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해하기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7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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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역사 이론


제5장 생산양식


5.1. 생산양식에 관한 일반 이론


"마르크스는 '생산력'이라는 용어 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다른 용어들도 사용한다. 노동자의 생산성이나 총산출의 크기를 증진시키는 인과적 효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요강》에서 〈과학, 발명, 분업, 노동의 결합, 향상된 교통수단, 세계시장의 창출, 기계 등에서 비롯되는〉 생산력의 증가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좁은 의미에서) 생산력의 증가를 '구성'하는 것─예컨대 발명─이 그러한 증가의 '원인'이 되는 것─예컨대 세계시장의 발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나열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후자 그 자체가 생산력의 증가라고 말한 것으로,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최적의?) 발전을 촉진하는 한, 그것도 생산력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만일 그 자체가 생산력이라면, 생산력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각각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17-8)


"우리는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이며, 생산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산관계의 변화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강압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 같은 경우가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병행한다. 잠재적 잉여가 크면 동시에 현실적 잉여도 크고, 기술적 세련성도 높아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구조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관련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한다. 노예제의 붕괴를 그 체제 내의 숙련노동의 사용에 대한 내재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주의가 창출한 잉여의 비효율적 사용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흡족한 설명이 아니다. 이것이 노예제의 붕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솔깃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29-30)


# 소유관계와 생산양식

1. 독립 생산자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함께 소유한 경우

2. 과도기적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3. 농노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모두 '부분적으로' 소유한 경우

4. 노예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도 자신의 노동력도 소유하지 못한 경우

5.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1859년의 〈서문〉의 진술을 해석해보면, 각 생산양식의 초기단계에는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서 그 둘은 서로 '상응한다'. 나중에 생산력의 정체가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된다. 그러므로 상응과 모순은 각각 기술적 진보와 기술적 정체로 해석된다." "이 독법에 따르면, 상응에서 충돌로의 변화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하위최적 상황일 때 일어난다.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었을 때가 아니다. 생산관계가 하위최적 상황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올 다른 생산관계가 있을 때이다. 여기에서 비교대상은 현재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반사실적 생산관계이다. 이 경우 하위최적성은 기술적 정체와 우연히 일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체가 시작되면, 기술적 진보의 여지가 있다고 전제할 경우, 이를 하위최적의 징조로 여기게 된다. 다른 한편 하위최적 상황이 정체 없이 올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경우다."(38-9)


"생산양식의 모순을 생산력의 하위최적 '사용'으로 정의하면, 모순이 왜 정치적 행동을 가져오는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의 수립을 가져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모순이 급속한 기술진보와 함께 등장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생산력을 잘 활용하는 체제에서는 기술변혁의 속도가 오히려 '둔화된다'는 유명한 주장이 있다. 슘페터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낭비와 경기순환이 없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낫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더 못하다. 이 예시는 다음과 같은 일반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어떤 체제든─경제체제든 다른 체제든─모든 주어진 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체제는, 장기적으로는 그 어떤 시점에서도 그렇지 못한 체제보다 열등하다. 그렇지 못한 체제의 실패 그 자체가 장기적 성취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소유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기라면, 이것이 생산력의 변화율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48)


5.2. 역사적 생산양식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다. 세계시장의 창출과 전통적인 농업의 변형이 자본주의적 산업생산 체제와 내수시장을 창출했고, 이 내수시장이 그러한 체제의 확장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Ⅰ》에서 그는 소규모 소유 생산의, 〈경제적인 이유〉와 관계없는 〈폭력적 수단〉, 즉 (정치적인 이유로 발생한) 엔클로저 운동을 다룬다." "영국에서의 자본주의의 전개는 (엔클로저 운동 같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야 영국에서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에서 엔클로저 운동은 토지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시장으로 내몰았고, 이로써 도시 자본주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엔클로저 운동은 이로 인해 토지를 잃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흡수했다. 따라서 도시 노동자들의 공급은 일반적인 인구증가의 결과였다."(65-7)


"공산주의는 그 체제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일 때 (혹은 최적이 되었을 때) 바람직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폐기하고자 하는 동기유인이 생겼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주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이 두 조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서,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사회주의에 딱 맞는 그 순간에 정확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요인이 체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 완화하면,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은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즉 두 조건 모두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조성된다는 것이다."(84-5)


"공산주의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존재하는 가장 빠른 시점을 현실화하기 위해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첫째, 노동자들이 봉건·절대·식민 정권에 대해 투쟁에 성공하고 나면, 이들의 투쟁은 이전의 동맹이었던 부르주아 계급을 향하게 되는데, 이 (때 이른) 투쟁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둘째,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의 적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용의주도하게 경계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부르주아 계급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는 것이다. 이 패배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고, 미래의 투쟁을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킨다. 노동자들은 굳건해야 하지만,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약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93-4)


5.3.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통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가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국지적인 혹은 일시적인 정체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발전단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연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발전의 진보적 성격을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잉여의 규모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반드시 잉여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잉여는 노동시간의 강제적인 연장을 통해, 혹은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 혹은 임금 삭감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산성에 변화가 없어도 잉여의 규모는 중단 없이 증대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제도들의 연속이 된다. 이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견해가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를 주장하는 견해보다는 더 그럴듯하다. 계급투쟁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99-100)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한 선형 진보의 형태로 보지는 않았다. 역사는 나선형을 보였다. 계급 사회는 일반적으로 퇴보단계를 나타내는데, 자본주의는 특히 그러하고, 인류는 이를 거쳐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진보의 기준은 생산성이나 잉여의 구묘가 아니라 사회적 통합의 정도이다. 전계급 사회의 원시적 통일성은 탈계급 사회의 더 높은 통일성 획득을 위해 붕괴되어야만 한다. 개개인은 전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을 상실하고 전문화된 다음에야 다시 전면적 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 인간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의 중단 있는 진보."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론적 전제로부터, 공산주의는 일어나게 되어 있고, 따라서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도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발전도식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작동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100, 107)


제6장 계급


6.1. 계급 정의하기


"계급은 생산요소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또는 비소유의 관계가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소유와 비소유로 정의할 경우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소자본가와 약간의 생산수단을 가진 임금노동자(선대제도의 경우)가 구별되지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계급을 착취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착취자를 한 계급에 넣고, 모든 피착취자를 또 한 계급에 넣는 것은 너무 거칠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착취 계급, 즉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다른 피착취 계급, 즉 동시대에 존재했던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은 시장행위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사는 자, 노동력을 파는 자, 사지도 팔지도 않는 소부르주아가 그것이다." "이 방법의 난점은 비시장경제를 연구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25-8)


"시장경제에서는 〈기본재산 구조에서 비롯되는 활동이 계급의 특징〉이다. 이것은 노동 혹은 비노동,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자본의 대부와 차용, 토지의 임대와 임차이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개념 쌍들은 경제행위자 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게다가 노동 혹은 비노동의 속성은 그 자체만으로 계급의 특징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노동 및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 혹은 '비노동 및 토지 임대'와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계급의 특징은 반드시 관계적이다." "이 기준은 생산요소들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비시장경제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경제에서는 생산 행위자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통제의 결여는 소유재산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통제권을 가진 자가 생산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물론 소유구조와 그에 따른 행위자의 강제된 활동 사이의 관계는 두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130)


# 시장경제에서는 행위자가 시장의 거래에 참여한다는 전제가 있고, 비시장경제(가령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는 거래에 앞서 존재하는 제도가 결정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의 기준으로서 재산을 과대평가하고, 권력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정한 계급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적 일관성과 이론적 직관에 있어서 그러했다는 뜻이다." "계급 분류를 착취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따라 결정하더라도, 지배와 복종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행위만 보고 구조에 대한 고찰은 불충분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가진 것에 의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었지만,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는 오로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야만 한다. 록펠러가 하위 관리직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의 계급적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력의 고용과 판매를 소유재산에 결부시킨 것처럼, 지배와 복종에 대해서도 그 구조적 기초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기초는 〈문화자본〉, 〈타고난 기술〉, 〈교육 기회〉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연이라는 요소도 중요하다.)"(135-6)


"현대 사회학에서는 계급보다는 지위집단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개념을 창안한 막스 베버는 지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순전히 경제적으로 결정된 '계급상황'과는 달리, 인간 생활의 전형적인 구성요소를 '지위상황'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특정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은 생산에 대한 관계와 재화의 획득에 따라 계층화된다. 반면에 지위집단은 재화의 '소비'원칙에 따라 계층화된다. 이 소비원칙은 특정한 생활스타일로 나타난다.〉 지위집단은 〈실제로 그러하건 전통적으로 그러하건 그들이 함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며, 〈당사자의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한〉 닫힌 공동체이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처럼 국외자를 배제한다. 이를 기초로 그는 계급에 기초한 사회와 주로 지위에 기초한 사회를 구별한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계급을 시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조는 자연스럽다."(137-8)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간의 중심적인 관계는 아래로부터의 잉여의 이전과 위로부터의 권력의 행사이다.〉 이 둘은 종종 함께 간다. 노예, 농노, 계약상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임금노동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권력의 행사 없이 잉여가 이전될 수도 있다.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자본가, 은행에 의해 착취되는 소생산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반대로 잉여의 이전이 없는 권력 행사도 있을 수 있다.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들은 매우 특수한 경우들로서, '더 적게 버는' 그런 관계와는 다르다." "'더 적게 버는' 혹은 '더 착취당하는' 관계들이 분노와 적대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잉여 이전 및 명령 발령 관계와는 달리, 항구적인 사회적 갈등을 산출하는 힘은 없다. 특수한 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계층이 갈등, 혹은 '밥그릇 싸움'을 산출할 수 없다고 마르크스가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계급투쟁과 같은 안정성은 없다는 것이다."(151-2)


# '더 적게 버는' 관계의 계층도는 자신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상위에 놓는다.


6.2. 계급의식


계급의식은 '공동체', '결합', '조직'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요소들이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긴 후에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나에 대한 인식은 당신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계급의식도 그러한지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자적 계급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 나는 (긍정적) 계급의식을 〈계급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무임승차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 노동 계급은 (집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무임승차자의 배반행위도 극복해야 하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해치면서까지 당장의 정치적 가능성을 끝까지 이용하려는 '행동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즉 성숙한 노동 계급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157-61)


집합행위의 효용은 세 가지 변수로 계산된다. 첫째는 '협동의 이익'이며,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과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둘째는 '무임승차자 이익'이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모두가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마지막은 '단독행위의 손실'로, 집합행위에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자기 혼자 또는 소수만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헛수고에 든 비용이나 처벌 같은 것─간의 차이를 말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집합행위의 가능성은 첫째 변수에서 증가하고, 둘째 및 셋째 변수에서 감소한다. … 일반적으로 집합행위는 '개인적으로 불안정'하거나(무임승차의 이익이 커서), '개인적으로 접근 불가능'하다(단독행위의 손실이 커서), 혹은 둘 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행위는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장애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5-6)


# 집합행위의 메커니즘

1. 합리성·이기심 : 노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 하면, 이들이 어떤 순간에 선택한 행위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합리성단일 : 한 행위자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관찰되며, 각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행동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 협력을 선호한다.

3. 비합리성 : 자신을 어떤 집단의 대표자 또는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는 집합행위의 미시적 기초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이 단결할 필요성이 있고, 이미 단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미래의 계급투쟁을 준비하는 일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그 투쟁이 요구하는 물질적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투쟁이 발전했을 때 생기는 성숙한 계급의식 자체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부산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바람직한 상태를 그 행위의 동기목표로 삼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한다면 사용자와 충돌하면서 계급의식이 발전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경제적 투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투쟁의 지양이 경제적 투쟁에 가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187-8)


6.3. 계급투쟁


"두 계급의 경우, 두 가지 형태의 계급투쟁이 있다. 하나는 두 착취 계급이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분배 몫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전자는 순수 갈등게임, 즉 일정합 게임으로 보인다. 분배할 총량이 투쟁에 앞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계급들은 '순'소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익다툼이 있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이 그러하듯이 그 게임은 실제로는 변동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총산출 자체가 그 투쟁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 비용을 생각해보자. 조직을 건설하고 노조간부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비용만 드는 것이 아니다. 파업이 일어나면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따라서 몫을 요구할 생산물의 크기 자체가 줄어든다. 이 경우 투쟁은 생산에 있어서나 분배에 있어서나 변동합 게임이다. 반면에 착취 계급 간의 투쟁은 분배 측면에서만 변동합 게임이다."(195)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1848년 이전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주역은 셋이다. 노동자, 금융자본가, 산업자본가. 전선의 형태는 단순하고 고전적이다. 산업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금융귀족'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한다. 그런 다음 산업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항하여 금융자본가와 동맹을 맺는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의 계급투쟁에서 영국 공장주들은 토지소유자들과 싸우는 척하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인 노동자들의 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다. 프랑스 공업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계급의 다른 분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영국에서 부르주아 계급 내의 계급협력의 절정은 반곡물법동맹의 해체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절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에서는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의 계급의식 형성을 막기 위해 협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최소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았다."(211-3)


"계급투쟁이 사회적 갈등의 전부는 아니다.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들의 투쟁도 계급투쟁 못지않게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페인의 지역갈등, 아일랜드나 중동의 종교갈등, 미국이나 남미의 인종갈등, 벨기에의 언어적 갈등, 폴란드의 민족주의 등도 계급갈등만큼이나 강력하고 파장이 큰 사회적 갈등이다." "마르크스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계급은 계급의식을 획득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사라지며,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화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러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틀렸다. 다른 계급이 무대에 등장했다. 법인재산 혹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농민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 통신수단 덕분에 다른 계급에 버금가는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근대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옳았다."(219-20)


제7장 정치와 국가


7.1. 국가의 본질과 국가에 대한 설명


"국가는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다. 베버의 정의, 즉 폭력의 합법적 사용의 독점이라는 정의는 둘째 유형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기능의 관점에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점에서 그는 정치 이론의 전통, 혹은 전통 중 하나를 따른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공공재 공급자로 간주되어왔다. 공공재에는 법과 질서는 물론, 개인들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공급될 수 없는 경제재도 포함된다. 크게 보면, 국가는 죄수의 딜레마에 놓인 개인들의 협동적 해결책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사회 속에 국가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의 과제는 이러한 딜레마의 관점에서 등장한다. 다만 행위자가 다를 뿐이다. 국가의 과제는 경제적 지배 계급이 직면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협동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과제의 일부로서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그들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이제 국가의 모든 과제는 자본을 위하여 수행되거나, 자본에 위임된다."(231)


"나는 마르크스가 권력에 대해 좁은, 전략 부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봉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두 행위자 A(자본)와 B(정부)가 있고, 각각 일정한 수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 B는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공식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 A는 특정 대안을 고려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B는 A의 봉토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B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B는 자신의 권력이 A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보유 또는 행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B가 A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B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A의 권력도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은 권력을 직접 맡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행위자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239-41)


# 이때 A가 직접적인 권력을 원치 않는 것은 제3의 행위자인 C(노동계급)의 관심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 마르크스는 이전과 달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의지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프랑스에서처럼) 양보하거나, (영국, 독일에서처럼) 자제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양위국가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848년 이전에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대리인으로서의 정부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50년대의 사건은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유럽 주요국들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체제하에서도 번성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변을 역사적 유물론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수정해야 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제1의 계급이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가 정치를 설명한다는 견해는 그대로 유지했다."(246-8)


"말년에 이르러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가능한 전략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양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3년에 쓴 〈정치적 무관심〉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정적인 '사회 청산'을 기다린다는 구실 아래 묵종주의를 조장하는 극좌 편향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와 싸우는 것은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적대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원칙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설혹 지배 계급이 정치권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의 수용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 견해에 반대한다. 첫째, 권력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둘째, 현재 노동자들의 고통을 무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체제 내의 정치적 행동으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57-8)


7.2. 혁명론


"마르크스는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 사이에 간간이 공화정이 들어설 때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일시적 승리는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에 봉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한 싸움은, 1793년과 1794년 프랑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싸움의 '방식'이 부르주아 계급과 달랐을 뿐이다. '프랑스의 모든 테러'는 '부르주아 계급의 적'을 상대하는 '평민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싸웠을 때 그들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고, 이성의 간지가 구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분석한 것처럼, 부르주아적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과거가 깨끗이 청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크르크에 따르면 이 과업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272-5)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필연적인 도래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공산주의를 수립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어떻게 공산주의의 효율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결함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나타난 혁명의 전술 및 전략에 관한 언급들은 주로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혁명의 와중에 혹은 혁명을 기대하며 쓴 것이므로, 그러한 언급들은 혁명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나는데, 각각 '타협편향'과 '권고편향'으로 부르겠다. 이 두 편향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희망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희망적 사고는 그의 사고 자체가 왜곡된 것인 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편향은 표현이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독자들을 격려할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285-6)


# 편향의 두 종류

1. 타협편향 : 어떤 조직의 대변자로서 그 조직성원들과 타협한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경우에 나타난다.

2. 권고편향 : 이론가의 '정세분석'(권고)는 혁명의 실현에 기여하는 수단이나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무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 소수 혁명론, 다수 혁명론, '경쟁체제' 전략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권력 장악, 다수의 획득,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서가 각각 다르다. 소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그런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마지막으로 다수를 획득한다. 이것은 레닌의 전략과 유사하다. 권력을 사용하여 농민을 산업노동자로 바꾸고 이들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레닌의 전략이었다. 다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노동자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혁명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가정 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은 자본주의 사회를 안으로부터 변혁하고, 이로써 다수를 확보하고,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에서 자본주의 내에 수립된 공산주의적 성채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288)


"우리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소렐 류의 급진적 행동주의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그도 수단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의 함의는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수단이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으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한 반면, 훗날의 수정주의자들은 그러한 수단이 오히려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초기의 입장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그런 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평생에 걸쳐 혁명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마르크스로서는 전혀 새로운 도구주의적 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296-7)


7.3.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의 어법으로는 독재라는 말이 꼭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초법적 형태, 기존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코뮌은 〈국가가 위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에게 군림했던 관리들을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공복으로 바꾸고, 항상 대중의 감시 아래 일하도록 하여 형식적인 책임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에 들어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징은 다수 지배, 법외성, 국가기구의 해체 및 대의원의 소환가능성이다." "다만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독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독재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독재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위헌적이어서가 아니라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였기 때문일 것이다."(298-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 혹은 과도적 상태는 국가자본주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시장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협동체들이 상호 간에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두 체제 모두 교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이 교환되고, 시장사회주의에서는 생산물과 화폐가 교환된다. 자본주의적 속성은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없어진다. 시장사회주의에서 계급은 없어지지만, 착취는 남아 있을 것 같고, 소외는 확실히 그대로이다. 협동체에 따라 자연적·인적 자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없다 하더라도 시장교환을 통해 착취가 발생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계급과 착취가 다 없어지지만, 소외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해 과도적 단계로서 국가자본주의를 선호했다."(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하여 제시한다. 첫 단계는 복지국가와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다. 소비는 기여에 따라 이루어진다. 기여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이므로, 생산자들이 생산물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는 하지만, 자본가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팔기 때문에 계급은 형성되지 않는다. 착취도 없다. 기여에 상응하지 않는 소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제외) 이것은 어떤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노동의 이질성 때문에 '노동으로 기여한 만큼 분배한다'는 원칙 자체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체의 재산 혹은 공유재산의 관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 즉 권력관계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형성의 기초라면, 이러한 현상은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303)


"마지막 단계의 공산주의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고에 공상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단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날고 싶다고 해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중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생산과 소비의 조직에 관하여는 폴라니가 제시하고 콤이 발전시킨 유용한 분석틀이 있다. 폴라니는 자급자족하는 사회가 아닌 한 재화의 유통은 필수적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시장교환, 재분배(즉 주변에서 중심으로 간 다음, 일부를 뗀 나머지를 다시 주변으로 보내는 것), 상부상조(즉 가격을 정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제도화된 재화의 교환)가 그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재분배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시장, 계획, 상부상조로 약칭할 수 있겠다. 콤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지 이 세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데 조합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306-7)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형공장도, 예술가 천국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사회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회사(개인들의 집단)들은 상호 간에 물품을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형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계획'에 가까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시장에서 먼 곳에, 다른 한편, 자율적인 노동자 협동체들은 일을 통해 최소한의 자아실현이 보장될 것이며, 대규모 생산단위와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은 시장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그 가치들을 동시에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모든 좋은 것은 함께 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는 최대한의 자아실현과 최대한의 생산성과 최대한의 협동을 동시에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후기산업사회'가 이 목표들을 어느 정도 근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격차는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309)


제8장 이데올로기


8.1. 문제 제기


"나는 이데올로기를 기능적 관점이 아니라 구조적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어떤 존재물이 다른 존재물에 대해 가지는 일정한 효과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정신적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 크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이다. 이데올로기는 ① 존재하고, ②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③ 의식적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정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상태 또는 특정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존재물'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존재물들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 용어도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기능적으로 정의한다) 중 강제적 성격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정의하면, 예컨대 대의정치제도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는 식의 진술이 가능하다."(319)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설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념소유자(혹은 여타 행위자)의 '이익'에 입각한 설명과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입각한 설명으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각각 이익 설명과 위치 설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또 하나는 인과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 것들은 부분적으로 중첩된다. 모든 위치 설명은 인과적이지만, 이익 설명은 기능적 성격과 인과적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즉 신념은 그것이 어떤 이익에 '봉사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고, 이익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속류 경제학자들의 '조화 이론'은 내생적인 경제적 환상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변론이라고 말한다." "노동자 계급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내생적인 정신적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분할통치를 통해 자본가 계급이 얻는 이익이다."(324-8)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적 창조물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연속적인 생산양식 A, B, C ··· 가 있고, 각각에 상응하는 관념 a, b, c ··· 가 있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양식 A가 주어지면 관념 a가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생산양식 B의 등장은 이전의 생산양식 A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다. 이전의 이데올로기 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으로 a-b-c의 연속성은 A-B-C에 존재하는 연속성에서 파생된 '겉보기' 연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으면, 이것은 새로운 생산양식에서 성립하게 될 가능한 이데올로기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 b는 당대의 생산양식 B는 물론, a에도 상응해야 한다. 즉 이 두 요인의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견해는 생산양식에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역사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28-31)


8.2. 메커니즘


"사변적인 명제들(신 또는 정신)을 뒤집는 것은 이전에 뒤집혀 있던 것(경험적 인간), 즉 진짜 주어를 술어로 만들어놓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전도(顚倒)는 이데올로기 형성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가 그다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전도는 추상화(abstraction)와 투사(projection)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의 전형적인 예는 헤겔 철학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헤겔 철학은 존재와 의식이 전도되어 있다. 사유를 사고행위로부터 분리시키고, 의식(Bewusstsein)을 의식하는 존재(das bewusste Sein)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는 헤겔의 추상물들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인류, 인간, 유일자 역시 추상물이었다. '정신'의 술어였던 '인간'을 주어로 만들었지만, '인간' 역시 추상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인간의 술어일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인 개개인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추상물들은 완전히 폐기된다."(341-3)


"투사의 관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특히 종교적 사유가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 존재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은 타자의 본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투사는 소원성취의 한 형태이다.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가 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참함을 사상 속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소원성취를 위해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전유한다. 이 대상은 사실상 자신을 객체화한 것이며 그렇게 전유된다.〉 정신분석 이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투사자와 투사물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이론뿐만 아니라, 정치 이론과 자본론의 골격이 바로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분석으로부터 나왔다. 세 영역의 공통된 주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만든 산물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자본론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서 인간이 자신의 두뇌의 산물에 의해 지배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인간은 자신의 손의 산물에 의해 지배된다.〉"(344-5)


"마르크스는 신념을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특수한 계급이익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의 일반이익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념이 반드시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어떤 시기에는 한 계급의 특수한 이익이 사회 전반의 이익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즉 특수이익의 실현이 지배적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그 계급은 압도적인 힘을 얻는다. 특수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한다는 신념이 그릇된 것일 경우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된 신념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진실일 수 있다. 모든 계급이 자신의 특수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이 신념이 진실일 때에는 권력을 얻게 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한 사회계급과 그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다른 계급들에게 '계속판매'를 신청하는 셈이다."(350)


"《무월 18일》에서 마르크스는 〈크롬웰과 영국 백성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하여 구약성서로부터 어법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왔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과거가 넘겨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념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한다. 확실히 이것은 이념에는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즉 인간의 사상은 현재의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의한 제약만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부구조의 '관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현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요점은 과거의 사상이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미래와 직면했을 때 분석과 행동에 쓸모가 있으면 부활한다는 것이다."(364-5)


8.3. 적용


# (마르크스가 파악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 이론

1. 중상주의자 : 중상주의자는 돈이 아무런 매개 없이 돈을 낳는다거나(이자부자본), 상품의 유통에서 이윤이 발생한다(누구나 그 물건을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여)고 주장한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성의 오류이다.

2. 중농주의자 : 중농주의자는 산업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국부의 순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잉여가치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자연의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업부문은 비과세, 농업부문은 과세를 해야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산업자본가에게 유리하다.

3. 맬서스 : 마르크스가 보기에 맬서스 학설의 특징은 유효수요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구매자 계급이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로써 맬서스는 (혁명적 단계의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토지귀족과 국가 관리의 더할 나위 없는 대변자가 되었다.

4. 속류 경제학자들 : 속류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기존 체제를 변호한다. 이들의 핵심적인 오류는 토지·노동·자본을 각각 독립적인 생산요소로 동등하게 놓고, 각각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낸다고 본 점이다. 이러한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믿고, 이를 정당화한다. 


결론


제9장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탁월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 체제와 이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러한 신념은 체제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종 그릇된 틀 속에 들어 있기 대문에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곳곳에 헤겔식 방법의 잔재가 남아 있다. '자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신비한 행위주체로 등장한다. 공장법은 마법에 의해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적 이동성도 자본의 법칙을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중농주의자의 학설도 봉건체제 내에서 자본을 대변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러한 설명들은 방법론적 전체론과 기능적 설명과 변증법적 연역이 뒤범벅된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목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론의 한 축이요, 궁극적으로 자본을 파괴하는 과정의 필연성이 또 한 축이다."(395)


"대체로 마르크스는,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의미에서 빈곤이 증대된다는 이유로,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활수준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비교기준은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체로 소외는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모순은 생산력의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두 현상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외를 진압하고 나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창조적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전대미문의 생산성 향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본주의가 창출한 기술적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토끼를 잡은 다음 버리게 될 올무 같은 것이다."(400-1)


공산주의


"확실히 마르크스의 일부 주장에는 과장이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일면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식물처럼 맥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직장에서 그들은 기계에 붙어 있는 부속품이었고, 집으로 돌아와도 너무 지친 나머지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곤 소비의 수동적 쾌락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적인 힘이 넘쳐났다. 그는 창조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긴장이 해소되었을 때 어떤 기쁨이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좋은 삶이 더 이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를 갈망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본질이다. 여기에 모리스의 손으로 하는 창조활동을 추가하면 더욱 균형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404-5)


"공산주의에서도 자기중심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①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풍요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재화는 희소할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이 차지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②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들어 있는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자아실현의 평등이다. ③ 자아실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할 경우, 고비용 활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전제를(따라서 두 번째 전제도) 부정할 경우, 그런 사회는 이상향이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세 번째 전제를 부정하려면, 각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즉 타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일부 희생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기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이타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아실현이 '완전한' 공동체와 함께 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409)


혁명


"두 개의 유령이 공산주의 혁명을 괴롭히고 있다. 하나는 때 이른 혁명의 위험이다. 혁명사상은 앞서 가는데, 그 나라의 상황은 빈곤하여 공산주의를 할 정도로 성숙되지는 않은 경우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선제(先制) 혁명의 위험이다. 이것은 혁명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위로부터 개혁이 추진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때 이른 혁명의 사례를 많이 보았다. 이런 판단 자체가 때 이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들이 없었더라면 미성숙 여부를 떠나 더 많은 혁명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옹호한 혁명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혁명의 호기가 언제인지, 어느 하나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언젠가 자본주의를 앞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중에 가서 자신들의 혁명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418)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일생의 과업은 실패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도덕적인 측면에서 혹은 지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가치설, 이윤율 하락 이론 등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이론들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와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있다. 나는 내가 중요한 진리라고 믿는 것 대부분을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다. 방법론에서도 구체적인 이론에서도, 특히 가치문제에서도 그렇다. 착취와 소외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창조하고, 발명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테니까."(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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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해하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6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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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장 설명과 변증법


1.1. 방법론적 개체론


"방법론적 개체론이란 모든 사회현상의 구조와 변화를 원칙적으로 오직 개인만 포함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학설을 말한다." "첫째, 이 학설은 개개인의 행동 수준에서 이기심을 전제하지 않으며, 합리성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개개인의 행위에 이러한 특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우에도, 오로지 방법론적 고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지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방법론적 개체론은 오직 외연적 맥락에서만 사용된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감정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 계급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이 취한 행동의 결과에 관한 복합적인 진술로 환원될 수 있다. 셋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들, 예를 들면 '강력하다'와 같은 속성들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한 개인에 관한 정확한 기술이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할 수 있다."(21-3)


"반면 방법론적 전체론에서는 설명 순서상 개인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초개인적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고(이러한 가정 자체가 방법론적 전체론이 설명을 시도하는 목적이다), 그러한 더 큰 실체들의 자기규제의 법칙, 혹은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설명을 진행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행동은 집합유형으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종종 (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없는) 기능적 설명의 형태를 띠게 된다. 어떤 행동들이 집합적으로 이익을 낳는다면, 바로 그 객관적 이익이 그 행동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주장할 경우에 그렇게 된다." "방법론적 개체론은 사회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지, 사회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 단계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그리고 일관되게 개인을 설명의 중심에 놓지는 않았다."(24-6)


1.2. 의도적 설명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소비자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요강》의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동자는] 특별한 대상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특정한 욕구충족 방식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소비영역은 질적으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오직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소비자로서의 노동자가 가진 선택의 자유는 그를 자율적인 존재,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자본론》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고정된 소비계수' 가정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고정된 소비계수'는 본질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그대로 답습해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화가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32-3)


"마르크스는 경제학에서 의도적 설명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과정의 〈의식적 조연〉일 뿐이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들을 제정할 뿐이다. 자본가의 소비조차도 〈자본의 재생산비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자가 능동적 인간, 예컨대 더 큰 소비집합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의 소비집합의 수동적 구현자일 뿐이라는 견해와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종종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자본가는 그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시장에서 생존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떤 의미로 보나 도저히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길을 따라간다. 현재 가는 길이 임계 수준 이하로 이윤의 하락을 가져올 때, 오직 그때에 이르러서야 능동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그 대안을 현상(status quo)과 비교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생산자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선택 모형으로부터의 근본적인 결별이다."(34-5)


"마르크스는 국제정치 연구에서 행위자가 공식적으로 공언한 동기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을 확대했다. 첫째, 그는 종종 그 행위가 기여하게 된 역사적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행위를 설명했다. 예를 들면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무의식중에 현대의 '숙명'인 혁명의 마지못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인도 지배도 아시아에서 근본적인 혁명을 야기할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그 의도와 목적을 가진 구체적인 행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기능적 설명이다. '역사'라는 허공에 떠 있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그의 저작에는 음모론적 설명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겉으로 드러난 의도 외에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방식은 경우에 따라 과장된 견해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파머스턴 경은 영국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러시아의 가신〉이었다는 식이다."(41)


1.3. 인과분석의 두 종류


# 인과분석의 두 종류

1. 준의도적(sub-intentional) 인과설명 : 선호를 비롯하여 신념, 정서 등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인과설명

2. 초의도적(supra-intentional) 인과설명 : 다수의 개인적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집합적 사회현상에 대한 인과설명


"신념 형성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는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다. 즉 경제 행위의 주체들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견해를 전체적으로도 타당한 것처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일 조건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인과관계가 무한정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누구든' 최저 생계수준의 노동자로 간주될 수 있지만, '모든' 노동자가 최저 생계수준에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인식적 실패를 가져오는 국지·전역 오류이다. 이것은 행동의 실패를 초래하는 국지·전역 혼동과 관계는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가장 강력한 부분일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분권화된 경제에서는 자동적으로 합성의 오류─어떤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의 성질과 그 집합 전체의 성질이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오류─가 발생하며, 그 결과 이론과 실천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44)


"근대 사회과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일군의 개념들이 있다.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헤겔의 〈이성의 간지(奸智)〉, 머턴의 〈잠재기능〉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의 공통적인 생각은, 개인들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위해 행동하지만,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결과들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군의 행동과 그 행동들의 집합적 결과 사이에 성립할 수 있는 관계는 다음 중 하나이다. ① 행위자들이 알고 있는 결과가 산출된다. 각자는 다른 사람의 행위 및 관련된 목표와 수단 간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가정 아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② 행위자는 의도한 결과를 산출하지만, 그 일은 의도한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다." "③ 행위자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그릇된 가정(이 상호 간에 존재하는 경우)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을 오판하여 생길 수도 있다."(49-50)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발생적인 위기를 체계적으로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위기에 대한 기업가들의 대응행동이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집단적으로는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조안 로빈슨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이다. 그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각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야 고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자본가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고임금이 지급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가 생산한 상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밑바탕에는 케인즈가 연구한 유효수요의 위기가 깔려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류의 위기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경제체제에서 노동자의 두 가지 역할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각 자본가에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외한 전체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라는 것〉이다."(54-5)


1.4. 마르크스의 기능적 설명


"의도적 설명은 행위의 '의도된'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기능적 설명은 '사실상의'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특히 행위를 기능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는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혹은 어떤 것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논증이 포함된다.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이 설명 형식에 들어 있는 명백한 역설 하나를 제거해야 한다. 그 역설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일어난 일로써 어떻게 그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설명항이 개별적인 사건이어서는 안 된다. 오직 지속적인 행위유형이어야 한다." "이 설명들은, '단순히' 그 사건이 어떤 행위주체(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행위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르크스는 이런 종류의 설명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57-8)


"마르크스는 역사가 공산주의의 도래라는 목표를 향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행위의 유형들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들까지도 그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가져오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했고', 이리하여 노동자는 공산주의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의 역사철학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도래에 유리한 결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사회제도와 행위양식들은 계급지배에 미치는 안정화 효과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마르크는 두 개의 음역(音域)에서 연주한다. 즉 때로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촉진하기 때문에, 또 때로는 자본주의의 존속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결과론'적 요소도 가미되는데, 여러 형태의 기능주의적 마르크스주의들이 여기에 감염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유형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현저하게 나타난다."(60)


1.5. 변증법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헤겔적 추론은 세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셋 중 어느 하나도 변증법적 방법(the dialectical method)이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가질 수는 없지만, 각각 '일종의' 변증법적 방법(a dialectical method)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가닥은 준연역적 절차로서 《요강》의 주요 부분과 《자본론Ⅰ》의 앞부분에서 이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헤겔의 《논리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둘째 가닥은 엥겔스가 정식화한 변증법으로서 부정의 부정 '법칙'과 양질 전화의 '법칙'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가닥은 사회적 모순들에 관한 이론으로서 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끌어온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지적인 가치가 거의 없고, 두 번째 것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지적 가치가 있고, 세 번째 것은 사회변동 이론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좀더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에서는 변증법적 방법이 일상적인 '분석적' 언어로 진술될 수 있다."(71-2)


# 마르크스 변증법의 세 갈래

1. 변증법적 연역 : 헤겔의 존재론적 논의의 잔해들에서 경제적 범주를 이끌어낸 것인데, 경제적 범주들(생산-상품-교환가치-화폐-자본-노동)의 역사적 등장 순서를 논리적 연쇄로 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2. 변증법의 법칙

  2-1. 부정의 부정 법칙 : 연속되는 과정 p-q-r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셋 중 어느 두 가지도 양립할 수 없다. (2) p에서 직접 r로 갈 수 없다. (3) q에서 p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예)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2-2. 양질 전화의 법칙 :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에 불연속적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물이 얼음이 되는 경우)와 비선형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두 명의 마멜루크 인[중세 이집트의 노예 기병]은 세 명의 프랑스 인을 물리치지만, 1천 명의 프랑스 병사는 1,500 명의 마멜루크 인을 물리친다)가 있다.

3. 모순론 : 여러 사람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은 그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각각 진실일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모두의 믿음이 다 진실일 수는 없다. 예) 개별 자본가가 이윤을 높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집합적으로는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오는 경향


제1부 철학과 경제학


제2장 철학적 인류학


2.1. 인간과 자연


"외부 세계는 인간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인간의 존재에 앞서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렇지만 《신성가족》에 나와 있는 유물론의 언급에서도, 혹은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그가 실재론, 자연주의,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들에 대해 정력적인 반론을 제기한 논의에서도 일관성 있는 이론은 찾을 수가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물질'에 설명적 우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이 어느 의미로 보더라도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한다고 보는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나 언어도 기술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생산력이며, 사회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코헨의 말처럼, '물질어'의 대응어는 '사회적'이지 '정신적'이 아니다. 생산력을 '전체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회적 생산관계와 대립하는 것이지 정신의 산물 및 활동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98-9)


2.2. 인간의 본성


"인간의 '욕구'(needs)는 마르크스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욕구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이 대상은 일반적인 대상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특정한 책이 아니라 (일반적 대상으로서의) 책을 욕구할 수 있다. 특정한 책에 대한 심리적 태도 같은 것은 욕망(a desire)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각각의 욕망이 〈욕구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모든 욕구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충족된다. 그러나 그 반대는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 욕구에서 비롯되지 않은 욕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물이 없는, 특별한 대상을 향한 욕망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특정한 옷에 대한 욕망이 옷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욕구, 예를 들면 위신에 대한 욕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시계가 있어도 동일한 위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계가 바로 대체물이 될 수 있다."(119-20)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마르크스 저작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정신적 소외의 측면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면, 노동의 소외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외적인' 것이라는 사실, 즉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내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 그러므로 노동자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자기를 느끼고, 일을 할 때는 자기가 없다고 느낀다. 일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일을 할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자기가 없다고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인가? 부정적인 느낌의 존재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느낌의 부재인가?" "두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 부정과 내적 부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맥에서 이러한 혼동은 치명적이다. 소외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취해야 할 집단적 행동 간의 관계는 어느 문장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129-30)


"소외 문제는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소외가 증가하면 소외된 사람들이 점점 불행해지고 불만을 느끼고 반항하기 쉬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소외가 증가한다 해도 불만은 증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 욕구가 일정할 경우, 욕구충족의 객관적 가능성이 커진다고 해도 빈곤이 증대되지는 않는다. 욕구충족의 가능성이 증대해도 욕구가 감소한다면, 소외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외는 현실적 욕구의 미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혹은 충족 가능한 욕구의 비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소외는 집합행위를 야기하지만, 후자의 경우 오히려 집합행위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노동자들의) 욕구 역시 팽창하는데 욕구충족의 수단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좌절을 느끼고 불행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정신적 의미에서의 소외이다."(132-3)


"나는 물화(reification)라는 말을 욕구와 능력이 자신의 인격 전체에 통합되지 못하고, 고정되고, 고립되고, 독립되어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로 사용하겠다." "욕구(혹은 그에 상응하는 욕망)가 물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 고립적 성격을 지닐 경우, 낯선 힘으로 나와 대립할 경우, 따라서 하나의 정념이 편향적으로 충족되는 형태로 만족이 올 경우〉를 말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진정한) 욕구는 하나같이 소비의 욕구이며 수동적 향락의 욕구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일은 질식되고 만다. 이러한 진단은 일종의 고발이다. 이 고발의 전제는 좋은 사회에서는 일 그 자체가 하나의 욕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좋은 삶은 (근무시간이든, 근무 이외의 시간이든) 능동적인 창조의 삶이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그리고 그 실현 가능성을 믿었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편향적인 '소비자 경제'라고 비판한다."(134-6)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옹호한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야말로 중요한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훌륭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정의의 문제는 마르크스에게 부차적인 문제다. 물론 그러한 고려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체제 전복에 나서도록 하는, 그렇게 해야 할 아주 좋은 이유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주로 인간적 발전과 자아실현을 좌절시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전인적(全人的) 창조자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부산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적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생산성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분배 정의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혹은 해소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42-3)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은 창조와 생산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창조적 과정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즐겨 쓸 것들을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대립은 없으며, 양자가 완전한 보완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들어 있다. 창조를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가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비에 기대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소비에 부여된 더 낮은 가치가 함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심하게 말하자면, 전적으로 활동적·창조적 개인들로만 구성된 사회에서는 아무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즐기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타주의와 타인을 위한 행동을 강조하는 모든 사회운동에 이러한 문제가 들어 있다. 이타적 행위는 적어도 한순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149-50)


"마르크스는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 개개인의 무조건적 자율성을 굳게 믿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이 가진 주요한 약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그는 보편개념으로서의 인간과 인간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인간이 가진 재능의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 체제에서는 그 부산물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좌절이 나타난다. ②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의 객관적 자아실현과 주관적 행복감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③ 그는 또한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하나의 활동에 대한 편향적인 몰두─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특징인─가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④ 마지막으로 그는 과도한 충동의 문제를 간과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만든 장치들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완고한 성격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공산주의에서 개인은 이드(id)도 없고 슈퍼에고(superego)도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155-6)


2.3. 사회적 관계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물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대상들의 (자연적) 속성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자본론Ⅰ》에 나오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상품형태는 인간의 노동 속에 들어 있는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에 들어 있는 대상적 성격으로 보이게 만들고, 총 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관계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물신숭배는 인간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에서는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상품물신은 사물들에 각인된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생산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사물들의 물질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자연적 속성으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언급도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참여하는 자들은 마법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들 자신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보인다〉는 언급도 있다."(161-2)


"자본물신은, 코헨에 따르면, 〈생산에서 발휘하는 자본의 힘이 노동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본 그 자체에 들어 있는 능력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대해서도, 잉여가치 혹은 이윤의 생산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자본에 들어 있는 관계들의 외면적 성격과 물신적 성격은 대부자본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화폐가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증식되고 과실을 낳는다면, 그것이 신비하게도 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사실은 그것이 생산과정에 투자되어 생산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생산적이지만, 금융자본가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금융자본가는 〈모든 자본가가 자신의 돈을 빌려주기만 하고, 아무도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화폐자본이 이자를 낳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처럼 화폐에 대한 환상은 상품에 대한 환상보다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166-7)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존재를 얻고서 생산자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세 가지 있는데, 종교, 국가,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영역에 한정하여) 노동자가 소외되는 대상을 두 종류(소비재와 생산수단)로 나누어보면 뜻이 좀더 명확해진다. 마르크스도 초기의 원고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한 적이 있다. 〈노동자는 생활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기고, 일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긴다.〉 이 문장에서 소비수단이 먼저 강조되고, 그 다음 생산수단이 언급된다. 15년쯤 후에 쓴 글에서는 강조 순서가 바뀐다. 〈노동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대상적 요소들은 그에게 낯선 것으로 나타난다. 생계수단도 생산수단도 모두 자본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기 경제학 저작들에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훨씬 더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168, 172-3)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소비재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은 정신적 소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비재의 생산은 동시에 욕구의 창출을 가져오지만, 이 욕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서 종종 좌절된다. 이것은 확실히 투명한 연관관계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 왜 노동자를 좌절하게 하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에게 소비재가 필요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생산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과거 노동의 산물인)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는 외견상 명백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곧 소비수단으로부터의 소외를 낳는 구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는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생산물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고, 노동과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도 가질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된다."(173)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지배는 착취 현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다. 사유재산만 보호하면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의 소유가 합법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즉 노동자들이 현재 사용된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현 세대 자본가들의 재산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좀더 그럴듯하게 말하면,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현재 자본가의 소유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이전 세대의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생산했고, 그 생산수단은 이전 세대 자본가들의 합법적인 재산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외와 착취는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176)


2.4. 역사철학


"라이프니츠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역사에는 목적도 있고, 창조자도 있다. 물론 이 둘은 함께 간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불행하게도 역사에 목적은 있지만, 이 목적에 따라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적인 행위 주체가 없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속적 신정론인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그의 《역사철학 강의》와 《정신현상학》(정도는 약하지만)은 실체 없는 의도, 행위자가 결여된 행위, 주어 없는 동사에 의존한다. 그의 '이성의 간지'는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이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관계가 있지만, 같지는 않다. 헤겔은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의미나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유학 철학자들에 대한 논평에서, 그들이 질서 있는 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창조자로서의 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현자(sage)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명(sagacity)을 논하는 공허한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헤겔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182)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진술은 종의 이익이 항상 실현된다는 전제이다. 마르크스의 '인류'는 헤겔의 '정신' 또는 '이성'이다. 둘 다 초개인적인 실체로서 이들의 완전한 발전이 역사의 목적이다. 이들은 의도를 가진 행위주체가 아니면서도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모든 사건을 두 번씩, 한 번은 목적론적으로, 또 한 번은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목적론적 전통의 특징이다. 〈작용인의 왕국과 목적인의 왕국 중 어느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신이 창조했을 때 그의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인과의 사슬을 만들어놓았고,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지 인과사슬에서의 선행사건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그 사슬 자체를 최적으로 만드는 사건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역사관이 어떻게 세속적인 형태로 살아남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헤겔의 역사관이 그러했고, 마르크스에게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192)


"일반적으로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러한 신념의 불확실성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신념이 총체적인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 바탕에 역사철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연관성'을 정당화하는 기능적 설명까지 있으면, 그러한 신념은 더욱 강화된다. 스탈린으로부터 홍위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계관은,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훨씬 넘어 개인을 경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므로 '전진을 위한 후퇴'에 바탕을 둔 사변적인 역사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실천적인 것이지 결코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지적 결함은 그 이론이 가져올 정치적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서 개인은 핵심적인 위치에 있고, 이 개인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오기 전까지의 개인을 희생양으로 여기는 역사철학은 버려야 한다."(194-5)


제3장 경제학


3.1. 방법론


"마르크스는 경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제 모형으로 만들어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경제 모형을 만들려면 신중하게 단순화하면서 또한 수량적인 가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정확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물론 부분균형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 혹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한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을 모두 모으면 일반균형 이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를 하려면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고, 그러한 국지적인 연구가 지니는 한계를 아는 한, 모형은 지식의 진보에서 매우 가치 있는 도구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풍의 학습 때문에 가끔 빗나가기도 했지만,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기본 주장들을 대수적으로 또는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이 분야에서의 수학의 힘을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서툴러 보이지만 말이다."(199-200)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활에 대해 논의하면서 '본질'(Wesen)과 '현상'(Erscheinu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두 용어는 헤겔에게서 가져온 것인데, 마르크스는 헤겔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현상의 반대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감추어진 것, 명상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반대말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와 가격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대체로 이와 같다. 노동가치는 가격과는 다른, 가격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서이지만, 경제주체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격뿐이다." "둘째, 현상의 '국지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타나는 것은 항상 특정한 지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관점에서 관찰하는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현상의 반대말은 특정한 지점에 얽매여 있지 않은, 현상들의 '전체적인 연결망'이 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본질은 '상호 관련된 현상들의 전체성'이지, 그 현상들의 '이면'에 있는, 그 현상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질서가 아니다."(205-6)


3.2. 노동가치설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의 증가 혹은 감소는 생산가격을 상승 혹은 하락시킴으로써 가격의 움직임은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 변화가 가격 변화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필요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리카도를 따라 단기가격과 장기가격(또는 균형가격)을 구분했다. 수요가 증가하여 소비자들이 현행 가격에서 생산된 것보다 더 많은 재화를 원하면 가격은 올라가고 그것을 생산하는 부문의 이윤율도 올라간다. 이윤율이 높아지면 다른 상품을 생산하던 자본가들도 그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고, 이 부문의 이윤율이 다른 부문의 이윤율과 같아질 때까지 자본이 유입되고, 시장이 다시 균형에 이르면서 재화의 가격은 수요가 이동하기 이전과 같아진다. 이것이 바로 리카도의 해석에 따른 노동가치설이다." "이때 수요의 이동이라는 견해는 노동자가 화폐임금을 받는다는 가정을 할 때에만 유효하다."(222-3)


"그런데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화폐소득보다는 노동자의 소비집합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이러한 전제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서로 다른 소비집합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 그 개념은 쓸모가 없어진다. 서로 다른 소비집합이란 가격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가치는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한다. 가격은 일반적으로 가치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절차로 인해 그는 리카도식 노동가치설의 확고한 기초를 확보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견해와 달리) 가격과 이윤율을 유도하는 데 가치는 필요하지 않다. 가치는 부속물(appendix)일 뿐이고, 막창자꼬리처럼 거의 쓸모가 없다. 노동가치의 개념이 비록 잘 정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도 않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25)


3.3. 축적과 기술변혁


"자본가는 두 가지 기술이 주어지면 더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그 기술들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선택기준이 사회적으로 하위최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생산물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기준이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이유는 '필요의 영역'을 줄이고, '자유의 영역'을 넓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개별 자본가의 동기는 더 높은 이윤이다. 마르크스는 《요강》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주어진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최대한의 수량에서 최대한의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자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동, 즉 에너지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이 해방되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며, 노동 해방의 조건이다.〉"(239)


# 하위최적 : 대량 생산 시대의 분업화로, 하위 조직인 개별 시스템의 성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향. 시스템 전체 성과를 극대화하는 전체 최적화와 반대되는 개념


"1861~1863년의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이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하의 기술진보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자유시간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이윤극대화에 따른 우연한 부산물이며, 이로 인해 가능한 것보다는 작은 규모로 기술변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부르주아 생산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이 생산력의 발전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 둘은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히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한 측면은 계속되는 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위기는 노동 계급의 한 부문에서 전통적인 직업이 쓸모없어진 것을 알아차릴 때 터진다. 그 바깥 한계는 노동자들의 잉여시간이다. 사회가 얻는 절대적인 잉여시간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 생산 일반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시간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240)


3.4. 자본주의적 위기 이론


# 자본주의적 위기의 성질

1. 체제 내 위기 : 위기는 외부 충격이나 독점, 기타 피할 수 있는 과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적인 것이어야 한다.

2. 미시적인 기초 : 개별 행위주체들의 국지적 합리성이 총체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3. 불가역성 :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치적 규제로 해결할 수 없다.

4. 정치적 행동의 동기 제공 : 자본주의 체제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촉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주요한 결점, 곧 착취와 소외 및 이윤율의 하락에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여기서 이윤율의 하락과 연결되는 역사적 유물론은 모든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종말을 고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진보를 가로막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자본주의의 한계이지 자본주의의 무능이 아니다. 이 한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항구적인 속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한계를 갖지 않는 다른 생산양식의 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멸의 조건을 창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힘을 위축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다른 체제의 수립을 촉진함으로써 이루어진다."(252-3)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잉여노동의 원천, 따라서 이윤의 원천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산 노동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계속 살리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집합적 이익이다. 그러나 또한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즉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다. 좀더 생산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개별 자본가는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도입한 혁신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이 혁신이 일반화되어) 평균이윤율이 하락한다 하더라도, 이 하락분은 너무 미미하여 이 때문에 기계도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모든 산업분야에서 모든 사업가들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경우, 이윤율이 꾸준히 침식되는 심각한 결과가 나타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방정식이 보여주듯이, 착취율이 일정하다고 가정할 때, 기계가 도입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이윤율은 하락한다. 이 주장의 근본적인 약점은 산 노동이 이윤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가정이다."(254)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한 세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마르크스는 혁신이 사전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절약형이라는 가정을 당연시하면서, 이에 대해 별도의 논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폭약이나 무선 같이 자본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혁신도 있다." "둘째, 사전적 의미에서 노동절약형 진보가 많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들이 모두 일정할 때 주어진 혁신이 노동절약형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혁신이 집합적으로 노동절약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합성의 오류에 해당한다." "셋째, 기술변혁이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영향을 줄 경우, 잉여가치율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실질임금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발명이 노동절약적일수록 노동에 대한 총수요가 줄어들어 실질임금의 상승폭은 작아질 것이고, 잉여가치율의 상승폭은 커질 것이 분명하다. 즉 노동절약형 진보와 고정 잉여가치율 가정은 함께 할 수 없다."(255-6)


제4장 착취, 자유, 정의


4.1. 착취의 본질과 원인


"모든 계급 사회의 공통점은 잉여노동의 추출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잉여노동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넘어선 노동을 말한다." "잉여노동은 소수의 비생산자 계급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능하게'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차일드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계급의 등장과 착취를 잉여를 가능하게 한 기술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자는 동일한 소비수준에서 일을 덜 할 수도 있고, 일을 더 해서 잉여를 창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이 사회적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잉여가 있는 한 계급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급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잉여의 가능성이다. 경제가 잉여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268-9)


"로머의 노동시장 착취 모형에서 우리는 행위자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① 가진 재산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인가? ② 자영인가, 노동력의 판매자인가, 노동력의 구매자인가? ③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노동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경제행위자의 '부'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계급'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착취' 지위에 관한 것이다. 로머는 이들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최적화를 위해 노동력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자이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당한다. 자영이 최적인 사람들에는 착취자도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도 있고, '회색지대'에 속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묶음 중, 그 묶음에 구현되어 있는 노동시간이 구매자의 노동시간보다 많은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격과 가치의 불비례 때문이다."(275)


# 로머 모형(자본주의적 축적모형)의 특징

1. 착취와 계급은 양상(樣相)으로 정의된다. 자본가는 단순히 노동을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최적을 위해 '반드시' 노동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다.

2. 착취는 개인들의 속성이 아니라 전체 경제체제의 속성이다. 관계 또한 아니다. 착취하거나 착취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속성을 가진다.

3. 착취가 완전히 정태적인 개념이다. 개인재산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수익의 미래가치를 무시한다. 축적과 기술변혁에 대해서도 설명력이 떨어진다.

4. 완전한 경쟁 구도에 한정된다. 착취가 완전 경쟁의 '부재'에서만 일어난다면서 마르크스를 공략한 신고전파 착취 이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착취율의 결정 요소

1. 개별 자본가와 그에게 고용된 노동자들 간의 적대(특히, 노동강도)

2. 경쟁적 노동시장에서의 공급과 수요(산업예비군의 존재)

3. 조직된 노동자와 조직된 자본가 간의 단체협상

4. 기술진보의 간접적 일반균형 효과(노동자의 소비집합을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하락하면 착취율은 증가한다)

5. 국가의 개입

6. 정치적 동맹의 형성(자본가는 지주들과의 싸움에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 부분 양보하기도 한다)


4.2. 자유, 물리적 강제, 경제적 강제


"두 개념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소극적 자유를 〈형식적 자유〉라 하였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고용주를 떠날 형식적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율로서의 자유의 개념인데,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시장에 있어서 형식적 자유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했다. 완전한 자아실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사람들과의 거래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또한 형식적 자유는 노동자가 진정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형식적 자유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노동자를 자율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것은 소비자로서의 자유, 생산자로서의 자유, 그리고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에 모두 해당된다."(321-4)


"공장문을 나서면 어느 누구도 노동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는 원하는 물품을 자신의 임금 범위 내에서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다. 일자리가 있으면 고용주를 바꿀 수도 있다. 심지어 자영업자가 될 수도 있고, 고용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위험한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한다. 특별한 자본가로부터는 물론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는 그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는 없었던 자유라는 생각은 마르크스 시대의 상식이었다. 그 스스로 랭게와 에드몽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토크빌도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 사실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다. ① 노동자는 개별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② 개별 자본가로부터의 독립성이 자본에의 실질적 종속을 가린다는 것이 그것이다."(326)


"고용주를 바꿀 자유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자유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낳는다. 그것이 환상인 이유는 구성의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한 노동자가 '특정' 고용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모든' 고용주로부터, 즉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후자의 경우 '특정' 노동자가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노동자가 그런 독립성을 얻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여기서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원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본가 계급으로 진입할 자유는 그가 '남달리 영리하거나 기민한 사람'일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형식적 자유를 가리킬 뿐 실제로는 소수에 불과하다."(330-1)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되고 있는가? 나는 강압(force)과 강제(coercion)를 구별하고자 한다. 강제는 강제하는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강압은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제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비시장 착취의 '직접적 강제'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져오는 '상황의 압력'을 구별한 이상, 그가 후자는 강제로 보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그는 '경제적 관계의 둔탁한 강요'와 '경제적 조건 외부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강압'을 구별했는데, 이러한 구별은 경제적 관계 내부의 직접적 강압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익명으로 이루어지고, 비인격적·경쟁적 시장을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이었다. 독점의 존재를 가정하기보다는 자본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 방법론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31-4)


# 임금노동과 관련한 착취, 강제, 강압의 개념

1. 노동자가 자기 몫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착취당하고' 있다.

2.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된(coerced)' 것이다.

3.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열악해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압된(forced)' 것이다.


4.3. 착취는 부당한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이상(理想) 담화를 배격한다. 〈공산주의는 확립되어야 할 상태, 현실이 그를 향해 나아가야 할 이상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재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것은 단순한 '당위'(Sollen)에 대한 헤겔 식의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공상가들이 비판을 받은 이유는 이상의 설교가 곧 실현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이상 그 자체를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은 그대로 가져왔고, 〈오직 수단이 다를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인식, 즉 노동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믿음'과 같은 주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불의가 자본주의에 관한 '사실'이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의 지각이 최소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동반되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폐기하고자 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340-3)


"마르크스는 〈어떤 제도든 일반적 규칙에 따라 적용되면 불공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 규칙은 개인차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두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다른 한편 개인 간의 차이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는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일정한 재화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진술하는 모든 원칙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간에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은 명백한 내적 일관성의 결여 때문에 실패했다. 그는 기여 원칙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더 높은 정의의 원칙을 암묵적으로 상정한다. 그것은 바로 필요에 따른 분배이다. 이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는 추상적인 정의 이론을 훌륭하게 논박했다고 믿었겠지만, 이로써 그가 폐기하려고 했던 그런 종류의 이론을 자신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산문으로 하고 있다."(346-7)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분배의 원칙이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첫 단계의 원칙은 노동기여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다. 이때 투자분과 공공재 및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 등은 분배대상에서 제외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기여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의 차이를 잴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우월하여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오랫동안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내포된 문제점을 여기에서 따지지는 않겠다. 그러한 환원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그와 유사한 작업이 자본주의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즉 기여 원칙은 (분배의 두 번째 원칙인) 필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차선책으로 적용하는 기준인 것이다."(358-9)


"필요 원칙은 평등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기여 원칙에 따르면, 자녀가 많은 노동자와 적은 노동자가 같은 임금을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했으므로, 일 인당 소득 혹은 복지의 측면에서 가족 간 불평등이 발생하는 결함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결함은 불평등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체제가 창출되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그런 체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상적인 해석이다. 혹은 평등한 분배 원칙에 의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의 평등인가? 마르크스의 좋은 삶 이론에 비추어보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필요 원칙이 자아실현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가치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Man)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men)의 자아실현이라면, 개개인 모두에게 최고 수준의, 동시에 다른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361-2)


"드워킨은 '값비싼 욕구'의 문제 때문에 그 이상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아실현의 방법 중 어떤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보다 비싸다. 시를 짓는 일은 물질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대작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유로이 갖되, 비용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을 둔다면, 값비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 일부만 충족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자아실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자원의 희소성은 실제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자아실현의 방법을 모르면 좌절할 수도 있다. 자원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재능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해주는 순기능이 있다고 쉽게 말할 일만은 아니다. 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과 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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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카를 마르크스 지음, 임지현.이종훈 옮김 / 소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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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사람들은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가 (1871년의) 파리 코뮌과 함께 궁극적으로 매장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반대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코뮌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기점으로 가장 힘찬 전진을 시작했다.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주민 전체를 군대로 편성─수백만을 헤아리는─하는 것과 전대미문의 효력을 지닌 화기·탄약·폭탄의 사용은 군사 전반에 총체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한편으로 이로 인해 보나파르트식의 전쟁 시대는 급속히 종결되고 평화로운 산업 발전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전대미문의 잔혹함과 예측 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세계대전 이외의 어떤 전쟁도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듯한 군비 경쟁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알자스-로렌의 병합이었는데, 이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고 상대방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양국의 노동자에게 그것은 단결의 새로운 끈이 되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기념일은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 공동 기념일이 되었다."(30)


# 1895년 엥겔스의 서문에서


"루이 필립 시대에 프랑스를 지배했던 사람들은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그들의 한 분파인 은행가, 대증권업자, 철도왕, 탄광·철광·삼림의 소유자, 이들과 결탁한 일부 지주, 즉 금융 귀족 등이었다. 본래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제도권 야당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들에 맞선 투쟁(1848년 2월 혁명)으로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한 공화정이 선포되자, 프랑스 사회의 온갖 계급이 갑작스럽게 정치권력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극장의 칸막이 관람석의 정면 일등석이나 맨 위층 관람석을 떠나 혁명의 무대에서 자신이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공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사라짐과 동시에 국가 권력이 독자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에 맞서 있던 것 같던 가상도 사라졌으며, 마찬가지로 이러한 가상이 불러일으켰던 일련의 부수적 투쟁 모두가 사라졌다." "1830년 7월에 노동자들이 싸워서 부르주아 군주정을 얻었던 것처럼, 1848년 2월에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공화정을 쟁취했다."(45, 54-6)


"대체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은 산업 부르주아지의 발전에 의해 규정된다. 오직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서만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을 전국적 혁명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또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서만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적 생산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러한 생산 수단은 동시에 자신들의 혁명적 해방을 위한 수단이 된다. 오직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배만이 봉건 사회의 물질적 근원을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닦아준다." "그러므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순간에 파리에서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수단 이상으로 전진한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 분산된 산업 중심지에 몰려 있으므로 압도적 다수의 농민과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에 섞여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산업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산업 임금노동자의 투쟁은 프랑스에서는 부분적인 사실이다."(58-9)


"따라서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이해를 사회 자체의 혁명적 이해로 관철시키는 대신에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병행해서 관철하려 했다." "이렇게 금융 귀족을 부르주아지 일반과 혼동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생각 속에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기껏해야 계급을 입헌군주정의 결과로 인정했던 순진한 구공화파의 공상 속에서, 이제까지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 문구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사라졌다. 당시 왕당파는 모두 공화파로 변신했으며 파리의 백만장자들은 모두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계급 관계를 공상 속에서 폐지하는 것에 상응하는 상투적 문구가 박애, 즉 모든 사람 사이의 무차별적인 우애와 형제애였다. 계급적 적대감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도외시하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감상적으로 평균화하는 것, 계급투쟁을 몽상적으로 뛰어넘는 것, 다시 말해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본래 슬로건이었다."(59-61)


"부르주아지는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6월 폭동을 일으키도록 강요했다. 이 점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죄 선고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요구에서 폭력적으로 부르주아지의 붕괴를 쟁취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이러한 과제를 담당할 능력도 없었다. 《세계 신보》는 공화국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환상에 경의를 표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야 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를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공화국 내에서는 하나의 공상일 뿐이며 그런 공상은 그것을 실현시키려 하면 곧 하나의 범죄로 변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제2공화국에서 획득하고 싶었던 요구, 형식상으로는 엄청나지만 내용상으로는 사소하고 부르주아적이기조차 한 요구 대신에 대담하고 혁명적인 투쟁 구호를 내놓았다. 〈부르주아지 타도! 노동계급의 독재!〉"(77)


"이제 노동자들이 진압되자 프티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꼼짝없이 채권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2월 이후 만성적인 형태로 계속 지연되었거나 불문에 붙여졌던 그들의 파산이 6월 이후에는 명백히 선고되었다. 그들의 명목상 재산이 침해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프티부르주아지를 전쟁터에 내보낼 필요가 있었던 한에서 가능했다." "대부분의 프티부르주아지는 완전히 파산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오직 자본의 절대적 노예가 된다는 조건하에서만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파리 프티부르주아지의 대규모 파산이 직접적인 희생자를 넘어서는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부르주아 상업을 한 번 더 혼란 속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카베냐크와 국민의회는 새로운 공채라는 임시방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공채 때문에 그들은 훨씬 깊이 금융 귀족의 굴레에 매이게 되었다."(86-7)


"공화주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제헌국민의회의 '위대한 조직 사업'이었다. 6월 사건 이전에 작성된 최초의 헌법 초안에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요구를 요약한 최초의 서투른 공식인 '노동의 권리'라는 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노동의 권리는 국가로부터 부조를 받을 권리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빈민을 먹여 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동의 권리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는 터무니없는 것이며 가련하고 헛된 소망이다. 그러나 노동의 권리 배후에는 자본에 대한 지배 요구가 있고 자본에 대한 지배 요구의 배후에는 생산 수단을 전유하여 그것을 단결한 노동계급에게 종속시키고 그렇게 해서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들 상호 관계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있다. '노동의 권리' 배후에는 6월 봉기가 있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실상 법률의 보호 밖으로 몰아낸 제헌의회는 법 중의 법인 헌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식을 원천적으로 삭제했으며, '노동의 권리'에 저주를 내렸다."(90)


"그러나 이 헌법의 가장 포괄적인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에 내재해 있었다. 즉, 헌법은 프롤레타리아트·농민·프티부르주아계급의 사회적 노예 상태를 영구화하려는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급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옛 사회적 권력을 인정했던 계급인 부르주아지로부터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정치적 보증을 박탈했다. 헌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민주적 조건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 조건들은 매순간 적대 계급의 승리를 용이하게 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헌법은 프롤레타리아트·농민·프티부르주아지에게는 정치적 해방에서 사회적 해방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동시에 부르주아계급에게는 사회적 복고에서 정치적 복고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결국 헌법 시행 첫날이 제헌의회 지배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울 카베냐크가 다윗 나폴레옹에게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다."(91-3)


"1848년 12월 20일에 입헌공화국의 야누스 머리는 아직 한쪽의 얼굴, 즉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트릿하고 넓적한 모습을 지닌 행정권의 얼굴만을 드러냈다. 1849년 5월 28일에 입헌공화국은 그 두 번째 얼굴, 즉 왕정복고와 7월 왕정의 방탕한 생활이 남긴 상처로 얼룩진 입법부의 얼굴을 드러냈다. 입법국민의회와 더불어 공화제적 국가 형태인 입헌공화국의 외양이 완성되었으며, 이 국가 형태와 더불어 부르주아계급의 지배가, 즉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양대 왕당파인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파가 연합한 질서당의 공동 지배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공화국이 연립 왕당파의 수중에 들어가는 동안에 유럽의 반혁명 열강 연합은 3월 혁명의 최종 피신처를 향해 전면적인 십자군 원정을 꾀했다. 러시아는 헝가리를 침공했고, 프로이센은 제국 헌법을 옹호하는 군대를 향해 진군했으며, 우디노는 로마를 포격했다. 유럽의 위기는 분명히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121)


"1848년 6월 23일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동을 일으킨 날이었다면, 1849년 6월 13일은 민주주의적 프티부르주아지가 폭동을 일으킨 날이었다. 이들 두 폭동은 각기 그것을 이끈 계급을 전형적이고도 순수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1849년 5월 28일에 입법의회 소집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한 입헌공화정의 생애 제1기는 6월 13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서막은 시종 질서당과 산악당,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의 소란스러운 싸움으로 일관되었다. 프티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공화정의 체제 강화에 헛되이 대항했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와 집행위원회에서 부단히 음모를 꾸몄으며, 또 6월 사건 때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맹렬히 공격했다. 6월 13일은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연합 왕당파의 의회 독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계엄 선포를 정부의 재량에 맡기고 언론의 입을 더욱 굳게 다물게 하고 결사권을 폐지시킨 탄압법이 (질서당이 장악한) 6·7·8월 국민의회의 입법 활동 전부를 차지했다."(127-9)


"입헌공화국의 생애 제3기는 1849년 11월 1일에 시작되어 1850년 3월 10일에 끝났다. 기조가 그토록 감탄했던 헌법 기관들의 관례적인 경기, 즉 행정권과 입법권의 세력 다툼이 시작된다. 11월 1일에 루이 보나파르트는 꽤 신랄한 표현으로 바로 내각의 해산과 새 내각의 조각을 통고하는 교서를 통해 입법의회에 응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트는 연합한 오를레앙파와 정통 왕조파의 복고욕에 대항해 자신의 실제 권력의 근거인 공화정을 옹호하고, 질서당은 보나파르트 측의 복고욕에 대항애 자신들의 공동 지배의 근거인 공화정을 옹호하며, 정통 왕조파는 오를레앙파에 반대하여 그리고 오를레앙파는 정통 왕조파에 반대하여 현 상태, 즉 공화정을 옹호한다. 질서당의 모든 분파는 각기 자신의 왕과 자신의 복고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서로 경쟁자의 찬탈욕이나 반란 야욕에 대비하여 부르주아지의 공동 지배, 즉 각자의 특정 주장이 중화되고 유보된 채 유지되는 형태인 공화정을 주장한다."(137-8)


"헌법의 기반은 보통선거권이다. 보통선거권의 폐지, 그것은 질서당과 부르주아 독재의 마지막 말이다. 1848년 5월 4일, 1848년 12월 20일, 1849년 5월 13일, 1849년 7월 8일에 보통선거권을 질서당과 부르주아 독재가 옳다고 인정했다. 1850년 3월 10일에는 보통선거권이 스스로를 질책했다. 부르주아지의 통치를 보통선거권의 성과요 결과로 보는 것, 국민의 주권 의지가 명백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 그것이 부르주아 헌법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 선거권이, 주권 의지의 내용이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통치와 일치하지 않게 될 때 헌법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 무한한 힘을 부여한 보통선거권을 거부하면서 공공연히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의 독재는 지금까지 인민의 뜻에 따라 존재해왔으니 이제 인민의 뜻에 거슬러서 공고히 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공화국은 단 하나의 공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 공화국이 혁명의 온실이었다는 점이다."(161-3)


2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1년 12월 2일의 정변)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 세대가 자기 자신과 만물을 개조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도, 바로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노심초사하면서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어 이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려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하여 루터는 사도 바울로 가장했으며 1789년부터 1814년까지의 혁명은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의상을 번갈아가며 몸에 걸쳤고, 1848년의 혁명은 때로는 1789년의 혁명 전통을, 때로는 1793년부터 1795년까지의 혁명 전통을 서투르게 모방했다."(190-1)


"이와 같이 여러 혁명에서 망령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과거의 투쟁을 서투르게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을 예찬하기 위해서였으며, 주어진 임무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에서 도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임무를 상상 속에서 위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지나가버린 시대의 유령으로 하여금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1848년부터 1851년까지 늙은 바이유의 옷을 입고 양피 장갑을 낀 공화주의자 마라스로부터, 천박한 나머지 거부감을 주는 자신의 모습을 나폴레옹의 철제 데스마스크 밑에 감춘 모험가(루이 보나파르트)에 이르기까지 오직 구혁명의 유령만이 떠돌아다녔다. 혁명으로 운동을 가속화할 힘을 갖게 되었다고 믿었던 한 민족 전체는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다고 여겨졌던 권력의 앞잡이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192-3)


"(부르주아 공화파의 주도로 작성된) 헌법 제45조부터 70조까지에 규정된 조항에 따르면, 국민의회는 헌법상 대통령을 제거할 수 있는 반면 대통령은 오직 위헌적인 방법으로만, 다시 말해서 헌법 그 자체를 거부함으로써만 국민의회를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서는 헌법이 그 자신의 폭력적 파멸을 도발하고 있다. 헌법은 1830년의 헌장과 마찬가지로 권력 분립을 신성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분립을 지탱될 수 없는 모순에 이르기까지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이른바 헌법에 입각한 권력 사이의 도박이라고 기조가 이름 붙인, 의회에서의 입법권과 행정권 간의 알력은 1848년 헌법에서도 줄기차게 결사적으로 계속되었다." "의회가 항상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매일매일 대중의 비판을 받기 쉽게 되었던 반면에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지만 그러한 생활 속에서 헌법 제45조는 그의 눈앞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매일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다. 〈형제여, 죽음이 가까이 왔다!〉"(210-1)


# 1852년 5월에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예정이었다. 1848년 당시의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 선거를 4년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에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헌법은 대통령이 모든 프랑스인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게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다. 프랑스의 전체 투표가 국민의회의 750명의 의원들 사이에 나뉘어 있는 한편 대통령의 경우에는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 인민의 각 대표자는 단지 이런저런 정파 또는 특정 도시, 특정 교두보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750명의 의석수를 채우기 위해 후보자의 인간됨됨이나 그의 대의명분을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못하고 어떤 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선출된 경우가 있다. 반면에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의해 선출되며, 대통령 선거 행위 그 자체는 국민이 4년마다 한 번씩 하게 되는 트럼프 놀이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민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에 놓여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과 개인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국회는 개별적인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대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정신의 화신이다. 즉, 그는 국민의 은총을 입은 대통령인 것이다."(212)


"1849년 11월 1일 보나파르트는 바로-팔루 내각을 해임하고 새 내각을 구성한다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의회를 놀라게 했다." "바로 내각은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구성된 질서당의 내각이었다. 보나파르트는 공화주의적인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로마 원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리고 민주파를 와해시키기 위해 바로 내각을 필요로 했다. 겉보기에 그는 이 내각 뒤에 자기를 숨긴 채 정부 권력을 질서당의 수중에 양보하고 루이 필립 치하에서 신문의 책임 있는 보증인들이 썼던 겸소한 가면, 즉 꼭두각시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제 그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 가면을 더 이상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게 해주는 짧은 베일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막는 철가면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질서당의 이름으로 공화주의적 국민의회를 분쇄하기 위해 바로 내각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질서당의 국민의회와 독립해 있음을 천명하기 위해 바로 내각을 해임했다."(243)


"질서당과 대통령 간의 불화는 예기치 않은 한 사건이 대통령을 다시 질서당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때 위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예기치 않은 사건이란 바로 '1850년 3월 10일이 보궐 선거'였다. 이 선거는 6월 13일 이후에 투옥되거나 추방된 의원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실시되었다. 파리는 오로지 사회민주당의 후보자들만을 선출했다. 더욱이 파리는 대부분의 표를 1848년 6월 봉기 가담자인 드플로트에게 몰아주었다." "보나파르트는 갑자기 다시 한 번 혁명의 위기에 직면한 자신을 발견했다. 1849년 1월 29일과 1849년 6월 13일의 경우처럼 1850년 3월 10일에도 그는 질서당의 등 뒤로 도망쳤다. 그는 굴복했고 무기력하게 용서를 빌었으며, 의회 다수파의 명령에 따라 어떠한 내각이든 임명하겠다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오를레앙파와 정통 왕조파의 지도자들에게 정권을 잡아 달라고 간청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질서당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이러한 기회를 이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251-2)


"이에 덧붙여서 우리는 1850년은 상업과 산업의 눈부신 발전이 이룩된 해이며, 따라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 고용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보통선거권 폐지를 중점에 둔) 1850년 5월 31일의 선거법은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권력에 참가하는 것을 봉쇄했다. 이 선거법은 모든 투쟁의 영역에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차단시켜버렸다. 또한 그 법은 노동자들을 2월 혁명 이전과 같은 천민의 위치로 되돌려놓았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건에 직면해 그들 자신을 민주파 인사들에게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순간적인 만족 때문에 자기 계급의 혁명적인 이해관계를 망각함으로써 정복자가 되는 명예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겨 버렸다." "보통선거는 3월 10일에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한 정면 반대를 선언했다. 부르주아지는 이에 보통선거권의 불법화로 대응했다. 그러므로 5월 31일의 법률은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255-6)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친위조직인) '12월 10일회'에 1만 명의 불량배를 끌어 모았는데, 이들은 민중의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의 국민작업장, 부르주아 공화파의 기동대 같은 것이 보나파르트의 12월 10일회였는데 이 조직은 보나파르트의 고유한 당파적 전투력이었다. 그가 여행하는 동안 도로를 가득 메운 이 단체의 분견대는 그의 즉석 청중이 되어 대중의 열광을 연출했고 황제 만세를 외쳤으며 공화파를 모욕하고 때려 눕혔는데, 물론 이 모든 일은 경찰의 비호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나파르트가 파리로 귀환할 때 그들은 전위대가 되어 반대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반대 시위자들을 쫓아버렸다. 12월 10일회는 그의 부속물이었으며 그의 작품이었고 그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그 외에 그가 갖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황의 힘에 의해 그의 수중에 들어왔고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황이 그를 대신해주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었다."(261-3)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온을 요구한다.〉 이것은 2월 혁명 이래 질서당이 혁명에 대해 외친 말이었으며, 보나파르트의 교서가 질서당에 대해 외친 말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주권 찬탈을 목적으로 한 행동을 했다. 그러나 질서당이 보나파르트의 행동을 신경질적으로 해석해 소동을 일으킨다면 질서당이 '불안'을 조성한 것이 되고 만다. 사토리의 군대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쥐 죽은 듯 고요할 것이다. 따라서 보나파르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조용히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요구했으며, 의회의 정당들은 혁명적 불안을 다시 야기시킬 것이라는 공포와 자기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눈에 그들 자신이 불안을 교사하는 것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 가지 두려움으로 마비되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온을 요구했기 때문에 질서당은 결과적으로 보나파르트가 그의 교서에서 '평화'를 이야기한 데 대해 감히 '전쟁'으로 맞설 수 없었다."(267-8)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된) 질서당은 개헌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결정을 통해 질서당이 지배할 수도 복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살 줄도 죽을 줄도, 공화제를 견뎌낼 줄도 타도할 줄도, 헌법을 보전할 줄도 파괴할 줄도 모르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질서당은 누구에게 이 모든 모순의 해결을 기대했는가? 그들은 그것을 세월과 사건의 흐름에 맡겼다. 질서당은 사건을 주도한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질서당은 이렇게 자신을 사건들의 힘에, 그리고 권력에 맡겼는데 국민과의 투쟁에서 질서당은 자신의 권리를 이 권력에 하나하나 양도하여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맞서게 되었다. 행정권의 수반이 질서당에 대한 반대 투쟁 계획을 방해받지 않고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공격 수단을 강화하고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며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질서당은 정확히 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대로부터 퇴장하여 8월 10일부터 11월 4일까지 3개월 간 휴회할 것을 결정했다."(291)


"장기 의회를 해산시킬 때 크롬웰은 홀로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부과한 시간의 한계를 일 분도 넘기지 못하도록 회중시계를 꺼내 보면서 유쾌하고 유머가 넘치는 욕지거리로 의원들을 하나하나 쫓아냈다. 나폴레옹은 크롬웰보다 작았지만 적어도 브뤼메르 18일에는 입법의회에 나가 비록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의회의 사형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크롬웰이나 나폴레옹이 소유했던 권력과는 아주 다른 행정권을 소유하고 있던 제2의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모델을 세계사 연표가 아니라 12월 10일회의 연대기 또는 형사재판소의 연대기에서 구했다. 그는 프랑스 은행에서 2,500만 프랑을 강탈하여 마냥 장군을 100만 프랑에 사고 병사들을 일인당 15프랑과 술로 매수했으며, 도둑과 같이 밤중에 공범자들과 만나 의회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국민의회와 국무회의 해산, 보통선거권 부활, 센 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을 벽이란 벽에는 모두 부착할 것을 명령했다."(305-6)


"〈이것은 바로 완전하고 최종적인 사회주의의 승리이다.〉 기조는 12월 2일을 이와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의회 공화정의 타도가 그 속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싹을 담고 있다 해도 그것의 직접적이고 뚜렷한 결과는 의회에 대한 보나파르트의 승리, 입법권에 대한 행정권의 승리, 문구의 힘에 대한 문구 없는 힘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이렇게 한 개인의 독재 앞에, 그것도 권위 없는 한 개인의 권위 앞에 굴복하기 위해 한 계급의 독재에서 도망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 고난 속을 방황하고 있지만,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혁명은 우선 의회 권력을 타도할 수 있도록 의회 권력을 완성했다. 혁명은 이 과제를 완수했기 때문에 행정권을 완성시켜, 그 행정권을 자신이 맞서야 할 유일한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 혁명 준비 작업의 나머지 반이 이루어졌을 때 유럽은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의기양양하게 외칠 것이다. 〈잘 파냈다. 늙은 두더지여.〉"(310-1)


3 / 프랑스 내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자) 1870년 9월 4일에 파리 노동자들은 공화국을 선언했고, 이는 거의 즉각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받아들여졌으며 단 하나의 반대의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날 엽관·매직을 노리는 변호사 도당이 티에르를 자신들의 정치가로 하고 트로슈를 자신들의 장군으로 하여 시청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모든 역사적 위기의 시대에 프랑스를 대표했던 파리의 사명에 대한 광적인 신념에 차 있었습니다." "파리는 노동계급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효과적인 군대로 조직하고 그 병사들을 전쟁 자체에 의해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방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장된 파리는 곧 무장 혁명을 의미했습니다. 프로이센 침략자들에 대한 파리의 승리는 프랑스 자본가 및 그 국가의 기생충에 대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였을 것입니다. 국민적 의무와 계급적 이해 사이의 이러한 갈등 속에서 국민방위 정부는 '국민 배반 정부'로 변절함에 일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373-4)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루이 보나파르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전쟁. 프랑스의 패배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2제정에 종말을 고했다.


"사실상 (공화국과 그 보루인 파리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반혁명은 낭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2제정은 국가 부채를 두 배 이상 만들었고 대도시에 과중한 지방 부채를 씌웠습니다. 전쟁은 무섭게 빚더미를 불렸으며 무자비하게 국가 자원을 황폐화시켰습니다. 파멸을 마무리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샤일록(비스마르크)은 프랑스 영토에 50만 병력의 주둔과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그 미불 불입금에 대한 5퍼센트의 이자율이라는 채무 상환 청구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청구서에 대해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까? 부의 전유자들이 스스로 일으켰던 전쟁의 대가를 부의 생산자들(노동자들)의 어깨 위로 떠넘기도록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공화정을 폭력적으로 타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엄청난 파멸은 토지 및 자본의 이 같은 애국적 대표들로 하여금 침입자의 감시와 후견하에 대외 전쟁에다가 내전을 접목시키는 일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388-9)


"1871년 3월 18일 새벽, 파리는 〈코뮌 만세〉라는 뇌성과 함께 일어섰습니다. 부르주아지의 마음을 그토록 번민케 하는 스핑크스인 코뮌은 과연 무엇입니까?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 계급의 실패와 반역의 와중에서 공무 집행에 개입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할 때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스스로를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 간주하는 것이 자신의 절박한 과제이며 절대적 권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조직을 장악하여 이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집중된 국가 권력은 상비군, 경찰, 관료제, 성직 제도 및 사법 제도 등의 광범위한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기관은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분업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국가 권력은 절대 왕정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태동하는 중간계급 사회에 반봉건주의 투쟁의 강력한 무기로 기여한 것입니다."(402-3)


"근대 산업상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적대가 확대·심화되는 속도에 따라 국가 권력은 점점 더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국가 권력으로서의 성격, 사회적 노예화를 위해 조직된 공권력으로서의 성격, 계급적 전제 정치의 동력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발전적 국면을 나타냈던 모든 혁명이 지나간 후에는 순전히 억압적인 국가 권력이 더욱더 뚜렷이 부각되었습니다. 지주들로부터 자본가들로의 통치권 이전을 야기했던 1830년의 혁명은 노동자들과 좀 더 거리가 떨어진 적대자들로부터 노동자들의 좀 더 직접적인 적대자들에게로 통치권을 이전시켰던 것입니다." "이전 체제하에서 지배 계급의 자체 분열로 해서 국가 권력을 견제했던 장애 요소는 지배 계급의 단결로 제거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대두를 목도하면서 지배 계급은 이제 노동을 적으로 삼는 자본에 의한 국가적 전쟁의 동력 기관으로서 국가 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403-4)


"파리가 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원인은 포위의 결과로 파리가 군대를 배제한 가운데 이것을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이제 하나의 제도로 변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코뮌은 파리 시의 다양한 각 구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어 시민에게 책임을 지며 즉시 소환 가능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성원의 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들이었습니다. 경찰은 중앙 정부의 하수인으로 계속 남았던 것이 아니라 즉각 그 정치적 속성을 벗게 되어 책임감 있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코뮌의 집행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코뮌 의원을 필두로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 수준에서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구정부가 갖는 물리력의 요소인 상비군과 경찰을 제거한 후 코뮌은 노심초사 재산 기관으로서의 모든 교회를 해체하고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육 시설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은 배제되었습니다."(406-7)


"현 사회의 대변자들은 코뮌이 모든 문명의 기반인 재산의 철폐를 의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코뮌은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재산으로 만드는 바로 그 계급 재산을 철폐하고자 의도했던 것입니다. 코뮌은 착취자에 대한 착취를 목표로 했습니다. 코뮌은 토지 및 자본과 현재는 주로 노동의 노예화 및 착취의 수단인 생산 수단을 단지 자유롭고 협동적인 노동의 도구로 변형시킴으로써 개인적 소유를 하나의 진실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그것도 '불가능한' 공산주의라고 말합니다! … 만일 협동적 생산이 협잡이나 함정으로 남게 되지 않는다면, 만일 협동 생산이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게 된다면, 만일 단결된 사회들이 공동 계획에 의거해 국민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따라서 국민 경제를 그들 스스로가 통제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참화인 항구적인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인 변동을 종식시키게 된다면, 신사 여러분, 이것 이외에 무엇이 공산주의, 그것도 '가능한' 공산주의가 되겠습니까?"(412)


"비스마르크는 파리의 폐허를, 파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체들을 흡족한 듯이 바라봅니다. 그에게 이것은 혁명의 박멸일 뿐만 아니라 이제 실제로 참수된 그리고 프랑스 정부 자체에 의한 프랑스의 소멸인 것입니다." "현 시대의 가장 엄청난 전쟁 후에 정복 국가와 피정복 국가의 주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동으로 학살하기 위해 친교를 맺어야 했습니다. 이 미증유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비스마르크가 생각하듯이 대두하는 신사회에 대한 최후의 탄압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가 먼지로 되어 사라지는 일입니다. 구사회가 아직도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 시도는 국가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전쟁은 이제 계급투쟁을 지연시키기 위해 의도된 단지 정부 측의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날 판국이며,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폭발하게 되자 곧 버림받을 운명에 있습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국가적 형태 속에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각국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하는 동일체인 것입니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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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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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변질하는 보수주의─진보주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개혁에 단호히 반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의 전제화를 방지하고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권리들을 지키는 방법에 있었다. 그 핵심은 권력의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에 있다. 자유를 위한 제도 구상이야말로 버크의 보수주의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보수주의를 논함에 있어 버크를 언급하려면 적어도 1) 지켜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이며 2) 이러한 제도와 관습은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3)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4) 민주화를 전제로 하면서도 질서 있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을 근거로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1)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과거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2) 현실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며 3) 자유를 위한 제도를 파괴하고 4) 나아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수주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버크적 의미의 보수주의는 아니다."(32-3)


제1장 프랑스 혁명과 싸우다


"미학사에서 버크는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1757)를 집필하여 '숭고'라는 관념에 처음 주목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 이전까지 미학에서 중시된 것은 '균형'이나 '질서' 혹은 '조화'와 같은 정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에 비해 18세기 유럽에서는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여행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알프스 등지에서 증가한 산악체험을 배경으로 새로운 미의식 및 감수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즉 높이 솟아오른 산이나 깊은 골짜기, 광대한 사막 등을 눈앞에 둔 인간은 일종의 외경심과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동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이 '숭고'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미와는 대조적으로 '숭고'는 충격이나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단 이러한 충격이나 긴장감은 인간의 삶을 북돋우며 재생의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버크는 논했다. 이러한 '숭고'의 관념은 이마누엘 칸트가 재조명해 『판단력 비판』(1790)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44-5)


"프랑스 혁명의 비판자이자 계몽사상에 적대적이었던 인물이라는 버크의 이미지는 다소 일면적이다. 버크는 분명 추상적 이성 사용을 비판했지만 결코 이성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의 계몽사상을 섭렵한) 버크는 실로 당대의 지(知)의 발전과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었으며 훗날 그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된 계몽사상을 비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계몽사상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아니었다. 버크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믿었다. 다만 그 사용법에 관해 동시대의 계몽사상과 격렬히 대립했을 뿐이다. 또 버크는 이성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주목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인간을 추동하는 감정과 관념은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시절부터 그에게 중요한 테마였다.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 주목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의 무한한 발전보다는 그 한계에 착목했던 점에서 버크 사고의 특징이 생생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50-1)


"버크가 『현재의 불만의 원인』(1770)을 집필할 당시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버크는 그 원인을 왕권의 정치개입에서 찾았다. 국왕(조지 3세) 자신의 음모야말로 영국 정치를 위협하고 현재의 불만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버크는 격렬히 왕권 비판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크는 국왕 본인을 직접 비판하는 일은 신중하게 피해갔다. 버크가 비판의 창끝을 겨눈 것은 왕의 측근들이었다. '국왕의 벗' 즉 궁정파야말로 현실의 내각 배후에 존재하는 세력이며 실질적으로 인민의 견제를 받지 않는 또 하나의 내각, 이른바 '이중내각제'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버크의 주장이었다." "명예혁명 이래 영국 정치의 최대 특징은 내각과 민중 사이에 의회가 존재하고, 특히 하원이 민중의 목소리와 정치 시스템을 잘 매개했다는 데 있다. 버크는 이렇게 논하면서 정치의 요체는 민중을 힘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정'을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56)


"버크는 〈정당이란 연대된 노력을 통하여 특정한 원리를 공유하고 이에 기반해 국가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통합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현재의 불만의 원인』)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정당이 〈특정한 원리〉에 기반을 둔다고 명시하는 한편, 그 존재 이유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의 촉진〉에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버크의 이 정의에 따르면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야합은 정당이 아니며 국가와 완전히 적대하고 국가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집단 역시 정당이 아니다. 이러한 정당의 정의는 정치사상사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본래 정당과 파벌은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으며 양자 모두 사회 전체의 공공이익에 반하는 '부분 이익'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버크는 정당을 국가이익의 촉진을 위해 특정 원리를 공유하는 집단이라 재정의함으로써 단순한 일시적 이해에 따라 생겨난 파벌과 구별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58-9)


"1774년 봄 이래 버크는 계속해 미국과 관련된 중요한 연설을 했다." "버크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은 미국인을 특징짓는 자유의 정신이었다." "버크(그리고 토크빌)가 보기에 미국인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의 후예이며 미국인이 사랑하는 자유는 자유 일반이 아니라 영국식 자유의 이념이다. 게다가 그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국의 역사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만들어 온 것이었다. 식민지 미국 땅의 사람 역시 자유민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미국인과 영국인의 공통된 선조의 위업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미국인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피 흘려 싸워 얻어낸 원리 일부를 공격하고 그 감정 일부를 조롱하지 않고서는 논쟁에서 결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식민지와의 화해 결의 제안에 관한 연설」)"(60)


# 버크의 핵심 논점은 일방적으로 미국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영제국이라는 기존 제국 질서의 안정화라는 대의에 순응하는 영국과 미국 간의 화해와 협조였다.


"버크에게 '보수(保守)'란 낡은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변화의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에겐 자신을 보존할 수단도 없는 법이다. 그런 수단이 없다면 그 국가가 가장 절실히 유지하고 싶어 하는 헌정상의 한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처럼 들리는 보수주의의 신조(credo)가 태어났다. (왕위계승과 권리선언이 함께 선포된) 명예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수정이라는 두 원리가 강하게 작동한 사례였다. 그 혁명은 어디까지나 왕국의 오래된 원리를 회복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왕국의 과거 원리 회복은커녕 역사의 명확한 단절로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버크는 주목했다." "과거에서 회귀해야 할 모범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 원리에 기반을 둔 미래로 도약하는 것, 버크를 뒤흔든 것은 이와 같은 사태였다."(70-1)


"사회라는 복잡한 건축물의 전체를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보존하고 개량해야 할까. 버크는 개인의 이성보다는 감성과 편견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버크가 이성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성을 논하면서 일개 개인의 사변적, 추상적 이성을 과신하는 것을 비판했다. 인간의 이성은 취약한 것이며 한 사람의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버크는 도리어 종종 편견이나 미신이라 불리는 인간 정신 활동이 이성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습관 역시 인간의 이성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보통 습관이라고 하면 사고가 결여된 동일패턴의 반복이라 이해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에게 각자의 역할과 임무를 가르치고 편견 안에 숨겨진 지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습관이다." "이에 비해 계몽사상은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성을 벗겨버리고 개인을 추상적으로 바라본 데에 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74-6)


제2장 사회주의와 싸우다


"20세기 전반기의 보수주의는 영국을 주된 무대로 하는데 영국 보수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한 것은 문학자들, 혹은 문인들이었다." "T. S. 엘리엇은 〈그럼 우리 가 봅시다, 그대와 나/함께 수술대 위에 올라 마취당한 환자처럼〉(「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처럼 전위적인 표현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그런데 31세 때 쓴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9)에서 그는 오히려 전통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이란 첫째, 25세를 넘겨서도 계속해서 시인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무시해서는 안 될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즉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자기 스스로 호메로스 이래의 문학적 전통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그 전통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비로소 그 현대성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다. 거듭 말하자면 전통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추가하며 갱신해 나가는 것이다."(82-5)


"엘리엇의 또 다른 저서인 『문화 정의론』(1948)의 논점들 중 하나는 문화와 집단의 연결이다. 문화란 개인 혼자 짋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나 가족 등 집단에 의해 지탱된다. 이러한 집단의 문화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엘리엇은 문화에 관한 비개인주의적 이해를 제시한 것이다." "엘리엇의 담론은 단순한 엘리트 문화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문화라는 것이 과연 계급 등의 집단이 담당할 대상인가, 그 여부에 있다. 엘리엇에게 문화란 단순히 이런저런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통일성 있는 삶의 방식〉에 가깝다. 문화란 한 집단의 고유한 태도나 행동의 스타일일뿐 아니라 미의식과 지혜, 판단력, 심지어는 요리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요리법에 대한 무관심을 영국 문화 쇠퇴의 방증이라 보았다.) 이런 문화는 종종 집단의 특정인물로 인해서 체현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에 의해 유지, 발전되는 것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87-8)


"20세기 보수주의의 최대 테마가 사회주의와의 대결이었다고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칭했으며 보수주의자임을 명확히 부정했다." "왜 하이에크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일컫지 않는가. 〈그것은 보수주의가 바로 그 본질에 의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대신할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시대의 경향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바람직하지 않은 발전을 감속시키는 데는 성공할 수도 있으나 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에 그 경향이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즉 보수주의는 감속장치를 작동시킬 뿐 미래를 향한 가속기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오히려 변화를 환영한다. 이 변화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자생적(spontaneous)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요점이다. 진화는 결코 계획할 수 없다."(95-8)


"『노예의 길』(1944)에서 하이에크가 문제시한 것은 것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아니었다. 이 이념에 관해 하이에크는 꼭 반대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비판한 것은 사회주의가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 곧 '집산주의(collectivism)'였다." "단순한 상황이라면 한 사람의 인간, 또는 하나의 위원회가 모든 것을 고려해 효과적인 계획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화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주체가 모든 정보를 수집해 이를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라는 비인격적 메커니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신념이었다."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개인에게 하나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단일 가치체계가 존재한다는 이상주의와 사람들의 필요에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환상이 모든 집산주의의 배경에 있다고 주장한다."(103-4)


"하이에크는 『자유의 구조』(1960)에서 '법의 지배'를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자유를 '강제의 결여'로 정의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중시한 것은 인간 행동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의도의 결과는 아닌 복잡한 질서였다. 이런 질서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고 부른다. 자생적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이다." "하이에크가 생각하는 '진화'란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의 진화다." "하이에크는 이런 '진화'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법'이라고 했다. 이 경우 법이란 특정 입법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행동의 일반적 규칙을 가리킨다. 하이에크가 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일반성'이었다.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입법은 그 대상인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강제와 같다. 법은 특정 대상을 노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일반적인 규칙은 강제를 최소화한다고 생각했다."(106-7)


"마이클 오크숏이 비판하는 것은 '합리주의자'다. 합리주의자는 정치에 관해 항상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치가 존재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획일적으로 완전한 답이 존재함을 당연히 여기며 정치를 그 실천의 장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크숏의 경우 이런 지(知)는 '기술지'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지(知) 속에는 기술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지(知)가 존재한다. 오크숏은 이를 '실천지'라고 부른다. 실천지는 기술지와는 달리 명확히 정식화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른 개연성의 지인 실천지는 보통 관습과 전통이라는 실천 속에 내포돼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실천지를 실천지라고 알지 못한 채 배워 간다. 바꿔 말하면 실천 속에서 어떤 행동양식과 매너로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 실천지이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여러 직업과 전문 속에서 축적되어 온 이와 같은 실천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나아가 적대시하기도 한다."(118-9)


제3장 '큰 정부'와 싸우다


"1950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 부활의 봉화를 올린 이가 러셀 커크다. 『보수주의 정신』(1953)에서 커크는 보수주의의 여섯 가지 규범(canon)을 제시하고 있다. 제1규범은 '인간 의식과 사회를 동등하게 지배하는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에 대한 믿음'이다. '정치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문제'라고까지 단언한다. 제2규범은 '획일성과 효율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며 이에 따라 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신비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3규범은 '문명사회에 있어 서열과 계급은 불가결한 것이라는 확신'이다. 커크에게 '계급 없는 사회'는 결코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를 잇는 제4의 규범은 '자유와 소유권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이다. 제5규범은 '추상적 계획에 기초해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궤변가, 계산가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를 신용해서는 안 된다', 제6규범으로 '변화가 꼭 유익한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132-3)


"이러한 주장은 머지않아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운동과 연결돼 결국 정치와 사회의 존재방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 정신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미국이 현대 선진국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종교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는 동부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종교화한 '선벨트'의 신앙심 깊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근저에 있는 것은 세속화, 개인화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정신적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욕구이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또 다른 정신적 배경에는 이른바 '반지성주의'가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은 지역의 기초적 자치를 담당하는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지성에 감명 받았다.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지적 엘리트가 아니다. 지위도 학력도 없으나 생활에 뿌리내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토대라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반엘리트 사상이 바로 '반지성주의'이다."(134-7)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가 단순한 정신적 태도와 심리상태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혁명'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전통주의'와 함께 또 하나의 요소가 더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리버테리어니즘'이다." "'리버테리언'이라는 말은 원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상을 일컬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 단어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 배경에는 리버럴리즘이라는 단어의 의미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원래 정부 권력을 억제해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 시기에는 오히려 '큰 정부' 아래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리버럴리즘에 위화감을 느낀 리버테리언은 리버럴파에 의한 정부 권한 확대와 격렬히 대립하며 개인의 선택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의 '융합'이 실현된 것이야말로 현대 미국 보수주의 발전의 커다란 비약을 위한 디딤대가 되었다."(141-3)


"밀턴 프리드먼은 『선택의 자유』(1980)에서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이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경제적 자유이며 경제적 자유가 없는 곳에 정치적 자유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먼이 신뢰하는 것은 가격 메커니즘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개별적 이익 증진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가격 시스템은 중앙집권적 지시 없이, 서로 대화하지 않고, 나아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서도 이 과제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공동 행위에 대한 눈에 띄게 낮은 평가와 그것과는 대조적인 시장질서에 대한 극명히 높은 평가이다. 사람들의 자발적 상호행위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치 않은 것으로 가격 메커니즘을 매개로 한 것에 한정된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144)


"프리드먼의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과는 달리 개인의 인권과 자연권을 중시하는 이른바 윤리적 리버테리어니즘을 전개한 것이 바로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1974)다. 이 책에서 노직이 주장한 것은 '보호협회'라는 모델이다." "자연상태에서 자발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호협회'는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다른 협회를 압도하는 사실상 독점 조직이 된다. 노직은 이를 지배적 보호협회라고 불렀다. 지배적 보호협회는 이윽고 영역 내의 나머지 주민에 대해서도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최소국가가 되어 간다. 노직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생적인 프로세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최소국가는 보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단 하나의 점에서만 정통성을 가진다." "따라서 사람들의 노동이 결실을 맺은 소유권에 정부가 과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며 노직은 정부의 권한 확대를 강하게 비판했다."(147-9)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를 구성하는 것은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 이 둘뿐만이 아니다. 이 둘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질적 요소가 보수주의에 유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네오콘(Neo Conservatism)', 즉 (리버럴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신보수주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1964년 대통령 선거이다. 이 선거는 비명에 죽음을 맞이한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어 현직에 있던 민주당 출신 린든 존슨 대통령과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대결이었다." "당시 훗날 네오콘으로 불리는 이들은 골드워터가 아닌 존슨을 지지했다." "그러나 네오콘들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계획에 환멸을 느끼고, 카운터컬처(반체제문화) 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에 반발하면서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지지하는 쪽으로 정치적 입장을 전환해 간다. 네오콘이 골드워터 지지 세력과 합류했을 때, 처음으로 레이건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미국 '보수혁명'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154-8)


# 네오콘의 사상적 특징

1. 독특한 국제주의 :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어 국제정치에 (억제를 넘어)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다.

2. (도덕적) 리얼리즘 : 국제정치를 권력 투쟁의 장으로 여기는 고전적 리얼리즘과 달리 도덕적 이념 실현의 장으로 취급한다.

3. 사회개혁 유보 : 대규모 국가 개입과 복지 정책, 특히 반전운동 같은 '좌경화'된 리버럴은 사회의 유기적 연결을 파괴한다.


제4장 일본의 보수주의


종장 21세기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시대가 끝나고 보수주의도 갈 길을 헤매는 지금 더 이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또는 리버럴과 보수주의라는 구별은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을까. '예'와 '아니오' 모두 그 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별은 불분명해지고 있다. 오늘날 모든 전통을 부정하고 사회를 이성에 기초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0에서부터 새로 만들기를 바라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해도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지혜는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이 '진보'라는 이름의 강한 순풍을 받아 앞으로 나아갔던 시대는 확실히 그 끝을 고했다. 이후에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되돌아봄으로써 전진을 위한 에너지와 지혜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서 얻은 추진력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217-8)


"또 한편 리버럴과 보수라는 대립축이 완전히 무효해졌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리버럴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반대로 어디까지나 보편주의의 입장을 중시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동료'를 강조하는 순간, 배제되는 '그들'이 생겨난다." "동료와의 관계를 우선하는 전자의 입장이 보수, 보편적 연대를 주장하는 후자의 입장이 리버럴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에 있어 공동체 내부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사이의 상호성을 중시하는가 하는 차이와도 연동해 이후 사회를 논해 가는 데 유력한 대립축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버럴과 보수의 차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다양한 지향점의 공존이다. 즉 가장 심각한 위기는 리버럴과 보수 모두가 원리주의적이 되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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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8
에드먼드 버크 지음, 이태숙 옮김 / 한길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옮긴이 해제


"보수주의는 인간·사회·역사에 대한 특정한 규정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인식론적 겸손이라고도 하며, 기존 제도를 옹호할 때나 변혁 주장을 논박할 때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강조하는 논지─와 역사적 공리주의─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제도들을 현존하는 이익과 행복의 원천이라고 규정하는 논지─를 주요 논지로 삼는다. 이 논지들은 특정한 정치양식의 옹호로 이어진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기존 제도들은 사람들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효능을 지니므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 정치양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치양식─기존 상황에 대하여 어떤 태도가 타당한지─을 규정한 이데올로기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는 정치 목표에 주안을 두는 이데올로기들─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로 분류된다. 보수주의와 같은 기반에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는 마찬가지로 정치양식의 하나인 급진주의다."(20-1)


"버크의 사상에서 본격적인 보수주의 논설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피력되었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서 영국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감지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개한 논설이 보수주의의 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수주의가 심대한 체제 위협에 대항하는 상황적 이데올로기(situational ideology)라는 헌팅턴의 정의가 확인된다. 또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보수주의 논설을 제시했으므로, 보수주의를 규명할 때 버크의 전기 논설을 후기 논설과 혼합해서 자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영국체제를 위협한다고 인식되자, 인간성과 역사와 신의 이름을 동원하여 그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보수주의자로 '전환'했다.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은 세련된 보수주의 논설을 갖게 되었다. 버크를 상당한 개혁주의자로 묘사하는 견해들은, 〈자유주의〉로 평가되기도 하는 버크의 초기 언설들에 부당하게 비중을 둔 데서 종종 연유한다."(24-5)


제1부 프랑스 사태와 일부 영국인의 경거망동


"나는 프랑스의 새 자유에 축하를 보내는 일을, 그들의 자유가 통치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자유가 공적 권력, 군대의 기율과 복종, 효율적이고 잘 배당된 조세 징수, 도덕과 종교, 재산의 안정성, 평화와 질서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관습들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알게 될 때까지 미룰 것이다. 이 모두가 (각각의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곧 불평으로 변할지도 모를 축하를 하러 나서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각자 고립된 사사로운 개인의 경우에 분별력에 따르는 처사다. 그러나 자유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행동할 때 권력이 된다. 사려 깊은 국민은 태도를 천명하기 전에 권력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지켜볼 것이다. 특히 그들의 원칙, 기질 그리고 성향에 관해 겪어본 적이 없는 거의 새로운 사람들 손에 새로운 권력이 주어진 매우 어려운 경우에는, 그리고 표면적으로 가장 요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추진자가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할 것이다."(46-7)


"프랑스 사태를 찬양하는 프라이스 박사는 영국인이 명예혁명의 원리에서 세 개의 근본적 권리─그는 그 권리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하나의 짧은 문장 속에 개괄된다고 본다─를 획득했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한다. ① 우리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② 부당 행위를 이유로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 ③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 이 새롭고 들어본 적이 없는 권리장전은, 비록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신사들과 그 일당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전체 영국민은 그것에 관여한 바 없다." "1688년의 혁명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이라고 불리는 법률에서다. 정열적이고 경험 없는 열성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법률가와 정치가가 작성한 매우 현명하고 분별 있고 사려 깊은 그 선언에는, 〈우리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하고 부당 행위를 이유로 추방하고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보편적 권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또는 암시조차도 들어 있지 않다."(57-8)


"그리고 설사 우리가 명예혁명 전에 우리 왕을 선출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더라도, 영국민은 당시에 자신과 후손을 위해 영원히 엄숙하게 부정하고 폐기했다. 이 신사들은 자신들의 휘그(Whig) 원리─명예혁명 전에 후일의 제임스 2세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려 한 일파를 반대파가 스코틀랜드 반란자 명칭인 휘그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그 반대파도 아일랜드 도적을 가리키는 토리라고 불림으로써 휘그(의회 중심, 비국교도, 상업 중시)와 토리(국왕과 국교회 그리고 지주인 젠트리 중시)는 영국의 전통적 양대 당파 이름이 되었다─에 대해 자신들 좋을 대로 자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솜머스 경보다 더 나은 휘그로 받들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명예혁명을 성사시킨 사람들보다 명예혁명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할 마음도 없다. 그리고 우리 법률과 가슴에 감동적인 문체로 그 영원한 법의 언어와 정신을 새겨 넣은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신비한 뜻을 권리선언에서 읽을 마음도 없다."(63)


"우리가 형이상학적 궤변의 미로에 빠지지 않는다면, 확정된 규칙과 일시적 이탈을 둘 다 조화롭게 이용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 국가가 그러한 수단이 없다면, 독실한 마음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던 헌정의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 보존과 교정이라는 두 원리는, 영국에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인 왕정복고와 명예혁명이라는 위기의 두 시기에 강력하게 작동했다. 그 두 시기에 국민은 그들의 오랜 건축물에 존재하는 통합의 유대를 상실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구조를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두 경우 모두에서 그들은, 손상되지 않은 부분들을 통해 옛 헌정체제의 결함 부분을 쇄신했다. 그들은 이 오래된 부분들을 그대로 유지해 쇄신된 부분이 잘 들어맞도록 했다. 그들은 옛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며 옛날에 조직되었던 신분제의회로 행동했던 것이지, 유대가 풀린 인민이라는 유기체 분자들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65)


"현재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겠지만, (과거의) 광신도들은 〈왕은 신이 정한 세습과 불가침적 권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다〉라고 주장했다. 단지 자의적 권력을 옹호할 뿐인 이러한 옛 광신도들은, 세습에 따른 왕이 세계에서 유일한 합법적 통치자인 것처럼 독단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마치 민중의 자의적 권력에 대한 우리 시대 새 광신도들이 민중 선거가 권위의 유일한 합법적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바와 같다. 확실히 예전의 열광적 대권 옹호자들은 우둔하게도 그리고 아마도 불경스럽게도, 국왕제가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더 신의 재가를 받았다고 상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습에 따른 통치권이, 왕위에 누가 오르게 되든지 개개 인물 모두의 경우에 그리고 어떤 시민적·정치적 권리도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상황에서도, 절대로 파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법에 따른 왕위 세습 계승을, 오류가 아니라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 불평거리가 아니라 혜택으로, 예속의 표지가 아니라 자유의 보장으로 여긴다."(71-2)


"혁신하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기적 성향과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다. 자연의 양식을 따르는 헌정 방침에 의해, 우리는 우리 정부와 특권을, 재산과 생명을 향유하고 전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고 보유하고 전달한다. 정치제도, 재산 그리고 섭리가 부여한 재능이 동일한 경로와 순서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며, 우리에게서 전달되어 나간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세상의 질서와 일시적인 부분들로 이루어져 영원한 전체가 된 존재 양식과 그대로 상응하며 조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존재 양식에는 인류를 거대하고 신비한 통합체로 엮어내는 위대한 지혜에 의해, 전체는 어느 한 시기도 노년이라거나 중년이라거나 연소한 상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변함없는 항구성 속에서 영원한 쇠퇴, 몰락, 쇄신, 진전이라는 행로를 거치면서 움직인다. 국가운영에서 자연 양식을 견지함으로써 우리가 개선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전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며, 우리가 보유하는 경우에도 결코 전적으로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82-3)


제2부 프랑스 혁명의 실상


"당신들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에 매우 근접한 헌법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질서 잡힌 사회로 구성된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선택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당신네는 잘못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멸시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자본 없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당신 나라의 바로 앞 세대가 별로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지나쳐버렸으면 될 것이다. 당신들의 주장을 더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끌어오면 될 일이었다. 그러한 조상에 대한 경건한 애호 속에서, 당신의 상상력은 요즈음의 천박한 행동을 넘어서 그들에게서 덕과 지혜의 기준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닮고자 하는 모범과 더불어 향상되었을 것이다. 조상을 존경하면서 자신을 존경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프랑스인을 어제 갓 태어난 사람들로 간주하거나 1789년 해방의 해까지는 미천하고 예속된 가련한 사람들로 여기도록 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85-6)


"국민의회는 자신들의 지식과 현명함 그리고 성실성을 조국에 바치기로 서약했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법정의 자랑거리인 일류 변호사들도 아니었다. 대학의 고명한 교수들도 아니었다─그 대신에, (출중한 예외도 있지만) 그렇게 수가 많은 경우 으레 그럴 것이지만, 훨씬 많은 부분이 법률가 중에서 하급으로 무식하고 사무적이며 단지 보조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구성된 집단에 최고 권위가 부여되면 언제나, 자신들을 존중하도록 습관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최고 권위가 놓인 데에 수반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질 평판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진 것에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 더 놀랄 이들이, 절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갑자기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예속된 미천한 지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자신들의 준비되지 않은 위대함에 도취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95-6)


"단언컨대, 수평이 되게 맞추려는 자들은 절대로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모든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시민들로 이루어지는 법이어서, 그중 어떤 부류가 최상위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평등화하려는 자들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변화시키고 전복시킬 뿐이다.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땅 위에 두어야 할 것을, 그들은 공중에 세움으로써 사회라는 건축물에 무거운 부담을 준다. 그 공화국을 (파리 공화국이 그 한 예다) 구성하고 있는 재봉사 단체와 목수 단체들은, 찬탈 중에서 최악인 자연적 특권에 대한 찬탈을 통해 당신들이 그들에게 강요한 지위를 감당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명예로운 것이 못 되는)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개별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통치하도록 허락된다면, 국가가 억압되게 된다. 당신들은 이 점에서 편견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실은 자연과 투쟁하는 것이다."(104-5)


"공공 사회가 협약(convention)의 소산이라면, 그 협약이 공공 사회의 법이 되어야만 한다. 그 협약이 공공 사회에서 형성된 모든 종류의 기본법을 한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은 그 피조물이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개인들의 열정이 억제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단체에서도 인간의 성향이 빈번하게 좌절되고, 의지가 통제되고, 열정이 극복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오직 '그들 자신에서 나온 권력에 의해서' 실시될 수 있다. 그 기능을 행사할 때 제어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임무인 사람들의 의사와 열정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억제가 그들의 권리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와 억제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변경의 여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를 어떤 추상적 규칙에 기반하여 정해놓을 수는 없다. 그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와 억제를 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119-20)


"한 국가를 구성하거나, 혁신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학문은 그 밖의 다른 경험과학처럼 '선험적'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 실천적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짧은 경험이 아니다. 도덕적 요인의 진정한 결과는 반드시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로운 것이 더 나중 작용에서는 탁월할 수도 있다. 그 탁월성이 처음에 산출된 나쁜 결과에서 생길 수도 있다. 반대로, 아주 그럴듯한 계획이 매우 만족스럽게 시작되었다가도 종종 낭패스럽고 유감스런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통치 지식은 그 자체로 매우 실천적이면서 그러한 실천적 목적을 지향하므로 (한 개인의 삶 전체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경험(experience)을 요구한다. 따라서 여러 시대를 거쳐서 상당한 정도로 사회의 공통된 목적에 부응해온 건축물을 감히 쓰러뜨리려고 시도하는 경우나, 증명된 유용성을 간직한 모델과 모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재건축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는, 무한한 조심성이 요구된다."(121)


"저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국왕은 한 남자에 불과하다. 왕비는 한 여자에 불과하다. 국왕 시해, 존속 살인, 신성 모독은 미신적 허구일 뿐이다." "이 야만적인 철학의 사고방식은, 냉정한 가슴과 불명료한 이해력의 소산이며, 모든 아취와 고상함이 결여된 것만큼이나 확실한 지혜도 결핍되어 있다. 여기서 법은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아니면 법은, 각자가 사적인 궁리로 찾은 관심사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서 보아 할애한 부분에 따라서만, 지지될 것이다. 그들의 아카데미의 덤불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끝에 보이는 것은 교수대뿐이다. 국가 쪽에는 애정을 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기계론적인 철학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 제도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면, 인격 속에 결코 구현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 사랑, 존경, 찬미 또는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애정을 내쫓는 그러한 종류의 이성이 인격을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44)


"우리는 자칫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들을 초래하고 아마도 지금까지 지탱하는 원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예절, 우리의 문명 그리고 예절이나 문명과 연관된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이 유럽 세계에서 오랫동안 두 가지 원리에 기초했다는 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실은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였다. 이 두 가지는 신사의 정신과 종교의 정신이다." "어떤 나라에 무역과 공업은 없지만 귀족과 종교의 정신이 남아 있다면, 판단력이 전자의 자리를, 그것도 반드시 나쁘지는 않게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래의 기본적 원리들 없이 국가가 얼마나 잘 지탱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려고 덤벼서 그 와중에 상업과 기술이 상실된다면, 그 국민은 상스럽고 우둔하고 난폭하며 동시에 가난하고 누추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종교도 명예도 남자다운 자부심도 없이, 현재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그럴 희망이 없게 된 나라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146-7)


"이 계몽된 시대에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화되지 않은 감정의 소유자라고 대담하게 고백한다. 우리의 옛 편견(prejudices)을 모두 버리는 대신에 상당한 정도를 소중히 여기며,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편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중히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편견이 더 오래 지속된 것일수록, 더 일반적일수록, 우리는 더 소중히 여긴다고 고백한다." "우리나라의 사변적 인물 다수는 일반적 편견을 퇴출시키는 대신, 그 속에 가득한 잠재적 지혜를 발견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현명함을 발휘한다." "이성을 지닌 편견은, 행동에 그 이성을 부여하는 동력을 보유하며, 행동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애정을 지닌다. 편견은 위급시에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편견은 정신을 미리 지혜와 덕성의 꾸준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결정의 순간에 사람들을 회의하고 당황하고 미결 상태에서 망설이도록 두지 않는다. 편견은 미덕을 습관으로 만들지, 서로 연결되지 않은 행위의 연속 상태로 버려두지 않는다."(158-9)


"우리는 인간이 그 성격상 종교적 동물임을 알고 있다. 무신론은 우리의 이성뿐 아니라 본능에도 배치되며, 결코 오랜 기간 지배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안다는 점에 자부심을 지닌다. 그러나 만일 난동 시기에, 그리고 프랑스에서 현재 맹렬하게 뒤끓고 있는 지옥의 증류 가마에서 나온 강한 술로 착란상태에 빠져서 기독교를 폐기하여 우리의 알몸을 드러낸다면, 투박하고 위험하며 저열한 미신이 그를 대신할 것이라고 (정신은 진공 상태를 참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염려하는 바다. 기독교는 이제까지 우리의 자부심이었고 위안이었으며,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국민에게 문명의 일대 원천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당신네가 했듯이 기존 제도에서 자연스런 인간적 존경 수단들을 제거하여 경멸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대신에 어떤 다른 것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164)


"이 혁명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 채용된 모든 사기, 기만, 폭력, 약탈, 방화, 살인, 몰수, 강제유통지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전제와 잔인함이 그 자연적 결과를 나타낼 때, 즉 모든 유덕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도덕심에 충격을 주었을 때, 이 철학적 체계의 선동자들은 즉시 프랑스의 옛 왕정을 비난하는 데 목청을 높였다. 폐위된 권력을 충분히 불명예스럽게 만든 후, 그들은 새로운 악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구체제 당파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들의 조악하고 난폭한 자유 기획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속의 옹호자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필요성에 쫓겨서 이러한 천박하고 경멸스러운 기만을 행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편에 그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극악한 폭정이 있어서 그외에는 제3의 다른 선택이 없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의 행위와 기획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궤변이라는 이름도 붙일 가치가 없다."(208-9)


"사람들이 현존하는 법에 의해 일정한 생활양식을 영위하도록 조장되었고 또 합법적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방식이 보호될 때─그들이 모든 생각과 모든 습관을 그 방식에 적응시켰을 때─법률이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규칙에 충실함을 평판의 기반으로 삼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치욕의 기반 또는 형벌의 기반으로 삼았을 때─나는 입법부가 그러한 때에 자의적 법률에 의해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갑작스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상태나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강등시킨다든지, 전에는 그들의 행복과 명예의 척도가 되었던 성격과 습관을 치욕과 오명으로써 낙인찍는 일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만일 여기에 더하여 그들이 집에서 추방되고 재산이 모두 몰수된다면─무릇 혁명은 몰수하는 데 적절한 기회다─나는 사람의 감정과 양심, 편견, 그리고 재산을 가지고 행해지는 이 전제정치적 오락이 어떻게 극악한 폭정과 구별될 수 있을지 알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252-3)


"인간 정신의 왕성한 생산력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힘을 어떤 것이라도 파괴하는 행위는, 물질세계에서 물체의 분명한 활동 속성을 파괴하는 짓을 도덕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질산소다에 함유된 기체의 팽창력이나 증기, 전기, 자기의 힘을 (만일 우리에게 파괴할 능력이 있다면) 없애려고 덤비는 것과 같다." "나는 어떤 자가 감히 자신의 나라를 백지(carte blanche)에 불과하다고 보고 자신이 좋을 대로 그 위에 갈겨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오만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열렬한 공상적 선의로 가득한 자라면, 자신의 사회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구성되기를 기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애국자이고 진정한 정치가라면, 자신의 국가에 현존하는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할 것이다. 보수하려는 성향과 개선하는 능력이 같이 가는 것이 정치가에 대한 내 기준이다. 그외에 다른 것은 모두 그 생각에서 천박하고 실행에서 위험하다."(255-4)


"미신은 정신이 허약한 자들의 종교다. 따라서 약간의 이러저러한 사소한 형태와 또는 약간의 열정적인 형태로, 상호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하기 때문에 '찬미자'가 되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에 격렬하게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격렬하게 혐오하지도 않는다. 지혜는 오류에 대한 가장 엄격한 교정자가 아니다. 양자는 경쟁하는 오류이며, 서로 가차 없는 전쟁을 벌인다. 양자가 자신의 우세를 이용하는 데 매우 잔인하여, 상호 논쟁에서 무절제한 대중을 이편에 또는 다른 편에 끌어들이는 일이 있을 정도다. 신중함은 중립일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그러한 열기를 만들어내게끔 되어 있지 않은 사안에 관해 맹목적 집착과 격렬한 반감이 대립하는 경우, 정열이 초래하는 과오와 과도함 가운데 무엇을 비난하고 무엇을 용인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아마도 현명한 인물은 건설하는 미신이 파괴하는 미신보다 더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256-7)


제3부 국민의회의 새 국가 건설 사업


"국민의회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나 계속하는 모든 일은, 가장 통상적인 기술에 속한다. 그들은 야심가 선조들이 그들에 앞서 했던 그대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책략, 기만 그리고 폭력의 자취를 추적해보면,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폭정과 찬탈의 정식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은 결코 없다. 공공선과 관련된 모든 규칙에서는 그들의 정신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전체를 시험해보지 않은 사변의 처분대로 맡겨버렸다. 그들은 공중의 가장 소중한 이익을 산만한 이론에 맡겨버렸는데,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는 그들 중 누구도 이론에 맡긴 바가 없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확보하려는 욕망에 완전히 열성적이어서, 이미 다져놓은 길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공공이익에 관해서는, 전부 우연에 내맡겨버렸다. 내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계획은 경험상 그 경향이 유익하다고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267-8)


"나는 국민의회의 민중 지도자들 가운데는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 몇몇은 연설과 저술에서 유창함을 보였다. 이러한 유창함은 풍부하고 연마된 재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창함은 그에 비례하는 정도의 지혜를 동반하지 않고도 갖출 수 있다." "체제 그 자체를 시민의 번영과 안전을 확보하고 국가의 힘과 위엄을 증진하기 위해 구성된 하나의 국가 계획으로 보았을 때, 종합적이며 적절한 정신 작업이라거나, 심지어 통속적인 신중함이라도 나타내는 그 어떤 것은 단 하나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서나 곤란을 회피하고 빠져나가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관은 엄격한 교사다. 그들이 탈피하기보다는 회피했던 난관이 그들의 길에 다시 나타난다. 곤란은 증가하고 무성하게 그들을 덮친다. 그들은 혼란된 세부 사항들의 미로에 부딪혀 방향을 잃고 끝없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일 전체가 위태롭고, 타락하고, 불안정하게 된다."(268-70)


"보존과 개혁을 동시에 하려는 것은 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오랜 제도의 유용한 부분들이 유지되며, 그 위에 덧붙여진 것이 보존된 것에 적합하게 되기 위해서는 활발한 정신, 꾸준하고 끈기 있는 주의력, 비교하고 결합하는 여러 능력 그리고 방편이 풍부한 이해력이 제공하는 자원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질은 반대편 해악의 결합 세력과 계속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또 모든 개선을 거부하는 완고함과 소유하는 것 모두에 대해 염증을 내고 혐오하는 경솔함과도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진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속도가 느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걸려야 한다." "생명을 지니지 않은 물질을 처리하는 데에서조차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지혜의 일부라고 한다면, 우리가 파괴하고 건설하는 것이 벽돌과 재목이 아니라 민감한 존재여서 그들의 상태와 상황 그리고 습관을 갑자기 변경하면 다수가 비참해질지 모르는 경우에, 조심과 주의는 진정 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271)


"고대의 공화국들을 조형한 입법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힘든 일이어서, 대학생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소비세 담당관 수준의 수학과 산술 같은 도구로는 도저히 완수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어야 했으며,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시민을 다루어야 했으며, 시민이 생활하는 환경 속에서 전달되는 습관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이 2차적 본성이 1차적 본성에 작용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식했다." "반면 프랑스의 권력자들은 형이상학을 많이 가졌는데, 그것은 나쁜 형이상학이다. 기하학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나쁜 기하학이다. 비례산술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례산술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일에서, 도덕과 관련된 어떤 것이나 정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참조한 바는 무엇이 되었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관심사, 행위, 정열,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289-92)


"세심한 정확성을 지니고 인간의 도덕 상태와 경향에 따르던 몇몇 고대 공화국 입법자들의 유능한 성향과는 매우 달리 그들은 발견되는 모든 위계를 평준화하고 한꺼번에 분쇄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계급화는 만일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면, 모든 정부 형태에서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공화국에 실효성과 영속성을 부여하는 필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전제의 과도함을 막는 강력한 장벽을 구성한다. 이런 것 없이 만일 현재의 공화국 기획이 실패한다면, 절제된 자유를 위한 모든 보장도 함께 실패하게 된다. 전제정치를 완화하는 모든 간접적 규제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만일 프랑스에서 현재의 왕조든 아니면 다른 왕조 아래서든, 왕국이 세력을 다시 전부 키우게 된다면, 아마도 그 왕국─만일 국왕의 현명하고 도덕적인 의도에 의해 초기에 자발적으로 진정되지 않는다면─은, 지상에 출현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완전한 자의적 권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절망적인 게임이다."(294-5)


"무릇 군대는 이제까지 원로원이나 민중적 권위 기관에 대해서는 매우 위태롭고 불확실하게만 복종했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군대는 2년 동안만 지속되는 의회에 대해서는 거의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장교들이 중재자들이 행사하는 지배를 완벽한 복종과 적당한 존경을 지니고 대한다면, 그들은 군인의 특징적 성향을 완전히 잃었음이 틀림없다." "한 권위는 취약하고, 모든 권위는 부침을 거듭하는 속에서, 장교들은 한동안 불온한 채로 파쟁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마침내 병사의 호감을 얻는 기술을 이해하고, 지휘의 진정한 기백을 갖춘 어느 민중적 장군이 출현하여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것이다. 군대는 그 개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서는 군대의 복종을 확보할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는 그자가 당신들의 주인이 된다. 당신네 왕의 주인, 당신네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 전체의 주인인 것이다."(340-1)


"(능력과 요구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좋은 질서는 모든 좋은 것들의 기반이다. 획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중이 굴종적이지 않되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 정부 고관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법률은 권위를 지녀야 한다. 민중의 마음속에서 자연적 복속 원리가 인위적으로 근절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은 자신들이 한몫 차지할 수 없는 재산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들은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대개 그렇듯이 성공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위안은 영원한 정의가 행하는 최종 분배에서 얻어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 이 위안을 빼앗는 자는 그들의 근면성을 꺾으며, 모든 보존과 함께 모든 획득의 뿌리에 타격을 입힌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인물은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잔인한 압제자이며, 무자비한 적이다. 동시에 그는 사악한 공상에 의해, 성공한 근면의 열매와 재산 축적을, 태만한 자들, 실망한 자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의 약탈에 노출시킨다."(373)


"나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사소한 기교와 고안을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많은 중요한 사안을 실행할 수 있게 한다. 민중을 결합하게 한다. 노력하는 정신에 생기를 준다. 도덕적 자유의 엄격한 얼굴에 때때로 유쾌함을 퍼뜨린다. 모든 정치가들은 매력을 지니기 위해 희생해야 하며, 이성과 유순함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행해지는 사업에서는, 이러한 모든 보조적 감정과 방책들이 별로 쓸모가 없다.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대단한 신중함이 필요치 않다. 권력의 자리를 안정시키고, 복종을 가르치면 일은 완수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 쉽다. 지도할 필요가 없다. 고삐를 놓아버리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정신을 국민의회의 지도자들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375)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이 누구든 우리 이웃나라들에게 영국 헌정의 예를 추천하기 바란다. 나는 우리의 행복한 상태가 우리의 헌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헌정 전체 덕분인 것이다. 변경하고 첨가한 것들과 더불어 몇 번에 걸친 검토와 개혁을 거치면서도 유지시킨 것에 크게 혜택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데 진정 애국적이고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정신을 발휘할 일들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나는 변경을 배제하지 않겠다. 그러나 변경할 때에도 그것이 보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심대한 불만거리가 있을 때 비로소 치료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행동에 옮길 때, 나는 우리 선조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수선을 할 때, 가능한 한 그 건물과 같은 방식으로 할 것이다. 현명한 조심성, 주도면밀함, 기질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소심함이 우리 선조들이 가장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 지녔던 지도 원리들이었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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