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내가 보기에 플롯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플롯 구조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나는 플롯을 마법의 공식처럼 떠받든 탓에 간혹 요즘의 이야기가 가볍고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플롯만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플롯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인물에게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자연히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결함이 있고 매력적이고 구체적인 누군가의 역경을 보면서 응원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소파 쿠션에 머리를 박기도 한다. 플롯 표면에 드러난 사건도 물론 중요하고 플롯 구조가 제 기능을 다하고 규율을 따라야 하지만 플롯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그 안의 인물을 위해서다." "나는 강렬하고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플롯은 주요 원칙을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인물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풍성하고 진실하며 서사적 놀라움이 가득한 인물을 창조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인물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알아보는 것이다."(18-20)


1장 만들어진 세계


"진화론에서는 우리의 목적이 살아남아 번식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성에게 좋은 짝이라는 확신을 주려면 매력이나 지위, 명성, 구애 의식과 같은 사회적 개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결국 뇌의 궁극적인 사명은 상대를 통제하는 일이다. 뇌는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지각하고 그 사람들을 '통제'해야 한다. 세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뇌는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 항상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경계한다. 뜻밖의 변화가 위험을 불러오고 우리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인데, 한편 그런 변화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뜻밖의 변화라는 우주의 갈라진 틈새로 미래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변화는 희망이자 약속이고 더 나은 내일로 가는 굴곡진 여정이다. 삶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와 맞닥뜨릴 때 우리는 알고 싶어 한다." "예상 밖의 변화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 호기심이야말로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독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다."(31)


"예기치 못한 변화만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뇌가 세계를 통제하려면 우선 그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진다. 태어난 지 9주 된 아기도 이미 한 번 본 이미지보다 낯선 이미지에 더 끌린다. 2세에서 5세 사이의 아이들은 보호자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약 4만 개나 던진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독자에게 그 세계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면서 정보에 대한 갈증을 자극한다." "호기심은 소문자 n 모양의 그래프를 그린다. 질문의 답을 전혀 모르면서도 안다고 확신할 때 호기심이 가장 적다. 호기심이 가장 큰 구간(작가가 개입하는 영역)은 조금은 알 것 같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다. 뇌 스캔을 해보면 호기심이 생길 때 뇌의 보상체계가 약간 자극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야기에서 답을 궁금해하거나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마약이나 섹스나 초콜릿을 갈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37-8)


"뇌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보를 받아서 신경계 모형으로 변환한다. 책의 글자를 눈으로 훑으면 글자에 내포된 정보가 전기 파장으로 변환되고, 뇌가 그 파장을 받아 글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모형을 생성한다." "독자의 뇌는 작가가 원래 상상한 모형의 세계를 각자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베르겐에 따르면 우리가 단어를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형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한 문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형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작가가 단어를 배치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제인이 새끼고양이를 아빠에게 주었다Jane gave a Kitten to her Dad'와 같은 타동구문이 '제인이 아빠에게 새끼고양이를 주었다Jane gave her Dad a Kitten'와 같은 이중타동구문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셈이므로 영화와 같은 순서로 단어를 배치하면서 독자의 머릿속 카메라가 문장의 각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을 상상해야 한다."(48-50)


"뇌는 외부 세계의 모형을 구축하듯이 마음의 모형도 만든다. 우리의 사회생활 무기고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이 기술을 '마음 이론mind theory'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며 어떤 모의를 하는지 그들이 앞에 없어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능력을 극단적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의 행동을 수치로 정확히 수량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부 연구에서는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20퍼센트만 정확히 판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와 연인 사이라면? 기껏해야 35퍼센트다. 사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때 발생하는 오류가 인간 드라마의 주된 원인이다.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려 할 때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잘못 예측하는 순간 불행히도 반목과 싸움과 오해가 싹터서 인간관계에 예기치 못한 변화의 파국적 소용돌이가 일어난다."(58-60)


"신경과학자들은 은유가 인지 차원에서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연구자들은 우리의 뇌가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랑과 기쁨, 사회와 경제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추상적 개념을 물리적 속성이 있는 개념, 가령 생기가 돌고 따뜻하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과 결부시키지 않고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뇌 스캔 연구에서는 더 강력한, 은유의 두 번째 용도가 드러난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그는 거친 하루를 보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 〈그는 힘든 하루를 보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보다 촉감과 관련된 신경 영역이 더 많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서는 〈그녀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라는 문장을 읽으면 〈그녀는 부담을 느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보다 신체 운동과 연관된 신경 영역이 더 많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자는 이렇게 표현된 문장을 읽을 때 짐을 짊어지는 무게와 긴장을 '느끼고' 거칠고 고단한 하루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68-70)


"현실에 관한 심오한 질문에 대해서도 인간의 뇌는 이야기로 향한다. 정교한 신피질에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론과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면 현대의 종교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단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심오한 질문에 답해준다.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 나의 모든 사랑과 죄책감과 증오와 욕망과 질투와 공포와 애도와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줄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의 답은 당연히 데이터나 방정식으로 나오지 않는다. 주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고 의지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누군가는 영웅이고 누군가는 악당이지만 모두가 의미가 있는 뜻밖의 사건으로 구축된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플롯의 공동 주연이다." "인과관계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근간이며 뇌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76-7)


"하지만 모든 작가는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정하든 간에 서사를 지나치게 통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고 방치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나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는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암시해야 한다. 아니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식어버리고 독자나 관객은 지루해진다. 나아가 이들이 이야기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 설명에 빈틈을 남겨둬 독자나 관객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유롭게 예상하고 방금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자기만의 감정과 해석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독자의 예상과 가치관, 기억, 연결, 감정을 이야기에 끼워 넣는데, 이들 요소가 모두 스토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작가도 자기 머릿속 세계를 타인의 마음에 완벽하게 이식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두 세계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독자가 작품에 푹 빠지기만 해도 오직 예술에서만 가능한 힘의 공명이 일어날 수있다."(81-2)


2장 결함 있는 자아


"이야기가 시작될 때 결함이 구체적으로 정의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세계에 관해 갖는 오류를 보면서 우리는 그에게 공감하고, 오류의 원인에 대한 암시나 단서가 나오는 동안 주인공의 약점에 흥미를 느끼며 그가 벌이는 싸움에 감정적으로 몰입한다. 주인공이 플롯의 극적 사건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동안 우리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그 '이유'를 정확히 통찰하기 시작했다. 결함은, 특히 우리가 인간 세계에 관해서 그리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범하는 실수는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간단히 공감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결함은 우리의 환각 모형에 스며들고 지각의 일부와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이루므로 우리 자신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깊은 차원의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과의 싸움에 뛰어든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89-90)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옳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스토리텔링 뇌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옳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우리의 편향과 오류와 편견에 관한 불길한 사실은 그것들이 진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남들은 다 '편견'에 치우치고 우리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순진한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 우리의 환각 모형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뇌에서 우리를 위해 만든 현실에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환각에는 나름의 기능이 있다. 우리의 신경 모형을 구성하는 작은 신념 하나하나는 우리의 뇌에 외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는 작은 지침과 같다. 〈꽉 잠긴 잼 뚜껑은 이렇게 따라. 경찰한테는 이렇게 거짓말을 하라. 상사에게 유능하고 분별력 있고 정직한 직원으로 보이고 싶으면 이렇게 처신하라.〉 이런 지침이 우리의 환경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91-3)


"문화는 현실과 허구의 인물들이 결함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는 또 하나의 경로다. 흔히 '문화'라고 하면 오페라나 문학 혹은 패션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문화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신경 모형에 깊숙이 녹아있다. 문화는 현실에 대한 환각을 구축하는 신경 기제의 일부를 형성하며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렌즈를 왜곡하거나 좁히는 식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도덕 원칙을 목숨 걸고 준수하게 하거나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지각하는지 결정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문화 규범은 유년기의 신경 모형으로 통합된다. 유년기는 뇌가 특정 환경을 가장 잘 통제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신속하게 찾아가는 시기다. 0세에서 2세 사이에는 뇌에서 1초에 약 180만 개의 뉴런 연결이 생성된다. 이런 높은 유연성(혹은 '가소성')의 상태는 청소년기 후기나 성인기 초기까지 이어지며 어느 정도 놀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환경의 규범을 습득한다."(108-9)


"우리는 머릿속 환각 모형이 정확하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하면서 삶을 체계화한다. 우리의 신경 모형과 일맥상통하는 예술과 미디어와 이야기에서 즐거움을 찾고, 어긋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거슬리게 받아들이거나 거리감을 느낀다. 우리의 신경 모형의 정당성을 대변하는 문화 지도자에게 갈채를 보내며 우리와입장이 반대인 사람을 만나면 일단 부정하고 본다. 불안을 느끼고 화를 내고 복수심을 느끼면서 그 사람이 실패하고 수모당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옆에 두려고 한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논쟁거리에 대해 함께 같은 생각을 나누면서 '유대'를 형성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지키려고 싸우는 신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과 통제 이론을 이루는 믿음이고, 따라서 이 신념에 대한 공격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자체를 공격하는 셈이 된다. 이야기에서는 이런 신념과 이런 공격이 가장 중요한 스토리를 이끌어낸다."(119-21)


"우리가 현실과 이야기에서 접하는 갈등은 주로 이런 신경 모형과 세계 모형을 방어하는 행동과 연관된다." "좋은 이야기에는 발화점이 있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다가 발화점이 오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중한다. 감정이 증폭되고, 호기심과 긴장감이 살아난다. 발화점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사건들 중 첫 번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주인공의 결함 있는 통제 이론의 중심부에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결함의 핵심을 건드리므로 주인공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과잉 반응을 보이거나 이상해 보이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인물과 플롯 사이에 격렬한 불꽃이 튄다는 무의식적 신호다.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통제 이론이 검증받고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이야기 사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그리고 사건에 의해 촉발된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결정을 요구한다. 결함을 수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121-2)


"뇌의 영웅 만들기 장치는 자동적이고, 대개는 잠재의식 차원의 직감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세계 모형에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 신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흑인이나 백인, 여자나 남자를 만날 때 미묘하게 부정적인 감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따라서 영웅 만들기 장치는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주어진 임무를 잘 해낸다.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도덕적 우월성은 사실 '유난히 강력하고 보편적인 긍정적 착각의 한 형태'다." "연구자들은 폭력과 잔혹성의 네 가지 일반적인 원인을 찾아냈다. 탐욕(야망), 가학증, 높은 자존감, 도덕적 이상주의다. 대중적인 신념과 진부한 이야기에서는 탐욕과 가학증을 주된 원인으로 잡는다. 그런데 이들 원인은 극히 사소하다. 알고 보면 높은 자존감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대다수 악행의 원인이다."(127-9)


"물론 이야기 유형마다 강점과 심리적 복잡성이 다르지만 인물이 없는 플롯은 그저 빛과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사람에게, 바로 그 변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의미가 발생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물의 갈등은 그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서 일어난다. 인물은 머릿속에 든 세계 모형 속에 살면서 그 모형을 현실이라고 경험하는데, 모형 자체에 결함이 있으므로 실제 외부 세계를 통제하는 능력이 손상된다. 혼돈이 일어나고 인물의 세계 모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인물은 서서히 통제력을 잃고 그 결과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나 사건들과 더 극적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인물이 외부 세계와만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인물은 자기 자신과도 전쟁을 치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잠재의식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가담한다. 결국 모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핵심이다."(136-7)


3장 극적 질문


"'우리'는 우리의 신경 모형 속에 있다. 우리의 화자는 단지 우리의 행동을 비롯해 머릿속의 통제된 환각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할 뿐이다. 모든 현상을 연결해서 우리가 누구이고 왜 그렇게 행동하고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에 관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는다. 우리가 흥미진진한 신경계의 쇼를 통제한다고 느끼게 해준다.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이를 작화증作話症이라고 하는데,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리사 보르톨로티 교수는 우리가 작화할 때는 〈허구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고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항상 작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뇌의 화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하는 행동을 (혹은 누구에게 묻는지에 따라 전적으로) 통제하는 신경 구조에 거의 접근하지 못한다. 화자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의 진정한 원인인 회로와 동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고 왜 그런 상황에 있는지에 관해 들려줄 만한 그럴듯한(대개는 영웅적인) 이야기를 급조해야 한다."(144-6)


"인간 조건에 관한 무섭고도 흥미로운 진실은 누구도 극적 질문의 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왜 우울한지 가설을 세우면서, 도덕적 신념을 정당화하면서, 음악이 감동을 주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의 자아 감각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그래서 인생이 그렇게 골치 아픈 싸움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수수께끼 같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실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에서 극적 질문이 그렇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시시각각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사이에 극에 압력이 생기고, 플롯이 전환되는 사이에 주인공은 대개 의도치 않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147-8)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다양한 모형도 들어 있어서 각각의 모형은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싸운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모형이 전면에 나서고, 그 모형은 화자 역할을 맡아서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게 주장을 펼치고 대개는 논쟁에서 이긴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교수는 우리의 의식 아래 차원에서는 지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싸우는 작은 자아들의 시끌벅적한 민주주의가 구현된다〉고 말했다. 우리의 행동은 '그 싸움의 최종 결과일 뿐'이다. 그사이 작화를 담당하는 화자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일상에 논리를 짜 넣는다. 가령,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여기서 내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뇌의 주요 역할 중 하나다. 뇌는 민주주의의 다채로운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한다는 확고한 목표에 따라 이야기를 만든다.〉" "좋은 이야기에서 인물은 이런 특징은 반영하며 그의 성격은 '3차원'이 넘는다."(151-4)


"영화에서는 생애 전체를 약 90분 안에 전달하면서도 어느 정도 완결된 느낌을 준다. 이때 흥미로운 대화의 비결은 압축에 있다. 인물이 쓰는 단어는 진실하게 들리면서도 의미를 가득 담고 있어야 한다." "대사에 심오한 진실이 가득 담겨 있어야 독자나 관객이 대사에서 진실을 깊이 흡수하고 고도로 사회적인 뇌를 작동시켜 인물의 마음 모형을 신속히 구현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모든 원칙이 대화의 기술로 통합된다. 대화는 변화무쌍해야 하고 무언가를 원해야 하며, 인물의 개성과 관점을 풍부하게 담아야 하고 의식과 잠재의식 두 차원 모두에서 작동해야 한다. 대화는 우리가 인물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정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인물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인물의 사회적 배경, 개성, 가치관, 지위에 대한 감각, 진정한 자아와 겉으로 드러난 거짓 사이의 긴장,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서사를 전개시키는 은밀한 고뇌를 알려준다."(172-4)


"소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 관해 알려주고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대부분 도덕규범을 위반한 내용, 집단의 규율을 깨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를 자극해서 소문 속 인물을 공격하든 방어하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집단에 우호적인 행동을 유지한다. 우리가 좋은 책이나 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책이나 영화에서 이런 원시적인 사회 정서를 자극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브라이언 보이드 교수는 〈이야기는 사회 감시에 대한 강렬한 관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사회 정보에 주목하게 만들고〉 소문이나 시나리오나 책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감시하는 행동의 과장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우리의 생존에 중요했다. 우리의 뇌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소문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이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약 3분의 2가 사회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다."(179-80)


"도덕적 분노만이 스토리텔링의 즐거움을 더하는 원시적 사회 정서가 아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가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부족민으로 여기게 만들려는 욕망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을 '앞질러서' 우리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인간은 소통하고 지배하고 싶어 한다. 두 가지 욕망은 양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앞지르고 싶은 마음은 부정직과 위선과 배신과 마키아벨리적 묘책처럼 들린다. 이런 두 가지 욕망의 갈등이 인간 조건과 우리가 인간 조건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출세란 지위를 얻는 것으로, 인간의 보편적 갈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폭넓은 목표 지향적 활동'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지극히 고상한 플롯과 활동의 기저에는 지위를 향한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있다."(185-6)


"흔히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심리적 진실에 있다고 말한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마음의 과학에서 이 말이 놀라울 정도로 입증되었다. 셰익스피어는 항상 '심리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회의적인 태도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이 현대의 과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누구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잘 모른다. 리어 왕도 이아고도,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는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관객이 그 이유를 짐작할 여지를 남겨서 관객의 가축화된 뇌를 훌륭하게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인간 행동의 원인과 결과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없다. 셰익스피어는 극적 질문의 답을 모호하게 제시함으로써 타인과 그의 기묘함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호기심에 접근한 다음, 인물과 작품에 경이롭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또 우리가 이야기에 끼어들 여지를 남겼다."(218)


4장 플롯과 결말


"목표는 삶에 질서와 가속도와 논리를 부여하며, 현실에 대한 환각에 서사적 구심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행동하고 싸우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우리의 영웅 만들기 뇌는 끊임없이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고하기를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관주의와 운명이라는 착각으로 삶의 플롯을 밀고 나간다." "목표 지향성은 긴장감 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낳는다. 주인공이 목표를 추구하는 사이 우리는 그가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함께 느낀다. 주인공이 상을 거머쥐면 그의 기쁨에 공감하고 주인공이 실패하면 함께 좌절한다. 이야기 이론가 크리스포터 부커는 탄탄하게 구축된 플롯에 흐르는 '수축'과 '이완'에 관해 설명한다. 부족적 사회 정서가 누구를 응원하고 누구의 죽음을 갈망해야 할지 말해준다면, 목표에 대한 우리의 이런 반응은 이야기라는 롤러코스터에서 꼭대기와 밑바닥을 이루고, 언어 이전에 수백만 년 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의 보편적인 언어를 쓴다."(232-5)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 힘들지만 의미 있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번창한다. 뇌의 보상 기제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 아니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승한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고 플롯을 만드는 것이다." "위협적이고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의 목표는 그 변화를 다루는 것에 있다. 목표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통제해야 하는 세계가 좁아진다. 일종의 인지적 터널로 들어가서 해야 할 일만 보인다. 우리 앞의 모든 것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이거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극에서 반응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어떤 식으로든 혼돈을 통제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인물은 진정한 주인공이 아니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극적 질문의 답이 사실상 달라지지 않는다. 인물은 자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긴 하지만 서서히 지루하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238-9)


"나아가 플롯은 변화의 교향곡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상위 차원의 인과관계는 이야기 사건과 그 여파의 영향을 받고 하위의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인물이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의해 놀랍고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할지 말해주는 부족적 정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서사의 정상과 바닥을 이루는 수축과 해방의 목표 지향적 정서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인물이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인물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우는 계획도 달라질 수 있고 목표 자체도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으며 관계에 대한 이해도 바뀔 수 있다.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극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 바뀔 수 있다. 두 번째 주요 인물(그리고 세 번째 인물)도 달라질 수 있고 정보의 격차가 벌어지고 좁아졌다가 완전히 닫힐 수도 있다. 변화는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247)


"모든 이야기가 변화라면 당연히 변화가 멈출 때 이야기도 끝날 것이다. 주인공은 발화점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면 그 과정이 성공적인 셈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뇌의 모형과 통제 이론이 갱신되고 향상될 것이고, 주인공은 마침내 혼돈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통제는 뇌의 궁극적인 사명이다. 우리의 영웅만들기 뇌는 항상 우리가 실제보다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해주려고 한다." "우리는 통제력을 잃으면 적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라는 자아 감각을 잃고 결국 불안하고 우울하고 심각한 상태로 치닫는다. 뇌는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영웅적인 우리 자신에 관한 설득력 있고 교묘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의 중요한 요소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252-3)


"이야기는 진실한 위안을 준다. 고도로 사회화된 종인 우리가 받은 저주는 우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두가 타인과 잘 어울리고 성공하고 싶어하므로 우리는 거의 항상 상대에게 조종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환경은 가벼운 거짓말과 절반의 미소가 뒤섞여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즐겁게 만들고 타인과 외부에 순응하게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통제하기 위해 잘못과 실수와 고통을 열심히 위장한다. 사교성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소외당할 수도 있다. 오직 이야기에서만 온갖 가면이 벗겨진다.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결함 있는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우리만 갈등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어두운 두개골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한다."(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명의 과학 - 운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뇌 과학
한나 크리츨로우 지음, 김성훈 옮김 / 브론스테인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자유의지냐 운명이냐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뇌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장애에 기여하지만 직접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 조현병이 생길 위험 중 80퍼센트는 결국 갖고 태어난 유전자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여기에 관여하는 180개 정도의 유전자가 서로 서로, 그리고 사람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아직 완전히 풀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음식의 선택, 사교성 같은 성격의 한 가지 측면인 친구관계 스타일, 혹은 신념 같은 문제로 오면 여기에 기여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아주 미묘하고, 서로 서로, 그리고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또한 대단히 교묘해진다. 그렇다고 이 영역에서 한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난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운명이라는 개념에서 운명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비극적인 암시를 덜어내고, 도달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종착지라는 개념으로 운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22-3)


"과학은 인간 모두가 신경생물학에 크게 휘둘리며, 어떤 결정이나 행동을 보이기 쉬우며, 특정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한 수준에서 보면 모두는 아무리 고유의 복잡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주 목적은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교환하여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에 기여하고, 운이 좋다면 자신의 유전 물질을 후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깊은 욕구가 작동 중이고, 이런 욕구들은 대체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심지어는 행동 중에서 좀 더 개성적인 측면이라 생각하는 부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분명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인 산물이고, 그래서 의식적 통제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대단히 추상적인 의견이나 성격적 특성들 같은─도 사실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강화된 선천적 요인에 의해 깊숙한 수준에서 형성이 된다."(35)


"뇌의 지도가 점점 더 분명하게 밝혀짐에 따라 자유의지가 차지하는 공간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다면,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상했던 것만큼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위험이 따라온다. 개인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마음을 불편하고, 불안정하게 한다. 자신의 행동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권한이 약해져서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다면 사회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경과학은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생각만큼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빠져들 필요는 없음을 설득하는 논거를 개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은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과학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한동안은 자유의작 착각에 불과해도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37-8)


2 발달 중인 뇌


"아이의 처음 몇 년이 그 아이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는 인지 기능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역동적인 시기다. 심리학에서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수십 년 치의 연구를 보면, 이른 아동기의 환경 및 경험의 영향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평생 지속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을 설명해 줄 타당한 해부학적 이유가 존재한다. 뇌의 정보 처리의 기본 구성 요소인 뉴런, 즉 신경세포는 아기가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에 주로 만들어지지만 모든 뉴런들을 연결하는 복잡한 과정은 대략 처음 3년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열 달을 다 채우고 태어난 아기의 뇌는 부피는 성인 뇌의 2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성인과 비슷한 수의 뉴런이 들어 있다. 아이가 만 3세가 될 즈음에 아기의 뇌는 평균적으로 성인 뇌의 80퍼센트 정도 크기로 발달한다."(46-7)


"아기와 어린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도약은 바로 기존의 뇌 구조물에서 일어나는 '배선wiring up' 때문이다. 뇌의 서로 다른 영역들은 서로 다른 기술을 학습하는 특별히 민감한 시기가 따로 있다. 이때는 새로운 배선이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가령, 언어 습득과 청각 기관hearing system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의 발달 과정을 보면 아기들이 어떻게 자신의 특정 환경에 맞게 미세하게 조정된 선천적 기술을 갖고 태어나는지 알 수 있다. 청력에 장애가 없는 아기들은 모두 성숙한 달팽이관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음의 높이와 크기를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세계 시민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전 세계 어떤 언어에서 사용되는 음소phoneme라도 듣고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국어에 노출됨에 따라 아기는 자신의 환경에서 나타나지 않는 음소를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50-1)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거나,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자각함에 따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신경 연결이 강화되어 학습이 기억으로 응고된다. 그 기억을 되풀이해서 끄집어내면 그 기억은 뇌 속 전기 신호의 기본 설정 경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학습된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용되지 않는 신경 연결은 결국 가지치기를 통해 소실된다. 신경세포들 사이의 연결은 대부분 전기 신호에 반응해서 모양을 바꾸는 '가지돌기가시dendritic spine'라는 극소의 구조물에서 일어난다. 학습이 일어남에 따라 가시돌기가지는 이웃의 활발한 신경세포와 접촉하기 위해 가지를 뻗는다. 가지돌기가시가 부풀어 오르다 결국 두 개의 딸가지daughter spine로 쪼개지면서 회로 연결이 두 배로 늘어난다. 각각의 신경세포는 이런 과정을 통해 10,000개까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대략 100조 개 정도의 연결이 만들어진다. 이런 연결들을 통틀어 '커넥톰connectome'이라고 부른다."(53-4)


"청소년기가 시작될 즈음 뇌는 이미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 잘 확립된 신경 고속도로가 가동 중이지만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연결을 만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잘 사용되지 않는 신경로를 더 많이 가지치기하기 시작한다. 가지치기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데 10대의 앞이마겉질prefrontal cortex은 그런 시냅스 가지치기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장소다. 이 뇌 영역은 자기가 배워 왔던 내용을 가다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해 나가는 일을 동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대단히 역동적인 시기에는 앞이마겉질에서 정보가 처리되는 방식과 보상회로를 비롯한 다른 심부 영역의 정보 처리 방식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결과로 청소년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대단히 예민해지지만 충동 조절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은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평균적으로 10대들은 안전책을 강구하지 않고 즉각적인 황홀감을 좇아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64)


"청소년의 뇌 발달에서 중요한 측면이 한 가지 더 있다. 10대 시절에는 뇌의 회백질grey matter이 줄어든다. 앞이마겉질에서는 무려 17퍼센트나 줄어든다. 회백질은 중추신경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곳은 시냅스 접합이 일어나는 대량의 수상돌기 가지와 신경세포의 세포체,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지지세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우리 뇌의 대부분을 형성하며 척수를 타고 아래로도 이어진다." "회백질의 일부는 백질white matter의 확장으로 대체된다. 백질은 신경세포의 긴 회색 실린더 모양 구조물인 축삭돌기axon 둘레를 감싸서 코팅하고 있는 지방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코팅은 축삭돌기의 절연을 도와주어 전기 신호가 뉴런에서 뉴런으로 더 빠르고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게 해 준다. 10대의 뇌 발달 과정에 일어나는 다양한 과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청소년 커넥톰의 개선을 도와 자잘한 수많은 가지로 구성되어 있던 시스템을 그보다 숫자는 적지만 고속의 신경로를 갖춘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해 준다."(64-5)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므리강카 수르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이 일단 어느 단계까지 강화되면 이웃한 연결을 녹이는 유전자 스위치가 켜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뇌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로를 최적화하여 효율성을 유지한다. 뇌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미 시도를 통해 검증이 된 이런 신경로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나이 든 뇌는 귀, 눈, 기타 감각기관을 통해 유입되는 새로운 정보보다는 기존의 경험과 예상을 더 중시한다. 이 경우에도 이런 전략은 역시나 말이 된다. 외부 세상으로부터의 정보를 수집하는 시스템들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다. 뇌는 이미 경험을 구축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정신적 전략을 검증하고 연마하는 데 엄청난 인지 에너지cognitive energy를 소비한 상태다. 나이 든 뇌는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보다는 과거의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지혜와 경직된 사고는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72-4)


3 배고픈 뇌


"과거에는 사람들의 비만을 멈추어 줄 유전자 압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칼로리 섭취를 낮추게 만드는 유전자 돌연변이는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떨어졌다. 음식이 귀하고 음식을 사냥하거나 채집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환경에서 이런 돌연변이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번식의 기회를 얻기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의 환경에서는 비만을 야기하는 돌연변이들이 인구 집단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지금은 환경이 아주 달라져 있지만 문제는 진화의 시간 척도가 아주 길다는 점이다. 환경이 이렇게 변한 것은 불과 한 세기 동안의 일로 포유류의 진화 시간에서 대략 0.00004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언제라도 먹을 수 있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진화가 지금의 음식 배달 환경을 따라잡으려면 2천 년 정도는 걸릴 것이다."(97-8)


"전 세계 인구 중 절반이 FTO 유전자(체지방량 및 비만 관련 단백질)를 비만의 확률을 25퍼센트 높이는 버전으로 갖고 있었다. FTO의 이 유전자 변이를 2개 갖고 있는 사람(전 세계 인구의 1/6이 여기에 해당한다)은 원래 나가야 할 체중보다 3킬로그램 더 무거울 것이고 비만이 될 위험은 50퍼센트 더 높다. 이 유전자는 보상체계를 구성하는 회로가 아니라 시상하부에서 발현된다. 하지만 이것은 몸에게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지시를 내려서 보상체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이 계속 깨어 음식을 먹게 만든다." "개인적 식욕은 대체로 고유의 유전자 꾸러미를 물려주기 위해 오랜 세월 진화한 회로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는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추구하도록 진화되어 왔다. 개인별로 이런 욕구가 얼마나 강력할지는 그 사람이 타고난 유전자와 뇌의 배선에 달려 있다. 체중 감량이 그토록 어려운 경우가 많은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99-101)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환경적 요인이 맡는 역할은 근래에 들어서야 발견되었고, 이것을 후성유전학적 조절epigenetic regulation이라고 한다. 후성유전학은 세포들이 똑같은 유전 암호를 갖고 있음에도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식욕의 후성유전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동안에 태어난 네덜란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에서 형태가 잡혔다." "연구 결과 수정 당시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불량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나중에 비만과 당뇨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즉, 아이가 먹을 것이 귀한 환경에서 자란 경우에는 그 아이의 대사가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가혹해도 이런 환경에 의해 변화를 겪은 것은 DNA 암호가 아니다. 변화한 것은 유전자의 행동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전달된다."(108-9)


"이런 연구 결과들은 환경과 유전적 운명을 살짝 비틀어서 음식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바꿈으로써 더 건강한 음식 선택으로 이끌고, 더 나아가 미래 세대에 이득이 되도록 유전적 반응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알코올을 이용한 의미 있는 연구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런 연구 결과를 적용해서 중독성 행동이나 강박적 행동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호도와 식욕이 어떻게 미리 결정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정해져 있는 운명을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으로 보인다. 후성유전학은 또한 유전적 변화가 더 이상 기나긴 진화적 시간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며, 물려받은 회로와 살고 있는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대단히 복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이제야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111-2)


4 보살피는 뇌


"미국에서 재현이 이루어진 한 흥미로운 실험에서는 여성들이 짝을 평가하는 기준 중,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선호하는 파트너의 냄새 맡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여성들이 면역계가 자기와 아주 다른 남성의 체취를 훨씬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조직적합성복합체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MHC로 알려진 100개 정도의 유전자 때문에 생긴다. MHC는 면역계가 병원체를 비롯한 외부 이물질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단백질 정보를 암호화하고 있다. 이 유전자들은 당신 몸에서 나는 체취를 결정하고, 당신의 면역계 구성을 결정하는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과 다른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는 배우자를 만나면 거기서 나온 자손은 감염에 대해 훨씬 광범위한 저항능력을 갖게 되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여성들은 말 그대로 자기와 유전자 궁합이 제일 잘 맞는 남편감을 냄새로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와 뇌에 새겨진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인다."(128-9)


"뜨거운 초기 연애 시절 이후로도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몇몇 신경화학 물질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부드러운 손길은 피부에 있는 신경말단을 자극해서 뇌의 시상하부 영역으로 전기신호를 보낼 수 있다. 그러면 이 영역에서는 프로호르몬pro-homone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엄마와 신생아 사이의 유대감 형성에서 특히나 중요하게 작용한다. 옥시토신은 대단히 강력한 물질이며 알코올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해서 앞이마겉질과 둘레계통limbic system(동기, 감정, 학습, 기억을 지배)의 억제신경세포를 활성화한다. 이 억제신경세포를 활성화함으로써 스트레스와 불안을 약화시키고 (사회 구성원들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억제social inhibition에 브레이크를 건다. 이렇게 하면 행복, 긴장 완화, 신뢰 등의 느낌을 강화하기 때문에 성적 절정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133)


"코델리아 파인이 인용한 한 연구는 필요야말로 발명의 이버지임을 입증한다. 수컷 쥐는 보통 새끼를 돌보는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지만 만약 수컷 쥐가 새로 태어난 새끼와 함께 굴속에 남아 있고 그 새끼를 돌볼 어미가 없다면 수컷 쥐는 새끼의 털을 고르고, 돌보고, 심지어 둥지를 짓는 일까지도 완벽한 능력을 보여 준다. 시간이 이틀 정도 걸리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수컷은 마치 새끼를 돌보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새끼에게 착 달라붙어 지낸다." "양쪽 성 모두에서 육아 행동은 애착과 돌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깊숙하게 자리 잡은 선천적 욕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호르몬, 환경이 모두 중요하며 이런 것들을 모두 함께 평가하지 않고서는 행동에 대해 신뢰할 만한 설명을 내놓을 수 없다." "애착은 번식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보상회로를 통해서도 동기가 부여된다. 육아는 생존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145-7)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고 함께 교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다. 진화심리학 교수 로빈 던바는 이 주제와 관련한 연구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 연구는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 여부를 말해 주는 최고의 예측인자는 하루 한 갑씩 태우는 흡연 습관을 끊느냐, 혹은 콜레스테롤이 뚝뚝 떨어지는 감자튀김을 끊느냐 등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을 뒷받침해 주는 인적 네트워크와 우정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었다. 포옹, 걱정의 표현, 웃음 등 애정이 담긴 신체적 접촉은 엔도르핀의 생산을 촉진해 준다. 엔도르핀은 면역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회복 속도와 감염에 대한 저항성을 높여 주고, 기분도 좋아지게 해 준다." "로빈은 인류가 눈확앞이마겉질orbital prefrontal cortex(눈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뇌 영역으로 충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처리하는 일에 관여한다)을 발달시키던 것과 때를 같이해서 든든한 우정을 구축하고 가꿈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는 이러한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믿고 있다."(148-9)


5 지각하는 뇌


"'버전'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짝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뇌의 독특한 왜곡, 내재된 필터와 인지편향 등, 자기만 갖고 있는 뇌의 특성 덕분에 자기만의 맞춤형 '현실'에서 살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정확한 스냅사진이 아니라 그냥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전에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당신이 매일 매일 경험하는 하루는 모든 감각을 통해 뇌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 모든 정보는 당신이 기존에 세상을 어떻게 당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색안경을 통해 처리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자기가 예상한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165-6)


"거대하고, 정교하고, 강력한 뇌가 어째서 세상의 근사치를 제공하는 데서 만족하는 것일까? 만약 지각이 다른 수많은 인지 기능이 의존하는 플랫폼이 맞다면 지각을 바로잡는 것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뇌가 환상을 다루지 않고 정확한 현실을 다룬다면 재앙을 낳을 수 있는 판단 오류의 가능성이 더 낮아지지 않을까? 그 대답은, 그러기에는 뇌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게다가 지각은 뇌가 동시에 처리하고 있는 사실상 무한히 많은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잠정적인 버전의 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뇌는 귀, 눈, 코, 그리고 다른 감각 기관에서 유입되는 신호들을 전하를 띤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으로 변환해서 그 이온들을 신경세포 안팎으로 펌프질해야 한다. 또 뇌는 그 결과로 생기는 전기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회로판인 커넥톰 여기저기로 시속 400킬로미터의 속도로 내보내야 한다."(168)


"안타까운 일이지만 뇌가 현실에 대해 일관되고 안정적인 착시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 때로는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2천 5백만 명이나 된다는 것이 그 예다. 이들은 망상이나 환각 같은 증상을 통해 심각하게 왜곡된 지각을 경험할 수 있다(정신병)." "이런 사람들도 눈으로는 나머지 사람들과 똑같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하향식으로 그 정보를 해석하고 가정을 세우는 과정이 바뀌어 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뇌를 분석해 보면 학습, 기억, 추론, 유연성. 고등 인지 조절에 관여하는 회로(해마의 눈확앞이마겉질)에 신경 연결이 더 적은 것으로 나온다. 전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조현병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걸러 내고 이 지식을 이용해서 자기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하드웨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172-4)


"병든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각 결함을 완화하는 손쉬운 방법은 바로 밖으로 나가 자신을 새로운 경험, 혹은 새로운 의견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 보면 뇌는 이런 문제 제기에 저항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의 작동 방식에 대한 기존의 가정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정보는 뇌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변화에는 에너지와 관심이라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뇌는 그런 문제 제기를 걸러 내는 데 아주 능숙하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가 그리도 힘든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뇌가 선천적으로 보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과 균형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경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바로 새로움을 탐구하고 추구하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 개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을 즐기도록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다. 이것은 인간이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을 형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181-2)


6 믿는 뇌


"우리가 믿는 내용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입력되는 내용과 함께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각의 메커니즘으로부터도 유래한다. 신념은 자기만의 독특한 현실감sense of reality을 통해 형성되고 또 그와 동시에 압축된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좌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 초기에 습득한 신념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인간은 정치나 축구에 대한 의견을 갖기 오래전에 이미 세상의 본질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어린 유아기에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어서 자신이 고통받을 때면 어디선가 보호자가 나타나 도와줄 것이라는 신념을 형성한다면 그 신념은 자기강화적self-reinfocing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세상은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적대적이라는 신념도 자기영속적self-perpetuating일 수 있어서 가끔은 한 개인의 인생에 비극적인 결말을 갖고 오기도 한다."(199-200)


"뇌를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로부터 지속적으로 의미를 추출해 내려 애쓰는 '신념 엔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뇌는 자기가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 입력을 분류하고 상호참조해서 패턴을 생성함으로써 이것을 해내고 있다.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이 작업의 목표는 의식적 인지conscious cognition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능력이기는 하지만 항상 결함 없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뇌는 특정한 사실로부터 일반화하는 데 약점을 가지고 있다. 보통 일단 누군가가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경험을 두세 번 정도 겪게 되면 그 사람은 이것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기꺼이 주장하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현실을 모형화한다. 그리고 이 예측 과정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도와준다. 이것은 '직접 경험 경로direct-experience pathway'라는 것을 통해 행동을 빚어내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201)


"직접 경험 경로에 덧붙여 사회적 경로social pathway도 존재한다. 이 경우 정보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평가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세계관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데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경로가 대단히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세상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언어를 통해 개인적 신념을 소통할 능력을 가지고 진화해 왔다. 언어는 오래도록 인간 인지능력의 정점으로 여겨져 왔고, 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능력에서 언어가 담당하는 역할은 대단히 흥미롭고도 중요하다." "문제는 일단 뇌가 무언가에 대한 신념을 구축하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더라도 새로 고칠 생각을 않는다는 점이다." "뇌는 오히려 이런 신념에 빠져들어 그와 모순되는 정보들을 무시하고 그 신념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만 찾아다니면서 강화해 나간다."(202-4)


"이 모든 신념 구축에는 분명 사회적 효용social utility이 있지만, 늘 그렇듯이 진화를 통해 보존된 보상체계가 그런 활동을 유용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만드는 데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신념이 없었다면 바퀴, 배, 위생시설, 소설, 오페라, 현대무용, 무균 외과 수술 기법 같은 것들을 발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놀라운 결과에 더해서 신념은 무형의 자산도 제공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 전체의 안녕과 행복을 크게 증진시켜 준다는 뜻이다. 신념은 자부심과 목적의식을 부여해 준다. 신념은 엄청난 보상의 느낌을 부여할 수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무수히 많은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쳐 왔다. 예를 들어 성적 지향 같은 문제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적 신념은 그런 부분을 지지하는 사람의 안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뇌 활동의 한 범주로서 신념은 전체적으로 이롭게 작용해 왔다."(208-9)


7 예측 가능한 뇌


"생체지표biomarker란 한마디로 생물학적 상태나 질병을 예측할 수 있는 측정 가능한 표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혈구세포에 항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염의 생체지표다. 그리고 BRCA1이나 BRCA2 유전자의 특정 돌연변이는 유방암에 걸리기 쉬운 정도를 말해 주는 유전체 생체지표다. 신경과학의 발달 덕분에 이제는 특정 행동을 하는 성향이 있을 때 특정 정신질환에 걸릴지 여부, 그리고 특정 치료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점점 더 세밀하고 선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생체지표들이 확인되고 있다. 기존에는 미신과 미스터리로 바라보았던 질병들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환자에 따라 맞춤형 치료가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지금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릴지 여부를 증상이 발현되기 최고 30년 전에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진단 검사들이 나와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선천적 요인을 후천적 요인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237-41)


"건강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 도덕적 고려뿐만 아니라 정치적 고려까지도 그림에 넣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통계유전학자 데이비드 힐 박사의 연구는 높은 지능과 연관된 유전자가 장수, 행복,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와도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가 말하는 대로 인생에서 중요한 이런 측면에 작지만 의미 있는 유전적 요소가 들어 있다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지는 빈곤을 줄이기 위한 대책에 대해 논의할 때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낮은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신경발달에 불리하다는 것은 이미 연구를 통해 시사된 바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새로운 유전학 지식이 그런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위험한 부분은 정치가와 다른 사람들이 생물학을 불개입non-intervention의 논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247)


"우리는 일부 정신질환에서 환경과 생물학의 상호작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고 있지만 누가 이런 질환에 걸리고, 또 누가 안 걸릴지 예측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예를 들어 어째서 어떤 형제는 아동 시절의 정신적 외상으로 만성 우울증에 걸리고 어떤 형제는 기적처럼 마음이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을까?" "회복력이란 역경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인생관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회복력은 복잡한 현상이지만 유전적 요인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유전자 중 하나는 뇌유래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BDNF다. 이것은 기존 뉴런의 생존을 뒷받침하고, 새로운 뉴런의 성장을 촉진하고, 뉴런들 사이의 연결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대단히 유용한 화학물질을 생산한다. 이 유전자의 한 변이인 Val66Met은 BDNF가 아주 높은 농도로 발현되도록 지시한다. 이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뇌가 아주 튼튼하다."(264-6)


"하지만 잠시 유전적인 기여 요인에만 국한해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회복력에 관여하는 특정 BDNF 변이를 단일 유전자로 찾아내면 그만인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전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반응의 크기도 환경의 촉발 요인에 따라 커지고 작아진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이 회복력처럼 복잡한 특성의 경우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생물학적 개념으로 이해해 보자면 회복력은 고난에 반응하는 수많은 서로 다른 행동을 아우르는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테마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불행하게도 사회적 불안, 충동성, 취약한 감정 조절의 성향을 갖게 만드는 유전자 레퍼토리를 갖고 있는데 학대, 부상, 질병, 유기 등의 심각한 스트레스 요소도 경험한다면 당신의 정신건강을 더욱 손상시킬 일련의 강력한 환경적, 사회적 요인을 촉발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당신의 유전자 성향을 영속시키게 된다."(266-7)


# 다유전자성polygenic :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데는 단일 유전자가 아니라 여러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의미


8 협동하는 뇌


"실수투성이 뇌가 일반화하기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인간의 본성은 주요 대상 중 하나다." "나는 생물학이 인생 궤적을 좌우한다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가 바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관점이 아무리 매력적일지언정 그 관점 역시 옹호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진정한 제약과 타고난 재능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런 개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종의 전체적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수준에서는 생물학이 상당히 결정론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지나친 단순화 모형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수십 개의 고유한 현실 모형인 뇌가 서로와 마주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장엄한 복잡성과 유연성, 수십억 명이 제각기 찾고 있는 고유한 현실 모형들이 부정되어 버린다."(285-6)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행동에서 끝없이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의 신경생물학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지역 선거에 투표를 하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면 발끈하는 것도 다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법률 제정, 개입, 정책 입안 등을 통해 환경을 바꿈으로써 거시 수준의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특정 행동 쪽으로 우리를 집단적으로 유도하고 유지해서 집단 수준에서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항상 패스트푸드 대신 케일 샐러드를 선택하고, 지역 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하고, 철창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충분히 다스린다. 반면 어떤 사람은 도넛을 입에 달고 살고, 선거일에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고, 옆 차선에서 바보같이 운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린다. 대부분 사람들의 행동은 이 중간 어디쯤에 해당해서 맥락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맥락에 따라 이런 성향이 북돋아질 수도, 약화될 수도 있다."(288-9)


"사회 전반에서 더욱 폭넓게 그런 접근 방법을 추구하기로 결정하려면 자기 자신과 타인 안에서 연민, 협동, 호기심, 그리고 비판적이지 않은 마음가짐을 북돋을 필요가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인류가 개념(혹은 밈, 아이디어, 행동)의 전파를 가속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녁에 마을을 거닐며 이웃과 나누는 대화, 모닥불 주변으로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 시각 미술 전시나 음악 연주,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에 가기 등 모든 사회적 모임과 예술 표현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통해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흡수할 수 있다. 신경촬영 기술은 이런 '밈 전염' 방식에 대한 노출이 증가하면 뇌 속에서 극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사람이 그런 활동에 많이 참여할수록 뇌의 연결성도 증가한다."(307-9)


"인생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신경과학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라고 대답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수록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더 큰 힘이 실린다. 우리는 방대하고 복잡한 행동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배어들고, 놀라운 메커니즘을 통해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DNA 암호 속에 새겨지고, 또 유전자 볼륨 조절 다이얼을 통해 정신을 구성하는 회로의 구축을 지시하는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과 현실감은 본질적인 정보 처리의 제약을 안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운명을 믿게 만든다. 반면, 뇌의 또 다른 특성인 가소성, 활력, 유연성은 행동, 나아가서는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개개인의 습관을 깨뜨리려면 인내심과 함께 자아성찰, 그리고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능력도 필요하다. 우리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3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딜레마 - 위대함과 위태로움 사이에서, 시진핑 시대 열전
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안과 밖


"시진핑은 중국몽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비전을 내놓으며 자신만만한 지도자로서 등장했지만, 공산당 내부를 향해 발신한 메시지는 전혀 달랐다. 2012년 12월 첫 지방 시찰로 광둥성을 찾아가 열었던 당 내부 회의에서 그는 〈왜 소련이 해체되었는가? 소련공산당은 왜 붕괴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념과 신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정치적 부패와 이단적 이데올로기, 군부의 불충성이 지배당의 붕괴를 가져왔다. (···)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조용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 위대한 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아무도 저항하려 나서지 않았다.〉 시진핑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시진핑 리더십은 처음부터 외부로는 강력한 자신감, 내부로는 불안감의 두 얼굴로 등장했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공산당 지도부를 향해 현재 당이 처한 불안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을 강조했고, 자신이 그위기를 돌파할 비전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임을 강조하며, 시진핑 1인 체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왔다."(24)


"왜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엘리트들은 이에 동의한 것일까? 물론 '부패와의 전쟁'으로 당내 다른 파벌들의 영향력이 약화된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의 권력 강화가,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소련공산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 중국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집중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공산당 지도부의 위협 의식이 빚어낸 합의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을 〈두려움의 정치〉로 설명한다. 시진핑 1인 권력의 강화는 그의 권력욕 같은 개인적 요소보다는 통치 엘리트들의 집단적 위협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공격적 본능보다는 방어적 본능이 시진핑으로의 빠른 권력 집중과 공산당의 영도 강화를 추동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 〈지배연합으로부터 배제된 대중과의 갈등과 지배연합 내부의 권력 갈등이 엘리트들이 느끼는 위협 의식의 뿌리〉라는 것이다."(26-7)


"빈부격차를 원망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시기의 평등에 대한 향수가 커지는 가운데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빌려서 듬직한 아버지의 이미지, 공산당의 이상주의적 뿌리를 회복시키고 외세에 단호히 맞서는 강력한 지도자상을 구축해왔다.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향수를 이용하고 부패와의 전쟁으로 인기를 얻는 것은 시진핑의 라이벌인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험했던 방법인데, 그를 숙청한 시진핑도 이를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다." "시진핑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공산당 내에서 개혁을 모색하는 목소리들, 더 나은 삶과 공정함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각성, 시민사회의 성장 등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포용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중국의 길을 만들어갈 여지도 있었다. 미국의 '트럼프 난장극'에 실망한 전 세계에도 중국 모델은 훨씬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권력은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29-31)


2부 설계자들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에게 발탁되어, 후진타오 시절과 시진핑 시대까지, 최고지도자 세 명의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보좌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다. 중국공산당 당헌에 명시된 지도 이념인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공산당이 노동자·농민, 지식인과 함께 자본가의 이익도 대변하다는 이론),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지속 가능하고 균형 잡힌 성장 추진), 시진핑의 신세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싱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 시대의 비전인 중국몽과 일대일로 정책에도 왕후닝의 전략이 주요하게 반영되었다." "1986년 무렵 왕후닝은 사상계에서 (중국은 서구와 다른 고유한 정치 모델,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신권위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 공평한 기회의 땅이며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서구식 민주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기득권 집단이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46-9)


"왕후닝과 함께 중국 신권위주의를 대표하는 학자인 샤오궁친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덩샤오핑의 중국을 신권위주의1.0, 시진핑의 중국을 신권위주의2.0의 시대로 구분한다. 샤오 교수는 덩샤오핑이 구축한 중국식 신권위주의1.0은 공산당의 강권통치를 기초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지만, 공산당의 통치 지위에 도전하지만 않는다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체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다원성을 내포한 유연한 신권위주의였다고 평가한다." "시진핑 시대 신권위주의2.0은 강경 신권위주의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의 전통 조직과 이념을 강화해 지도자와 당의 중앙에 권력을 고도로 집중시키고,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 등) 보편가치, 삼권분립 같은 민감한 용어는 아예 거론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강화해 사회의 다원성을 억제하고 통치질서의 안정성을 강화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고 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51-2)


"트럼프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허물고 소프트파워를 스스로 파괴하는 동안 중국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지만, 돈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거친 외교를 벌이면서 스스로 기회를 망쳤다. 중국의 경제 채찍 외교는 분명 즉각적인 효과를 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 곳곳에서 중국에 대한 깊은 반감을 확산시킨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에 '민주주의정상회의'를 개최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은 중국의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이 중국의 약점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국제사회를 이어주는 공동의 이상이 부재한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적 힘으로 반감을 누르고 미국의 전략에 맞대응하려는 전략에 더욱 집중한다." "일각에서는 중국 외교가 처한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시진핑 지도부도 외교 고립을 돌파해야 할 필요성을 알고 있겠지만, 여전히 강력하고 위대한 중국을 과시해야 할 국내 정치적 수요가 큰 상황이다."(64-7)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왕후이, 자오팅양 같은 학자들은 중국이 중화제국의 조공 체제를 긍정적으로 되살려 서구식 근대 국제질서의 대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오팅양은 《천하체계》에서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는 국가 간의 경계성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과 구별되는 적을 분류하고 파괴하려 하지만, 중국의 천하체계는 모든 국가와 민족에 경계를 두지 않고 분류할 수 없는 '하나'로 인정하기에 진정한 세계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시진핑 시대 외교의 주요 구호인 '인류 운명 공동체' 그리고 유라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에까지 중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대일로 정책은 새로운 천하체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 중심은 중국이며 충성하는 국가에는 경제적 이익이, 불충하는 국가에는 보복이 주어지는 21세기 조공 질서다. 공유할 가치는 희미하고 돈의 힘으로만 유지되는 '인류 운명 공동체'를 세계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67-8)


3부 중화의 꿈 아래에서


"시진핑 주석은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의 틀을 가져다 위구르인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강제로 한족화하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2013년부터 시진핑 지도부는 일대일로 계획을 발표해 중앙아시아,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에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구상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주요 길목인 신장을 안정화시키는 게 더욱 중요해졌다." "당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중동·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에너지 공급 통로인 신장에 대한 통제력이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2016년 8월 천취안궈가 신장 당서기로 부임했다. 티베트에서 초강경 탄압 정책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신장에 부임한 뒤 1년 동안 경찰 9만 명 이상을 새로 채용하고 7300여 개의 검문소를 세웠다. 중국 당국의 종교 사무가 통일전선부 산하로 들어갔고, 소수민족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한족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102-3)


"2008년 베이징올림픽 직전 일어난 티베트인들의 봉기, 2009년 한족-위구르인 충돌을 계기로 중국공산당과 관련된 학자들은 소수민족의 전면적 동화에 초점을 맞춘 '제2세대 민족 정책'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은 신장에서 극단주의·분리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점은 신장 모델이 다른 소수민족 지역으로 확대되는 현상이다. 2018년 무렵부터 신장에 가까운 간쑤성 닝샤후이족자치구에서 후이족 무슬림들의 기도와 예배가 제한되고, 모스크의 돔과 첨탑이 철거된 뒤 중국식 지붕으로 바뀌었다. 네이멍구(내몽골)에선 2020년 9월 1일 새 학기를 맞아 몽골어 교육 축소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몽골어로 가르쳐온 주요 과목을 중국어로 수업하라는 정책에 맞서 몽골인 학부모·교사·학생들이 수업 거부와 시위를 벌였고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부 조선족 학교에서도 한국어 부분이 빠지고 중국어로만 된 교과서를 쓰기 시작했다."(118-9)


"2020년 5월 28일 중국인민대표대회는 홍콩 국가보안법(국가안전법)을 통과시켰다. 6월 4일에는 톈안먼 31주년 추모 시위도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범민주 진영 전면 탄압에 이어 2021년 3월 초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 당국은 '애국자의 홍콩 통치'라는 새로운 구호를 내놓고, 홍콩의 선거제도를 전면 개편해 민주 진영의 민의가 선거에 반영되는 길을 전면 차단했다. 행정장관과 입법회 의원 후보자의 자격을 사전에 심사할 위원회를 신설하고, 행정장관 선거인단에서 친중파의 비율을 더욱 늘렸다. 중국공산당에 비관적인 이들을 비애국자로 규정해 행정장관이나 입법회 의원으로 당선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홍콩 반환 당시 중국이 약속한 '홍콩인의 홍콩 통치'를 기본으로 하는 일국양제 원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홍콩의 완전한 중국화를 서두르려는 중국 지도부의 조바심이 두드러졌다."(138-40)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서 미국과 중국 모두 대만 카드를 요란하게 이용했다. 미국은 대만을 활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이 중국을 흔드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선 대만은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돌파해야 하는 '제1열도선'(쿠릴열도-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보르네오를 잇는 개념)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인 반도체 전쟁에서도 대만의 향방이 중요하다. 대만은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시진핑 체제의 중국몽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위치가 미-중 갈등에서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1월 2일에 〈대만은 중국의 내정이고 중국의 핵심 이익과 중국 인민의 민족 감정 문제〉라면서 〈어떤 외부의 간섭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력 사용 포기를 약속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151-2)


"바이든 정부는 대중국·대만 정책과 관련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미-중이 맺은 세 개의 코뮈니케, 대만관계법, 그리고 6대 보장이다. 닉슨 대통령의 1972년 방중 이후 미-중이 발표한 세 개의 코뮈니케의 핵심은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고 베이징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1982년 세 번째 미-중 코뮈니케에서 미국은 중국에게는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줄이겠다고 하면서 대만에는 '6대 보장'을 해주었다. 6대 보장은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종료 시점을 정하지 않고,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 중국과 협의하지 않으며, 대만의 주권과 관련한 미국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과거 미국 정부에서는 부각되지 않다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때리기에 나서면서 강조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6대 보장'을 대만에 대한 주요 정책으로 강조함으로써 대만을 활용하는 대중국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했다."(155-6)


4부 변혁의 불씨


"2015년 7월 9일 새벽, 여성 변호사 왕위와 남편, 열다섯 살 아들이 검은 옷의 남성들에게 끌려가 실종된 것은 긴 공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709 대체포'로 불리는 이 사건은 시진핑 시대 중국이 공산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하고 강력한 불호령이었다." "이들 중 가장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던 왕취안장은 지방정부와 부동산 회사들에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 파룬궁 수련자 등을 변호해왔다. 2015년 8월 3일 체포된 그는 2019년 1월 24일까지 1300일 넘게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채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왕취안장은 끝까지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어떻게 국가전복죄가 되느냐〉고 따졌다. 2019년 1월 24일, 방청이 금지된 재판에서 톈진 제2중급인민법원은 그에게 국가정권 전복 선동 혐의로 4년 6개월 형과 정치권리 5년 박탈을 판결했고 3개월 뒤 톈진 고급인민법원이 판결을 확정했다."(161-3)


"인권변호사들은 2000년 이후 조심스럽게 싹을 틔우고 성장해온 중국 사회의 풀뿌리 시민운동, 노동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전국에 흩어진 운동들을 이어주는 그물 같은 존재였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관영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소식을 전하려던 시민기자들, 탄압받는 소수민족들, 공산당이 금지한 지하교회(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조직에 속하지 않은 교회)와 파룬궁 신자들, 토지를 빼앗긴 이들을 변호하고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인권변호사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중국 전역에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 조직들도 이들을 통해 연대할 수 있었다. 톈안먼 시위 유혈 진압 이후 중국 당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탄압이었던 '709 대체포'는 인권변호사들의 네트워크를 궤멸시킴으로써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암흑시대를 예고했다."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의 영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면서 인민의 주체성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다."(166-7)


"한국에 배달의민족과 요기요가 있다면, 중국에는 메이퇀과 얼러머가 있다." "21세기 중국 청년들은 한국의 청년들과 나란히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통제 속에 갇힌 동지다. 많은 기업들이 동남아 국가 등으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일자리는 줄고, 음식배달, 택배 등 플랫폼으로 통제되는 노동이나 일용직으로 일하는 건설업·서비스업 중심으로 일자리 구조가 바뀌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노동자들의 각성과 권리 의식 성장을 사회불안정 요소로 판단했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2016년 자선법, 2017년 해외비정부조직관리법을 시행해 시민 단체들이 정부 승인 없이는 모금을 할 수 없고 홍콩이나 외국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했다.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사회복지 서비스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역할로 변모해야 했다.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노동자가 변화의 주체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근과 채찍'이다."(180-5)


"코로나19의 위험을 최초로 알렸다가 공안에 끌려갔던 우한중심병원의 의사 리원량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2020년 2월 7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상에서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건강한 사회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 세계에서 중국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높아진 가운데, 중국은 '우리는 세계에서 코로나19를 가장 빨리 극복했다'는 성과를 과시하면서 초기 방역 실패의 교훈은 망각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중국의 코로나 대응은 극과 극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발병 초기에 정보를 은폐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통제국가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한 봉쇄 이후 강력한 국가 권력의 힘으로 효율적으로 상황을 통제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중국 당국이 초기 대응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진실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과 외부 세계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없애고, 중국 내에서 진실을 요구하는 이들을 억압한다."(199-201)


5부 영합과 저항


"시진핑 시대 중국은 파업, 토지 분쟁, 소수민족 저항 등 사회불안에 대응해 감시·통제를 전면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주도로 도시에서는 '톈왕', 향촌지역에서는 '쉐량' 공정을 시작했다. 톈왕은 도시 말단의 행정단위인 사구社區를 좀더 작은 규모의 격자로 나누어 각각 관리인을 배치하고 관할 지역의 모든 상황을 관리·감시하게 한다. 〈군중의 눈은 눈(雪·설)처럼 밝다(亮·량)〉는 마오쩌둥의 말에서 따온 쉐량 역시 각 지역 주민들이 이웃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메그비의 페이스++안면인식 알고리즘은 톈왕과 쉐량 공정을 완벽하게 만들 화룡점정의 기술이었다." "메그비의 창업자로 2021년 33세가 된 인치는 2019년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 〈알고리즘은 아름답고 명료하고 우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장에서 인권 탄압에 그 기술이 사용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기술은 결코 잘못이 없으며, 책임은 사람이 져야 한다〉고만 답했다."(225-7)


"감시카메라, 안면·홍채인식 등 바이오 감시 기술과 관련해 2017년 한 해 동안 중국 기업은 530건의 특허를 출원해 미국의 96건을 월등히 앞섰다. 중국 밖에서 퉁팡이라는 중국 기업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지만, 이 회사의 자회사인 눅텍Nuctech은 100개국 이상의 공항과 국경에 보안 검색 장비를 판매했다. 하이크비전은 2010년에는 매출 기준 세계 10위의 감시카메라 제조업체였지만 2016년에는 1위 업체가 되었다. 2018년 세계 20대 감시카메라 업체 가운데 여섯 개가 중국 기업이다. 더 철저히 감시하면 더 많은 빅데이터가 모이고, 기술과 산업은 더 급속도로 성장한다. 감시와 산업, 돈이 하나로 얽힌 위대한 신세계다. 2019년 저장성 항저우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안면인식 기술로 학생 개개인의 표정을 분석해 얼마나 수업에 집중하는지를 감시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많은 공장에선 노동자들의 표정과 동작, 작업량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얼마나 열심히 근무하는지를 감시한다."(229)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 시장경제의 길로 나아간 이후 국가와 기업, 국유경제와 민영경제의 관계는 계속 민감하고 복잡했다." "특히 마윈은 금융 서비스 이용자의 데이터를 활용해 사업을 전방위로 확대해갔다. 중국인 약 10억 명이 알리페이로 결제를 한다. 마이그룹은 2000만 개 이상의 중소기업과 약 5억 명의 개인에게 대출했다. 여기서 축적된 빅데이터를 활용해 마이그룹은 14억 거대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수요와 물류 흐름을 꿰뚫어보면서 새 사업의 영토를 계속 넓혀갔다." "중국 당국의 경계심은 커졌다. 당국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과도하게 자금을 끌어들여 폭풍 성장한 마이그룹의 소액 대출 사업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중국판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무엇보다도 일개 민영기업가인 마윈이 14억 중국인들의 금융 생활과 정보를 과도하게 지배하는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겼다. 마윈의 금융 사업에 돈과 영향력을 빼앗긴 국유은행들도 마이그룹에 대한 공격에 가세했다."(237-41)


"왕리쥔 (망명) 사건으로 반 시진핑 정변 음모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시진핑의 길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야심가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쉬차이허우 4인방이 손잡고 공산당 지도부의 공식 결정을 뒤집어, 시진핑을 끌어내리고 보시라이를 최고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은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저우융캉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공안·정보·사법·무장경찰 기구를 관할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무장경찰 병력 일부를 움직였다는 소식이 있었다. 쉬차이허우는 공산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링지화는 후진타오 주석의 비서실장 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권한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권력을 분점해 한 명이 야심을 품으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집단지도 체제의 부작용과 불안정을 경고하며 최고지도자인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공산당이 직면한 위기를 헤쳐가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275-6)


"2020년부터 중국에선 '네이쥐안內卷'(involution)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원래 중국 근대 역사에서 아무리 노동력을 투입해도 1인당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상태, 노동량을 무한 투입해도 생산성이나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 상태를 설명하는 학술 용어다. 996(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노동)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치솟는 집값과 불평등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네이쥐안은 절박한 현실의 화두가 되고 있다. 충칭 모델과 이를 활용한 시진핑식 통치는 기득권층의 부를 줄여 보통 사람들의 몫을 늘리는 근본적인 개혁 대신, 대중의 불만과 분노, 강력한 에너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결합이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Make China Great Again)을 외치고, 트럼프는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외쳤던 것은, 두 제국의 포퓰리즘이 충돌하는 기묘한 광경이었다."(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 어쩌다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 선순환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지구촌 곳곳이 불안하다


"이제 자본은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하게 침투해 있어서 붕괴시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혁명주의자라면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그 잿더미 위에 새로운 체제가 서게 될 것이라고 한 번쯤 꿈꿔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혁명이 가능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기를 갈망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체제 내에서는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체제에 의해 수많은 기존 재화의 생산 체인과 유통을 지속해 나아갈 수 있는 정치가 존재하며, 동시에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현 체제를 점진적으로 수정하고 사회화하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한 체제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보다 사회주의적인 시대로 평화롭게 전환할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입니다."(26-8)


2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


"대처는 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경제문화 전반을 바꾸려 했습니다.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 자기계발 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주입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기업가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에 빠지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이죠. 집을 압류당해도 그것은 시스템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자립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생성된 것이죠." "자본의 본질에 대항하는 운동이 벌어지자, 자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합니다. 특히 시장에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시장구조를 체계화할 것입니다. 그 대신 사회정의라는 것은 잊어주셔야겠습니다.〉"(36)


3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파헤치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강한 정부를 등에 업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이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를 배제하자. 정부를 제거하라. 정부가 문제이므로 우리는 정부의 개입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죠. 로널드 레이건이 한 유명한 말도 있습니다. 〈정부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중략) 정부가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발을 빼지 않았습니다. 역할을 바꿨죠. 건강관리 및 교육을 비롯해 넓은 범위의 사회복지사업과 같은 복지 시스템을 창출해 국민을 지원하던 정부가 자본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정부는 자본을 옹호하고, 때로는 보조금을 주기까지 하면서 자본의 적극적인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강한 신보수주의 정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합은 신자유주의가 대중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시기에도 계속 강화되었습니다."(47-9)


4 실체 없는 금융이 세상을 지배하다


"2007-08년 금융위기 이래 통화 측면에서는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빨랐지만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진전이 일어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최근의 통화팽창은 실제로는 부유한 자들의 손에 그 혜택이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특히 양적완화라는 정책에 있어서는 사실입니다.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중앙은행들(미국의 연방준비은행, 잉글랜드은행,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은 상업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담보대출과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중앙은행들은 현금을 줬죠. 이렇게 하면 경제에 유동성이 증가하게 됩니다. 상업은행들이 담보대출과 채권을 보유하고 있으면 은행의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양적완화입니다. 2007-08년 금융위기에 반응해서 일어난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중앙은행들은 전 세계 통화공급량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늘린 돈은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 주로 자산가치를 매입하는 데 흘러 들어갔던 거죠."(64)


5 독재로 선회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권력이 정치에 개입하려면 그 진용을 잘 짜야 하지만, 지금은 극우 성향의 인종차별적인 국수주의, 더 나아가 신나치주의 정치를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브라질의 신군부독재로 나아가는 추세는 꼭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재계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재계는 계속해서 우파 성향의 정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재계 인사들 중에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신파시스트의 동맹을 막으려면 민중의 거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모든 사람이 이러한 문제들의 깊은 본질을 꿰뚫고 있어야 하며, 어떤 해결책들이 가능한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86-8)


6 사회주의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


"1960년대 당시 정의와 자유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요구가 광범위하게 퍼졌죠. 국가 및 기업자본에 의해 부여되는 강제와 시장의 강제 등에서 벗어날 자유는 물론이고, 사회정의에 부응하는 자유에 대한 요구까지 광범위하게 일었습니다." "이에 대한 1970년대 자본주의자들의 정치적 답변은 흥미로웠죠. 이들은 이러한 요구를 정면 돌파하면서 요컨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꺼이 자유를 내어드리죠. 몇 가지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요. 그 대신 정의라는 것은 잊어주셔야겠습니다.〉" "이러한 전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폴라니는 말합니다. 〈그래서 계획과 통제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공격받고 있다. 사람들은 사유재산이 자유의 핵심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는 '자유'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규제가 만들어낸 자유는 비자유라고 비난받고 있다. 그것이 제공하는 정의, 자유, 복지는 노예제도를 교묘히 위장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94-6)


7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중요성


"2008년도에 우리는 중국과 그 경제체제가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중국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중국은 갑자기 첨단산업 부문에 엄청난 속도로 진입했으며, 8년 만에 첨단기술 산업에서 주요한 경쟁자가 됐습니다." "중국은 매우 빠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엄청난 규모의 경제 혜택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강력한 정부의 개입이 혼재되어 있지만, 고도로 분권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 환경에서 부상하고 있는 '검투사 자본주의'가 기업가 문화의 중심에 절대적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인공지능을 미래라고 결정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배제하는 길을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얼마나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지는 바로 '노동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123-5)


8 자본주의의 지정학


"자본이란 성장하는 것이며, 성장하면 팽창합니다. 따라서 자본의 지리학이란 자본이 한 공간 내에서, 또 그 공간을 넘어 끊임없이 팽창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죠. 특정한 영토 내에서의 자본의 팽창은 궁극적으로는 자원, 인구, 사회기반시설 등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그 영토 내에서 특정 시점이 되면 자본의 팽창은 한계에 도달하죠. 따라서 지상의 특정 장소에 잉여자본이 계속 쌓이게 되는데, 이때 잉여노동력도 함께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잉여자본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배출구를 필요로 하죠. 이 자본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한 가지 해답은 식민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답은 자본을 수출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곳을 찾아 자본을 보내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말하는, 자본의 과잉 축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적 해결'입니다. 이러한 자본의 과잉 축적은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산물입니다."(145)


9 성장 증후군


"경제학자, 정책 입안자, 정치인 및 경제지 기자들 모두 경제의 건강과 건전성을 평가하는 주요한 측정치로 성장률을 자주 거론합니다.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는 성장률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죠. 하지만 성장에는 아주 중요한 측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성을 대부분 무시하죠. 그것은 바로 성장의 총량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는 치명적인 중요성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얘기할 때 탄소 배출량의 증가율을 조정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가 걸려 있죠. 그러나 이미 대기 중에 존재하는 온실가스의 총량도 분명 중요한 정치적 현안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즉각적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온실가스의 총량입니다. 증가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실가스의 총량이 훨씬 더 중요한 상황이죠. 이처럼 비율보다 총량이 훨씬 중요해지는 상황들이 있는 것입니다."(169-71)


10 소비자 선택권이 박탈당하다


"자본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그 급증하는 총량에 대한 시장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상품의 총량을 증가시키면 늘어난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인구가 더 많아져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인구가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이익률이 하락하는 경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상품의 총량에 대한 이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증가하는 상품의 총량이 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생산 총량의 증가, 특히 대량소비주의는 자본이 인간 생활에 미친 영향을 논할 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일로 손꼽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자본의 축적과 궤를 같이하는, 현대 소비지상주의의 끝없이 계속되는 복리성장 증후군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기후 문제에서 보듯이, 일단 어떤 일이 한계점에 해당하는 총량에 도달하면 제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187-9)


11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자본축적


"마르크스가 자본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유산계급의 견해와 설명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축적의 출발을 검약한 자본가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덕성 덕분이라는 미담으로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하고 싶었던 주된 이야기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자본축적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토지로 대표되는 생산수단에 민중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사용한 폭력적인 수단, 그리고 막 탄생한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 외에 다른 생존 수단을 박탈당한 민중들에게 가한 폭력적인 수단을 말하고자 했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도용하고 사회질서를 재편성한 것이 자본이 가진 원죄라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원시적인 자본축적은 결국,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방법 외에는 존재할 수도,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는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94-8)


12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


"저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을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방식과 달리, 강탈에 의한 축적에 점점 더 심하게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집중화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죠.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시장에서 쫓겨난 소규모 제조업자들의 자산을 훔치고 그것을 통합합니다. 인수와 합병은 요즘 거대한 산업 형태를 띠고 있죠. 거대 자본은 소위 송사리들을 인수해 집어삼키고는, 단순히 그 자본을 인수해 자신의 권력과 덩치를 키웁니다." "이런 자본의 축적은 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 과정을 아주 세심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부富란 것이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탈취되어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이 자산가치를 계속 올리는 재평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의 축적은 이제 생산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자산가치를 조작해서 교환하는 것에 기대고 있죠."(207-9)


# 기업담보차입매수 전략을 동원한 인수 합병, 젠트리피케이션, 기업 내 연금 및 건강보험 의무조항 삭제 등


13 생산과 실현


"1970년대 이후의 탈산업화 때문에 육체노동 일자리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제가 제일 잘 아는 미국과 영국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나라의 경우 모두 기술 변화로 일자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지난 30년 내지 40년에 걸쳐 없어진 일자리의 약 60%는 기술 변화 때문이었죠. 그 나머지는 주로 오프쇼링, 즉 임금이 싼 중국, 멕시코 등지로 저임금 일자리를 보내버린 것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사라졌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전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 않을 뿐이며, 전과 같은 일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고용 자료를 들여다보면 맥도날드, KFC, 버거킹 같은 업종에서 고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자계급은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곳의 일자리는 임시직인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잠시 일하다 떠납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가 힘듭니다."(219-21)


14 탄소 배출과 기후변화


"우리는 화석연료를 태워서 탄소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경제를 개발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정치경제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자본축적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중국이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투자 같은 방식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2007-08년 이후의 자본주의가 주로 중국 및 경제가 부상하던 국가에 기대어 살아난 거라면, 자본주의의 생존 자체가 대기 중 탄소 급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들 국가의 경제 팽창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탄소의 농도라고요. 지구촌은 가능한 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 끊임없이 복리 이자율로 축적되는 자본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241)


15 잉여가치의 변화율 대 총량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자유무역과 이윤 균등화라는 조건에서는 부유한 지역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지역은 그대로 침체되거나 더욱 가난해지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윤율의 균등화가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은(기술혁신이 미비한) 19세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20세기에도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던) 브레턴우즈 협정이 깨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줄곧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진정한 특징은 이윤율의 균등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는 노동집약적인 경제체제에서 자본집약적인 체제로 가치가 훨씬 더 많이 이동하는 현상을 목도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노동집약적인 경제체제와 자본집약적인 체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이제는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특정 국가나 지역의 자본집약화를 막으려는 것이 국제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중국에게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249-54)


16 소외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고용됩니다. 그리고 상품을 생산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 어떠한 힘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제품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가 창조한 가치가 자본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 상품도 자본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둔 기술적인 소외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만 소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은 시장체제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시장체제 때문에 자본가들은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떤 일정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의 강제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시장은 훈육을 통해 자본가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이중 소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소외가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죠."(260-2)


1960, 70년대부터 자신의 소외를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노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외가 덜한 방식으로 노동과정을 다시 구축하고, 공장 작업 현장 내에서 노동자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아주 다른 방법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자연합회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1968년의 봉기는 젊은이들이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계급과 기업들은 젊은 세대의 욕구에 보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선택의 자유와 문화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에서 소비지상주의를 재구성하여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상적 소비주의compensatory consumerism'라고 칭할 수 있는 이론이 탄생했고, 보상적 소비주의 행태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실상 자본은 소비자 틈새를 공략했고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 틈새를 창출했죠. 이것이 사회적 파편화를 초래했습니다."(268-70)


17 소외당하는 노동자: 공장 폐쇄의 정치


"자본의 관점에서 보는 노동은 사용가치에 불과하며, 생산에 필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일회용이며, 일정한 환경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노동은 가족의 생활이며, 사회관계이며,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이며, 노조의 일원으로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기업은 효율과 수익률만 강조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역사회의 삶에 기업은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본은 지역사회의 모든 것을 내팽개쳤습니다. 사회관계, 사회적 서비스 구조 등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지역사회 자원을 버린 것이죠. 더 나은 방법으로 이러한 전환을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지만, 자본은 이런 방법을 포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자본가들은 계속 같은 방법으로 움직일 뿐입니다."(289-92)


18 코로나19 시대의 반자본주의 정치


"코로나19 시대로 들어서면서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에 폭발한 소비지상주의는 붕괴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전의 소비지상주의는 회전 시간을 거의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단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죠. 회전 시간이 최대한 짧은 소비지상주의로 몰려든 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자본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해외관광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2010년에 8억 건이었던 해외관광은 2018년에는 14억 건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순간적 체험 소비지상주의를 유지하려면 공항, 항공사, 호텔, 식당, 테마파크, 문화 행사 등 막대한 기반 시설 투자가 필요했죠. 이러한 자본축적 분야는 이제 한물갔습니다."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적 소비지상주의의 첨단 모델이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그리고 있는 나선형 궤도가 전 세계 곳곳의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는 것이죠."(305-6)


19 집단적인 딜레마에 대한 집단적인 반응


"마르크스는 항상 집단 행동이 추구하는 종착점은 바로 개인의 자유로운 개발이라는 생각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회의 일상생활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필요노동의 전반적인 감소'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 자체가 '움직이는 모순 덩어리'라는 점입니다. 〈자본은 노동시간을 최소한도로 줄이려고 압박을 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로지 노동시간을 부의 척도와 원천으로 본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시간을 필요한 방식으로 실제 필요한 만큼 줄이고서는 잉여노동시간을 불필요하게 늘립니다. 불필요하게 늘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잉여가치입니다. 누가 이 잉여가치를 갖는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되풀이해서 말하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진정한 뿌리는 하루에 6시간 노동을 통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324-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1장 MEGA: 경제학을 다시 위대하게


"이 책에서 우리는 경제 사안을 다루지만,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더 큰 개념이 언제나 우리 작업의 지침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후생을 소득이나 물질적인 소비로만 협소하게 정의하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인정과 존중,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편안함, 압박 없는 가벼운 마음, 존엄과 자존감, 즐거움 등이 모두 중요하다. 소득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단순히 편리한 지름길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을(때로는 매우 영민한 경제학자들마저) 잘못된 경로로 이끌고, 정책 결정자들을 잘못된 결정으로 이끌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강박으로 이끄는 왜곡된 렌즈다." "인간의 존엄을 다시 중심에 놓는다면 우리는 경제의 우선순위와 사회가 구성원들을 (특히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돌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28-9)


2장 상어의 입


"최근에 수행된 실험 연구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선거에서 광장히 유리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미국에서 진행된 한 실험에서는 연구자들이 두 종류의 질문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이주에 대한 응답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찬성 또는 반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의 규모와 속성에 대해 응답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정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정보' 질문지를 '견해' 질문지보다 먼저 받은 사람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하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사실정보를 먼저 상기한 사람들은 이주에 반대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더 높았다. 실제 숫자를 알려 주자 사실관계에 대한 생각은 달라졌지만 이주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즉, 사실관계는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지 못했다. '이주'라는 주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더 편협해지고 사실정보는 그 견해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35-6)


# 이주에 대한 '경제적' 논증

1. 경제 여건이 훨씬 좋은 나라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자기 나라에 있을 때보다 고소득을 올릴 것이 분명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2. 따라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나라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3. 그렇게 들어온 이주민들은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에서 임금을 내리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해 기존에 우리나라에 있던 사람 대부분은 경제상황이 전보다 악화될 것이다.


"이 논리는 단순하고 솔깃하다. 다만 틀린 논리라는 게 문제다. 우선, 국가 간 임금 격차(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역 간 임금 격차)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느냐 마느냐와 크게 상관이 없다. 물론 자기 나라에서 절망적인 수준의 빈곤에 처해 그곳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설명되어야 할 수수께끼는 자기 나라를 벗어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설령 실제로 저숙련 이주민이 노동시장에 많이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도착국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이주민들과 숙련 수준이 가장 비슷한 사람들[즉, 직접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이주민과 경쟁 관계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오히려 이주민이 들어오면 이주민뿐 아니라 도착국 사람들도 대개 경제적 상황이 전보다 나아진다. 사실 노동시장은 수요-공급 법칙의 표준적인 이야기와 부합하는 면이 별로 없다."(37-8)


"이라크, 시리아, 과테말라, 예멘 등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나라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아니다." "이 나라들에서 탈출하고자 한 사람들은 라이베리아나 모잠비크의 평균적인 거주자가 겪고 있는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도 더는 자기 나라에 머물 수 없겠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 것은, 멕시코 북부에서 벌어진 '마약과의 전쟁'이나 과테말라의 끔찍한 군부 독재 혹은 중동의 내전 등이 불러온 끔찍한 폭력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일상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업 소출이 안 좋았던 해에도 고향을 지켰던) 사람들이 네팔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옛 마오주의 무장세력이 다시 발흥해 폭력이 격화된 다음이었다. 이때 그들은 '상어의 입'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39)


"하지만 왜 사람들이 이주를 하지 않는지는 애초에 수수께끼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가 이주의 이득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주의 이득을 가늠할 때의 일반적인 실수 하나는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의 임금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이주를 결심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과 성공적으로 이주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주를 택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남달리 체력이 강하거나 해서 자기 나라에 머물렀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소득을 올렸을 사람들일 것이다. 이주자들이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는 일에 많이 종사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체력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주자의 소득과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득을 단순 비교해서 이주가 막대한 이득을 준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주를 독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논거이긴 하지만) 너무 순진한 접근이다."(41)


# 고전적 수요-공급 이론이 이주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

1. 새로운 노동자들이 유입되면 일반적으로 수요 곡선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즉, 노동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증가한다.

2. 저임금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경우, 노동 집약적인 기술을 도입할 유인이 줄어들어 기계화가 늦어진다.

3. 고용주들이 새로운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생산 과정을 재조직(가령, 현지인의 직업적 계층 상승 같은)한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가령 도매시장에서 수박을 사는 것과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수박을 사는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오래 이어진다. 수박은 품질이 맘에 안 들면 다음 주에 바로 공급자를 바꿀 수 있지만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둘째, 노동자의 질은 수박보다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자신이 채용하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모종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요컨대 이주 노동자가 이미 취직되어 있는 현지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일을 더 낮은 임금을 받고 할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는 이주 노동자들이 현지인이 하지 않으려 하는 일 혹은 현지인이 가지 않으려 하는 지역에 몰리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런 직종이나 지역에서는 이주자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이 일자리는 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61-5)


"하지만 비숙련 이주자들이 노동시장에서 비숙련 현지인들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가 아니라고 했던 우리의 설명은 고숙련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 이들은 일반적으로 최저임금 수준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받는다." "둘째, 고숙련 노동자를 채용할 때 고용주는 그가 해당 업무에 적합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인간성은 어떠한지 등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 "많은 이들이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을 지지하지만,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이 국내 인구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숙련 이주자가 들어오면 저숙련 현지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고숙련 직군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기존보다 싸게 누릴 수 있다(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서 일하는 의사는 개도국 출신 이민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슷한 숙련 수준을 가진 현지인들(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교수 등)의 고용 전망을 악화시키는 비용이 따른다."(65-7)


"이주민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이 경제적 합리성을 잘못 이해한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서도 기인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제의 괴리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20세기 초에 유럽 이민자가 많이 들어왔던 미국 도시들은 이민자 유입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얻었는데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적대적인 반응이 촉발되었다. 도시 당국은 이민자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조세와 공공 지출을 줄였다. 특히 학교처럼 타 인종, 타 민족 간에 접촉과 소통을 촉진할 법한 분야와 하수 시설, 쓰레기 수거처럼 저소득층 이민자에게 도움이 될 법한 분야의 공공 지출이 크게 삭감되었다. 또한 이민자 유입이 많았던 도시 대부분에서 민주당(이민을 지지했다)의 득표가 줄었고 더 보수적인 정치인들, 특히 1924년의 이민 제한법National Origins Act(이 법으로 외국인이 미국에 아무 제약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났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선출되었다."(98-9)


3장 무역의 고통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인 경우가 많고 대체로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가난하므로, 무역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 나라의 불평등을 감소시킨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노동자가 손해를 보고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득을 보기 때문에 불평등이 증가한다. 가령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 개방이 이루어지면 임금 면에서 미국 노동자는 손해를 보고 중국 노동자는 이득을 본다. 그렇다고 미국 노동자들이 꼭 전보다 못살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새뮤얼슨이 이후의 논문에서 보여 주었듯이, 자유 무역을 하면 국가 전체적으로 GNP가 올라가므로 만약 미국 사회가 자유 무역의 수혜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미국 노동자들도 전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질 수 있다. 문제는 그 '만약'이 너무나 큰 '만약'이라는 데 있다. 노동자의 후생이 정치 과정에 좌우되어 버리는 것이다."(108)


"스톨퍼-새뮤얼슨 정리는 세 가지의 명백한 함의를 가진다. 두 가지는 긍정적이다. 무역 개방은 모든 나라의 GNP를 올리고, 가난한 나라의 불평등을 줄인다. 한 가지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재분배 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불평등이 증가한다. 연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정을 하는지에 따라 국가 간 비교를 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문제는 실증 근거들이 이러한 예측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30년간 많은 저소득 및 중위소득 국가가 무역을 개방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나라에서 벌어진 소득 분배상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암시하는 것과 반대였다. 스톨퍼-새뮤얼슨 정리에 따르면, 저숙련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서는 무역이 개방되면 저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서 불평등이 줄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보다 임금상의 이득을 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109-16)


"(한 나라 안의 여러 지역들에 무역 자유화가 끼친 영향을 다루고 있는) 토팔로바의 논문이 국제무역을 전공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왜 위협적으로 느껴졌을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통적인 무역 이론에서 무역의 이득은 자원이 더 효율적으로 재분배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무역 자유화에 더 강하게 노출된 지역과 덜 노출된 지역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토팔로바의 발견은 자원(토팔로바의 논문에서는 노동력이지만 자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이 그리 쉽게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원(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면 모든 곳의 임금이 동일해지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토팔로바만이 아니다. 많은 연구가 무역으로 자원의 재배분이 이뤄진다는 가설에 대해 실증 근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과 돈이 기회를 따라 움직인다는 개념을 포기하고 나면, 무역이 득이 된다는 우리의 신념을 어떻게 고수할 수 있겠는가?"(122-3)


"'이름값'을 갖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된다. 구찌 향수나 페라리 노트북을 사는 소비자는 '구찌'와 '페라리'라는 브랜드를 보고 이 제품들에서 딱히 '혁신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브랜드 가치가 매우 높은 구찌와 페라리가 자신의 평판을 손상시킬지 모를 질 낮은 제품을 판매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리고 값비싼 명품을 쓸 때 으스댈 수 있다는 점이 주는 매력에서) 그 제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국제 무역이 단지 제품 가격, 좋은 아이디어, 낮은 관세 장벽, 값싼 운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평판이 없는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 신규 행위자가 시장에 진입하고 시장을 점유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에 노동의 경직성까지 고려하면,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기초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거기에서 자유 무역의 이득이 발생한다'는 가정은 현실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다."(136-9)


"신규 진입자에 대한 의구심 자체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될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그 회사는 곧 망할 것이고 그러면 고객 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했을 때 서구에 살았던 중국계, 인도계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서구에 살면서 자신이 쌓은 평판과 네크워크를 활용해 구매자들(종종 자신이 거래해 본 곳들)에게 중국과 인도의 제품이 믿을 만하다고 보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성공 스토리가 있으면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 구매자들이 성공적으로 도약을 한 업체 주위로 모이면, 또 다른 구매자가 이 업체와 거래를 하는 구매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 업체를 신뢰하게 된다. 따라서 거래가 성사되어 주문을 받은 신생 기업은 이것이 '낮은 기대의 저주'가 일으키는 악순환을 깰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납품을 맞추고자 한다."(140)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조의 생산 모델이 이제 또다시 변화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에 속할 두 기업 아마존과 알리바바가 온라인 플랫폼을 열어 중개상 역할을 대신하면서, 개별 생산자가 중개업체에 의존할 필요 없이 (물론 비용을 내고) 그 플랫폼에서 스스로의 평판을 구축하게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좋은 리뷰를 받기 위해 판매자들은 제품을 불합리할 정도로 낮은 가격에 내놓는다. 리뷰 수가 늘어나고 또 '좋은 리뷰'의 수가 늘어나면, 나중에 가격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플랫폼에서 신규 업체가 소비자들에게 품질에 대한 신뢰를 줄 만큼 평판을 쌓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판 구축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제3세계에 고립된 생산자가 국제 시장에 진입해 경쟁을 시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가 만드는 제품이 얼마나 품질이 좋든지, 얼마나 값이 싸든지 간에 말이다."(144)


"경제학자들은 무역으로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을 시장이 알아서 돌볼 것이라고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무역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보리라는 것' 또한 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설명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역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회가 [재분배 정책을 통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피해를 상쇄해 줄 수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터, 돈, 핸슨은 중국과의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을 살펴본 경과,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이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약간 더 많은 돈을 받긴 했지만 잃어버린 소득을 상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역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지역과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지역을 비교한 결과, 전자의 지역에서 성인 1인당 소득은 549달러나 줄었는데 정부의 이전 지출transfer payment을 통해 받은 돈은 겨우 58달러 증가했다."(153)


"하지만 시장이 크지 않으면 기업 규모가 커질 수 없다. 일찍이 1776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듯이,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범위에 의해 제약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제 교역이 가치를 갖는다. 고립된 공동체에서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기업이 존재하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나라가 철도가 놓이면서 지역 간 장벽이 극복되어 국가 단위의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대대적인 경제 변화를 경험했다." "국내 시장이 잘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경제의 경직성은 더 심해진다. 그러면 국내 각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제 교역의 이득을 누릴 수 없게 되거나 오히려 손해를 입는다. 가령 도로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최종 재화와 중간재 모두, 운송 수단이 열악하면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비용상의 장점이 상쇄된다. 이런 면에서, 국내 시장의 연결을 향상시키면 국제 시장에 통합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164-5)


4장 좋아요, 원해요, 필요해요


"1977년 노벨상 수상자이자 시카고 학파의 거목인 게리 베커와 조지 스티글러는 〈취향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경제학자는 사람들의 선호를 구성하는 기저 요인들을 파고들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만약 어느 두 사람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도 바닐라가 더 좋은지 초콜릿이 더 좋은지, 북극곰을 구해야 하는지 아닌지 등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각자의 자아를 구성하는 내재적인 무언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말에 따르면 선호는 변덕도, 실수도, 사회적 압력에 의한 반응도 아니며, 사람들 각자가 무엇을 가치 있게 보느냐가 반영된,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베커와 스티글러는 물론 늘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고자 할 때는 선호를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이자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180-1)


"그런데 베커와 스티글러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선호가 '합리적'일 뿐 아니라 '안정적'이라고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선호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한다. 학교도, 부모의 잔소리도, 광고판과 화면에 나오는 메시지도 우리의 '진정한' 선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렇게 가정하면,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거나 동료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의사결정을 하는 가능성(다들 하니까 나도 문신을 한다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히잡을 쓴다거나)은 배제된다. 물론 뛰어난 사회과학자인 베커와 스티글러는 선호가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불합리해 보이는 선택을 설명해야 할 때 그것이 사실은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들을 고찰하는 것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논리에는 완전히 마음을 닫고서 단순히 그것을 '집합 히스테리'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접근 방식이라고 보았다."(183-4)


"물론 개개인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그 결과가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군중 행동herd behavior은 '정보 폭포informational cascade' 현상을 낳는다. 처음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토대가 된 정보가 이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에 이뤄진 한 실험은 첫 번째 사람 '단 한 명'의 무작위적인 행동으로도 그러한 폭포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는 레스토랑 등 서비스업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웹사이트와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다. 이 웹사이트에 사용자가 평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그 평에 대해 '좋아요'나 '싫어요'를 누를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약 10만 개의 평 중에서 일부에는 평이 올라오자마자 '좋아요'를, 일부에는 올라오자마자 '싫어요'를 눌렀다. 어떤 평에 대해 최초의 반응이 '좋아요'이면 다음번 사용자도 '좋아요'를 누를 가능성이 32퍼센트나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185)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공동체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규범이 스스로 강제력을 갖는다고 해서 그 규범이 꼭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규범이 부과하는 규칙이 반동적, 폭력적, 파괴적인 대의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1992년의 한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실제로는 아무도 인종이나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차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무도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성관계나 결혼에서 카스트의 경계를 넘으면 '잡혼'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배제된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미래의 결과를 숙고해 결정을 내리는 한, 그리고 결혼이 하고 싶은 한, 이 규칙만으로도 '잡혼'을 하지 않는다는 규범을 모든 사람이 지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모두가 그 규범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충분히 많은 사람이 규칙을 깨기 시작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189)


"오늘날 미국의 흑인들이 1965년에 비해 훨씬 더 교육을 많이 받고 있긴 해도 교육 수준이 비슷한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 사이의 소득 격차는 증가하고 있고 현재는 거의 30퍼센트에 달한다. 이는 인도의 '지정 카스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임금 격차보다도 큰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대선 이래 미국에서 지배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은 흑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분노를 훨씬 넘어선다. 이민자는 〈우리의 일자리〉만 〈가로채는〉 게 아니라 백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범죄자이고 강간범〉이라고 이야기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민자가 적은 주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민자가 거의 없는 주(와이오밍, 앨라배마,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아칸소 등)에서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이민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이 경제적인 불안보다는 '정체성'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195-6)


"자기 차별, 즉 스스로가 자신의 집단을 차별하는 현상이 매우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미국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의 유명한 실험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스틸은 동일한 과제에 대해 '실험용 문제풀기 과제'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 사이에 성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지능 테스트'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현저히 낮은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경우에 자기 차별은 자기 강화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고, 다시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사례들을 보면, 이것의 영향을 받는 집단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자기 실현적 예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은 언제나 전통적으로 불리한 사회집단이었던 사람들이다." "요컨대, 편견을 일으키는 고정관념은 사회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203-7)


"우리의 믿음, 심지어는 우리가 자아에 내재된 선호 체계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상당히 많은 것이 설명된다." "〈동기부여된 믿음motivated beliefs〉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티롤과 베나부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을 너무 문자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감정적인 '필요'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에 감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왜곡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우리를 덫에 걸리게 만든다.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기는 싫기 때문에 타 집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면 그들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아내서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싶어진다."(212-3)


"이것은 '사실 확인'이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는 데(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왜 그렇게 영향력이 없는지도 설명해 준다.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네가 감히 내가 믿는 것들에 도전을 할 수 있는가〉라는 초기의 감정적인 반응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들이미는 것은 사실을 표현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므로, 나의 가치판단을 상대에게 부여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하게 하는 것이 상대의 편견을 줄이는 데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때문에 기술 진보나 무역과 같은 교란으로 일자리가 위협에 처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생존 보장을 넘어서 존엄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 정책은 그들이 자존감의 상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215-7)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잃어 버렸다. 민주주의는 퇴색되었고 마치 여러 부족 간의 합의와 비슷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부족들은 우선순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신중하게 고려하기보다 부족적 충성심에 기반해 투표를 하고 가장 규모가 큰 부족들의 연합이 승리한다. 그들의 후보가 아동학대자인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지른 사람인지 등은 상관없다. 상대편이 집권할 가능성을 지지자들이 몹시 우려하는 한, 승리자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서 공포심에 불을 지피는 데 매진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잡고 나면 그 권력을 이용해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며, 대안적인 목소리를 닫아 버리려 한다. 더 이상 '경쟁'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다른 사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238)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의 자존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개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만이 평범한 사람들이 관용적인 생각에 더 많이 열려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종주의, 반이민자 정서, 정당 간의 소통 부족은 상대방과 접해 본 경험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일찍이 1954년에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고든 올포트는 적절한 여건하에서 타 집단 사람들과의 접촉을 늘리면 편견을 줄이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접촉 가설contract hypothesis'을 제시했다." "접촉 가설이 옳다면, 학교와 대학이 매우 중요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사고가 더 유연한 젊은 시기에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의 룸메이트를 무작위로 배정하는 실험을 한 결과,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과 룸메이트가 되면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를 현저히 더 많이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239-40)


"문제는, 적극적 우대 조치 자체가 오늘날 극단화된 싸움의 소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 간에 접촉을 늘려서 사람들의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는 좁은 목적에서 보자면,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올포트가 제시했던 원래의 접촉 가설은 접촉이 편견을 줄인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몇몇 조건이 만족될 때만 그렇다는 것이기도 했다. 올포트는 특히 상이한 집단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 또 공동의 목적과 집단 간 협동, 그리고 법과 관습과 권위자의 지원이 있는 상태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만 편견을 줄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적대적인 상태로 접촉이 이뤄지면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기 어렵다. 가령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의 좁은 문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느끼고, 더 나쁘게는 경쟁이 상대 집단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상대 집단에 대해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될 것이다."(241-6)


# 편견의 네 가지 시사점

1. 편견을 가진 사람(가령, 인종주의자,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하는 사람 같은)을 경멸하는 것은 세상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데서 나오는 그들의 견해를 더 강화할 뿐이다.

2. 편견은 '절대적인' 선호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 우세주州의 주민들이 오바마 케어 도입에 찬성한 경우처럼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책은 당파적 편견을 이겨내기도 한다.

3. 인종주의 같은 편견에 기반한 투표는 사실 '무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유권자들은 인종, 민족, 종교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발언이 정치적 제스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편견과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직접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안들을 논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5장 성장의 종말?


"1973년(혹은 그즈음)에 모든 성장이 멈추었다. 그 이후 25년 동안 총요소생산성의 성장 속도는 1920~1970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경기 침체는 시작 날짜도 특정할 수 있고 비난을 돌릴 만한 명백한 행위자(석유수출국 정부들)도 존재했던 특수한 경제 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정상 상태)이 되었다." "성장의 둔화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을 무렵, 사람들은 컴퓨터 기술이 추동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곧 도래하리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1995년부터 몇 년간 반짝하던 이 호황은 곧 사라졌다." "논쟁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언젠가는 생산성의 고속 성장이 다시 돌아오고 지속될 것인가? 둘째, (결국 GDP도 상당 부분 추측이 개입되는 지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경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행복과 효용을 GDP라는 지표가 다 포착하지 못해서 지표상으로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262-3)


#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 노동생산성 증가분 중 교육이나 기술 발전 같이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요인들을 다 동원하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


"총요소생산성의 성장은 1995년에 시동이 걸렸다가 2004년에 둔화되었다. 그런데 2004년은 페이스북이 우리 삶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해다. 그리고 2006년에는 트위터가, 2010년에는 인스타그램이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러한 플랫폼들의 공통점은 명목 가격이 공짜이고,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것이 GDP에 잡히는 부분이다)은 그것이 일으키는 후생(혹은 마이너스 후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측정된' 생산성의 성장이 둔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 소셜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한다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여기에서 GDP에 '잡힌 것'과 '잡혀야 마땅한 것' 사이에 격차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봄직하기 때문이다. 혹시 진정한 후생의 증가라는 면을 GDP 통계가 통째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268-9)


"(1956년에 이미 장기 성장률의 둔화를 예측했던) 솔로우는 국가들 사이의 균형 성장률이 왜 차이를 보이는지는 각국의 '운'이라고 보기로 했다. 즉, 솔로우는 어느 나라에서 총요소생산성이 향상되는 속도는 해당 국가가 가진 정책 체계의 속성이나 문화 제도적 요인 등과는 상관없고, 우리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이 성장에서 수행하던 역할을 거의 다 해서 자본 투자의 수익률이 충분히 낮아진 다음에는 장기적으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솔로우의 모델이 알려 주는 바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경제학자들은 솔로우의 모델을 '외생적' 성장 모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외생적'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진 요인에 의해 추동된다는 의미이고, 이는 장기 성장률과 관련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장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279-80)


"로머가 제시한 새로운 통찰은, 솔로우 효과[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이윤율이 저하되는) 수확 체감이 발생한다]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전체 자본의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가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별 기업들은 모두 수확 체감 법칙의 적용을 받더라도, 이 개념[경제 전체적인 수확 체증]이 여전히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솔로우의 세계의 기업들과 매우 비슷하지만 한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실리콘 밸리 기업들은 통상 우리가 '자본'이라고 생각하는 것(기계, 건물 등)보다는 경제학자들이 '인적자본'이라고 부르는 것(특화된 전문성 등)에 더 크게 의존한다. 실리콘 밸리의 많은 기업은 시장화시킬 수 있는 뛰어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똑똑한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때로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284-5)


"로머의 이론으로 설명해 보자면, 실리콘 밸리는 아이디어의 교차 수분이 가능한 환경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게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로머는 성공한 모든 산업 도시에서 이와 같은 동학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중반의 맨체스터, 금융 혁신기의 뉴욕과 런던, 오늘날의 중국 선전이나 캘리포니아 베이에어리어 등 모두에서 토지와 노동의 희소성(부분적으로 노동이 희소해지는 이유는 토지가 희소해서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이 유발하는 수확 체감이, 고숙련 인력들이 서로 지식과 영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막대한 활력으로 상쇄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다시 고숙련 인력들이 한층 더 이곳에 모여들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높은 성장률이 영속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솔로우 모델이 상정한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신비로운 요인의 도움이 없더라도 말이다."(285-6)


"종합해 볼 때, 결국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우선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지는 비교적 명확한 듯하다. 초인플레, 극도로 고평가된 고정 환율, 소비에트나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 또는 북한과 같은 종류의 사회주의, 1970년대에 배부터 신발까지 온갖 것을 국영화했던 인도 정부의 정책처럼 민간 기업을 질식시키는 정책 등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 알고 싶어 하는 질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답이 아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지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베트남이나 미얀마가 오늘날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중국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이지, 북한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중국이 매우 시장화된 경제이긴 하지만(베트남이나 미얀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식은 고전적인 앵글로색슨 모델과 전혀 다르고 유럽식과도 다르다는 점이다."(317-8)


"우리는 중국의 경험 중에 정확히 무엇을 따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상대적으로 훌륭한 교육과 의료 시스템이 있었고 굉장히 평등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가난한 경제였던 덩샤오핑의 중국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존 지배 계급의 문화적 특권을 모조리 쓸어 없애고 모든 사람을 평평한 운동장 위에 놓고자 했던 '문화 혁명'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본의 침략을 받아 중국의 자존심이 막대하게 훼손되었던 1930년대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국 5,000년 역사를 처음부터 밟아야 하는가? 일본과 한국을 본받고자 말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접근 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방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부유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면 성장하게 할 수 있을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318-9)


"우리가 알아 본 모든 성장 이론이 토대를 두고 있는 핵심 신조는 가장 생산적인 사용처로 자원이 부드럽게 이동하리라는 것이다. 시장이 완벽하게 기능하는 한에서는 당연한 가정이다." "하지만 때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나라 경제를 보아도 생산적인 기업과 비생산적인 기업이 모두 존재한다." "개도국의 테크놀로지 문제는 수익성을 높여 줄 테크놀로지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접근이 가능한 테크놀로지조차 최선으로 이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테크놀로지뿐 아니라 토지, 자본, 숙련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많고 어떤 기업은 노동자를 충분히 고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기업은 굉장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자금이 없고, 어떤 기업은 딱히 경영을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퇴출되지 않고 계속 시장에 남아 있다. 거시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자원 배분상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324-5)


# 자원 배분 문제가 생기는 이유

1. 미성숙한 자본 시장과 은행 제도 : 생산적인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해, 비효율적인 기업들도 생존한다.

2. 성장 이외의 기업 목표 : 현재의 생산 수준에 만족하거나,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일 등이 기업의 목표인 경우가 있다.

3. 부족한 좋은 일자리 :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구직자의 눈높이와 일자리의 현실이 어긋나는 경우, 취업을 연기하기도 한다.


"자원 배분상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펴보았던 모든 사례가 예외 없이 말해 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추상적인 모델을 넘어서 자원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어느 나라가 자원 배분이 매우 왜곡된 상황에서 출발했다면(가령 공산주의 시절의 중국이나 정부가 극도로 경제를 통제하던 시절의 인도처럼), 개혁을 통해 처음에 발생하게 될 이득은 주로 자원이 더 잘 사용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가는 데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중국 같은 몇몇 나라가 한동안 매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가용한 자원과 인력이 너무나 잘못 사용되던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낭비된 자원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성장이 빠르게 둔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시점 이후부터는 추가적인 자원이 투입되어야 성장이 가능하다. 이 말은 이제는 향상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343)


"경제 성장의 근본 메커니즘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게 언제이든 간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에 초점을 둔 정책을 추진하면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모두 자국 경제 내에서 명백한 낭비 요인들을 없앨 수 있다. 이것으로 영속적인 고도성장에 불을 당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후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성장의 기관차가 다시 달리게 될지, 언제 그렇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읽고 쓸 수 있게 되고, 당장의 절박한 처지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면 성장의 기차에 올라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계화의 승자인 나라 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 시기 동안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중국, 베트남 등)이거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타이완, 한국 등)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352-3)


6장 뜨거운 지구


"더 나은 기술이 온실가스 배출을 상당히 저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너무 낙관적이다. 결국, 사람들의 소비가 줄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물질적 소비를 후생의 척도로 삼는 버릇이 있다. 둘재, 경제학자들은 행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의심스럽게 본다. 선호를 바꾸는 것과 관련될 때는 더욱 그렇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선호를 '조작'하는 것에 대해 철학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선호는 내재적이고 '진정한' 것이며 그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의 깊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행동을 바꾸도록(가령, 소비를 줄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소비를 하도록) 설득하고 확신시키는 것은 그들의 내재적인 선호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본질적이고 일관성 있는 '선호 체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371-2)


"오늘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미래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게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 소비가 중독과 비슷하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담배에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높은 세금이 도입되면 처음에 그 행동을 줄이도록 독려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일단 적절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행동이 조정되고 나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조세를 계속 높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을 덜하는 쪽으로 (따라서 세금을 덜 내는 쪽으로) 다들 습관이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습관'은 그것을 바꾸고자 할 때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에너지를 잡아먹는 재화들에 대해 '미래'에 새금이 급격히 인상될 것이라고 발표하면 그것을 예상해서 미리 익숙해지고자 사람들이 '현재' 습관을 조정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375-6)


"부유한 나라들이 펑펑 쓰면서 저질러 온 일에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하지만 개도국을 기후 위기 대응에서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개도국에 대한 일시적인 유예 조치는 앞으로 한참 동안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기술이 사용되도록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유예라 해도 그 효과는 그렇게 일시적이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개도국에 있을 것이므로 선진국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기후 위협을 차치하더라도 개도국이 현재 수준의 대기 오염을 지속할 (혹은 더 증가시킬) 여력이 있는지다. 개도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현재' 개도국 국민들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또 다른 문제, 즉 긴급한 공중 보건상의 유해 요인으로 자리잡은 대기오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377-8)


"관건은, 이 문제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싸우는 구도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가 조세와 규제로 자국의 탄소 배출을 줄이고 가난한 나라의 에너지 및 기술 전환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한다면 부유한 나라의 경제 성장이 둔화될지도 모른다(물론 둔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을 일으키거나 저해하는 요인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이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그로 인해 지구에 득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경제학자들은 자원이 재분배될 수 있으며 재분배되리라고 믿고서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덫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가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불평등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이것이 세계 전역에서 폭발 직전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숱한 악영향을 야기했다는 사실이다."(384-5)


7장 자동 피아노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이번의 자동화 파도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도 자동화의 파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처럼, 과거의 제니 방적기,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칩, 컴퓨터 기반 학습 기계와 같은 기술 모두가 자동화를 불러왔고 인간 노동력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다들 예상하시는 바대로다. 몇몇 직무에서 인간 노동자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자동화는 강력한 대체 효과를 일으켰다. 노동자가 불필요해졌다. 숙련된 장인이었던 직조공과 직물공 등이 산업혁명 시기에 정면으로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들은 기계에 밀려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초의 러다이트들은 숙련된 장인으로서의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기계를 부수며 직물 산업의 기계화에 저항했다." "그들이 속했던 직군에서는 정말로 기계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졌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냐고들 말하지만, '장기'는 정말로 긴 기간이다."(394-5)


"기업이 생산성이 매우 높은 테크놀로지를 도입하면 그 때문에 이 기업에서는 노동자가 대체된다 해도 생산성의 향상이 새로운 영역에서 수요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기술은 '그저 그런' 정도의 자동화 기술이다. 왜곡된 조세 혜택이 있을 경우에 도입되어 노동자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는 생산적이지만 전체적인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산적이지는 않은 기술 말이다. 오늘날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자원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줄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 개발보다 '기존의'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한 머신러닝이나 빅데이터 기법 개발에 들어간다. 노동자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주는 재정적 이득을 생각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학자, 공학자, 연구자들의 노력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혁신 쪽으로 쓰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쏠리게 만든다."(399)


"성장이 여전히 굼벵이 걸음이던 1980년대에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토마 피케티와 이메뉴얼 사에즈의 뛰어난, 그리고 각고의 노력이 들어간 연구 덕분에 이제 우리는 1980년 이래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1980년은 레이건이 당선된 해이자 미국에서 국민소득 중 상위 1퍼센트에게 가는 몫이 50년 동안 하락세를 보이다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해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가 끝날 무렵이던 1928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퍼센트는 미국 전체 소득의 24퍼센트를 가져갔는데 1979년에는 이 숫자가 3분의 1로 줄었다. 그런데 2017년에는 다시 1929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소득 불평등의 증가는 부의 불평등 증가를 수반했다." "더구나 이 수치들은 〈세전〉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즉, 소득이 얼마나 재분배되었는지가 감안되어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세율이 낮아졌으므로 1979년 이후 세후 소득 불평등은 세전 소득 불평등보다 심지어 더 크게 증가했으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406-7)


"하이테크 혁명의 가장 성공적인 발명 중 많은 것이 '승자 독식' 제품이다. 전 세계가 페이스북을 쓰는데 나 혼자 마이스페이스에 남아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내 트윗을 리트윗해 주지 않는다면 트위터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술 혁신은 첨단 산업뿐 아니라 기존의 산업에도 변혁을 가져왔고, 요식숙박업이나 운수업처럼 전에는 하이테크 분야와 거의 관련이 없어 보였던 산업에도 도입되어 커다란 이득을 창출했다." "그 결과 승자가 독식하는 (전체는 아니더라도 거의 다 독식하는) 경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기업의 집중도가 더 높은 업종에서는 매출 중에서 임금으로 가는 몫의 비중이 더 감소했다. 독점 혹은 준독점이 된 기업들이 더 높은 수익을 올리면서 그 수익을 [노동자보다는] 주주들에게 분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집중화의 심화는 임금의 상승 속도가 GDP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410-1)


"이같은 '슈퍼스타' 서사는 금융 분야에는 잘 맞지 않는다. 금융은 팀 스포츠가 아니다. 흔히 금융에서는 시장을 왜곡하고 있는 특정한 불합리를 예리하게 짚어 내거나, 다음번의 구글, 다음번의 페이스북이 될 싹수가 보이는 곳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는 개인적인 천재성과 안목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평범한' 펀드매니저가 매년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이유가 된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액티브 펀드'는 '패시브 펀드'보다 대체로 실적이 좋지 않다. 미국에서 뮤추얼 펀드는 평균적으로 주식시장보다 성과가 저조하다. '개인의 능력'이라는 언어만 빌려 왔을 뿐 능력 자체는 가져오지 않은 듯 보인다. 금융 분야 종사자들이 얻는 프리미엄의 대부분은 순전히 '지대'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규정인 것 같다. 능력이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특정한 직업에 안착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415-6)


"가난한 나라에서 정부 일자리가 갖는 지대처럼, 금융 종사자들의 지대도 노동시장의 전체적인 기능을 왜곡한다." "이것이 우려할 만한 일인 이유는 어떤 직업이 유용성과 상관없이 프리미엄을 받으면,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일을 하는 기업이 재능 있는 인재들을 활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 빠른 속도로 주식 거래를 하면 수익이 올라갈 수 있다. 거래인이 새로운 정보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응 속도라는 것이 이미 초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떻게 경제에서 자원 배분을 유의미하게 향상시킨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은 금융 기업이 홍보와 마케팅에서 단골로 드는 이야기지만 그 뛰어난 인재들을 데리고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인재들의 역량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그들은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거나 췌장암을 치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416-7)


"한 회사가 CEO에게 보수를 더 많이 지급하면 금융 회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회사들 역시 자사의 뛰어난 CEO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만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보수를 더 지급하지 않으면 우리 회사의 CEO가 자신이 함께 골프를 치는 다른 CEO들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금융 회사 CEO의 높은 보수는 다른 영역으로도 전염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 분포 스케일상에 있으면 CEO가 자신의 보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임금도 함께 올려야 한다. 하지만 스톡옵션이 있으면 기업 내에서 아래 쪽의 임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건비를 포함해 비용을 쥐어짜야 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직원들에게 기업에 대한 충성도를 요구하는 대신 직원들을 챙겨 주었던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거대 기업의 특징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온정주의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최상층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되었다."(417-8)


"우리는 레이건-대처 혁명의 기저가 된 '인센티브' 서사가 부유하지 않은 사람 상당수에게 초고소득자의 천문학적인 보수가'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면이 있다고 본다. 아마도 세금 인하는 이러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반영하는 한 가지 징후였을 것이다.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세율의 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다. 자신이 받는 돈이 '노력을 들여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은 채로 스스로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센티브' 개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이러한 서사를 퍼트리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서사는 계속 확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명백히 분노하면서도 자원이 꼭대기 쪽으로 점점 더 많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이민자와 자유 무역을 비난한다."(421)


"이매뉴얼 사에즈와 동료들이 소득세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사람들이 노동에 기울이는 노력은 최고세율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세율에 반응하는 것은 노동에 들이는 노력이 아니라 세금을 포탈하거나 회피하려는 노력이었다. 1986년 레이건 행정부가 세금을 감면했을 때 과세 대상인 개인 소득이 한 차례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즉, 일하려는 의욕과 노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전에는 소득을 숨겼던 사람들이 세제가 유리하게 바뀌면서 이제는 소득을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기업은 가장 좋은 경영자를 원하므로 막대한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되는가? 세금이 높아도 그것이 가능할까? 답은 '그렇다'이다." "세율이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한,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는 여전히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424-5)


"불평등에 맞서는 방안으로서 막대한 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의 장점은, 그 부를 소유하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그 막대한 부에서 발생하는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뿐 아니라 (가족 소유의 트러스트 등에 재투자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 축적한 부에서 새로운 자산 소득이 발생하면 그 소득의 대부분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진다. '매우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도록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유세 개념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유세를 경제 매체나 정치인들이 종종 말하듯이 부유한 사람들이 사회에 부를 '환원'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부유세는 그들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그 소득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행정적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편리하게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428-9)


"최고세율 인상의 어려움은 정치적인 어려움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면서 그들은 사회를 현 상태로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할 수 잇는 자원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최고위소득자들의 세율을 낮추도록 의원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고 로비를 하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부상한 것은 어느 면에서 여기에 대한 백래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역량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느낌이 깔려 있다. 이러한 느낌은, 언제나 결정은 저 먼 곳에 있는 엘리트 계층이 내리고 어쨌거나 그 결정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 생각 자체가 옳든 그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그의 엄청난 부와 엘리트 계층 인맥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이제까지의 방식을 뒤흔들겠다는 약속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432-3)


8장 국가의 일


"더 많은 공공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는 개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개입이든 간에 정부의 개입 자체에 매우 회의적이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레이건 시절 이래로 미국 사람들은 〈현재의 위기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줄기차게 들어 왔다." "정부의 행동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이야말로 정작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대의 제약 요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본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이 '무엇에 비하여' 나쁘다는 것인가? 가령 태풍이 닥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거나,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는 등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주체가 현실적으로 손댈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정부의 존재 근거 중 하나다."(452-5)


"정부에 대한 의구심은 정부의 부패에 대한 강박적인 우려와 관련 있다. 하지만 의지만 있으면 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부패의 근원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대해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 시장이 손대지 않는 일을 정부가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 일이 부패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오염에 벌금을 부과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물론 오염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기업이 오염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벌금을 무마하려 하는 경우가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리 기업이 이 일을 맡으면 그 문제가 나아지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리 기업 종사자라고 돈을 덜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조세 징수 업무를 민영화했던 '조세 징수 도급tax farming'의 실제 역사가 잘 보여 주듯이, 민간 조세 징수 업자가 엉뚱한 사람들에게까지 조세(혹은 벌금)를 과도하게 뜯어내려 할 인센티브가 생길 위험도 있다."(457-8)


"정부가 무능하거나 부패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보는 인식은 악순환을 일으킨다. 정부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매력적인 진로로 여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만 정부에 들어오게 되면 능력이 부족한 정부가 되고, 이는 다시 유능한 사람들이 정부로 가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정작 시민들이 정부의 부패에 무덤덤해지게 된다. 그래서 선출직 정치인들 사이에서 뻔뻔하고 노골적인 부패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도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넘어가게 된다. 워싱턴 D.C.부터 예루살렘, 모스크바까지 모든 곳에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그와 다른 모습을 기대하도록 학습되어 있지 못해서, 더 이상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부패에 대해 과도한 강박이 '거대한' 부패가 횡행할 여지를 만들어 주는 뒤틀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461-3)


"남미에서도 빈곤층에게 소득을 이전해 주는 프로그램은 정치적인 반대에 부닥쳤고 명목상의 이유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주면 도덕적,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복지 담론이 '복지 프로그램이 오남용과 게으름을 유발한다'는 우려로 점철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멕시코에서 저소득층 대상 소득 이전 프로그램인 '프로그레사'를 고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제학 교수 산티아고 레비는 우파의 탄탄한 지지를 얻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마땅한 보상'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수혜자가 받는 혜택이 분명하게 조건부로 제공되게 했다. 수혜 가구는 자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학교에 보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해당 가구는 자녀의 건강과 교육 면에서 더 나은 지표를 보여줬다." "우리에게 자원은 부족하지 않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불화와 불신과 분열의 벽을 뛰어넘게 해 줄 아이디어다."(466-8)


9장 돈과 존엄


"현재의 담론을 보면, 한쪽 끝에는 시장 경제에서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현금을 주고 그다음에는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손 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알아서 할 능력이 없으므로 운명대로 살도록(즉 비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그들의 삶에 매우 세세하게 개입해서 그들의 선택지를 제약하고 그 제약을 벗어날 경우에는 응분의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은 공공 정책 수혜자들의 자존감은 우리가 고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그들의 자존감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그들이 공공 정책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존감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존중받고 싶다는 욕망이야말로 사람들이, 특히 그 프로그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474-5)


"오늘날 보편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은 사회 복지 프로그램계의 '잇 아이템'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밀턴 프리드먼 이래로 대개의 경제학자들 역시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는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정부 관료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지 수급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는 그들이 알아서 결정하게 두는 것이 명백하게 옳은 일이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는 게 제일 좋을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 먹을 것을 사는 게 합리적이라면 그들은 먹을 것을 살 것이다. 옷을 사는 게 더 유용하다면 그들은 옷을 사기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SNAP(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 '푸드 스탬프'라고 불렸던 저소득층 영양 보조 프로그램) 같은 제도는 지급 받는 돈으로 식품만 살 수 있게 정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수급자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다."(475-6)


"보편기본소득에 저항하는 가장 간단한 한 가지 이유는 돈이다. 보편 프로그램은 수혜 대상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매달 모든 미국인에게 1,000달러를 주려면 연간 3.9조 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다 합한 것보다 1.3조 달러나 많은 것이고, 연방 정부 예산 전체, 그리고 미국 경제 규모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국방, 공공 교육 등 전통적인 정부 기능을 줄이지 않으면서 이만한 자금을 조달하려면 기존의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없애고 '추가로' 미국의 세금을 덴마크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적은 액수를 지급하고 소득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보편' 기본소득은 아니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상 집단을 설정하고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갖는 모든 단점들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483-4)


"가난한 나라의 정부도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을 지급하는 보편초超기본소득universal ultra basic income에 더해 매우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더 금액이 큰 소득 이전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후자의 프로그램을 예방적 의료 및 아동 교육과 연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 조합으로 보인다. 후자의 선별 프로그램에서 조건 이행을 너무 엄격하게 강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로코에서 '용도 독려 현금 이전labeled cash transfer' 방식의 프로그램을 평가한 결과, 프로그램의 목표[자녀의 교육]를 명확히 밝혀서 지급받는 돈을 자녀의 교육비로 쓰도록 '독려'는 하되 이행을 엄격하게 강제하지는 않아도 전통적인 조건부 현금 이전 프로그램만큼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 효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행정 비용을 낮추면서도 정작 가장 취약한 가구를 의도치 않게 배제하게 되는 위험도 피할 수 있다."(506-7)


"보편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그러나 본인이 가난하지는 않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기본소득을 새로운 경제 구조에서 비생산적인 인력이 되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될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돈을 지급함으로써 완화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보편기본소득이 있다면 그들이 굳이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실증 근거로 볼 때 이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연간 1만 3,000달러의 보편기본소득이 조건없이 주어지면 당신은 일을, 혹은 구직을 그만두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87퍼센트가 아니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그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일이 목적의식, 소속감,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고 고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직업을 자아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더 크다."(509-10)


"개념적으로 보편기본소득은 실직한 노동자들이 기본소득을 받으면 힘겨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것이라고 상정한다." "불행히도, 실증 근거들에 따르면 '노동 시스템' 외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구조화된 노동 환경에서 제공되는 모종의 규율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자동화에 대해 사람들이 매우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64퍼센트가 사람들이 로봇과 경쟁하도록 내몰린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실제로, 시간 여유가 더 많아진 사람들(은퇴자, 실직자,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등)은 전일제로 일하는 사람보다 자원봉사 활동을 할 가능성이 더 낮았다. 즉 자원봉사는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에 더해 '추가로' 하는 일이지, 일상적인 활동 '대신에' 하는 일이 아니다."(512-3)


"전환의 시기는 정부가 그 전환으로 고통을 겪는 노동자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기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기존과 비슷한 정도의 자부심을 주는 일자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을 바꾸는 것과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 모두 굉장히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경제에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 개인에게도 자신의 재능과 일자리를 더 잘 연결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노동자 다섯 중 넷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일자리를 전환할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에 대해서만 보편 권리를 보장하는) 보편기본소득과 달리 일자리 전환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사회적인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모두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져야 한다."(532)


"인도에서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과 시카고 남부 빈민가의 젊은이, 그리고 방금 해고된 50대 백인 남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고 그들 자신으로 여겨질 권리가 있다. 개도국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우리는 희망이야말로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늘 목격한다. 그들을, 사람 자체를 그들이 가진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상황'을 '본질'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희망이 들어설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스스로를 그 정체성으로 꽁꽁 감싸는 것이고,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모든 해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더 많이 알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한,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545-6)


에필로그 좋은 경제학과 나쁜 경제학


"개발경제학자로서 우리는, 지난 40년이 보여 주는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변화의 '속도'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은 쪽으로도 그렇고 나쁜 쪽으로도 그렇다. 공산권이 붕괴했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했고, 전 세계 극빈층이 반으로, 그리고 또다시 반으로 감소했고,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HIV가 맹렬히 확신되었다가 수그러들었고, 영아사망률이 대폭 감소했다. 또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널리 퍼졌고, 아마존과 알리바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등장했고, '아랍의 봄'의 희망이 중동을 휩쓸었고, 전체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었고,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의 위협이 닥쳤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지난 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목격한 변화의 매우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내린 정책적 선택의 결과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책은 강력하다. 정부는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엄청나게 해악을 끼칠 힘도 가지고 있다."(552-3)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말이다. 〈자신은 실용주의자라서 사상 따위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대개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하늘에서 계시를 듣는다는 미치광이 권력자들도 몇 년 전에 어느 학자가 끄적거려 놓은 글에서 자신의 망상을 뽑아낸다.〉 사상은 강력하다. 사상은 변화를 추동한다. 좋은 경제학만으로 우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제학이 없다면 우리는 어제의 치명적인 실수를 반드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쁜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중하게 살피고, '자명'해 보이는 것의 유혹에 저항하고, 기적의 약속을 의심하고, 실증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복잡성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함이 없다면,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담론은 단순한 슬로건과 이미지로 환원되어 버리고,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한 정책은 돌팔이의 해법에 밀려나 버릴 것이다."(55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