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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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4년 유럽


"18세기 말까지 유럽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동질적이었다. 여전히 지주 귀족층이 지배하고, 국교회에 의해 정통성을 확보한 유서 깊은 왕가들이 통치하는 농업 사회였다. 10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뀌거나 불안정한 변화의 길을 걸었다." "1914~18년의 대전쟁은 지구상의 모든 대양에 걸쳐서 벌어졌고 최종적으로는 교전국이 모든 대륙을 아울렀으니 마땅히 〈세계대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이 전쟁이 최초의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유럽 열강은 지구 곳곳에서 서로 싸워왔다.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그냥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앞선 모든 세계대전들처럼 이 전쟁도 처음에는 유럽 강대국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충하는 야심에서 비롯된, 오직 유럽에 국한된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이 이토록 끔찍하게 전개되고 파국적인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전 지구적 규모 탓이 아니라 발전된 군사 기술과 전쟁을 수행한 국민들의 문화가 결합된 탓이다."(8-10)


2 전쟁 발발


"1899년에 출판된 선구적 저작 『미래의 전쟁』에서 폴란드인 저자 이반 블로흐는 치명적인 무기들로 싸우는 미래의 전쟁에서 공세에 나서기는 불가능할 거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1899~1902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전쟁에서 보어인 라이플 소총수들의 실력과 용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해 그 지역을 평정했다. 승리의 주된 요인은 뜻밖에도 군사 개혁가들이 오랫동안 소멸을 예견해온 기병의 활용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례는 1904~05년 양측이 최신 현대 무기로 싸운 러일전쟁이다. 일본군은 정교한 보병·포병 전술과 병사들의 사생결단식 용기의 결합으로 연전연승하며 러시아가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럽의 군대들이 얻은 교훈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여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교훈은 승리를 조기에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을 일찍 끝내는 유일한 길은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33-5)


3 1914년: 개전 국면


"전쟁은 이제 전 국민적 사안이었다. 실제로, 사회가 갈수록 세속화돠면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Nation〉(민족)이라는 개념은 온갖 휘황찬란한 군사적 위용 및 역사적 유산과 더불어 준(準)종교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징병제는 이러한 의식화 과정을 도왔지만 거기에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1916년까지 징병제가 도입되지 않은 영국의 여론은 대륙 어느 곳 못지않게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다. 다윈 이론에 물든 사상가들에게 전쟁은 말랑말랑한 도시 생활이 더이상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자다움'을 시험하는 무대로 비쳤다. 진보가 자연 세계에서 나타나는 종들 간의 생존경쟁처럼 민족 간 협력보다는 경쟁의 결과인 세계 혹은 그렇다고 모두가 믿었던 세계에서, 그러한 '남자다움'은 민족이 저마다 '생존의 적자가 되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지만 특히 독일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여겨졌다."(48-9)


"덧붙여 모든 정부는 저마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숙적 러시아가 촉발한 해체 공작에 맞서 자신들의 유서 깊은 다민족 제국의 존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슬라브 동포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맹방인 프랑스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오랜 숙적이 자행한, 전적으로 자신들이 도발하지 않은 공격에 맞서 정당방위 차원에서 싸우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국제법을 옹호하고 나폴레옹 시대 이래 최대의 대륙발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단 하나 남은 맹방을 대신하여, 그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세계 강국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질투심 많은 서쪽의 적수들, 또 그들과 손잡은 동쪽 슬라브족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상이 각국 정부들이 자국민들에게 내세운 근거들이었다."(50-1)


4 1915년: 전쟁이 계속되다


"전쟁은 이제 전통적인 세력 다툼을 넘어 갈수록 이데올로기 충돌 양상을 보였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 전쟁을 경쟁 강국의 도전에 맞서 영(英)제국을 수호하는 일로 보았다면,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군홧발에 맞서 법과 규칙,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투쟁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프로이센 군국주의가 벨기에를 다루는 방식은 독일이 승리하면 유럽이 직면한 현실을 미리 맛보게 해주는 셈이었다." "독일의 학계와 지성계도 이 전쟁을 한편으로는 슬라브족 야만주의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고 경박한 프랑스 문명과 앵글로색슨의 조야한 상점 주인식 물질주의에 맞서 쿨투어(Kultur), 즉 독일만의 독특한 문화를 수호하는 투쟁으로 묘사하는 데 합세했다. 이는 군국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 전사의 미덕에 의해 수호되는 문화였다. 그러한 '대중의 열정'은 교전국들이 전쟁을 계속해나가겠노라는 결의에서 적어도 정치적 계산이나 군사적 계산만큼 중요했다."(67-71)


"1915년 내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공격을 감행하는 가운데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새로운 종류의 전쟁 기술을 터득했다. 3월에 전개된 연합군의 초기 공격은 쉽게 격퇴되었다." "1914년 이전의 포탄은 공중에서 터져서 기동전에 효과적인 유산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가시철조망으로 보호된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참호 안의 적 보병들을 무찌르고,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하는 적의 예비 병력의 발목을 붙잡고, 대항포격으로 적의 대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고도로 폭발력 강하고 무거운 포탄이었다. 게다가 보병에 의한 공격은 일제 엄호 포격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일급 참모 업무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통신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동식 무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이용 가능한 통신수단은 연락병과 전서구(傳書鳩), 그리고 적이 일제 포격을 가할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전화선뿐이었다."(92-3)


5 1916년: 소모전


"사실, 전쟁은 국가들이 더 잘 조직되고 더 단단히 결집되도록 만들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문제의 중심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유예되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행정적·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그들은 새로운 협상력을 얻었다. 대학 출신 전문가와 실무가들에 의해 강화된 관료조직은 국민 생활에서 갈수록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해나갔고, 많은 경우에 그때 얻은 권한을 전후에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입대한 사람들이 일하던 자리를 부분적으로 메운 여성들은 간호와 복지 분야뿐 아니라 사무실과 공장, 농업 부문에서도 갑자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면서 사회의 균형 전체를 바꾸고 있었다. 1918년에 이르자 그러한 변화는 새로운 인민대표법에 반영되어 영국의 경우, 30세 이상의 여성을 포함해 유권자가 70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전쟁의 부산물로서, 영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근접한 나라가 되어갔다."(99-102)


"1915년 말까지 독일군은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었지만 종전을 앞당길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팔켄하인은 자신이 동부에서 성공했던 수법에 눈길을 돌렸다. 다름 아닌 소모전이었다. 프랑스가 말 그대로 피를 모두 흘려 죽을 때까지 프랑스군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자면 프랑스군이 도저히 상실해서는 안 될 땅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의 땅은 베르됭 요새가 될 것이었다. 베르됭은 전략적 중요성은 없었지만 취약한 전선의 돌출부에 자리잡은, 프랑스의 위대한 군사적 영광들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였다." "베르됭 공세로 양측은 5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이는 위대한 승리였지만 프랑스군을 거의 산산조각 낸 승리였다. 독일측에는 최초의 부정할 수 없는 실패였고, 군대와 국민 양측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팔켄하인은 8월에 해임되었고, 카이저는 충직한 루덴도르프를 대동한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새로 임명했다."(108-11)


6 미국이 참전하다


"해상 봉쇄에 시달리던 독일 정부는 이에 맞서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 즉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미국의 참전이 실질적 효과를 보일 때쯤이면 전쟁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으리라고 계산했다." "더구나 독일 해군 참모부는 영국이 어떠한 용도로든 이용할 수 선박이 800만 톤분밖에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 잠수함이 영국 선박을 격침시키는 것을 한 달에 60만 톤분으로 늘리고 중립국 선박이 겁을 먹고 영국에 접근하지 않게 된다면, 6개월 안으로 영국은 곡물이나 고기 같은 필수 식량이 바닥날 것이다.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갱도 버팀목으로 쓰는 스칸디나비아 목재가 부족하여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철과 강철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로써 침몰된 선박을 대체할 선박의 건조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을 하든 안하든 6개월 안으로 영국의 항복은 통계상으로 확실했다."(124-9)


"최고사령부의 결정은 1917년 1월 9일에 내려졌지만,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는 1월 31일에 가서야 영국 제도로 접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전이 이튿날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윌슨은 즉각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했다. 이에 따라 독일 외무상 아르투어 침머만은 이미 1월 16일에, 미국과 이따금 적대 행위를 주고받는 상태에 있던 멕시코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멕시코가 (미국에 상실한)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독일 측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과 함께 두 나라가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공동으로 강화를 맺는' 동맹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미국 내 반응, 특히 그때까지 고립주의적이었던 서부의 반응은 결정적이었다. 선박 몇 척이 더 격침되자 윌슨은 다른 대안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5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135-6)


7 1917년: 위기의 해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17년 공세에서 전년도의 참사들(베르됭과 솜 강 전투)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4월 16일, 니벨이 엔 강 너머 슈맹데담의 숲이 우거진 고지대를 향해 대대적으로 예고한 대공세를 개시했을 때, 여건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 독일군은 사전에 충분한 경고를 받았다. 프랑스군의 계획은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함으로써 이미 틀어졌다." "열흘 동안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3만 명이 넘었다. 니벨은 베르됭의 영웅 페탱으로 교체되었지만,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무너졌는데, 이는 온전한 반란이라기보다는 부대 전체가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의 파업에 가까운 상태였다. 페탱은 엄중한 처벌은 최소화한 채, 대체로 부대의 여건을 개선하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자제하는 방식으로 부대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은 그 해의 남은 기간 동안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었다."(144-5)


"1916년 솜 강 전투의 인명 손실로 로이드 조지는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게 과연 현명한 전략인지 깊이 회의했고, 1917년 내내 최고사령부에게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려보라고 촉구했다." "그 결실이 12월 11일, 영국군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앨런비의 승전으로 영국은 중동에서 잠깐 동안 헤게모니를 확립하게 된다. 무엇보다 1917년 11월에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게 됐다. 안타깝게도 벨푸어는 현지 주민들이나, 군사 지원의 대가로 영토를 약속 받은 아랍 통치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약속을 해버렸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 외무부 관리들이 중동 지역을 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한다고 합의한 내용(사이크스-피코 협정)도 마찬가지였다. 양립할 수 없는 이런 의무 조항들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중동 지역을 혼란에 빠트렸으며, 21세기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숙제를 남겼다."(155-62)


8 1918년: 결정의 해


"1918년, 독일 최고사령부의 걱정거리는 서부로부터의 위협이 아니라 독일 내부의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은 독일에까지 뻗쳤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최고사령부와 그들의 민간인 지지자들이 보기에 병합이나 배상금이 없는 강화라는 제국의회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에서 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이상 독일의 외부 적들에 맞선 전쟁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독일의 가치를 파괴하려고 작심한 듯한 국내 세력들에 맞선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의 시각에서 후방 전선이 모조리 붕괴하기 전에─더 중요하게는 절망적인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전에─적대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압도적인 타격으로 연합국의 전의를 앗아버려 독일의 강화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승리였다. 이것이야말로 독일의 진정한 '마지막 패'일 터였다."(167-71)


"1918년 초, 프랑스에는 이미 미군이 100만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물론 아직 전투 조직으로 편성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금방 배웠다. 무엇보다 훤칠하고 쾌활하며, 잘 먹고 잘 자란 미국 중서부 출신 젊은이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무한한 낙관주의와 더불어 지친 연합국 동료들에게 이 전쟁에서 질 리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8월 초 이래로 독일군은 추가로 22만 8,000명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은 탈주로 인한 것이었다. 기지에 주둔중인 부대는 국내로부터 전해지는 갈수록 비관적인 소식에 전염되고 공산주의 선전에 영향을 받아, 군사 반란까지는 아니라 해도 파업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9월 27일, 미군이 합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24시간 동안 100만발에 가까운 집중 포격으로 힌덴부르크 선의 본선을 공략했다. 이 공격은 마침내 루덴도르프의 기를 꺾었다. 9월 29일, 그는 카이저에게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은 없다고 보고했다. 파국을 피하는 방법은 조기 휴전뿐이었다."(178-85)


9 강화 합의


"베르사유 평화 협정은 악평을 들어왔지만 그 조항들 대부분은 세월의 시련을 견뎌냈다. 조약이 탄생시킨 국가들은 국경선이 약간 변동되긴 했지만 지난 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존재로 야기된 '동방 문제'도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적어도 동쪽 국경선에 관한 결정은 반드시 뒤집으려 했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소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불신, 동유럽 동맹국들의 허약성,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유사한 시련을 겪지 않으려는 자국민들의 심한 거부감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개입하기를 꺼렸다. 국내 문제와 제국의 문제들 외에도 점점 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 때문에, 연이은 정부들은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식의 해법을 추구하게 되었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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