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1
피터 마셜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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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과 달리, 종교개혁은 '종교사'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교회사가들은 이념의 우위, 즉 현실을 변혁하는 새로운 신학과 세계관의 힘을 역설한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유행을 타는 사회학·문학 이론의 수용자들은 본능적으로 '해체'하고자 하고, 종교적 원칙이나 의례 형식 이면에 놓인 '실질적인' 정치적 동기, 계급에 기반한 동기, 경제적 동기 등을 분별해내려 한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시작하는 모든 접근법─근본적으로 근대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16세기와 17세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대단히 신성화되었고, 종교는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그렇기에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행위와 동기에서 '종교'를 말끔히 분리해내기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실 종교개혁이 역사에서 중대한 변혁적 계기였던 까닭은 이 모든 범주들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이다."(21)


1 종교개혁들


"(신학의 전체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루터의 '급진화'는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명석한 정통파 논적 요한 에크와 논쟁하는 가운데 훤히 드러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루터는 관례에 따라 교황에 맞서 공의회의 권위에 호소했다. 그러나 에크가 루터를 얀 후스에 빗대며 몰아붙이자 루터는 그 보헤미아 이단자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교황과 마찬가지로 공의회도 신앙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루터에게 오류가 없는 종교적 권위의 원천은 성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로 루터에게 후퇴란 없었다. 1520년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자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교황의 파문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특유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또한 루터는 일련의 팸플릿을 발행하여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규탄하고, 교회법에 순종할 필요성을 부인하고, 성사(聖事)의 수를 7개에서 3개로 줄이고, 황제와 독일 귀족에게 교회 개혁에 동참하라고 요청했다."(31)


"로마에 항거하는 것이 루터만의 소임은 아니었다. 루터는 어떠한 구체적인 의미에서도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선지자였고, 종교개혁은 초기부터 서로 별개의 복수 종교개혁들을 포함했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에서 활동한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배경이 더 탄탄했고 교회 내 몽매주의를 매섭게 비판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저술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루터와 비슷한 입장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 진리의 유일한 토대는 성서였고, 교황과 공의회의 권력은 허상이었다. 츠빙글리에게 '95개 논제'와 같은 순간은 1522년 사순절에 찾아왔다. 이때 그는 부활절 준비 기간에 육식을 삼가는 교회 규칙을 보란듯이 위반하는 소시지 식사를 주재했다. 그런 사안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루터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츠빙글리의 가르침에서도 중심 뼈대였고, 의심할 나위 없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중요한 요소였다."(34-5)


"1525년 이후 종교개혁은 '길들여졌고', 개혁은 점잖아졌다. 루터주의와 사회적 급진주의가 분리되자 당시 지지자들이 '복음주의'라 부르던 신앙을 제후들이 채택할 길이 열렸다." "루터주의가 종교적 개혁의 고동치는 심장박동을 잃어가는 사이에 탄생한 제2종교개혁의 탄생지는 예상 밖의 장소였다. 바로 스위스 연방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인구 1만여 명의) 도시 제네바였다." "법률가로 훈련받은 칼뱅은 1534년에 프랑스에서 신교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을 피해 달아나기 전까지 관례적인 학자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사실 (설교사 외에 어떠한 공식 직책도 없었던) 칼뱅은 제네바에서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칼뱅이 결국 성공한 주된 이유는 제네바 인구의 두 배가 넘는 망명자들이 16세기 중엽 수십 년간 이 도시에 정착하여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제네바 서쪽의 덩치 큰 이웃 프랑스에서 위그노라고 알려진 신교도들의 조직과 태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40-50)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58-61)


"17세기 후반에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공을 환영한 현지 가톨릭 소수집단이든 가톨릭교를 고수한다는 이유로 국왕 제임스 2세를 1688년에 폐위시킨 잉글랜드의 열렬한 반가톨릭 신교도들이든, 분명히 루이를 가톨릭의 대의와 동일시했다. 그보다 3년 전인 1685년에 루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에게 예배할 권리를 허용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써 정치적 절대주의와 종교적 승리주의를 결합하는 놀라운 실례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는 억압과 반란, 추방과 진실하지 않은 개종의 물결, 그리고 국경을 건너간 망명자들이 쓰라린 원한을 키우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였다. 한 세기 반 동안 종교개혁들은 유럽 정치생활과 문화생활의 주요 동력이었다. 종교개혁이 그 기능을 아직 다하지 않은 때에 계몽주의 시대가 동트기 시작했다."(68-70)


2 구원


"가톨릭교회가 신자들에게 '선행'을 실천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지난날 가르쳤거나 오늘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신교도뿐 아니라 일반 가톨릭교도 사이에서도 흔한 오해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역설한 대로, 구원은 권리가 아니라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이 자유롭게 자의로 죄인에게 '은총'을 제안한다고 보았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자격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호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은총 제안을 받아들일 때 의롭게 되었고, 하느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그 제안에 응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까다로운 점은 누군가 하느님의 초대에 토를 달지 않고 '네'하고 응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선행을 충분히 행했는지를 아는 일이었다. 중세 후기에 학구적 신학은 하느님은 인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73-4)


"청년 수도사 시절 루터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하느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수도생활이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고뇌했다." "그 위기를 해소한 촉매제는 성 바울로의 정경(正經) 서한, 특히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로마서 1장 17절)라는 말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한 결과로 하느님께서 여전히 완전한 죄인일지라도 개개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신다고 결론 내린 순간, 불안과 자기혐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하느님 계명의 역설적인 점은 그것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신시킨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저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신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실 거라는 '기쁜 소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루터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을 통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교리를 믿는다." "이제 구원은 참된 기독교 생활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75-6)


"사실 예정론을 다듬어 최종 형태를 내놓은 사람은 제네바에서 칼뱅을 계승한 테오도뤼스 베자(1519~1605)였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또는 '탈선' 이전부터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정해두었다고 결론 내렸으며, 이 교리는 '타락 전 예정설'이라는 위압적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더 밀고 나아가면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을 리 없고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결론, 즉 '제한 속죄'에 이른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했고, 어째서 겉보기에 무작위로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렸을까?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예정은 칼뱅주의 하느님의 전적인 초월성, 주권, 그리고 인간이 상상한 속박에서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궁극적 상징이었다. 가톨릭측은 그 교리가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든다고 비판했고, 16세기 후반에 일부 루터파도 그 비판에 얼마간 동의했다. 그들은 루터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예정은 인간 행위에 대한 신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79-80)


"칼뱅파만이, 더 넓게 말해 신교도만이 예정론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가톨릭권 유럽, 특히 프랑스는 얀선주의 현상─일종의 가톨릭 청교도주의─의 무대였다. 얀선주의는 네덜란드 신학자 코르넬리스 얀선(1585~1638)이 예수회의 루이스 데 몰리나를 공격한 데서 연원했는데, 몰리나는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예지로 인해 그 행위의 자유로운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얀선주의는 인간의 선행 역량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칼뱅주의와 공유하여 인간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 얀선주의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예수회를 매섭게 비판했고, 『팡세』에서 철학적 이성이 아닌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앎의 토대로 제시했다." "중요한 대중 운동이 되기엔 너무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너무 엄격했던 얀선주의는 가톨릭교를 '단일체'로 여기는 견해를 반박하는 사례, 그리고 종교개혁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사례다."(81-2)


"구원에는 개인의 운명보다, 심지어 지역 공동체의 운명보다도 넓은 차원이 있었다. 기독교 서사에는 결론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사건들은 성서의 묵시록 또는 그리스어로 아포칼립스(Apocalypse)에서 장관을 이루는 불투명한 이미지로 예언되었다. 묵시록은 신통찮은 시간표도 제공했다. 우주에서 그리스도에 적대하는 악마─적그리스도─가 1000년간 갇혀 지내다가 세상으로 풀려나고 결국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최후의 결전인 아마겟돈(Armageddon)을 벌인다는 시간표였다. 신자들에게 다짐하는 약속도 있었다. 세상이 파괴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가 1000년간 지상을 다스리는 지복천년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다가오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종교의 변두리에 있었던 괴짜들의 특권이 아니었다. 루터 본인이 〈말세의 혼돈의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96-7)


3 정치


"종교개혁에 제일 먼저 진지한 열정을 보인 지역 통치자들은 기존 국가의 군주들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픈 이들, 즉 황제의 명목상 종주권 아래 크기로 보나 실속으로 보나 왕국이라기엔 미흡한 독일 영지를 통치하던 제후들이었다. 그 연관성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일 제후들은 척 보기에도 루터의 대의를 받아들여 얻을 것이 많았다. 정치 면에서 그들은 자기 영토에 있는 교회의 행정을 통치기구에 통합하여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황제를 상대로 책략을 구사할 자유를 더 많이 주장할 수 있었다. 재정 면에서 그들은 (비교적) 떳떳한 마음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수도원의 땅과 기부금을 몰수하여 교회의 부를 강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터는 세속 권력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겼다. 이따금 '두 왕국론'이라 불리는 것에서 루터는 '하느님의 왕국'은 신께서 어련히 다스리실 테지만 교회 조직의 외형을 포함하는 '세속의 왕국'은 적법한 정치적 강제의 영역이라고 보았다."(106-8)


"종교개혁기는 유럽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이 거의 끊이지 않은 시대였고, 국가들이 영토 확장 또는 주권자의 명예와 영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서로 싸운 첫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전쟁이 한쪽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십중팔구 종전을 위해 교전국들이 문자 그대로 합의를 보아야 했다." "제국 내에서 양심의 자유와 사적 숭배의 자유 같은 권리들을 승인받지 못했다면, 어느 쪽도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조약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진짜 아이러니가 있는데, 종교적 용인 그 자체를 절대선으로 여긴 이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반대파를 제거할 수 없다면 평화의 대가로 타협해야 했고, 그리하여 전쟁의 예기치 못한 결과로 용인이 자리잡았다. 이런 이유로 지난날 종교개혁들이 단호히 고수하고자 했던 가정들 중 일부─종교적 충성과 정치적 충성의 융합, 기독교 문화와 시민사회의 완전한 일치─가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115-9)


"종교개혁은 더 직접적이고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권위의 기존 위상에 도전하기도 했다.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신민들이 통치자에게 항거한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정치적 사실이었지만, 내심 그들은 자신들이 취하는 조치가 법적·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 결과 또 하나의 중대한 국면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복종의 한계가 전례없이 이론화되었고, 종속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성숙한 이론들이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카를 5세의 적의에 직면한 신교 제후들을 위해 루터파 신학자들은 정치적 복종에 관한 교리와 입헌 이론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통치자에게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독일 제후들은 황제와 공동으로 제국의 좋은 질서를 책임져야 했다. 만일 황제가 참된 종교를 지탱하는 의무를 게을리하면, 적그리스도 교황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면, 그에게 적법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119-20)


"일각의 견해와 달리 칼뱅 역시 원칙에 입각한 저항을 지지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은 일부 국가들의 헌법에 따라 〈인민의 자유의 수호자들〉이 (고대 스파르타의 민선장관이나 로마의 호민관처럼) 폭정을 막아내는 일을 용인받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신중하게도 칼뱅은 근대 왕국들의 신분제 의회 또는 의회가 '아마도'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칼뱅이 '거짓된' 숭배의 참상을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참된 기독교도라면 그것을 멀리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적어도 소극적인 저항과 시민 불복종을 권유한 것이었다. 칼뱅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칼뱅의 입장보다 덜 모호하고 더 급진적인 논증을 개진한 까닭은 독일의 연방 권력구조를 결여한 지역들에서 실제로 박해를 당하고 대항-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는 사악한 통치자는 전복되거나 살해될 수도 있다는 폭군 살해론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120-1)


"종교 전쟁─종교적 소수파를 마지못해 공식 용인한다는 혼란스럽고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이라는 대변동이 잦아든 뒤 즉각 나타난 종교개혁의 결과는 정치적 권위의 강화와 공고화였다.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같은)를 빼면, 17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의 기조는 '절대주의'였고, 대의기구는 쇠퇴했으며, 군주의 구속받지 않는 권력 행사가 절대선으로 제시되었다. 저항 이론들은 폭력적이고 분열적이었던 가까운 과거의 산물로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 피치자, 신의 3자 관계의 계약적 측면에 근거하여 숙고한 끝에 정치적 불순종에 대한 정당화를 정식화한 논변들은 미래에 아주 중요했다. 물론 정당화 논변을 창안한 이들의 목표는 민주정 수립이나 정치적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우상 숭배'와 '이단'의 근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작업들은 18세기에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새롭고 판이한 정치적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125)


4 사회


"전근대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투자하는 활동은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농업(인구 절대다수의 직업)은 공동체가 합의한 관습에 따라 모두가 씨를 뿌리고 쟁기질을 하고 때가 되면 함께 수확하는 집단 활동이었다. 생계유지가 집단 활동이었던 것처럼 수확 실패, 전염병, 기상 이변, 전쟁 등 목숨을 위협한 주된 원인들도 집단으로 겪는 역경이었다. 이런 난관은 지금도 보험증서에 깨알 같은 글자로 끼워 넣는 표현처럼 '신의 행위'[불가항력 또는 천재지변을 뜻함]로 보였다. 주님이 개개인에게 상이나 벌을 주기도 했지만,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심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의 행위가 모두의 소관이 되었다. 소수의 부도덕한 행실이나 이단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사회에 천벌이 내리면 그들을 용인한 모두가 고통받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남편, 아내, 자식, 이웃 등과 함께 천국에 가기를 원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129-30)


"종교 조직과 사회 조직 모두의 주요 구역은 교구였다. 교구는 그 경계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응당 속해야 하는 지역의 행정 단위였다." "신교는 국교로 인정받은 곳에서 기존 교구 체계를 유지했고, 공동체 결속, 감독, 통제를 목회 임무의 주요 특징으로 삼았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야만 출교(가톨릭 종교재판소가 공표했든 제네바 종교국이 공표했든)가 불러일으켰던 격정을 이해할 수 있다. 출교는 사회적 불명예의 원천(적어도 공동체에서 덕망 높은 이들에게는)이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 극히 중요한 행사에서, 무엇보다도 이웃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지위와 좋은 평판을 상징하던 성체성사에서 배제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출교당한 자는 대부모(代父母) 자격도 금지되어 성체성사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빛바랜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당시 대부모 제도는 세례를 받는 아이에게 평생의 후원자를 정해주고 가족들 사이에 영적 친족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사회 제도였다."(130-2)


가톨릭 문화에서 '자선(charity)'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불우한 이들을 향한 이타심을 뜻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동반자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돌려주는, 사회관계가 바로잡힌 상태를 뜻했다." "그러나 신교 개혁가들이 보기에 빈자들에게 주는 행위는 '선행'이 아니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영적 이로움이 교환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빈자들이 특히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통념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가난을 진지하게 다루었고, 가난을 낭만화하던 관행을 그만두었으며, 구제 계획의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해 '자격 있는 빈민'을 지원했다. 어쩌다 한 번씩 차별을 두지 않고 베풀던 기존의 자선 형식은 사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일부 지역들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루터의 비텐베르크를 시작으로 많은 신교 도시들이 비슷한 계획을 실행하여 구걸을 금지하고, 빈민을 지원하는 '공동 기금(common chest)'을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 모금을 지시하고, 때로는 도시 구빈원을 설립했다."(133-4)


"가족은 신교의 핵심 사회 제도이자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동시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칼뱅은 개별 교회를 닮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목사 역할을 하며 집안 신도들인 아내와 자녀, 하인을 규제하고 지도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기는 아버지들이 지배한 시대였다. 가족과 가정생활에 관한 이 시대의 기본 전제를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은 가부장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자녀의 유년기에 복잡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린이는 나머지 인류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결백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매로 다스렸고, 억누르고 제지했으며, 교리문답의 메시지를 주입했다(이 동사의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로). 그러나 구약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신약은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라고 지시했다.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이었고, 개혁가들은 자녀를 야육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쳤다."(140-2)


"학자들은 여성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은 간과한 채 종교개혁이 여성에게 끼친 영향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곤 한다. 여성은 종교적 변화에 적극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대의 통념이었지만, 많은 여성이 변화에 동참해 열렬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당파심을 드러냈다. 메리 튜더의 체제에 의해 화형당한 신교도들 가운데 눈에 띄게 높은 비율(280여 명 중 51명)이 여성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신교 체제에서 여자들은 잉글랜드 가톨릭교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편과 별개인 법적 정체성이 아내에게 없거니와 남편이 교회에 다니는 한 아내에게 '영국 국교회 거부'를 이유로 벌금을 물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여성 행동주의는 성장중인 '자발적' 종교의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국교회들에서도 대개 가장 헌신적이고 독실한 구성원이었다. 근대 서구 문화의 뚜렷한 특징인 종교의 여성화는 가부장적 시대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146-8)


5 문화


"종교개혁 이전에 종교는 예배자들의 감각 범위 전체를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히 감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적 측면이 도드라졌다. 으리으리한 대성당부터 변변찮은 예배당까지, 교회들은 제단화, 프레스코 벽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을 정교하게 새긴 조각상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커다란 그리스도 조각물(잉글랜드에서는 루드rood라고 불렀다)은 제단 공간과 본당 회중석을 나누는 칸막이의 맨 위에 걸린 채로 교회의 시선을 지배했다. 종교 이미지를 옹호하는 고전적 논변은 그런 이미지가 문맹자들을 위한 교훈적 도구, '평신도들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정을 담아 조각하고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성인 이미지, 평신도들이 헌금을 바쳐 비용을 대고 촛불을 밝혀 공경한 그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 글자 이상이었다. 이미지는 신성한 권능의 프리즘으로, 예배에 참석해 집중하는 신도들이 가장 주목할 법한 위치이자 그들의 기도가 가장 응답받을 법한 위치에 있었다."(157-8)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비범한 유산을 거부하고 태반을 파괴했는데, 교양이 없거나 예술의 힘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더 예민하게 감지했고 우상숭배의 위험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종교 이미지에 대한 주요 개혁가들의 태도는 제각기 달랐다. 루터는 본인이 그림이나 조각의 힘에 별로 감명받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미지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보기에 이미지들 자체는 멜란히톤이 개진한 신학적 범주인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사례들, 즉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게 교회가 보유해도 되고 버려도 되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점이었다. 이미지를 숭배하거나 신에게 상을 받기를 기대하며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지만, '약한 자들'을 지도하는 수단으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루터파 뉘른베르크의 교회들에서 귀중한 고딕 예술 작품이 살아남았다."(159-60)


"시각 이미지의 종교적 유용성에 어느 정도까지 열려 있었던 루터주의의 입장을 개혁파 전통의 지도자들은 공유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스스로 인정하는 감정가였지만(〈빼어난 그림과 조각상은 그 자체로 내게 큰 기쁨을 준다〉), 그런 이미지가 교회 안에 자리하거나 예배에서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역할을 허용하는 것은 마땅히 하느님 한 분만이 받아야 하는 경의를 중간에서 가로채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고, 인간이 만든 사물을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주권을 모욕하는 꼴이었다. 루터와 츠빙글리 이후 갈라진 노선들은 성서의 이정표들에 대한 서로 다른 독해를 반영했다." "칼뱅에 따르면 〈하느님을 표상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그 형상들과 그분은 전혀 닮지 않았으므로 그분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분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이다〉. 이미지는 말 그대로 우상, 그릇된 숭배의 버팀목,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전염병이자 오염물이었다."(161-3)


"가톨릭 종교개혁은 (신교에 맞서) 성상의 가치를 다시 역설하는 한편 예술을 통해 신도들과 하느님을 연결할 새로운 방법을 궁리했다." "가톨릭이 이용한 예술에는 신교에 대적하는 전투적인 측면, 성상 파괴자들에게 '엿을 먹이는' 측면이 있었다. 가톨릭은 동정녀 마리아 이미지로 군기(軍旗)를 장식했는가 하면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이단자들을 완파하고 1571년 중대한 레판토 해전에서 무슬림들을 무찌른 공을 '승리의 성모'에게 돌렸다. 이단은 의인화된 형태로든 루터나 칼뱅을 닮은 인물의 형태로든 승리자 가톨릭에 짓밟힌 모습으로 자주 시각화되었다." "이미지가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교훈적 역할을 수행한 저 멀리 신세계와 아시아에서는 종교 예술이 개종 캠페인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예수회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능력을 확신했다. 그렇다 해도 전도를 받은 각양각색의 사회들은 유럽의 기독교 모델을 그저 흡수한 것이 아니라 토착 전통과 환경에 맞추어 조정했다."(167-9)


"〈음악은 신의 말씀 다음으로 가장 높이 칭송받을 가치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음악 애호가이자 능숙한 류트 연주자였고, 노래를 이용해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회중을 예배에 직접 참여시키려 했다." "훗날 루터가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수백 년간 신교의 애창곡이었다." "루터는 종교음악에 관대하게 접근했다. 라틴어 텍스트를 허용했고, 다성음악에 감탄했다. 종교음악에 관한 한 루터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보다 교양 수준이 높았다. 에라스뮈스는 〈우렛소리 같은 소음과 우스꽝스럽게 뒤섞이는 성부들〉을 싫어했고, 현학자마냥 음악은 성서 텍스트를 명료하게 수용하는 데 필요한 수단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 이후 루터교 음악은 새롭고 모험적인 경로로 들어섰다." "루터가 처음으로 시도한 코랄(chorale) 실험과 그 실험의 직계 후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천재인 J. S. 바흐의 전집 사이에는 뚜렷한 연속성이 있다."(173-5)


"루터처럼 재능 있는 음악가이긴 했으나 츠빙글리는 음악을 회화와 거의 같은 범주에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느님 경배를 음악이 어지럽힌다고 보았다. 취리히의 교회들은 오르간을 치웠고, 예배에서 모든 형태의 노래와 성가를 뺐다. 칼뱅 역시 오르간과 악기를 거부하긴 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서 자체에 주님을 노래로 찬양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하여 다윗의 시편을 찬양용 가사로 제공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전례 음악에 내린 처방은 시각예술에 관한 지시와 비슷했다. 교회음악은 〈음란하거나 불순한〉 함축을 피해야 했고, 속가의 선율을 차용해 작곡하는 미사곡(소위 '패러디 미사곡')이 금지되었다. 가사는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16세기 후반에 다성음악 작곡가들은 역설적으로 이런 제약 덕분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사곡과 모테트 중 일부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175-8)


# 모테트(motet) : 시편의 시를 비롯한 성서 구절에 곡을 붙인 무반주 다성 성악곡


6 타자


"이단은 최악의 범죄, 하느님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범죄였다. 이단자에게 교수형은 문자 그대로 과분한 처벌이었고, 이단자의 육체를 불태우는 것은 사회를 정화하는 의식, 이단자의 영혼을 틀림없이 집어삼킬 지옥불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루터가 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사 두 명이 브뤼셀에서 화형당한 1523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남녀 약 5000명이 종교적 믿음을 이유로 법적으로 처형되었다. 그들은 교회와 협력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특히 이 기간의 초기에 가톨릭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중에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순교자들과 순교자가 되려는 이들은 어느 종교 집단에서나 소수파였지만, 변화의 속도를 올리고 타협을 무산시키는 힘을 가진 소수파였다. 그들은 대의의 빛나는 상징이자 연약한 교우들을 격려하는 존재로서 열렬한 추모를 받았다."(185-7)


"이단이나 가톨릭교도의 반역죄에 대한 처형은 대부분 1600년 이전에 집행되었다. 교파들을 가르는 경계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완고해졌음에도, 종교적 소수집단을 박해하여 일소할 수 없다는 것이 여러 지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단 하나의 종교만 믿는다는 허구를 지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비국교도들이 일요일마다 국경을 넘는 관행(Auslauf, 달아나다)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용인과 관용은 같지 않다. 후자는 다양성 그 자체의 수용을 함축하는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태도이자 상반된 관점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당국들은 원칙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비국교도들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보통 평화가 종교적 내전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사적 숭배의 권리를 인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공동체들 내에서 용인은 협의된 사회적 관행이었으며, 종교개혁 시대 막바지에 '관용의 등장'이 곧장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190-2)


"이슬람은 중세의 기독교권 유럽에서 주요한 정치적·문화적 '타자'였다. 대체로 신교도들은 무슬림들을 가톨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우는 전우로 환영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따라서 루터에게 무슬림은 그저 하느님의 적이었다. 가톨릭권 유럽 대부분에서 유통기한을 한참 넘겨서까지 쓰여온 십자군 수사법을 루터는 구사하지 않았다. 복음을 전한답시고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다가오는 최후의 날들과 오스만 제국을 확실히 연관지었고, 그의 마음속에서 교황과 '튀르크족'은 적그리스도 역할을 줄곧 분담했다. 중세의 일부 논자들은 이슬람을 엇나간 '기독교 분파'로 여겼고, 원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공통 기반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앙 간 대화'는 루터의 어휘에 없는 표현이었다. 1542년 루터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인쇄된 코란을 후원하는 데 일조했는데, 종교적 개방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적의 견해를 알리고 논박하기 위함이었다."(193-5)


"튀르크인이 가깝지만 외부에 있는 '타자', 즉 기독교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오랜 세월 기독교 사회 내부에서 염증성 이물질로 존재해온 유대인은 다른 종류의 난제였다. 대체로 보아 세속 당국과 종교 당국은 도시 경제와 국가 재정 조달 측면을 유념하여 민중의 반유대 폭력을 제지하려 했지만, 고중세와 중세 후기에 대중적·공식적 반유대 감정은 더욱 격화되어 1290년 잉글랜드에서,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에스파냐에서(그라나다 정복을 기념해),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유대인이 잔류를 허용받은 곳에도 그들을 향한 분노가 두고두고 폭발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도 소년들을 납치하고 살해하여 그들의 피를 유월절 무교병(無酵餠)을 굽는 데 사용한다는 '피의 비방'이 그런 분노를 부채질하곤 했다. 이와 관련된 혐의는 성체 신성모독이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이 축성받은 성찬용 제병을 훔쳐서 고문함으로써 예수의 육신에 대한 폭력을 영속화하려 든다고 믿었다."(196-7)


"비기독교인 타자와의 가장 난처한 조우는 기독교 유럽 안쪽도 아니고 경계도 아닌 저 멀리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역만리에서 가톨릭교도들(그리고 뒤늦게 신교도들)은 종교개혁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오래된 금언인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배타성의 극치인 이 언명은 이교도들을 시급히 포섭하라는 주문, 그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살이로부터 구하기 위해 지치지 말고 힘쓰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럴 기회는 문자 그대로 거의 무한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적 가치라는 문제는 아메리카 대륙을 복음화하는 동안 진지한 논쟁의 주제였다.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파괴한 것이야 정치적 기정사실이었지만,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그 이후 정복자 지주들이 토착민 노동을 착취하는 상황이 선교 활동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201-3)


"동양에서 기독교의 호소력을 특히 사회 엘리트층까지 넓히려던 시도를 개척한 이는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였다.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펼친 사비에르는 '적응주의' 노선을 택해 기독교와 정반대되지만 않으면 지역 전통을 포용했다. 또다른 예수회원 로베르토 노빌리는 인도에서 같은 접근법을 택해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의식 같은 기독교 개종자들의 '사회적' 관습을 허용했다. 역시 예수회 수사들이 순응책을 구사한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1551~1610)와 그의 후계자들이 고관처럼 차려입었고, 지도 제작술과 천문 관측술로 중국의 학구적인 행정 계급에 감명을 주었다. 기독교를 생경한 수입품이 아니라 기존 신조의 완성형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리치는 '하느님', '천국' 같은 개념들을 유사한 한자 용어로 표기하도록 장려했고, 유교의 조상 숭배는 가톨릭교와 완전히 양립 가능한 민간 제례라고 말했다."(205-6)


7 유산


"19세기 후반에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늘날 베버의 다른 근대화론은 예전보다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것은 신교가 초월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종교로서 생활환경에 관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에 치명상을 입혔고, 광범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촉진했다는 견해다." "그러나 학자들이 발견한 증거에 따르면 다름 아닌 근대의 신교권 유럽 전역에서 종교 문화들은 징후와 징조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흠뻑 빠져 있었고, 마귀와 천사가 활동한다고 상상했다."(215-6)


"기적 개념, 아울러 악마를 비롯한 영적 존재들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믿음이 용인될 가능성은 적어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례상 '과학혁명'이라고 뭉뚱그리는 현상에 수반된 변화였다." "일각에서는 신교가 근대 과학을 후원한 사실이 가톨릭교가 근대 과학을 적대한 사실만큼이나 자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교가 과학의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은 무엇보다 중세 유럽에 추론하고 실험하는 활기찬 전통들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럴싸할 뿐이다. 여하튼 신교의 핵심은 구속받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텍스트에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 많은 신교도들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들어 진화론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펴보는 기간 내내 숱한 신교도들이 구약성서 여호수아기에서 기브온 위에 '멈추어 있는' 해를 언급한다는 이유로 지동설에 반대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종교개혁기의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217-8)


"그렇다면 이 모든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근대 세계의 시작을 우렁차게 알린 서곡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로는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기에 대두한 세력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은 실은 역설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은 사회적·종교적 균일성의 창출을 지향했으나 목표와 달리 다원주의의 형태들을 산출했으며, 그 형태들은 뒤이어 세계의 가장 먼 지역들에 수출되어 모방되었다. 종교개혁은 국가의 정치적·정신적 권력을 강화하겠노라 약속했지만,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문법과 어휘를 낳아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단과 그릇된 믿음을 뿌리 뽑고자 했지만,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까지 주춤주춤 오류를 용인했다. 종교개혁은 사회 전체를 신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장기적으로 사회가 세속화될 여건을 조성했다."(219-20)


"이 모든 말은 종교개혁의 주된 유산이 분열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처하기 위해 출현한 전략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통일된 '기독교권'이라는 중세의 이상─기독교의 정치적·사회적 가치들을 공유함으로써 안팎으로 완전한 통합체를 형성하는 지역 사회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언제나 현실보다는 오히려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개혁들은 서로 화목할 수 없는 계획들을 추진했고, 그로써 기독교의 염원과 그 염원이 희미하게 투영된 사회의 관습을 영구히 박살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분파들만이 종교개혁 시대의 절대적 확실성에 매달린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한 오래된 물음들─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에 관한 물음,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의무에 관한 물음, 양심과 정치적 복종 사이의 균형에 관한 물음─은 지금도 올바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고 있다."(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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