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
데이비드 M. 귄 지음, 신미숙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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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개에 싸인 과거


"최초의 로마인들을 자연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탐구해보면,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이탈리아인 가운데 라틴인은 기원전 1500~1000년경에 라티움 평원을 차지했다. 일찍이 이곳에 도달한 이들에게 로마는 정착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고리 모양을 이루는 일곱 언덕은 방어하기 용이했으며, 가까이에 티베리나 섬이 있어 테베레 강을 건너기 가장 쉬운 지점이었다. 북쪽에는 에트루리아 지역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원전 900년경 에트루리아인들이 정착했다. 남쪽에는 기원전 750년부터 그리스 세계의 식민자들이 건설한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나폴리(라틴어로 네아폴리스)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 그리스 도시들 때문에 남부 이탈리아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대大그리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라티움은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자연스러운 지상 연결 통로였다. 이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초기 로마는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21-4)


2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기원전 499년 혹은 496년에 벌어진 레길루스 호수의 전투 이후 약 두 세기 동안 라틴인과 맺은 동맹은 로마가 세력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로마의 동맹국이 된 라틴 도시는 세공을 납부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의 병사들을 제공하여 로마 장군의 지휘 아래 로마군에 복무하게 해야 했다. 라틴인은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에서 일정한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으며, 외부 세력의 침략을 받을 경우 로마의 보호를 보장받았다 또한 라틴 동맹국들은 로마 사회에 매우 긴밀하게 통합되었다. 로마인과 라틴인은 쌍방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유효한 경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으며, 서로 혼인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적출로 인정받았다." "로마-라틴 동맹 덕분에 로마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결코 이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개 도시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로마가 제공한 특권들은 매력적이었으며, 로마의 우위는 강압보다는 합의에 기반을 두었다."(32-3)


"왕정이 몰락한 후, 로마를 지배하는 귀족 계층은 처음에는 파트리키(patricii: 혈통 귀족을 의미함)로 알려진 특정한 대가문들로 제한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 율리우스 가문, 그리고 코르넬리우스 가문 같은 파트리키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만이 종교적 직책이나 정치적 직책을 보유할 수 있었다. 파트리키가 아닌 모든 로마 시민은 플레브스(plebs: 평민)로 분류되었다. 플레브스에는 가난한 시민들이 포함되었지만, 그렇다고 플레브스가 '가난한 사람들'을, 파트리키가 '부유한 사람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여느 혈통 귀족만큼이나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 하지만 혈통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다보니 혈통 귀족과 평민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빚어졌다. 최초의 분쟁은 혈통 귀족의 착취에 대한 반발로 비롯되었다." "사회적·정치적 권리 확보를 위한 평민들의 기나긴 투쟁은 신분 투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0)


"신분 투쟁 과정을 통해 로마 인민은 어느 정도 보호권을 획득하고, 다소간 국가 행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평민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역할을 요구했다." "한 세기 이상 충돌을 거듭한 후, 기원전 367년에 평민이 집정관(consul)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첫번째 평민 집정관은 366년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했다. 결국에는 평민들도 거의 모든 정치적·종교적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혈통 귀족과 평민 사이에 출생에 의한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공화정의 지배 계층은 확대되었다. 혈통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을 포함하는 새로운 귀족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이렇게 결합된 새로운 귀족 계층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로마 공화정의 독특한 통치 구조를 이루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이 확립되었다. 바로 행정관, 원로원, 그리고 민회였다."(42-3)


# 행정관의 종류

1. 집정관(consul) : 국가의 정치적·군사적 수장

2. 법무관(praetor) : 시민과 속주민의 재판 담당

3. 조영관(aedilis) : 도로, 상수도, 식량 문제 등 로마 시의 행정 처리

4. 재무관(quaestor) : 재정과 사법에 관한 의무 수행

5. 호민관(tribune of the plebs) : 혈통 귀족 출신 행정관들의 부당한 행위 견제

6. 감찰관(censor) : (비상근) 시민의 명부 작성 및 재산 평가, 원로원 심사

7. 독재관(dictator) : (비상근) 비상 시기에 국가를 감독하는 권한 행사


3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공화정의 역사에서 원로원 엘리트들은 '위엄'(dignitas)과 '영광'(gloria)에 대한 요구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로마의 사회와 정치생활을 지배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모방하고 능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는 공화정의 군사적 팽창의 원동력이자 로마 세력 확장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엘리트의 경쟁은 공화정이 몰락하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위엄'과 '영광'에 대한 욕구는 공화정기의 모든 영웅들, 즉 한니발을 제압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추진력을 제공한 힘이었다. 점점 더 위대한 능력을 획득한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와도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개인의 '위엄'이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더 중요해졌으며, 결국에는 로마를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킬 정도의 막강 권력을 손에 넣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61-2)


"로마의 경우 원로원 귀족층 아래에서는 계층 구분이 덜 명확한 편이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원로원 엘리트층 바로 아래에 기사 계층(equites)으로 알려진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초기 로마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상업과 공업 분야에 적극 관여했다. 그러나 로마의 자유민 가운데 중심 집단은 소농 계층이었다. 이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했으며, 유사시에는 군복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로마 사회의 화합에 불가결한 일종의 유대 관계, 즉 보호자(patronus)와 피보호자(cliens) 관계를 맺어 엘리트층과 통합되어 있었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투표를 하고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 반면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보호하고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이것은 법적 관계가 아니라 비공식적 관계였으므로 남용될 여지가 있었지만, 실제로 남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수의 충실한 피보호자에 대한 지원은 귀족인 보호자의 '위엄'을 위해 중요했다."(62-3)


"로마 사회를 통합한 마지막 결정적 요소는 종교였다.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힘들이 만들어놓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고대의 로마인들은 신을 믿음으로써 확신을 얻고 보호를 기대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의 성장 원인을 공화정의 독특한 정치체제와 로마 군단의 힘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초기 로마인들의 경건함과 도덕성에 의해 신들의 은총을 얻은 덕분이라 설명했다. 종교는 로마인의 생활에서 필수 요소였다. 가정에서는 가정을 수호하는 정령들을 모시는 소규모 가정의례를 열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국가를 수호하는 최고의 신들을 기리는 대규모 희생제와 행렬을 거행했다. 신들의 승인을 얻기 전에는 선거를 치르지도,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다양한 신을 모시는 만신전은 항상 새로운 신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외국의 신들을 로마에 흡수하는 것은 우월함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로마인들과 피정복민의 유대를 확립하는 수단이었다."(77-9)


4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기원전 288년 스스로를 마메르티니(Mamertini: 마르스 신의 아들들)로 부르는 한 무리의 이탈리아 용병대가 시칠리아의 도시 메시나(Messina)를 장악했다." "기원전 265년에 메시나 내의 경쟁 파벌들은 로마와 카르타고에 동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타고인은 오랫동안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해왔기에 메시나의 요청에 응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로마는 마메르티니를 돕게 되었을까? 한 가지 동기는 두려움이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면,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위협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또다른 이유는,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인인 마메르티니를 도움으로써, 로마는 동맹국들이 위험에 닥쳤을 때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신의(fides)를 굳게 지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신의는 로마의 사료들이 즐겨 강조한 동기들이었다."(92-3)


# 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 전쟁 발발


"카르타고의 병력을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끈 인물은 한니발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쟁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한니발 자신과, 부친 하밀카르로부터 물려받은 로마에 대한 '바르카 가문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더 복잡했다.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힘이 팽창하자 로마는 경계심을 품었고, 기원전 226년경 스페인 북쪽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측의 영역을 확정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스페인의 도시 사군툼(Saguntum)과도 우호동맹을 체결했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이 이 도시를 공격하자, 로마는 이를 완벽한 전쟁의 명분(casus belli)으로 삼았다. 응징 차원에서 로마는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카르타고가 거절하자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행동은 분명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동맹국을 방어한다는 로마의 주장 이면에 로마 역시 전쟁을 열망하고 있었다."(98-9)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슬픈 후기와도 같다. 기원전 194년 로마는 또다시 카르타고에 파병했다. 카르타고인은 로마의 모든 요구에 굴복했다. 300명의 인질을 넘겨주었고 모든 무기를 양도했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들에게 본국을 포기하고 해안으로부터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고,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카르타고인은 3년 동안 영웅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로마인은 낙담한 상태에서 집정관 직을 맡기에는 너무나 젊은, 떠오르는 기수를 집정관으로 맞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양한 손자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그의 지휘하에 로마는 카르타고를 기원전 146년에 함락시켰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 토지는 저주를 받았고, 소금이 뿌려졌다.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 영토는 이제 로마 공화정의 속주가 되었다."(109)


5 지중해의 여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방대한 정복지를 '가장 강한 자에게' 남겨놓았다. 그의 휘하 장군들이 지배권을 다투었고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세 개의 주요 왕국이 나타났다. 안티고노스 왕조하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하의 시리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하의 이집트였다. 그리스는 도시들이 연합하여 형성한 동맹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특히 코린토스 만 북쪽의 아이톨리아 동맹과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 동맹이 강력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몇몇 도시들은 독립을 유지했으나 정치적 중요성은 거의 상실했다. 다른 국가들로는 무역 중심지인 로도스(Rhodes) 섬과 소아시아의 페르가뭄(Pergamum) 왕국 등이 있었다. 그리스 역사의 전 기간에 걸쳐 항상 그래왔듯이, 각국은 지속적인 전쟁과 계속 변하는 동맹들의 그물망에 얽혀 있었다. 로마는 거의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러한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113-5)


"'자유'는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해 선전 구호가 되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개별 도시국가들은 오랜 기간 각자의 자치를 위해 투쟁했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왕들은 비록 말뿐이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겠노라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예외라면, 로마의 경우 약속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194년 그리스에 있는 로마의 모든 군대가 철수했다. 주둔군도, 세공도, 새로운 로마의 속주도 생기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공화정은 그리스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상비군도, 관료들도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그리스인과 그리스 문화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조처이기도 했다." "이제 그리스의 영향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리스의 예술 작품들이 이탈리아로 밀려들어왔고, 그리스 언어와 문학 지식은 로마 엘리트들 사이에서 새로이 중요성을 인정받았다."(120-3)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 즉 기원전 146년에 로마 장군 루키우스 무미우스의 명령에 의해 코린토스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는 50년 전 코린토스에서 그리스인에게 부여되었던 '자유'를 종식시키기에 적합한 상징적 행위였다. 그리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속주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집트도 명목상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이제 그리스 도시국가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유산으로 남긴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했다. 수십 년에 걸친 충돌과 오해가 빚어낸 분노는 여전히 부글거리고 있었고,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의 긴장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길게 보아 두 문화가 만나 얻게 된 혜택이 그동안 치른 비용을 훨씬 능가했다. 로마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동지중해 세계에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몇 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했다."(128-9)


6 제국의 비용


"제2차 포에니 전쟁, 그리고 동방의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장한 결과 로마 엘리트들 내부에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례 없는 경력은 원로원 의원들 간의 평등이라는 공화정의 근본 정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초로 원로원의 집단 의지를 압도할 정도의 권위와 인기를 누리는 로마 귀족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이에 해당하는 마지막 인물은 아니었다. 로마 엘리트들 간의 경쟁 심리로 인해 다른 귀족들도 불가피하게 스키피오에 필적하거나 그를 능가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플라미니누스는 젊은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을 분쇄했으며,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한 이후 치러진 그의 개선식은 스키피오의 개선식을 방불케 했다. 스키피오는 이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을 노린 원정에서 동생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재확인했다. 이렇듯 점점 고조되는 부와 '영광'에 대한 경쟁은 엘리트 전반으로 확대되었다."(133-4)


"세력 팽창이 이어지면서 로마로 엄청난 부가 유입되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였으나 오랜 원로원 가문의 지위를 얻지 못한 별도의 사회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129년 원로원 의원들은 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사 계층(ordo equester)과 분리되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같은 거대 무역도시들이 파괴되면서 기사 계층은 더욱 성장했다." "팽창의 경제적 효과는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의 더 광범한 주민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모든 고대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공화정 역시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이는 정복 전쟁들로 인한 부의 유입으로 더욱더 커졌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다. 왜냐하면 전리품 중 더 큰 몫을 챙긴 쪽은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받았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는 상승하였으며, 노예노동이 차지하는 비율도 확연히 증가했다." "팽창의 경제적 영향은 군사 지도자들의 등장보다는 덜 흥미로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공화정의 통합과 안정을 위협했다."(136-7)


"사료의 제한 때문에 기원전 2세기에 공화정이 직면한 사회적 위기의 정확한 규모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분명 소농들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예컨대 기원전 146년처럼 필요할 경우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집은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스페인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들은 특히 인기가 없었으며, 기원전 151년과 기원전 137년에는 징집에 반대하여 평민 호민관들이 집정관들을 투옥하기도 했다. 병력 제공과 충성심을 통해 로마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동맹국들도 불만이 컸다. 그들은 점점 더 길어지는 전쟁, 점점 더 멀어지는 전장에 병력을 제공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은 자기 몫의 전리품을 받았으나, 여전히 어떠한 정치적 발언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공무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는 기사 계층의 등장과 도시 폭도의 위협으로 인해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점화 심지에 불을 붙일 불꽃뿐이었다."(138)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추진과 실패, 사병화私兵化된 군대를 거느린 군사 지도자들의 등장


7 언어와 이미지


"기원전 2세기 사람들은 로마 귀족이 그리스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길 기대했는데, 이들은 공화정의 가치에도 집착했다. 이러한 집착은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로마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된 장르를 통해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바로 풍자시이다. 통렬한 사회적·정치적 비평, 그리고 문학적 패러디와 도덕적 판단이 결합된 풍자시는 공화정의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동시대의 논평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최초의 진정한 풍자시인은 가이우스 루킬리우스(기원전 102년 사망)였다. 그는 문학 서클을 만들어 교류하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구였다. 루킬리우스의 풍자시들은 단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가 확립한 장르는 오래 지속되었다. 루킬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인 호라티우스와 로마 최고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의 모델이 되었다. 훗날 제정기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는 '빵과 서커스', 그리고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와 같은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163-4)


"키케로는 로마에 대한 이상을 기원전 51년에 완성한 『국가론』에 묘사했다. 현재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국가론』은 플라톤의 『국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키케로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정치의 쇠퇴는 도덕의 쇠퇴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역으로 정치 개혁에는 도덕 개혁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키케로는 거친 세계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해 실제적 충고를 제시했다. 『의무론』(기원전 44~43년)에서 키케로는 당대의 올바른 행위의 지침으로서 과거 로마의 도덕성을 제시했다. 가장 위대한 선은 국가에 대한 봉사이며, 국가에 대한 최대의 봉사는 독재자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살해된 직후에 쓰인 저서로, 전제 권력을 추구하는 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필요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옳다는 키케로의 주장의 배후에는 당대의 매우 현실적인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168-9)


"로마인들 자신은 건축 분야의 업적을 고대 문명에 기여한 최대의 공헌 중 하나로 여겼다.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그리스인 디오니시오스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세 가지 업적은 '수도교, 포장도로, 그리고 하수도 공사'라고 썼다. 이같은 건조물들은 로마인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로마인은 디자인과 효율성 면에서 이들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기존의 건축 요소들, 특히 아치와 궁륭은 새로운 규모로 이용되었다. 또한 로마인은 콘크리트를 폭넓게 사용했는데, 이는 콘크리트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재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숙련노동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화정기의 특징을 규정하는 공공건물은 무엇보다 신전이었다. 신전은 로마인의 신앙심과 더불어 귀족의 경쟁심을 반영한다." "귀족들에게 신전 건축은 자신의 성공을 공적으로 기념하고, 신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이상적인 수단이었다."(172-5)


8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로마 공화정은 엄청난 유혈 사태 속에서 스스로 붕괴했다. 기원전 2세기의 위기들은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를 손상시켰다. 뒤이어 공화정 후기를 지배한 1세대 군사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마리우스와 술라를 계승한 이들은 제1차 삼두정을 형성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리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크라수스가 사망한 이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동맹은 와해되었고 내란이 시작되었다. 승리자는 카이사르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카이사르가 살해되었지만, 공화정은 살아나지 못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동료 '해방자들'의 무모한 행위는 로마를 또다시 10년간의 내란으로 몰아갔을 뿐이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파했다. 4년 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로마 공화정은 로마 제정에 자리를 내주었다."(186-7)


"내란으로 인한 파괴로 공화정은 엉망이 되었다. 속주들은 무질서해졌고, 원로원은 통치 기구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로마의 파괴에 일조한 바 있지만, 파괴된 로마를 재건해야만 했다. 놀라우리만치 짧았던 단독 지배자로 통치하던 동안, 그는 차후 로마 제정기의 역사에서 발전되는 핵심적 발전 요소들의 기초를 놓았다. 속주 행정과 징세 체계가 재조직되었다.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밖으로, 즉 갈리아, 스페인 등의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와 같이 버려진 도시들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리고 해산된 카이사르 군대의 퇴역병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식민시들이 건설되었다." "카이사르의 개혁들 중 직접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킨 조치는 거의 없었다. 증오를 불러일으킨 것은 카이사르 자신의 권력을 표현하는 수단 자체였다." "기원전 44년 초에 종신 독재관이 되겠노라는 선언은, 카이사르가 공화정 정서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음을 드러내는 조처였다."(207-8)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이사르 살해 음모를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불러일으킨 적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경탄했던 것만큼이나 그를 두려워했던 키케로는 냉담한 편지 속에서 그의 죽음을 '가장 호화로운 향연'이라 부르며 환호했다. 스스로를 '해방자들'이라 부른 음모자들의 우두머리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소小카토의 사위이자,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한 브루투스의 후손이었다. 카이사르가 마지막 말(너마저도, 아들아kai su teknon)을 남긴 대상이었다." "살해 모의에는 개인적인 적의도 작용했고 카이사르가 통제하게 된 관직과 영예를 되찾으려는 경쟁 욕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방자들'은 공히 카이사르가 죽임을 당한 후의 미래를 그려볼 능력이 없었다. 단순히 과거의 공화정이 회복되기를 희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화정은 이미 사망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다른 이들이 채워야 할 권력의 공백을 남겨놓았을 뿐이다."(209-10)


9 로마 공화정의 유산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고대 로마는 지극히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변형 과정의 다양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극히 대조적인 두 사람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피렌체 사람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과 영국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다." "먼저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따르면, 공화국은 두 가지 중 하나, 즉 로마처럼 팽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고대 스파르타나 동시대의 베네치아처럼 자기 보전에 치중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선택은 분명했다. 팽창을 거부하는 나라들은 아마도 좀더 오래 지속하거나, 로마 공화정을 괴롭혔던 투쟁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광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모든 국가는 성장하거나 몰락한다. 그리고 불화와 야망이라는 도전을, '우리가 로마의 위대함에 도달하려 한다면 피할 수 없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222-5)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이상국가로서의 로마 공화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영국은 왕정이었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훌륭한 역사극 중 많은 작품이 영국 왕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인민 대의제, 귀족의 특권, 그리고 독재 권력에 관한 동시대의 토론에서 공화정기 로마의 사회적·정치적 긴장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화정기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서 주제 선택은 극중 인물과 극적인 잠재력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안목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 토론 또한 반영한다. 그는 로마가 여러 세기에 걸쳐 팽창하고 상대적으로 정치가 안정된 시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공화정이 탄생하는 시기와 쇠퇴하고 몰락하는 시기에 집중했다." "낭만이 없는 순수주의자라면 셰익스피어가 역사적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자신이 다루는 고대 로마인들을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생하게 되살렸다."(226-31)


"미합중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에게 로마 공화정은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실제 모델로 여겨졌다." "마키아벨리처럼, 존 애덤스와 동시대인들은 로마 공화정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현실성 때문에, 그리고 민주정이 단순히 다수를 동원해 폭압을 행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이 민회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집단은 정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원로원 의원이자 엘리트주의자인 키케로라면 진심으로 찬성했을 조처였다. 둘째로 이 또한 키케로의 이상과 일치하는데,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만일 로마 공화정 말기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요소나 한 개인이 과도한 권력을 획득한다면, 다른 두 요소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합중국은 이와 같이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로마가 한때 누렸으나 나중에 잃어버린 정치적 안정을 획득했다."(233-5)


"몽테스키외가 로마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왕을 추방한 이후, 로마의 정부는 당연히 민주정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로원 귀족은 계속 권위를 유지했고, 로마 제국이 팽창해나가자 개개인의 부와 야망은 독재정치로 귀결되었다. 몽테스키외는 결론 맺기를, 〈공화국은 단지 소규모 영토만을 갖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지 않으면 오래 존속할 수 없다.〉" "법의 지배를 통해 확보된 자유를 강조한 점에서, 루소의 견해는 동시대 미국인들의 논의와 대단히 유사했다. 그러나 루소는 인민주권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었고, 몽테스키외가 예언한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공공 도덕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유덕한 삶은 공화정부의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는 로마 공화정을 그의 시대가 본받아야 할 하나의 상징으로 여겼다."(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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