭배의 자유 같은 권리들을 승인받지 못했다면, 어느 쪽도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조약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진짜 아이러니가 있는데, 종교적 용인 그 자체를 절대선으로 여긴 이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반대파를 제거할 수 없다면 평화의 대가로 타협해야 했고, 그리하여 전쟁의 예기치 못한 결과로 용인이 자리잡았다. 이런 이유로 지난날 종교개혁들이 단호히 고수하고자 했던 가정들 중 일부─종교적 충성과 정치적 충성의 융합, 기독교 문화와 시민사회의 완전한 일치─가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115-9)


"종교개혁은 더 직접적이고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권위의 기존 위상에 도전하기도 했다.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신민들이 통치자에게 항거한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정치적 사실이었지만, 내심 그들은 자신들이 취하는 조치가 법적·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 결과 또 하나의 중대한 국면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복종의 한계가 전례없이 이론화되었고, 종속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성숙한 이론들이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카를 5세의 적의에 직면한 신교 제후들을 위해 루터파 신학자들은 정치적 복종에 관한 교리와 입헌 이론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통치자에게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독일 제후들은 황제와 공동으로 제국의 좋은 질서를 책임져야 했다. 만일 황제가 참된 종교를 지탱하는 의무를 게을리하면, 적그리스도 교황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면, 그에게 적법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119-20)


"일각의 견해와 달리 칼뱅 역시 원칙에 입각한 저항을 지지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은 일부 국가들의 헌법에 따라 〈인민의 자유의 수호자들〉이 (고대 스파르타의 민선장관이나 로마의 호민관처럼) 폭정을 막아내는 일을 용인받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신중하게도 칼뱅은 근대 왕국들의 신분제 의회 또는 의회가 '아마도'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칼뱅이 '거짓된' 숭배의 참상을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참된 기독교도라면 그것을 멀리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적어도 소극적인 저항과 시민 불복종을 권유한 것이었다. 칼뱅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칼뱅의 입장보다 덜 모호하고 더 급진적인 논증을 개진한 까닭은 독일의 연방 권력구조를 결여한 지역들에서 실제로 박해를 당하고 대항-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는 사악한 통치자는 전복되거나 살해될 수도 있다는 폭군 살해론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120-1)


"종교 전쟁─종교적 소수파를 마지못해 공식 용인한다는 혼란스럽고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이라는 대변동이 잦아든 뒤 즉각 나타난 종교개혁의 결과는 정치적 권위의 강화와 공고화였다.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같은)를 빼면, 17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의 기조는 '절대주의'였고, 대의기구는 쇠퇴했으며, 군주의 구속받지 않는 권력 행사가 절대선으로 제시되었다. 저항 이론들은 폭력적이고 분열적이었던 가까운 과거의 산물로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 피치자, 신의 3자 관계의 계약적 측면에 근거하여 숙고한 끝에 정치적 불순종에 대한 정당화를 정식화한 논변들은 미래에 아주 중요했다. 물론 정당화 논변을 창안한 이들의 목표는 민주정 수립이나 정치적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우상 숭배'와 '이단'의 근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작업들은 18세기에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새롭고 판이한 정치적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125)


4 사회


"전근대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투자하는 활동은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농업(인구 절대다수의 직업)은 공동체가 합의한 관습에 따라 모두가 씨를 뿌리고 쟁기질을 하고 때가 되면 함께 수확하는 집단 활동이었다. 생계유지가 집단 활동이었던 것처럼 수확 실패, 전염병, 기상 이변, 전쟁 등 목숨을 위협한 주된 원인들도 집단으로 겪는 역경이었다. 이런 난관은 지금도 보험증서에 깨알 같은 글자로 끼워 넣는 표현처럼 '신의 행위'[불가항력 또는 천재지변을 뜻함]로 보였다. 주님이 개개인에게 상이나 벌을 주기도 했지만,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심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의 행위가 모두의 소관이 되었다. 소수의 부도덕한 행실이나 이단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사회에 천벌이 내리면 그들을 용인한 모두가 고통받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남편, 아내, 자식, 이웃 등과 함께 천국에 가기를 원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129-30)


"종교 조직과 사회 조직 모두의 주요 구역은 교구였다. 교구는 그 경계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응당 속해야 하는 지역의 행정 단위였다." "신교는 국교로 인정받은 곳에서 기존 교구 체계를 유지했고, 공동체 결속, 감독, 통제를 목회 임무의 주요 특징으로 삼았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야만 출교(가톨릭 종교재판소가 공표했든 제네바 종교국이 공표했든)가 불러일으켰던 격정을 이해할 수 있다. 출교는 사회적 불명예의 원천(적어도 공동체에서 덕망 높은 이들에게는)이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 극히 중요한 행사에서, 무엇보다도 이웃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지위와 좋은 평판을 상징하던 성체성사에서 배제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출교당한 자는 대부모(代父母) 자격도 금지되어 성체성사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빛바랜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당시 대부모 제도는 세례를 받는 아이에게 평생의 후원자를 정해주고 가족들 사이에 영적 친족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사회 제도였다."(130-2)


가톨릭 문화에서 '자선(charity)'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불우한 이들을 향한 이타심을 뜻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동반자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돌려주는, 사회관계가 바로잡힌 상태를 뜻했다." "그러나 신교 개혁가들이 보기에 빈자들에게 주는 행위는 '선행'이 아니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영적 이로움이 교환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빈자들이 특히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통념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가난을 진지하게 다루었고, 가난을 낭만화하던 관행을 그만두었으며, 구제 계획의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해 '자격 있는 빈민'을 지원했다. 어쩌다 한 번씩 차별을 두지 않고 베풀던 기존의 자선 형식은 사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일부 지역들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루터의 비텐베르크를 시작으로 많은 신교 도시들이 비슷한 계획을 실행하여 구걸을 금지하고, 빈민을 지원하는 '공동 기금(common chest)'을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 모금을 지시하고, 때로는 도시 구빈원을 설립했다."(133-4)


"가족은 신교의 핵심 사회 제도이자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동시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칼뱅은 개별 교회를 닮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목사 역할을 하며 집안 신도들인 아내와 자녀, 하인을 규제하고 지도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기는 아버지들이 지배한 시대였다. 가족과 가정생활에 관한 이 시대의 기본 전제를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은 가부장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자녀의 유년기에 복잡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린이는 나머지 인류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결백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매로 다스렸고, 억누르고 제지했으며, 교리문답의 메시지를 주입했다(이 동사의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로). 그러나 구약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신약은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라고 지시했다.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이었고, 개혁가들은 자녀를 야육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쳤다."(140-2)


"학자들은 여성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은 간과한 채 종교개혁이 여성에게 끼친 영향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곤 한다. 여성은 종교적 변화에 적극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대의 통념이었지만, 많은 여성이 변화에 동참해 열렬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당파심을 드러냈다. 메리 튜더의 체제에 의해 화형당한 신교도들 가운데 눈에 띄게 높은 비율(280여 명 중 51명)이 여성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신교 체제에서 여자들은 잉글랜드 가톨릭교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편과 별개인 법적 정체성이 아내에게 없거니와 남편이 교회에 다니는 한 아내에게 '영국 국교회 거부'를 이유로 벌금을 물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여성 행동주의는 성장중인 '자발적' 종교의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국교회들에서도 대개 가장 헌신적이고 독실한 구성원이었다. 근대 서구 문화의 뚜렷한 특징인 종교의 여성화는 가부장적 시대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146-8)


5 문화


"종교개혁 이전에 종교는 예배자들의 감각 범위 전체를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히 감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적 측면이 도드라졌다. 으리으리한 대성당부터 변변찮은 예배당까지, 교회들은 제단화, 프레스코 벽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을 정교하게 새긴 조각상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커다란 그리스도 조각물(잉글랜드에서는 루드rood라고 불렀다)은 제단 공간과 본당 회중석을 나누는 칸막이의 맨 위에 걸린 채로 교회의 시선을 지배했다. 종교 이미지를 옹호하는 고전적 논변은 그런 이미지가 문맹자들을 위한 교훈적 도구, '평신도들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정을 담아 조각하고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성인 이미지, 평신도들이 헌금을 바쳐 비용을 대고 촛불을 밝혀 공경한 그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 글자 이상이었다. 이미지는 신성한 권능의 프리즘으로, 예배에 참석해 집중하는 신도들이 가장 주목할 법한 위치이자 그들의 기도가 가장 응답받을 법한 위치에 있었다."(157-8)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비범한 유산을 거부하고 태반을 파괴했는데, 교양이 없거나 예술의 힘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더 예민하게 감지했고 우상숭배의 위험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종교 이미지에 대한 주요 개혁가들의 태도는 제각기 달랐다. 루터는 본인이 그림이나 조각의 힘에 별로 감명받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미지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보기에 이미지들 자체는 멜란히톤이 개진한 신학적 범주인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사례들, 즉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게 교회가 보유해도 되고 버려도 되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점이었다. 이미지를 숭배하거나 신에게 상을 받기를 기대하며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지만, '약한 자들'을 지도하는 수단으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루터파 뉘른베르크의 교회들에서 귀중한 고딕 예술 작품이 살아남았다."(159-60)


"시각 이미지의 종교적 유용성에 어느 정도까지 열려 있었던 루터주의의 입장을 개혁파 전통의 지도자들은 공유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스스로 인정하는 감정가였지만(〈빼어난 그림과 조각상은 그 자체로 내게 큰 기쁨을 준다〉), 그런 이미지가 교회 안에 자리하거나 예배에서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역할을 허용하는 것은 마땅히 하느님 한 분만이 받아야 하는 경의를 중간에서 가로채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고, 인간이 만든 사물을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주권을 모욕하는 꼴이었다. 루터와 츠빙글리 이후 갈라진 노선들은 성서의 이정표들에 대한 서로 다른 독해를 반영했다." "칼뱅에 따르면 〈하느님을 표상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그 형상들과 그분은 전혀 닮지 않았으므로 그분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분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이다〉. 이미지는 말 그대로 우상, 그릇된 숭배의 버팀목,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전염병이자 오염물이었다."(161-3)


"가톨릭 종교개혁은 (신교에 맞서) 성상의 가치를 다시 역설하는 한편 예술을 통해 신도들과 하느님을 연결할 새로운 방법을 궁리했다." "가톨릭이 이용한 예술에는 신교에 대적하는 전투적인 측면, 성상 파괴자들에게 '엿을 먹이는' 측면이 있었다. 가톨릭은 동정녀 마리아 이미지로 군기(軍旗)를 장식했는가 하면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이단자들을 완파하고 1571년 중대한 레판토 해전에서 무슬림들을 무찌른 공을 '승리의 성모'에게 돌렸다. 이단은 의인화된 형태로든 루터나 칼뱅을 닮은 인물의 형태로든 승리자 가톨릭에 짓밟힌 모습으로 자주 시각화되었다." "이미지가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교훈적 역할을 수행한 저 멀리 신세계와 아시아에서는 종교 예술이 개종 캠페인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예수회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능력을 확신했다. 그렇다 해도 전도를 받은 각양각색의 사회들은 유럽의 기독교 모델을 그저 흡수한 것이 아니라 토착 전통과 환경에 맞추어 조정했다."(167-9)


"〈음악은 신의 말씀 다음으로 가장 높이 칭송받을 가치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음악 애호가이자 능숙한 류트 연주자였고, 노래를 이용해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회중을 예배에 직접 참여시키려 했다." "훗날 루터가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수백 년간 신교의 애창곡이었다." "루터는 종교음악에 관대하게 접근했다. 라틴어 텍스트를 허용했고, 다성음악에 감탄했다. 종교음악에 관한 한 루터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보다 교양 수준이 높았다. 에라스뮈스는 〈우렛소리 같은 소음과 우스꽝스럽게 뒤섞이는 성부들〉을 싫어했고, 현학자마냥 음악은 성서 텍스트를 명료하게 수용하는 데 필요한 수단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 이후 루터교 음악은 새롭고 모험적인 경로로 들어섰다." "루터가 처음으로 시도한 코랄(chorale) 실험과 그 실험의 직계 후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천재인 J. S. 바흐의 전집 사이에는 뚜렷한 연속성이 있다."(173-5)


"루터처럼 재능 있는 음악가이긴 했으나 츠빙글리는 음악을 회화와 거의 같은 범주에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느님 경배를 음악이 어지럽힌다고 보았다. 취리히의 교회들은 오르간을 치웠고, 예배에서 모든 형태의 노래와 성가를 뺐다. 칼뱅 역시 오르간과 악기를 거부하긴 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서 자체에 주님을 노래로 찬양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하여 다윗의 시편을 찬양용 가사로 제공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전례 음악에 내린 처방은 시각예술에 관한 지시와 비슷했다. 교회음악은 〈음란하거나 불순한〉 함축을 피해야 했고, 속가의 선율을 차용해 작곡하는 미사곡(소위 '패러디 미사곡')이 금지되었다. 가사는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16세기 후반에 다성음악 작곡가들은 역설적으로 이런 제약 덕분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사곡과 모테트 중 일부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175-8)


# 모테트(motet) : 시편의 시를 비롯한 성서 구절에 곡을 붙인 무반주 다성 성악곡


6 타자


"이단은 최악의 범죄, 하느님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범죄였다. 이단자에게 교수형은 문자 그대로 과분한 처벌이었고, 이단자의 육체를 불태우는 것은 사회를 정화하는 의식, 이단자의 영혼을 틀림없이 집어삼킬 지옥불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루터가 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사 두 명이 브뤼셀에서 화형당한 1523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남녀 약 5000명이 종교적 믿음을 이유로 법적으로 처형되었다. 그들은 교회와 협력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특히 이 기간의 초기에 가톨릭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중에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순교자들과 순교자가 되려는 이들은 어느 종교 집단에서나 소수파였지만, 변화의 속도를 올리고 타협을 무산시키는 힘을 가진 소수파였다. 그들은 대의의 빛나는 상징이자 연약한 교우들을 격려하는 존재로서 열렬한 추모를 받았다."(185-7)


"이단이나 가톨릭교도의 반역죄에 대한 처형은 대부분 1600년 이전에 집행되었다. 교파들을 가르는 경계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완고해졌음에도, 종교적 소수집단을 박해하여 일소할 수 없다는 것이 여러 지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단 하나의 종교만 믿는다는 허구를 지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비국교도들이 일요일마다 국경을 넘는 관행(Auslauf, 달아나다)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용인과 관용은 같지 않다. 후자는 다양성 그 자체의 수용을 함축하는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태도이자 상반된 관점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당국들은 원칙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비국교도들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보통 평화가 종교적 내전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사적 숭배의 권리를 인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공동체들 내에서 용인은 협의된 사회적 관행이었으며, 종교개혁 시대 막바지에 '관용의 등장'이 곧장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190-2)


"이슬람은 중세의 기독교권 유럽에서 주요한 정치적·문화적 '타자'였다. 대체로 신교도들은 무슬림들을 가톨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우는 전우로 환영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따라서 루터에게 무슬림은 그저 하느님의 적이었다. 가톨릭권 유럽 대부분에서 유통기한을 한참 넘겨서까지 쓰여온 십자군 수사법을 루터는 구사하지 않았다. 복음을 전한답시고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다가오는 최후의 날들과 오스만 제국을 확실히 연관지었고, 그의 마음속에서 교황과 '튀르크족'은 적그리스도 역할을 줄곧 분담했다. 중세의 일부 논자들은 이슬람을 엇나간 '기독교 분파'로 여겼고, 원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공통 기반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앙 간 대화'는 루터의 어휘에 없는 표현이었다. 1542년 루터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인쇄된 코란을 후원하는 데 일조했는데, 종교적 개방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적의 견해를 알리고 논박하기 위함이었다."(193-5)


"튀르크인이 가깝지만 외부에 있는 '타자', 즉 기독교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오랜 세월 기독교 사회 내부에서 염증성 이물질로 존재해온 유대인은 다른 종류의 난제였다. 대체로 보아 세속 당국과 종교 당국은 도시 경제와 국가 재정 조달 측면을 유념하여 민중의 반유대 폭력을 제지하려 했지만, 고중세와 중세 후기에 대중적·공식적 반유대 감정은 더욱 격화되어 1290년 잉글랜드에서,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에스파냐에서(그라나다 정복을 기념해),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유대인이 잔류를 허용받은 곳에도 그들을 향한 분노가 두고두고 폭발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도 소년들을 납치하고 살해하여 그들의 피를 유월절 무교병(無酵餠)을 굽는 데 사용한다는 '피의 비방'이 그런 분노를 부채질하곤 했다. 이와 관련된 혐의는 성체 신성모독이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이 축성받은 성찬용 제병을 훔쳐서 고문함으로써 예수의 육신에 대한 폭력을 영속화하려 든다고 믿었다."(196-7)


"비기독교인 타자와의 가장 난처한 조우는 기독교 유럽 안쪽도 아니고 경계도 아닌 저 멀리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역만리에서 가톨릭교도들(그리고 뒤늦게 신교도들)은 종교개혁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오래된 금언인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배타성의 극치인 이 언명은 이교도들을 시급히 포섭하라는 주문, 그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살이로부터 구하기 위해 지치지 말고 힘쓰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럴 기회는 문자 그대로 거의 무한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적 가치라는 문제는 아메리카 대륙을 복음화하는 동안 진지한 논쟁의 주제였다.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파괴한 것이야 정치적 기정사실이었지만,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그 이후 정복자 지주들이 토착민 노동을 착취하는 상황이 선교 활동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201-3)


"동양에서 기독교의 호소력을 특히 사회 엘리트층까지 넓히려던 시도를 개척한 이는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였다.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펼친 사비에르는 '적응주의' 노선을 택해 기독교와 정반대되지만 않으면 지역 전통을 포용했다. 또다른 예수회원 로베르토 노빌리는 인도에서 같은 접근법을 택해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의식 같은 기독교 개종자들의 '사회적' 관습을 허용했다. 역시 예수회 수사들이 순응책을 구사한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1551~1610)와 그의 후계자들이 고관처럼 차려입었고, 지도 제작술과 천문 관측술로 중국의 학구적인 행정 계급에 감명을 주었다. 기독교를 생경한 수입품이 아니라 기존 신조의 완성형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리치는 '하느님', '천국' 같은 개념들을 유사한 한자 용어로 표기하도록 장려했고, 유교의 조상 숭배는 가톨릭교와 완전히 양립 가능한 민간 제례라고 말했다."(205-6)


7 유산


"19세기 후반에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늘날 베버의 다른 근대화론은 예전보다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것은 신교가 초월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종교로서 생활환경에 관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에 치명상을 입혔고, 광범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촉진했다는 견해다." "그러나 학자들이 발견한 증거에 따르면 다름 아닌 근대의 신교권 유럽 전역에서 종교 문화들은 징후와 징조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흠뻑 빠져 있었고, 마귀와 천사가 활동한다고 상상했다."(215-6)


"기적 개념, 아울러 악마를 비롯한 영적 존재들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믿음이 용인될 가능성은 적어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례상 '과학혁명'이라고 뭉뚱그리는 현상에 수반된 변화였다." "일각에서는 신교가 근대 과학을 후원한 사실이 가톨릭교가 근대 과학을 적대한 사실만큼이나 자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교가 과학의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은 무엇보다 중세 유럽에 추론하고 실험하는 활기찬 전통들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럴싸할 뿐이다. 여하튼 신교의 핵심은 구속받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텍스트에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 많은 신교도들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들어 진화론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펴보는 기간 내내 숱한 신교도들이 구약성서 여호수아기에서 기브온 위에 '멈추어 있는' 해를 언급한다는 이유로 지동설에 반대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종교개혁기의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217-8)


"그렇다면 이 모든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근대 세계의 시작을 우렁차게 알린 서곡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로는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기에 대두한 세력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은 실은 역설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은 사회적·종교적 균일성의 창출을 지향했으나 목표와 달리 다원주의의 형태들을 산출했으며, 그 형태들은 뒤이어 세계의 가장 먼 지역들에 수출되어 모방되었다. 종교개혁은 국가의 정치적·정신적 권력을 강화하겠노라 약속했지만,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문법과 어휘를 낳아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단과 그릇된 믿음을 뿌리 뽑고자 했지만,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까지 주춤주춤 오류를 용인했다. 종교개혁은 사회 전체를 신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장기적으로 사회가 세속화될 여건을 조성했다."(219-20)


"이 모든 말은 종교개혁의 주된 유산이 분열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처하기 위해 출현한 전략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통일된 '기독교권'이라는 중세의 이상─기독교의 정치적·사회적 가치들을 공유함으로써 안팎으로 완전한 통합체를 형성하는 지역 사회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언제나 현실보다는 오히려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개혁들은 서로 화목할 수 없는 계획들을 추진했고, 그로써 기독교의 염원과 그 염원이 희미하게 투영된 사회의 관습을 영구히 박살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분파들만이 종교개혁 시대의 절대적 확실성에 매달린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한 오래된 물음들─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에 관한 물음,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의무에 관한 물음, 양심과 정치적 복종 사이의 균형에 관한 물음─은 지금도 올바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고 있다."(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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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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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4년 유럽


"18세기 말까지 유럽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동질적이었다. 여전히 지주 귀족층이 지배하고, 국교회에 의해 정통성을 확보한 유서 깊은 왕가들이 통치하는 농업 사회였다. 10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뀌거나 불안정한 변화의 길을 걸었다." "1914~18년의 대전쟁은 지구상의 모든 대양에 걸쳐서 벌어졌고 최종적으로는 교전국이 모든 대륙을 아울렀으니 마땅히 〈세계대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이 전쟁이 최초의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유럽 열강은 지구 곳곳에서 서로 싸워왔다.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그냥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앞선 모든 세계대전들처럼 이 전쟁도 처음에는 유럽 강대국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충하는 야심에서 비롯된, 오직 유럽에 국한된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이 이토록 끔찍하게 전개되고 파국적인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전 지구적 규모 탓이 아니라 발전된 군사 기술과 전쟁을 수행한 국민들의 문화가 결합된 탓이다."(8-10)


2 전쟁 발발


"1899년에 출판된 선구적 저작 『미래의 전쟁』에서 폴란드인 저자 이반 블로흐는 치명적인 무기들로 싸우는 미래의 전쟁에서 공세에 나서기는 불가능할 거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1899~1902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전쟁에서 보어인 라이플 소총수들의 실력과 용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해 그 지역을 평정했다. 승리의 주된 요인은 뜻밖에도 군사 개혁가들이 오랫동안 소멸을 예견해온 기병의 활용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례는 1904~05년 양측이 최신 현대 무기로 싸운 러일전쟁이다. 일본군은 정교한 보병·포병 전술과 병사들의 사생결단식 용기의 결합으로 연전연승하며 러시아가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럽의 군대들이 얻은 교훈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여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교훈은 승리를 조기에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을 일찍 끝내는 유일한 길은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33-5)


3 1914년: 개전 국면


"전쟁은 이제 전 국민적 사안이었다. 실제로, 사회가 갈수록 세속화돠면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Nation〉(민족)이라는 개념은 온갖 휘황찬란한 군사적 위용 및 역사적 유산과 더불어 준(準)종교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징병제는 이러한 의식화 과정을 도왔지만 거기에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1916년까지 징병제가 도입되지 않은 영국의 여론은 대륙 어느 곳 못지않게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다. 다윈 이론에 물든 사상가들에게 전쟁은 말랑말랑한 도시 생활이 더이상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자다움'을 시험하는 무대로 비쳤다. 진보가 자연 세계에서 나타나는 종들 간의 생존경쟁처럼 민족 간 협력보다는 경쟁의 결과인 세계 혹은 그렇다고 모두가 믿었던 세계에서, 그러한 '남자다움'은 민족이 저마다 '생존의 적자가 되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지만 특히 독일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여겨졌다."(48-9)


"덧붙여 모든 정부는 저마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숙적 러시아가 촉발한 해체 공작에 맞서 자신들의 유서 깊은 다민족 제국의 존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슬라브 동포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맹방인 프랑스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오랜 숙적이 자행한, 전적으로 자신들이 도발하지 않은 공격에 맞서 정당방위 차원에서 싸우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국제법을 옹호하고 나폴레옹 시대 이래 최대의 대륙발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단 하나 남은 맹방을 대신하여, 그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세계 강국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질투심 많은 서쪽의 적수들, 또 그들과 손잡은 동쪽 슬라브족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상이 각국 정부들이 자국민들에게 내세운 근거들이었다."(50-1)


4 1915년: 전쟁이 계속되다


"전쟁은 이제 전통적인 세력 다툼을 넘어 갈수록 이데올로기 충돌 양상을 보였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 전쟁을 경쟁 강국의 도전에 맞서 영(英)제국을 수호하는 일로 보았다면,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군홧발에 맞서 법과 규칙,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투쟁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프로이센 군국주의가 벨기에를 다루는 방식은 독일이 승리하면 유럽이 직면한 현실을 미리 맛보게 해주는 셈이었다." "독일의 학계와 지성계도 이 전쟁을 한편으로는 슬라브족 야만주의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고 경박한 프랑스 문명과 앵글로색슨의 조야한 상점 주인식 물질주의에 맞서 쿨투어(Kultur), 즉 독일만의 독특한 문화를 수호하는 투쟁으로 묘사하는 데 합세했다. 이는 군국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 전사의 미덕에 의해 수호되는 문화였다. 그러한 '대중의 열정'은 교전국들이 전쟁을 계속해나가겠노라는 결의에서 적어도 정치적 계산이나 군사적 계산만큼 중요했다."(67-71)


"1915년 내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공격을 감행하는 가운데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새로운 종류의 전쟁 기술을 터득했다. 3월에 전개된 연합군의 초기 공격은 쉽게 격퇴되었다." "1914년 이전의 포탄은 공중에서 터져서 기동전에 효과적인 유산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가시철조망으로 보호된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참호 안의 적 보병들을 무찌르고,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하는 적의 예비 병력의 발목을 붙잡고, 대항포격으로 적의 대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고도로 폭발력 강하고 무거운 포탄이었다. 게다가 보병에 의한 공격은 일제 엄호 포격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일급 참모 업무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통신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동식 무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이용 가능한 통신수단은 연락병과 전서구(傳書鳩), 그리고 적이 일제 포격을 가할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전화선뿐이었다."(92-3)


5 1916년: 소모전


"사실, 전쟁은 국가들이 더 잘 조직되고 더 단단히 결집되도록 만들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문제의 중심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유예되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행정적·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그들은 새로운 협상력을 얻었다. 대학 출신 전문가와 실무가들에 의해 강화된 관료조직은 국민 생활에서 갈수록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해나갔고, 많은 경우에 그때 얻은 권한을 전후에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입대한 사람들이 일하던 자리를 부분적으로 메운 여성들은 간호와 복지 분야뿐 아니라 사무실과 공장, 농업 부문에서도 갑자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면서 사회의 균형 전체를 바꾸고 있었다. 1918년에 이르자 그러한 변화는 새로운 인민대표법에 반영되어 영국의 경우, 30세 이상의 여성을 포함해 유권자가 70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전쟁의 부산물로서, 영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근접한 나라가 되어갔다."(99-102)


"1915년 말까지 독일군은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었지만 종전을 앞당길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팔켄하인은 자신이 동부에서 성공했던 수법에 눈길을 돌렸다. 다름 아닌 소모전이었다. 프랑스가 말 그대로 피를 모두 흘려 죽을 때까지 프랑스군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자면 프랑스군이 도저히 상실해서는 안 될 땅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의 땅은 베르됭 요새가 될 것이었다. 베르됭은 전략적 중요성은 없었지만 취약한 전선의 돌출부에 자리잡은, 프랑스의 위대한 군사적 영광들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였다." "베르됭 공세로 양측은 5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이는 위대한 승리였지만 프랑스군을 거의 산산조각 낸 승리였다. 독일측에는 최초의 부정할 수 없는 실패였고, 군대와 국민 양측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팔켄하인은 8월에 해임되었고, 카이저는 충직한 루덴도르프를 대동한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새로 임명했다."(108-11)


6 미국이 참전하다


"해상 봉쇄에 시달리던 독일 정부는 이에 맞서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 즉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미국의 참전이 실질적 효과를 보일 때쯤이면 전쟁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으리라고 계산했다." "더구나 독일 해군 참모부는 영국이 어떠한 용도로든 이용할 수 선박이 800만 톤분밖에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 잠수함이 영국 선박을 격침시키는 것을 한 달에 60만 톤분으로 늘리고 중립국 선박이 겁을 먹고 영국에 접근하지 않게 된다면, 6개월 안으로 영국은 곡물이나 고기 같은 필수 식량이 바닥날 것이다.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갱도 버팀목으로 쓰는 스칸디나비아 목재가 부족하여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철과 강철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로써 침몰된 선박을 대체할 선박의 건조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을 하든 안하든 6개월 안으로 영국의 항복은 통계상으로 확실했다."(124-9)


"최고사령부의 결정은 1917년 1월 9일에 내려졌지만,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는 1월 31일에 가서야 영국 제도로 접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전이 이튿날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윌슨은 즉각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했다. 이에 따라 독일 외무상 아르투어 침머만은 이미 1월 16일에, 미국과 이따금 적대 행위를 주고받는 상태에 있던 멕시코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멕시코가 (미국에 상실한)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독일 측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과 함께 두 나라가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공동으로 강화를 맺는' 동맹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미국 내 반응, 특히 그때까지 고립주의적이었던 서부의 반응은 결정적이었다. 선박 몇 척이 더 격침되자 윌슨은 다른 대안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5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135-6)


7 1917년: 위기의 해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17년 공세에서 전년도의 참사들(베르됭과 솜 강 전투)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4월 16일, 니벨이 엔 강 너머 슈맹데담의 숲이 우거진 고지대를 향해 대대적으로 예고한 대공세를 개시했을 때, 여건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 독일군은 사전에 충분한 경고를 받았다. 프랑스군의 계획은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함으로써 이미 틀어졌다." "열흘 동안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3만 명이 넘었다. 니벨은 베르됭의 영웅 페탱으로 교체되었지만,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무너졌는데, 이는 온전한 반란이라기보다는 부대 전체가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의 파업에 가까운 상태였다. 페탱은 엄중한 처벌은 최소화한 채, 대체로 부대의 여건을 개선하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자제하는 방식으로 부대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은 그 해의 남은 기간 동안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었다."(144-5)


"1916년 솜 강 전투의 인명 손실로 로이드 조지는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게 과연 현명한 전략인지 깊이 회의했고, 1917년 내내 최고사령부에게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려보라고 촉구했다." "그 결실이 12월 11일, 영국군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앨런비의 승전으로 영국은 중동에서 잠깐 동안 헤게모니를 확립하게 된다. 무엇보다 1917년 11월에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게 됐다. 안타깝게도 벨푸어는 현지 주민들이나, 군사 지원의 대가로 영토를 약속 받은 아랍 통치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약속을 해버렸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 외무부 관리들이 중동 지역을 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한다고 합의한 내용(사이크스-피코 협정)도 마찬가지였다. 양립할 수 없는 이런 의무 조항들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중동 지역을 혼란에 빠트렸으며, 21세기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숙제를 남겼다."(155-62)


8 1918년: 결정의 해


"1918년, 독일 최고사령부의 걱정거리는 서부로부터의 위협이 아니라 독일 내부의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은 독일에까지 뻗쳤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최고사령부와 그들의 민간인 지지자들이 보기에 병합이나 배상금이 없는 강화라는 제국의회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에서 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이상 독일의 외부 적들에 맞선 전쟁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독일의 가치를 파괴하려고 작심한 듯한 국내 세력들에 맞선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의 시각에서 후방 전선이 모조리 붕괴하기 전에─더 중요하게는 절망적인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전에─적대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압도적인 타격으로 연합국의 전의를 앗아버려 독일의 강화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승리였다. 이것이야말로 독일의 진정한 '마지막 패'일 터였다."(167-71)


"1918년 초, 프랑스에는 이미 미군이 100만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물론 아직 전투 조직으로 편성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금방 배웠다. 무엇보다 훤칠하고 쾌활하며, 잘 먹고 잘 자란 미국 중서부 출신 젊은이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무한한 낙관주의와 더불어 지친 연합국 동료들에게 이 전쟁에서 질 리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8월 초 이래로 독일군은 추가로 22만 8,000명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은 탈주로 인한 것이었다. 기지에 주둔중인 부대는 국내로부터 전해지는 갈수록 비관적인 소식에 전염되고 공산주의 선전에 영향을 받아, 군사 반란까지는 아니라 해도 파업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9월 27일, 미군이 합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24시간 동안 100만발에 가까운 집중 포격으로 힌덴부르크 선의 본선을 공략했다. 이 공격은 마침내 루덴도르프의 기를 꺾었다. 9월 29일, 그는 카이저에게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은 없다고 보고했다. 파국을 피하는 방법은 조기 휴전뿐이었다."(178-85)


9 강화 합의


"베르사유 평화 협정은 악평을 들어왔지만 그 조항들 대부분은 세월의 시련을 견뎌냈다. 조약이 탄생시킨 국가들은 국경선이 약간 변동되긴 했지만 지난 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존재로 야기된 '동방 문제'도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적어도 동쪽 국경선에 관한 결정은 반드시 뒤집으려 했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소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불신, 동유럽 동맹국들의 허약성,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유사한 시련을 겪지 않으려는 자국민들의 심한 거부감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개입하기를 꺼렸다. 국내 문제와 제국의 문제들 외에도 점점 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 때문에, 연이은 정부들은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식의 해법을 추구하게 되었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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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
데이비드 M. 귄 지음, 신미숙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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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개에 싸인 과거


"최초의 로마인들을 자연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탐구해보면,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이탈리아인 가운데 라틴인은 기원전 1500~1000년경에 라티움 평원을 차지했다. 일찍이 이곳에 도달한 이들에게 로마는 정착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고리 모양을 이루는 일곱 언덕은 방어하기 용이했으며, 가까이에 티베리나 섬이 있어 테베레 강을 건너기 가장 쉬운 지점이었다. 북쪽에는 에트루리아 지역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원전 900년경 에트루리아인들이 정착했다. 남쪽에는 기원전 750년부터 그리스 세계의 식민자들이 건설한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나폴리(라틴어로 네아폴리스)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 그리스 도시들 때문에 남부 이탈리아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대大그리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라티움은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자연스러운 지상 연결 통로였다. 이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초기 로마는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21-4)


2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기원전 499년 혹은 496년에 벌어진 레길루스 호수의 전투 이후 약 두 세기 동안 라틴인과 맺은 동맹은 로마가 세력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로마의 동맹국이 된 라틴 도시는 세공을 납부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의 병사들을 제공하여 로마 장군의 지휘 아래 로마군에 복무하게 해야 했다. 라틴인은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에서 일정한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으며, 외부 세력의 침략을 받을 경우 로마의 보호를 보장받았다 또한 라틴 동맹국들은 로마 사회에 매우 긴밀하게 통합되었다. 로마인과 라틴인은 쌍방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유효한 경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으며, 서로 혼인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적출로 인정받았다." "로마-라틴 동맹 덕분에 로마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결코 이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개 도시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로마가 제공한 특권들은 매력적이었으며, 로마의 우위는 강압보다는 합의에 기반을 두었다."(32-3)


"왕정이 몰락한 후, 로마를 지배하는 귀족 계층은 처음에는 파트리키(patricii: 혈통 귀족을 의미함)로 알려진 특정한 대가문들로 제한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 율리우스 가문, 그리고 코르넬리우스 가문 같은 파트리키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만이 종교적 직책이나 정치적 직책을 보유할 수 있었다. 파트리키가 아닌 모든 로마 시민은 플레브스(plebs: 평민)로 분류되었다. 플레브스에는 가난한 시민들이 포함되었지만, 그렇다고 플레브스가 '가난한 사람들'을, 파트리키가 '부유한 사람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여느 혈통 귀족만큼이나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 하지만 혈통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다보니 혈통 귀족과 평민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빚어졌다. 최초의 분쟁은 혈통 귀족의 착취에 대한 반발로 비롯되었다." "사회적·정치적 권리 확보를 위한 평민들의 기나긴 투쟁은 신분 투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0)


"신분 투쟁 과정을 통해 로마 인민은 어느 정도 보호권을 획득하고, 다소간 국가 행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평민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역할을 요구했다." "한 세기 이상 충돌을 거듭한 후, 기원전 367년에 평민이 집정관(consul)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첫번째 평민 집정관은 366년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했다. 결국에는 평민들도 거의 모든 정치적·종교적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혈통 귀족과 평민 사이에 출생에 의한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공화정의 지배 계층은 확대되었다. 혈통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을 포함하는 새로운 귀족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이렇게 결합된 새로운 귀족 계층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로마 공화정의 독특한 통치 구조를 이루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이 확립되었다. 바로 행정관, 원로원, 그리고 민회였다."(42-3)


# 행정관의 종류

1. 집정관(consul) : 국가의 정치적·군사적 수장

2. 법무관(praetor) : 시민과 속주민의 재판 담당

3. 조영관(aedilis) : 도로, 상수도, 식량 문제 등 로마 시의 행정 처리

4. 재무관(quaestor) : 재정과 사법에 관한 의무 수행

5. 호민관(tribune of the plebs) : 혈통 귀족 출신 행정관들의 부당한 행위 견제

6. 감찰관(censor) : (비상근) 시민의 명부 작성 및 재산 평가, 원로원 심사

7. 독재관(dictator) : (비상근) 비상 시기에 국가를 감독하는 권한 행사


3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공화정의 역사에서 원로원 엘리트들은 '위엄'(dignitas)과 '영광'(gloria)에 대한 요구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로마의 사회와 정치생활을 지배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모방하고 능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는 공화정의 군사적 팽창의 원동력이자 로마 세력 확장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엘리트의 경쟁은 공화정이 몰락하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위엄'과 '영광'에 대한 욕구는 공화정기의 모든 영웅들, 즉 한니발을 제압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추진력을 제공한 힘이었다. 점점 더 위대한 능력을 획득한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와도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개인의 '위엄'이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더 중요해졌으며, 결국에는 로마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킬 정도의 막강 권력을 손에 넣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61-2)


"로마의 경우 원로원 귀족층 아래에서는 계층 구분이 덜 명확한 편이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원로원 엘리트층 바로 아래에 기사 계층(equites)으로 알려진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초기 로마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상업과 공업 분야에 적극 관여했다. 그러나 로마의 자유민 가운데 중심 집단은 소농 계층이었다. 이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했으며, 유사시에는 군복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로마 사회의 화합에 불가결한 일종의 유대 관계, 즉 보호자(patronus)와 피보호자(cliens) 관계를 맺어 엘리트층과 통합되어 있었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투표를 하고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 반면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보호하고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이것은 법적 관계가 아니라 비공식적 관계였으므로 남용될 여지가 있었지만, 실제로 남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수의 충실한 피보호자에 대한 지원은 귀족인 보호자의 '위엄'을 위해 중요했다."(62-3)


"로마 사회를 통합한 마지막 결정적 요소는 종교였다.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힘들이 만들어놓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고대의 로마인들은 신을 믿음으로써 확신을 얻고 보호를 기대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의 성장 원인을 공화정의 독특한 정치체제와 로마 군단의 힘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초기 로마인들의 경건함과 도덕성에 의해 신들의 은총을 얻은 덕분이라 설명했다. 종교는 로마인의 생활에서 필수 요소였다. 가정에서는 가정을 수호하는 정령들을 모시는 소규모 가정의례를 열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국가를 수호하는 최고의 신들을 기리는 대규모 희생제와 행렬을 거행했다. 신들의 승인을 얻기 전에는 선거를 치르지도,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다양한 신을 모시는 만신전은 항상 새로운 신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외국의 신들을 로마에 흡수하는 것은 우월함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로마인들과 피정복민의 유대를 확립하는 수단이었다."(77-9)


4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기원전 288년 스스로를 마메르티니(Mamertini: 마르스 신의 아들들)로 부르는 한 무리의 이탈리아 용병대가 시칠리아의 도시 메시나(Messina)를 장악했다." "기원전 265년에 메시나 내의 경쟁 파벌들은 로마와 카르타고에 동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타고인은 오랫동안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해왔기에 메시나의 요청에 응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로마는 마메르티니를 돕게 되었을까? 한 가지 동기는 두려움이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면,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위협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또다른 이유는,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인인 마메르티니를 도움으로써, 로마는 동맹국들이 위험에 닥쳤을 때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신의(fides)를 굳게 지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신의는 로마의 사료들이 즐겨 강조한 동기들이었다."(92-3)


# 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 전쟁 발발


"카르타고의 병력을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끈 인물은 한니발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쟁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한니발 자신과, 부친 하밀카르로부터 물려받은 로마에 대한 '바르카 가문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더 복잡했다.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힘이 팽창하자 로마는 경계심을 품었고, 기원전 226년경 스페인 북쪽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측의 영역을 확정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스페인의 도시 사군툼(Saguntum)과도 우호동맹을 체결했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이 이 도시를 공격하자, 로마는 이를 완벽한 전쟁의 명분(casus belli)으로 삼았다. 응징 차원에서 로마는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카르타고가 거절하자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행동은 분명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동맹국을 방어한다는 로마의 주장 이면에 로마 역시 전쟁을 열망하고 있었다."(98-9)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슬픈 후기와도 같다. 기원전 194년 로마는 또다시 카르타고에 파병했다. 카르타고인은 로마의 모든 요구에 굴복했다. 300명의 인질을 넘겨주었고 모든 무기를 양도했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들에게 본국을 포기하고 해안으로부터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고,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카르타고인은 3년 동안 영웅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로마인은 낙담한 상태에서 집정관 직을 맡기에는 너무나 젊은, 떠오르는 기수를 집정관으로 맞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양한 손자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그의 지휘하에 로마는 카르타고를 기원전 146년에 함락시켰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 토지는 저주를 받았고, 소금이 뿌려졌다.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 영토는 이제 로마 공화정의 속주가 되었다."(109)


5 지중해의 여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방대한 정복지를 '가장 강한 자에게' 남겨놓았다. 그의 휘하 장군들이 지배권을 다투었고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세 개의 주요 왕국이 나타났다. 안티고노스 왕조하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하의 시리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하의 이집트였다. 그리스는 도시들이 연합하여 형성한 동맹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특히 코린토스 만 북쪽의 아이톨리아 동맹과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 동맹이 강력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몇몇 도시들은 독립을 유지했으나 정치적 중요성은 거의 상실했다. 다른 국가들로는 무역 중심지인 로도스(Rhodes) 섬과 소아시아의 페르가뭄(Pergamum) 왕국 등이 있었다. 그리스 역사의 전 기간에 걸쳐 항상 그래왔듯이, 각국은 지속적인 전쟁과 계속 변하는 동맹들의 그물망에 얽혀 있었다. 로마는 거의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러한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113-5)


"'자유'는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해 선전 구호가 되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개별 도시국가들은 오랜 기간 각자의 자치를 위해 투쟁했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왕들은 비록 말뿐이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겠노라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예외라면, 로마의 경우 약속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194년 그리스에 있는 로마의 모든 군대가 철수했다. 주둔군도, 세공도, 새로운 로마의 속주도 생기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공화정은 그리스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상비군도, 관료들도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그리스인과 그리스 문화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조처이기도 했다." "이제 그리스의 영향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리스의 예술 작품들이 이탈리아로 밀려들어왔고, 그리스 언어와 문학 지식은 로마 엘리트들 사이에서 새로이 중요성을 인정받았다."(120-3)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 즉 기원전 146년에 로마 장군 루키우스 무미우스의 명령에 의해 코린토스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는 50년 전 코린토스에서 그리스인에게 부여되었던 '자유'를 종식시키기에 적합한 상징적 행위였다. 그리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속주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집트도 명목상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이제 그리스 도시국가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유산으로 남긴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했다. 수십 년에 걸친 충돌과 오해가 빚어낸 분노는 여전히 부글거리고 있었고,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의 긴장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길게 보아 두 문화가 만나 얻게 된 혜택이 그동안 치른 비용을 훨씬 능가했다. 로마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동지중해 세계에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몇 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했다."(128-9)


6 제국의 비용


"제2차 포에니 전쟁, 그리고 동방의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장한 결과 로마 엘리트들 내부에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례 없는 경력은 원로원 의원들 간의 평등이라는 공화정의 근본 정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초로 원로원의 집단 의지를 압도할 정도의 권위와 인기를 누리는 로마 귀족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이에 해당하는 마지막 인물은 아니었다. 로마 엘리트들 간의 경쟁 심리로 인해 다른 귀족들도 불가피하게 스키피오에 필적하거나 그를 능가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플라미니누스는 젊은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을 분쇄했으며,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한 이후 치러진 그의 개선식은 스키피오의 개선식을 방불케 했다. 스키피오는 이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을 노린 원정에서 동생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이렇듯 점점 고조되는 부와 '영광'에 대한 경쟁은 엘리트 전반으로 확대되었다."(133-4)


"세력 팽창이 이어지면서 로마로 엄청난 부가 유입되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였으나 오랜 원로원 가문의 지위를 얻지 못한 별도의 사회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129년 원로원 의원들은 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사 계층(ordo equester)과 분리되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같은 거대 무역도시들이 파괴되면서 기사 계층은 더욱 성장했다." "팽창의 경제적 효과는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의 더 광범한 주민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모든 고대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공화정 역시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이는 정복 전쟁들로 인한 부의 유입으로 더욱더 커졌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다. 왜냐하면 전리품 중 더 큰 몫을 챙긴 쪽은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받았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는 상승하였으며, 노예노동이 차지하는 비율도 확연히 증가했다." "팽창의 경제적 영향은 군사 지도자들의 등장보다는 덜 흥미로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공화정의 통합과 안정을 위협했다."(136-7)


"사료의 제한 때문에 기원전 2세기에 공화정이 직면한 사회적 위기의 정확한 규모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분명 소농들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예컨대 기원전 146년처럼 필요할 경우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집은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스페인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들은 특히 인기가 없었으며, 기원전 151년과 기원전 137년에는 징집에 반대하여 평민 호민관들이 집정관들을 투옥하기도 했다. 병력 제공과 충성심을 통해 로마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동맹국들도 불만이 컸다. 그들은 점점 더 길어지는 전쟁, 점점 더 멀어지는 전장에 병력을 제공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은 자기 몫의 전리품을 받았으나, 여전히 어떠한 정치적 발언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공무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는 기사 계층의 등장과 도시 폭도의 위협으로 인해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점화 심지에 불을 붙일 불꽃뿐이었다."(138)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추진과 실패, 사병화私兵化된 군대를 거느린 군사 지도자들의 등장


7 언어와 이미지


"기원전 2세기 사람들은 로마 귀족이 그리스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길 기대했는데, 이들은 공화정의 가치에도 집착했다. 이러한 집착은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로마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된 장르를 통해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바로 풍자시이다. 통렬한 사회적·정치적 비평, 그리고 문학적 패러디와 도덕적 판단이 결합된 풍자시는 공화정의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동시대의 논평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최초의 진정한 풍자시인은 가이우스 루킬리우스(기원전 102년 사망)였다. 그는 문학 서클을 만들어 교류하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구였다. 루킬리우스의 풍자시들은 단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가 확립한 장르는 오래 지속되었다. 루킬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인 호라티우스와 로마 최고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의 모델이 되었다. 훗날 제정기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는 '빵과 서커스', 그리고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와 같은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163-4)


"키케로는 로마에 대한 이상을 기원전 51년에 완성한 『국가론』에 묘사했다. 현재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국가론』은 플라톤의 『국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키케로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정치의 쇠퇴는 도덕의 쇠퇴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역으로 정치 개혁에는 도덕 개혁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키케로는 거친 세계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해 실제적 충고를 제시했다. 『의무론』(기원전 44~43년)에서 키케로는 당대의 올바른 행위의 지침으로서 과거 로마의 도덕성을 제시했다. 가장 위대한 선은 국가에 대한 봉사이며, 국가에 대한 최대의 봉사는 독재자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살해된 직후에 쓰인 저서로, 전제 권력을 추구하는 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필요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옳다는 키케로의 주장의 배후에는 당대의 매우 현실적인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168-9)


"로마인들 자신은 건축 분야의 업적을 고대 문명에 기여한 최대의 공헌 중 하나로 여겼다.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그리스인 디오니시오스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세 가지 업적은 '수도교, 포장도로, 그리고 하수도 공사'라고 썼다. 이같은 건조물들은 로마인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로마인은 디자인과 효율성 면에서 이들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기존의 건축 요소들, 특히 아치와 궁륭은 새로운 규모로 이용되었다. 또한 로마인은 콘크리트를 폭넓게 사용했는데, 이는 콘크리트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재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숙련노동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화정기의 특징을 규정하는 공공건물은 무엇보다 신전이었다. 신전은 로마인의 신앙심과 더불어 귀족의 경쟁심을 반영한다." "귀족들에게 신전 건축은 자신의 성공을 공적으로 기념하고, 신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이상적인 수단이었다."(172-5)


8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로마 공화정은 엄청난 유혈 사태 속에서 스스로 붕괴했다. 기원전 2세기의 위기들은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를 손상시켰다. 뒤이어 공화정 후기를 지배한 1세대 군사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마리우스와 술라를 계승한 이들은 제1차 삼두정을 형성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리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크라수스가 사망한 이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동맹은 와해되었고 내란이 시작되었다. 승리자는 카이사르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카이사르가 살해되었지만, 공화정은 살아나지 못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동료 '해방자들'의 무모한 행위는 로마를 또다시 10년간의 내란으로 몰아갔을 뿐이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했다. 4년 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로마 공화정은 로마 제정에 자리를 내주었다."(186-7)


"내란으로 인한 파괴로 공화정은 엉망이 되었다. 속주들은 무질서해졌고, 원로원은 통치 기구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로마의 파괴에 일조한 바 있지만, 파괴된 로마를 재건해야만 했다. 놀라우리만치 짧았던 단독 지배자로 통치하던 동안, 그는 차후 로마 제정기의 역사에서 발전되는 핵심적 발전 요소들의 기초를 놓았다. 속주 행정과 징세 체계가 재조직되었다.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밖으로, 즉 갈리아, 스페인 등의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와 같이 버려진 도시들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리고 해산된 카이사르 군대의 퇴역병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식민시들이 건설되었다." "카이사르의 개혁들 중 직접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킨 조치는 거의 없었다. 증오를 불러일으킨 것은 카이사르 자신의 권력을 표현하는 수단 자체였다." "기원전 44년 초에 종신 독재관이 되겠노라는 선언은, 카이사르가 공화정 정서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음을 드러내는 조처였다."(207-8)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이사르 살해 음모를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불러일으킨 적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경탄했던 것만큼이나 그를 두려워했던 키케로는 냉담한 편지 속에서 그의 죽음을 '가장 호화로운 향연'이라 부르며 환호했다. 스스로를 '해방자들'이라 부른 음모자들의 우두머리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소小카토의 사위이자,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한 브루투스의 후손이었다. 카이사르가 마지막 말(너마저도, 아들아kai su teknon)을 남긴 대상이었다." "살해 모의에는 개인적인 적의도 작용했고 카이사르가 통제하게 된 관직과 영예를 되찾으려는 경쟁 욕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방자들'은 공히 카이사르가 죽임을 당한 후의 미래를 그려볼 능력이 없었다. 단순히 과거의 공화정이 회복되기를 희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화정은 이미 사망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다른 이들이 채워야 할 권력의 공백을 남겨놓았을 뿐이다."(209-10)


9 로마 공화정의 유산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고대 로마는 지극히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변형 과정의 다양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극히 대조적인 두 사람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피렌체 사람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과 영국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다." "먼저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따르면, 공화국은 두 가지 중 하나, 즉 로마처럼 팽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고대 스파르타나 동시대의 베네치아처럼 자기 보전에 치중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선택은 분명했다. 팽창을 거부하는 나라들은 아마도 좀더 오래 지속하거나, 로마 공화정을 괴롭혔던 투쟁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광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모든 국가는 성장하거나 몰락한다. 그리고 불화와 야망이라는 도전을, '우리가 로마의 위대함에 도달하려 한다면 피할 수 없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222-5)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이상국가로서의 로마 공화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영국은 왕정이었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훌륭한 역사극 중 많은 작품이 영국 왕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인민 대의제, 귀족의 특권, 그리고 독재 권력에 관한 동시대의 토론에서 공화정기 로마의 사회적·정치적 긴장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화정기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서 주제 선택은 극중 인물과 극적인 잠재력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안목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 토론 또한 반영한다. 그는 로마가 여러 세기에 걸쳐 팽창하고 상대적으로 정치가 안정된 시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공화정이 탄생하는 시기와 쇠퇴하고 몰락하는 시기에 집중했다." "낭만이 없는 순수주의자라면 셰익스피어가 역사적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자신이 다루는 고대 로마인들을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생하게 되살렸다."(226-31)


"미합중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에게 로마 공화정은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실제 모델로 여겨졌다." "마키아벨리처럼, 존 애덤스와 동시대인들은 로마 공화정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현실성 때문에, 그리고 민주정이 단순히 다수를 동원해 폭압을 행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이 민회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집단은 정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원로원 의원이자 엘리트주의자인 키케로라면 진심으로 찬성했을 조처였다. 둘째로 이 또한 키케로의 이상과 일치하는데,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만일 로마 공화정 말기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요소나 한 개인이 과도한 권력을 획득한다면, 다른 두 요소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합중국은 이와 같이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로마가 한때 누렸으나 나중에 잃어버린 정치적 안정을 획득했다."(233-5)


"몽테스키외가 로마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왕을 추방한 이후, 로마의 정부는 당연히 민주정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로원 귀족은 계속 권위를 유지했고, 로마 제국이 팽창해나가자 개개인의 부와 야망은 독재정치로 귀결되었다. 몽테스키외는 결론 맺기를, 〈공화국은 단지 소규모 영토만을 갖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지 않으면 오래 존속할 수 없다.〉" "법의 지배를 통해 확보된 자유를 강조한 점에서, 루소의 견해는 동시대 미국인들의 논의와 대단히 유사했다. 그러나 루소는 인민주권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었고, 몽테스키외가 예언한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공공 도덕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유덕한 삶은 공화정부의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는 로마 공화정을 그의 시대가 본받아야 할 하나의 상징으로 여겼다."(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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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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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최초의 자폐아(1930~1960년대)


"도널드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특이한 점 중에서 부모는 이 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품에 뛰어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간절히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렇듯 주변 사람의 존재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으면 즉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던 일이라봐야 허공에 단어를 쓴다든지,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냄비뚜껑을 돌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 그것은 '동일함'이었다. 완전하고도 순수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주 조금만 변해도 참지 못했다. 가구를 옮기면 화를 냈고, 밖에 나갈 때는 들어올 때 밟았던 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꾸로 밟았으며, 장난감은 놀다 내버려둔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이전에 그것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조리) 기억해야 했다."(29)


"도널드를 진료한 의사들이 으레 사용한 용어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런 진단이 붙으면 부모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았다. 아이를 어딘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수용시설에 보내라는 조언은 그리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함이 있다〉는 말이 특별히 차별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심장판막의 결함〉처럼 그저 정상적인 기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을 지닌 임상용어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1902년에 등장한 〈백치idiot〉, 〈치우imbecile〉, 〈노둔moron〉이란 용어도 〈정신연령〉이 3세 미만, 3~7세, 7~10세인 사람을 지칭하는 의학용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누군가를 조롱하고, 상처를 주고, 낙인을 찍기 위한 말로 변질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지체retarded〉라는 말도 한때 장애에 관한 용어 중 가장 중립적인 말로 〈발달이 늦다delayed〉는 의미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모욕적인 단어를 파생시켰다."(41-3)


"인류학, 동물학, 유전학, 심리측정학 등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의 결합에서 탄생한 우생학은 인류의 혈통에서 결점과 불순물을 씻어버릴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친구인 뉴욕의 변호사 메디슨 그랜트가 쓴 우생학 선언서 〈위대한 혈통의 전승〉을 추켜세웠다. 책에서 그랜트는 집단 선택번식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허약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정신적 불구인〉 유전적 영향을 일소하고,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수백만 시민을 제거하라고 권고했다. 루스벨트는 〈국민이 가장 절실히 깨달아야 할 사실〉을 잘 요약한 책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오스트리아 청년은 그랜트에게 팬레터를 보내 그의 책이 자신의 〈바이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청년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랜트는 자손을 이어갈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불임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우생학에 어찌나 열광했던지 1920년대에 미국 17개 주에서 강제불임술을 법제화할 정도였다."(53-4)


"1974년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미시간 대학의 나탈리아 찰리스와 호러스 듀이는 (500년 전 러시아에서 〈신성한 바보〉로 간주되었던) 바질을 비롯해 비슷한 이야기로 전해지는 몇몇 사람의 행동을 그저 어리석거나 성스럽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신성한 바보들 중 일부는 말을 못했지만 일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으며, 수수께끼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권력자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불쑥 내뱉기도 했다. 찰리스와 듀이는 그런 경향이야말로 러시아 민중이 그들을 사랑했던 이유라고 적었다. 아무도 권위에 맞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문화였지만, 그들의 거침없는 행동에서 구약 속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500년 전에 자폐증이란 진단명이 있었다면 민중은 이 바보들을 신성한 존재로 추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의 경외심과 존경은 이들이 일부러 혹독하고 외로운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기에 생겨났다."(79-80)


2부 비난 게임(1960~1980년대)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자폐아 엄마들의) 소그룹 만남은 강렬한 고해성사의 장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몇 주 또는 몇 개월, 기억조차 희미한 그때를 떠올리며 자폐증이 시작된 순간을 잡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폐증을 언제 처음 알아차렸는지 찾는 것이 아니었다.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뭔가 잘못한 순간, 아기에게 심한 정신적 외상을 가해 스스로 지어낸 현실 속으로 영원히 숨게 만든 그 무언가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다. 아이들은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로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다름 아닌 엄마에 의해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정이었다."(121-2)


"(의학도 심리학도 아닌 예술사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브루노 베텔하임은 1967년에 《텅 빈 요새》를 출간하면서 최고의 자폐증 전문가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기계소년 조이〉의 사례를 든다. 조이는 어려서 부모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결과 자신을 커다란 기계의 부품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커다란 기계가 바로 세상이란 관념을 발달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조이는 사람과 접촉을 피하면서 주로 기계, 특히 선풍기에 관심을 보였다. 왜 선풍기일까? 베텔하임은 선풍기가 회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형태의 원은 자폐 어린이에게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절대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상호관계를 갈망한다.〉 베텔하임은 조이가 스스로 어떤 탁자 밑에 기어들어가 자신을 품은 알을 낳았다고 상상하던 날 〈악순환〉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상징적으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옴으로써 다시 태어났고, 완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136-7)


"루스와 남편은 완전한 베이비붐 세대이자 독실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 자신이 여덟 명의 형제자매 중 맏이였을 뿐 아니라 일곱 아이의 엄마였다. 일곱을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키웠지만 하나만 자폐증이었다. 저절로 대조군이 설정된 실험이었다. 6대 1이라고? 그 정도면 증거로 충분했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상식이야말로 루스가 삶에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냉장고 엄마라는 이론을 믿은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 이론은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 이론은 어린이를 배제하고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처방했기에 애초부터 실패할 것이 확실했다. 모든 것을 깨닫자 행동가의 본성이 꿈틀거렸다. 꽉 막힌 현실을 깨뜨려야 했다." "루스는 대중의 힘을 믿었다. 여성들이 힘을 합친다면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흔치 않은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엄마라는 작은 세계에서부터 그런 집단을 조직할 참이었다."(167-8)


"뭔가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면 예외 없이 부모들이 나서 도울 방법이 없다고 변명하는 구태의연한 상태를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문제란 편견의 벽에 맨손으로 맞선 루스 설리번과 올버니 엄마들, 고립된 상태에서 각지에 선구적인 조직을 만든 부모들은 주춧돌을 놓은 셈이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자폐가 엄마 때문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인식을 부추겼다.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냉장고 엄마 이론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대항이론이 필요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격과 신뢰성을 지닌 누군가가 그런 이론을 주장해주어야 했다." "1964년 그런 인물이 나타났다. 한때는 샌디에이고의 열쇠 수리공이었지만, 자신이 변화시킨 세계에서 그는 버나드 림랜드 박사로 알려졌다. 버니는 자폐증에 관해 한마디할 만한 학위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심리학이다. 또한 루스 설리번처럼 자폐증을 겪는 아들을 두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열정적이었다."(172-3)


"루스와 림랜드는 너무나 잘 맞았다. 둘은 즉시 서로를 하늘이 내려준 파트너로 생각했다. 설리번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과 미디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림랜드는 수많은 연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능숙했고, 의사나 과학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녀들에 대한 인식과 교육과 사회적 대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 네트워크를 넓히려고 노력해왔다. 1965년 늦여름,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설리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고립된 가족들을 전국 규모의 단일한 집단으로 결집시켜야 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종이에 적어 가며 구상을 마친 후, 자신의 생각을 림랜드에게 적어 보냈다. 림랜드가 보낸 편지 역시 우송되는 중이었다. 편지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으니 도와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1965년 11월 14일 전미 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189)


3부 수용시설의 종말(1970~1990년대)


"예전에 자폐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자녀를 시설로 보낸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곳이 〈뱀구덩이snake pit〉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많은 시설에서 수용자를 극단적으로 방치하거나 대놓고 학대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기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마다 격분과 개탄이 들끓었지만, 이내 잊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1949년 찰스 아멘트라우트는 헌팅턴 주립병원에 잠입하여 〈목재들이 썩어가는 방[들]〉과 〈어두침침한 복도[들]〉를 돌아다니며 본 것들을 보도했다." "그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였다. 하나같이 거의 벌거벗은 채 몸에 자신의 배설물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장난감은 물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아멘트라우트는 대소변 가리기 훈련이 안 되어 있음을 알고 기겁했다. 〈정신질환자들의 냄새〉라고 표현한 악취에 거의 압도당할 것 같았다."(225-8)


"1969년 겨울 PARC(펜실베이니아 지체아동협회)를 대표하는 두 명의 부모가 찾아왔을 때까지 톰 길훌은 그런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펜헐스트 주립학교의 소유주이자 운영자인 펜실베이니아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승산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PARC의 부모들은 〈인권〉 변호사를 원했다. 〈인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헌법을 근거로 학교에서 인종분리 정책이 퇴조하고, 소수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주 의회나 주지사 집무실에서는 승산이 없어도, 법정에서라면 약자들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다는 정서가 생겨났다." "길훌은 아홉 쪽에 이르는 전투계획을 제시했다. 핵심 단어는 〈교육받을 권리〉였다. 길훌은 어린이들이 감금된 소위 주립학교가 사실은 전혀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중심으로 결론을 구성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길훌은 승리를 거두었다. PARC의 부모들을 대신해 쟁취한 승리였다. 이후 2개월간 그는 주 정부와 13개 교육청이 취해야 할 조치들을 문서화했다."(236-40)


"시설에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세가 강화되면서 마지못해 장애 어린이의 교육 의무를 포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떤 교육청도 그 의무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어린이에게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육청들은 프로그램에 방해가 되고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어린이들을 배제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자폐 어린이는 이제 시설에 수용될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아직 학교에 갈 권리는 없었다. 1972년 숀 레이핀은 네 살이 되었다. 이미 카운티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예비 자폐 프로그램에 다니고 있었지만, 3년 뒤 일곱 살이 되면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캘리포니아주에서 자폐 어린이를 위한 기회의 물꼬를 터야만 했다. 레이핀 부부는 길훌의 자문을 받아 소송을 제기했다. 다른 지역 자폐 부모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법정 소송과 의회 로비를 벌였다. 요구는 하나같았다.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란 단어를 명시하라는 것이었다."(258-9)


# 1974년 9월 30일,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마지막 날에 법안에 서명함


"입소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거대 수용시설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미국의 시설 수용자 수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했다. 새로 입소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에는 시설 수용자 중 48.9퍼센트가 21세 미만이었다. 이 연령군이 가장 많았던 때다. 1977년에 이르면 이들의 비중은 35.8퍼센트로 떨어지고, 1987년에는 12.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추세는 어린이들에게 하루 종일 가 있을 곳을 제공한 덕분이다. 바로 학교였다 1975년 연방 장애아동교육법(1990년 장애인교육법으로 개칭)이 제정되면서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에 새로운 의무가 생겼다. 계속 보조금을 받으려면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 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어떤 장애가 해당되는지는 목록에 명시되어 있었다. 1990년에는 자폐증도 그 목록에 등재되었다."(267-9)


4부 행동, 분석되다(1950~1990년대)


"1960년대에 자폐 어린이를 돕는다며 온갖 희한한 방법을 추구했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실상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환각 효과가 정신질환의 주요 증상과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LSD 실험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이런 변명은 1965년 이바 로바스라는 UCLA 심리학자가 건전지로 작동하는 소몰이용 작대기로 어린이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등장했다. 그의 실험은 논쟁적이었던 만큼이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로바스는 자해행동이 나타나는 순간 처벌을 가함으로써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실험 결과, 처벌은 어린이들의 자해행동을 억제하는 데 눈에 띄는 효과를 보였다." "로바스는 자신의 과학을 깊이 신뢰했다. 그에게 과학이란 인간심리학의 원칙이 관찰 가능하고, 확인 가능하고, 측정 가능하고, 몇 번이고 신뢰성있게 반복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동물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었다."(282-92)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 사이의 도덕적 균형은 20년간 로바스의 자폐 어린이 연구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종종 잘못 이해되었던 '강화와 처벌'이란 용어는 사실 래트, 마우스, 비둘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래했으며, 임상 및 분석 목적으로 사용된 특정 방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실에서 이런 유형의 심리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물의 거의 모든 행동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지 밝히는 핵심적 원리를 발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화와 처벌 외에도 자극stimulus, 반응response, 행동형성shaping, 조작적 조건형성operant conditioning, 부정적 강화negative reinforcement, 소거extinction 등 이 분야의 어휘는 연구대상이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학습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주의라는 과학이다."(294-5)


"워싱턴 대학의 몬트로스 울프와 토드 리슬리는 자해가 심한 자폐아 디키를 대상으로 〈행동분석〉 접근법을 시도했다. 그들은 디키의 분노발작을 없애기 위해 당시 발표된 자폐증과 무관한 두 건의 연구에 착안하여 가벼운 처벌과 〈소거〉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들은 교사에게 아이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지나치게 운다든지, 혼자 논다든지, 심하게 몸을 긁는다든지 등)을 나타내면 완전히 무시하라고 했다. 선생님의 주목을 끌지 못하자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이내 〈소거〉과정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사라졌다. 반대로 사이좋게 노는 등 보다 적절한 행동으로 바뀌면 교사는 즉시 주목했다. 교사의 주목은 강화에 효과적이었다. 적절한 행동의 빈도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다." "디카를 지켜본 연구팀은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아이의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행동을 더욱 강화하고, 심지어 더 자주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300-1)


"1980년대 내내 소위 혐오 이슈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처벌을 사용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며 응용행동분석applied behavior analysis, ABA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반대진영에서 보기에 사람들은 약간의 충격이 행동이 향상시킨다면 더 많은 충격을 가할수록 행동이 향상된다고 믿을지도 몰랐다. 처벌은 너무나 쉽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한없이 사용하게 될 수 있다." "주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갈등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근치수술이나 항암화학요법 등 가혹하지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의학적 치료들을 예를 들어 이들은 장기적 이익을 위해 엄격하게 통제된 최소한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들은 혐오치료 반대자들이 힘세고 다루기 힘든 성인이 쉴 새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진정한 중증 행동문제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314-9)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폐증에 대해 로바스가 내놓았던 해답, 그 나름의 방식에 의한 ABA는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캐서린 모리스라는 한 엄마가 쓴 《네 목소리를 들려줘》라는 책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1991년, 캐서린 모리스는 그녀의 가족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혐오자극을 사용하지 않는) ABA를 통해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자폐증에 관한 서사를 완전히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의 책은 자폐공동체에 미친 영향이란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 "그 이유는 책의 부제에서 잘 드러난다. 〈자폐를 이겨낸 한 가족의 승리〉. 승리란 결국 회복 이야기였다." "로바스는 그 책의 후기를 쓰기도 했다. 책 속에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모리스의 수기 덕분에 로바스의 ABA에는 진정 존경받을 만한 방법론이란 품위가 덧씌워졌다. 로바스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요소였다."(352-63)


5부 런던에서 제기한 의문(1960~1990년대)


"영국과 미국 연구자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우선순위가 크게 달랐다. 미국인들은 자폐증의 치료, 심지어 완치를 추구했다. 상황을 일종의 응급상태로 받아들이고, 되도록 빨리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반면 호기심에 불타는 영국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자폐증의 모습을 보다 정확히 그려내고, 자폐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또한 영국 연구자들은 항상 보다 큰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폐증은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작동방식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라는 물음이다. 영국식 접근법은 50년간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벽에 부딪혔지만, 마침내 미국과 뚜렷이 다른 결과들을 내놓았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실험심리학자와 학계에 몸담은 정신과 의사들이 내놓은 통찰들은 전세계에서 자폐증이란 현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버렸다."(388)


"1966년 우타 프리스는 여덟 단어로 된 목록을 죽 읽어준 후, 바로 어린이들에게 들었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무작위적인 단어 목록을 제시했을 때 자폐 어린이는 비자폐 어린이와 똑같이 여덟 단어 대부분을 반복했으며, 사실 목록 마지막에 있는 몇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는 더 좋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하는 목록을 제시했을 때는 비자폐 어린이들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반면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순수하게 시각적 기억을 검사하는 실험에서 비자폐 어린이는 역시 시각적 단어에서 의미를 추정하여 좋은 성적을 냈다. 이는 자폐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점수는 대조군의 점수와 사실상 같았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409-10)


"심리학에서 〈마음이론〉이란 용어는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생각, 꿈, 믿음)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 실체임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자신의 의지가 없는 물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한편 마음이론의 필연적인 결과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나중에 〈정신화〉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과정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타인의 생각을 추정하고, 그 추정을 근거로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배런-코언이 제1저자, 앨런 레슬리와 우타 프리스가 제2, 3저자로 참여하여 작성한, 〈자폐 어린이에게도 마음이론이 있을까?〉라는 제목을 붙인 논문에서 그들은 (거짓믿음시험의) 데이터가 밝혀냈다고 믿는 바를 과감히 선언했다. 〈우리의 결과는 단일 집단으로서 자폐 어린이들이 마음이론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422-7)


6부 진단을 재정의하다(1970~1990년대)


"로나 윙과 주디스 굴드는 자폐성향을 판별하는 기존의 진단 범주가 너무 좁게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고,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을 아우르는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을 제안했다. 우선 뭔가를 주고받는 사회적 기술의 장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비음성언어를 포함한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였다. 세 번째는 윙이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예컨대 가상놀이에 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가변성이었다. 윙은 이 개념틀 내에서 자폐성향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날 수 있으며, 때로는 〈정확히 정상과의 경계선상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속선continuum〉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저서에도 〈자폐성향의 연속선〉이란 장이 있었지만, 1988년에 이르면 똑같은 목적으로 〈스펙트럼spectrum〉이란 용어를 사용했다."(438-9)


7부 꿈과 한계(1980~1990년대)


"1961년생인 애니 맥도널드는 뇌성마비로 진단받았으며, 뇌가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추정되었다. 걷지 못했고, 혼자서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로즈메리 크로슬리는 70년대 후반 애니가 하루종일 생활하던 수용시설의 보조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소녀의 지능이 사실은 온전하며 활발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크로슬리는 단어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열심히 추구하며 애니의 생각과 접점을 찾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개발한 방법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그런 성공이 애니가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으며, 할 말이 아주 많다는 자신의 직감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했다. 그간 말을 못한 것은 뇌성마비로 인해 물리적 발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로슬리는 발성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녀가 〈촉진적 의사소통facilitated communication〉이라고 명명한 이 방법은 FC라는 약자로 널리 알려졌다."(484)


"내면에 갇힌 아이. 자폐인의 가족들은 그 개념만 떠올리면 언제나 애가 탔다.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너무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방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끝없는 죄책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폐증은 단단히 걸어잠근 방 같은 것이었다. 부모들은 끊임없이 열쇠를 찾아헤맸다. 〈내면에 갇힌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가족마다 독특하게 나타났다. 다운증후군처럼 다른 발달문제를 안고 있는 가족에게 사랑이란,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폐 어린이의 부모 또한 자녀에 대한 사랑은 결코 덜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자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끼며 이를 위해 놀라운 치료를 찾아다니는 형태로 나타난다."(494-5)


"언어병리학자 하워드 쉐인은 FC의 검증 과정을 고안했다. 환자와 촉진자에게 동시에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촉진적 의사소통을 위해 나란히 앉지만, 그들 사이에 칸막이를 세워 상대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쉐인은 환자에게 그림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실험의 멋진 점은 촉진자와 환자에게 때로는 똑같은 그림을, 때로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FC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촉진자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촉진자가 보는 그림과 별개로, 환자는 매번 자신이 본 그림 속의 물체를 정확히 타자할 것이었다."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촉진자와 환자가 다른 그림을 볼 때만 틀린 답이 나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틀린 답은 촉진자가 본 그림과 일치했다." "환자는 진정한 의사소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사소통 따위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507-9)


8부 자폐증, 유명해지다(1980~1990년대)


"영화 〈레인 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단순히 서번트 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자폐인을 그려냈으며, 그가 그려낸 자폐인의 초상은 실로 흠잡을 데 없었다. 처음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뒤에도 레이먼드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약간 재미있어 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의 여정을 정의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쑤시개와 K마트에서 산 속옷을 필요로 한다. 감각이 너무 예민해 시끄러운 소음을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고,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스포츠에 관한 온갖 통계 숫자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난생 처음 키스를 받아본 느낌이 어땠느냐고 물어도 단 한마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축축했어.〉 몸에 손을 대면 벌컥 화를 내며, 초조할 때면 애벗과 코스텔로의 〈1루수가 누구야?〉에 나오는 유명한 대화를 끊임없이 반복한다."(576)


"표준적인 할리우드 영화라면 결국 레이먼드의 자폐증이 완치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습을 충분히 본 후에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영원히 그 밖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일주일간의 모험과 우여곡절 끝에 형제가 매우 가까워져 같이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인 맨〉의 결말은 뻔한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동생 찰리는 깊은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훌륭한 삶을 살아갈 것 같다는 희망을 던지지만, 레이먼드의 성장은 분명치 않다."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자폐인이다. 그것도 혼자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자폐인이다. 그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돌아간다. 다만 24시간 내내 인간적으로 돌봐주는 값비싼 수용기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폐증에 관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결말은 자폐인과 부모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자폐란 항상,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다."(576-7)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폐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번째 책은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받았다. 자폐증이란 경험이 책의 형태로, 그것도 실제 자폐증을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에 의해 기술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그랜딘은 대학에 진학했고, 애리조나주의 대학원에서 가축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하는 압박에 대해 소牛가 나타내는 반응을 연구했다. 오래도록 매혹되었던 주제였다. 그녀의 연구는 미국 전역에서 가축을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관행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 영국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뇌의 신경연결이 비전형적인 사람들의 다양한 양상을 그린 저서에 그랜딘을 등장시켰다. 그는 그녀가 때때로 〈화성의 인류학자〉처럼 느껴진다고 한 말에 매혹되었다. 그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에 관해 쓴 《뉴요커》 기고문과 나중에 발표된 저서의 제목으로 쓸 정도였다."(578-82)


"불운하게도 자폐증이 마침내 미국에서 진정 〈유명해진〉 것은 대중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자폐증은 드물고도 매혹적인 현상에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위협으로 돌변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물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사람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자폐증이 사회적 비상사태가 되었다는 급작스러운 인식 변화는 상식적인 관찰에 근거했다. 자폐 어린이가 옛날보다 훨씬 늘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폐증은 과거부터 존재했던 어떤 한계를 넘어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 같았다." "자폐증 유행병epidemic이란 마음 불편한 망령은 내키지 않는 대중적 컨센서스에 의해 21세기를 규정하는 심리적 스트레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세상이 결코 아이 키우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 것이다. 《어린이》라는 잡지는 이런 불안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자폐증에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장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585-8)


# 2000년대 자폐증 유병률의 상승 요인

1. 끊임없이 변경·확대되는 자폐증의 정의

2. 지역별, 집단별로 집계된 통계의 남용

3. 질병역학 분야의 발달로 유병률 상승


9부 〈유행병〉(1990~2010년대)


"소위 자폐증의 백신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의료행위로 인해 어린이에게 자폐증이 생길 수 있다는 대중적 공포였다.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을 이 공포는 정확히 1998년 2월 26일 아침 런던의 로얄 프리 병원에서 불붙었다."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논문은 한두 해 사이에 진료한 열두 명의 어린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자폐적 행동과 함께 심한 장의 염즘을 나타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세 살에서 열 살 사이였는데, 추가적으로 검사한 결과 또 다른 특이소견을 발견했다고도 했다. 위장관에서 홍역 바이러스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견들을 근거로 웨이크필드 연구팀은 위장관 문제, 자폐증, 홍역 바이러스라는 세 가지 요인의 조합을 한 가지 단일한 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했다." "열두 명 중 열한 명의 어린이가 MMR 백신(홍역, 볼거리, 풍진 예방 백신)을 맞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장관 문제와 자폐적 행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611-2)


"전 세계 바이러스학자, 소아과 의사, 공중보건 전문가 중에서 MMR 백신이야말로 응용과학의 빛나는 성과이자 실제로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치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MMR 백신이 등장한 뒤로 세 가지 질병은 사실상 대중의 기억에서 잊힐 정도였다. 웨이크필드가 이 백신 접종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고 싶다면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엄청나게 탄탄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호소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지지층이 있었다. 영국에서 백신 회의론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극구 지지하는 사람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줄곧 공중보건당국과 불화를 빚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영국의 대중이 백신 접종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백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국가가 침습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615-6)


"문제는 주류 의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웨이크필드 말고는 자폐증과 MMR이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전성에 관해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는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부모들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MMR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은 웨이크필드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예방주사가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대중적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웨이크필드조차 연관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그 때문에 영국의 언론, 인간의 본성, 자폐증과 백신 사이의 관련성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와 한데 묶였다. 바로 공포였다."(623)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연구는 언제나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1998년 《랜싯》지에 발표됐을 때도 예리한 비판자라면 즉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의 백신 연구자 로버츠 첸과 프랭크디스테파노가 쓴 논문은 일종의 선제공격이었다. 그들은 백신과 자폐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며, 심지어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MMR 백신의 안전성을 신뢰할 만한 근거가 차고도 넘친다는 것이었다." "웨이크필드의 연구에 반대되는 과학적 증거는 계속 쌓여 갔다. 1999년 6월 《랜싯》지는 브랜트 테일러라는 로얄 프리 병원 소속 연구자가 수행한 역학조사 결과를 게재했다. 그의 팀은 영국에 MMR 백신이 도입된 해를 포함하여 수십 년간 자폐증 진단을 받은 500명 가까운 어린이의 예방접종 기록을 조사했다. MMR 백신을 사용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자폐증이 급증했다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656-7)


10부 현재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 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 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종류가 확실히 달라지자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동과 함께 자폐증의 정치학을 영원히 바꿀 훨씬 급진적인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이다."(712)


"1960년대 이후 40년간 자폐증 권리옹호운동은 자녀를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부모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 문제에 관한 목소리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녀들을 위해 말했다. 하지만 1993년 싱클레어의 주장 또한 대부분 옳았다. 부모 운동에 투영된 자폐증의 모습은 종종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증이란 자녀의 삶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아이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헌신은 정반대 사실을 입증했다. 엄마 아빠들은 자녀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들의 기이한 점 때문에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716-8)


"자폐 스펙트럼을 겪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사반세기 전 사회가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을 폐쇄했을 때 받아들인 가치였다. 하지만 중증 자폐 어린이가 어떤 면에서는 병자가 아니라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은 2007년 당시 훨씬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725-9)


# 아리 네이만 : 자폐증 자기권리옹호 네트워크Autistic Self-Advocacy Network, ASAN 설립자


"자폐증에 관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점일 것이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복잡하다.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는 계속 새로운 의문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전문가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또 다시 움직일 수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 "자폐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폐증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실제로 〈자폐증〉이란 단어에 관련된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논쟁을 밀고 나간 힘은 점차 사회를 변화시켰다. 자폐증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루고자 노력했던 모든 사회는 그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을 사회와 조화시키려는 과정을 통해 '어딘가 다른 개인'의 존엄성을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크게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자폐증을 겪는다는 것은 인류라는 옷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름일 뿐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름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7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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