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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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MEGA: 경제학을 다시 위대하게


"이 책에서 우리는 경제 사안을 다루지만,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더 큰 개념이 언제나 우리 작업의 지침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후생을 소득이나 물질적인 소비로만 협소하게 정의하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인정과 존중,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편안함, 압박 없는 가벼운 마음, 존엄과 자존감, 즐거움 등이 모두 중요하다. 소득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단순히 편리한 지름길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을(때로는 매우 영민한 경제학자들마저) 잘못된 경로로 이끌고, 정책 결정자들을 잘못된 결정으로 이끌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강박으로 이끄는 왜곡된 렌즈다." "인간의 존엄을 다시 중심에 놓는다면 우리는 경제의 우선순위와 사회가 구성원들을 (특히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돌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28-9)


2장 상어의 입


"최근에 수행된 실험 연구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선거에서 광장히 유리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미국에서 진행된 한 실험에서는 연구자들이 두 종류의 질문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이주에 대한 응답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찬성 또는 반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의 규모와 속성에 대해 응답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정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정보' 질문지를 '견해' 질문지보다 먼저 받은 사람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하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사실정보를 먼저 상기한 사람들은 이주에 반대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더 높았다. 실제 숫자를 알려 주자 사실관계에 대한 생각은 달라졌지만 이주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즉, 사실관계는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지 못했다. '이주'라는 주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더 편협해지고 사실정보는 그 견해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35-6)


# 이주에 대한 '경제적' 논증

1. 경제 여건이 훨씬 좋은 나라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자기 나라에 있을 때보다 고소득을 올릴 것이 분명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2. 따라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나라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3. 그렇게 들어온 이주민들은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에서 임금을 내리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해 기존에 우리나라에 있던 사람 대부분은 경제상황이 전보다 악화될 것이다.


"이 논리는 단순하고 솔깃하다. 다만 틀린 논리라는 게 문제다. 우선, 국가 간 임금 격차(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역 간 임금 격차)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느냐 마느냐와 크게 상관이 없다. 물론 자기 나라에서 절망적인 수준의 빈곤에 처해 그곳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설명되어야 할 수수께끼는 자기 나라를 벗어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설령 실제로 저숙련 이주민이 노동시장에 많이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도착국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이주민들과 숙련 수준이 가장 비슷한 사람들[즉, 직접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이주민과 경쟁 관계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오히려 이주민이 들어오면 이주민뿐 아니라 도착국 사람들도 대개 경제적 상황이 전보다 나아진다. 사실 노동시장은 수요-공급 법칙의 표준적인 이야기와 부합하는 면이 별로 없다."(37-8)


"이라크, 시리아, 과테말라, 예멘 등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나라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아니다." "이 나라들에서 탈출하고자 한 사람들은 라이베리아나 모잠비크의 평균적인 거주자가 겪고 있는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도 더는 자기 나라에 머물 수 없겠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 것은, 멕시코 북부에서 벌어진 '마약과의 전쟁'이나 과테말라의 끔찍한 군부 독재 혹은 중동의 내전 등이 불러온 끔찍한 폭력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일상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업 소출이 안 좋았던 해에도 고향을 지켰던) 사람들이 네팔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옛 마오주의 무장세력이 다시 발흥해 폭력이 격화된 다음이었다. 이때 그들은 '상어의 입'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39)


"하지만 왜 사람들이 이주를 하지 않는지는 애초에 수수께끼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가 이주의 이득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주의 이득을 가늠할 때의 일반적인 실수 하나는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의 임금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이주를 결심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과 성공적으로 이주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주를 택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남달리 체력이 강하거나 해서 자기 나라에 머물렀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소득을 올렸을 사람들일 것이다. 이주자들이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는 일에 많이 종사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체력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주자의 소득과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득을 단순 비교해서 이주가 막대한 이득을 준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주를 독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논거이긴 하지만) 너무 순진한 접근이다."(41)


# 고전적 수요-공급 이론이 이주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

1. 새로운 노동자들이 유입되면 일반적으로 수요 곡선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즉, 노동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증가한다.

2. 저임금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경우, 노동 집약적인 기술을 도입할 유인이 줄어들어 기계화가 늦어진다.

3. 고용주들이 새로운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생산 과정을 재조직(가령, 현지인의 직업적 계층 상승 같은)한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가령 도매시장에서 수박을 사는 것과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수박을 사는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오래 이어진다. 수박은 품질이 맘에 안 들면 다음 주에 바로 공급자를 바꿀 수 있지만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둘째, 노동자의 질은 수박보다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자신이 채용하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모종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요컨대 이주 노동자가 이미 취직되어 있는 현지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일을 더 낮은 임금을 받고 할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는 이주 노동자들이 현지인이 하지 않으려 하는 일 혹은 현지인이 가지 않으려 하는 지역에 몰리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런 직종이나 지역에서는 이주자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이 일자리는 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61-5)


"하지만 비숙련 이주자들이 노동시장에서 비숙련 현지인들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가 아니라고 했던 우리의 설명은 고숙련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 이들은 일반적으로 최저임금 수준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받는다." "둘째, 고숙련 노동자를 채용할 때 고용주는 그가 해당 업무에 적합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인간성은 어떠한지 등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 "많은 이들이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을 지지하지만,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이 국내 인구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숙련 이주자가 들어오면 저숙련 현지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고숙련 직군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기존보다 싸게 누릴 수 있다(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서 일하는 의사는 개도국 출신 이민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슷한 숙련 수준을 가진 현지인들(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교수 등)의 고용 전망을 악화시키는 비용이 따른다."(65-7)


"이주민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이 경제적 합리성을 잘못 이해한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서도 기인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제의 괴리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20세기 초에 유럽 이민자가 많이 들어왔던 미국 도시들은 이민자 유입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얻었는데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적대적인 반응이 촉발되었다. 도시 당국은 이민자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조세와 공공 지출을 줄였다. 특히 학교처럼 타 인종, 타 민족 간에 접촉과 소통을 촉진할 법한 분야와 하수 시설, 쓰레기 수거처럼 저소득층 이민자에게 도움이 될 법한 분야의 공공 지출이 크게 삭감되었다. 또한 이민자 유입이 많았던 도시 대부분에서 민주당(이민을 지지했다)의 득표가 줄었고 더 보수적인 정치인들, 특히 1924년의 이민 제한법National Origins Act(이 법으로 외국인이 미국에 아무 제약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났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선출되었다."(98-9)


3장 무역의 고통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인 경우가 많고 대체로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가난하므로, 무역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 나라의 불평등을 감소시킨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노동자가 손해를 보고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득을 보기 때문에 불평등이 증가한다. 가령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 개방이 이루어지면 임금 면에서 미국 노동자는 손해를 보고 중국 노동자는 이득을 본다. 그렇다고 미국 노동자들이 꼭 전보다 못살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새뮤얼슨이 이후의 논문에서 보여 주었듯이, 자유 무역을 하면 국가 전체적으로 GNP가 올라가므로 만약 미국 사회가 자유 무역의 수혜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미국 노동자들도 전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질 수 있다. 문제는 그 '만약'이 너무나 큰 '만약'이라는 데 있다. 노동자의 후생이 정치 과정에 좌우되어 버리는 것이다."(108)


"스톨퍼-새뮤얼슨 정리는 세 가지의 명백한 함의를 가진다. 두 가지는 긍정적이다. 무역 개방은 모든 나라의 GNP를 올리고, 가난한 나라의 불평등을 줄인다. 한 가지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재분배 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불평등이 증가한다. 연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정을 하는지에 따라 국가 간 비교를 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문제는 실증 근거들이 이러한 예측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30년간 많은 저소득 및 중위소득 국가가 무역을 개방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나라에서 벌어진 소득 분배상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암시하는 것과 반대였다. 스톨퍼-새뮤얼슨 정리에 따르면, 저숙련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서는 무역이 개방되면 저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서 불평등이 줄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보다 임금상의 이득을 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109-16)


"(한 나라 안의 여러 지역들에 무역 자유화가 끼친 영향을 다루고 있는) 토팔로바의 논문이 국제무역을 전공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왜 위협적으로 느껴졌을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통적인 무역 이론에서 무역의 이득은 자원이 더 효율적으로 재분배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무역 자유화에 더 강하게 노출된 지역과 덜 노출된 지역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토팔로바의 발견은 자원(토팔로바의 논문에서는 노동력이지만 자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이 그리 쉽게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원(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면 모든 곳의 임금이 동일해지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토팔로바만이 아니다. 많은 연구가 무역으로 자원의 재배분이 이뤄진다는 가설에 대해 실증 근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과 돈이 기회를 따라 움직인다는 개념을 포기하고 나면, 무역이 득이 된다는 우리의 신념을 어떻게 고수할 수 있겠는가?"(122-3)


"'이름값'을 갖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된다. 구찌 향수나 페라리 노트북을 사는 소비자는 '구찌'와 '페라리'라는 브랜드를 보고 이 제품들에서 딱히 '혁신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브랜드 가치가 매우 높은 구찌와 페라리가 자신의 평판을 손상시킬지 모를 질 낮은 제품을 판매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리고 값비싼 명품을 쓸 때 으스댈 수 있다는 점이 주는 매력에서) 그 제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국제 무역이 단지 제품 가격, 좋은 아이디어, 낮은 관세 장벽, 값싼 운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평판이 없는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 신규 행위자가 시장에 진입하고 시장을 점유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에 노동의 경직성까지 고려하면,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기초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거기에서 자유 무역의 이득이 발생한다'는 가정은 현실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다."(136-9)


"신규 진입자에 대한 의구심 자체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될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그 회사는 곧 망할 것이고 그러면 고객 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했을 때 서구에 살았던 중국계, 인도계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서구에 살면서 자신이 쌓은 평판과 네크워크를 활용해 구매자들(종종 자신이 거래해 본 곳들)에게 중국과 인도의 제품이 믿을 만하다고 보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성공 스토리가 있으면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 구매자들이 성공적으로 도약을 한 업체 주위로 모이면, 또 다른 구매자가 이 업체와 거래를 하는 구매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 업체를 신뢰하게 된다. 따라서 거래가 성사되어 주문을 받은 신생 기업은 이것이 '낮은 기대의 저주'가 일으키는 악순환을 깰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납품을 맞추고자 한다."(140)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조의 생산 모델이 이제 또다시 변화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에 속할 두 기업 아마존과 알리바바가 온라인 플랫폼을 열어 중개상 역할을 대신하면서, 개별 생산자가 중개업체에 의존할 필요 없이 (물론 비용을 내고) 그 플랫폼에서 스스로의 평판을 구축하게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좋은 리뷰를 받기 위해 판매자들은 제품을 불합리할 정도로 낮은 가격에 내놓는다. 리뷰 수가 늘어나고 또 '좋은 리뷰'의 수가 늘어나면, 나중에 가격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플랫폼에서 신규 업체가 소비자들에게 품질에 대한 신뢰를 줄 만큼 평판을 쌓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판 구축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제3세계에 고립된 생산자가 국제 시장에 진입해 경쟁을 시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가 만드는 제품이 얼마나 품질이 좋든지, 얼마나 값이 싸든지 간에 말이다."(144)


"경제학자들은 무역으로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을 시장이 알아서 돌볼 것이라고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무역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보리라는 것' 또한 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설명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역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회가 [재분배 정책을 통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피해를 상쇄해 줄 수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터, 돈, 핸슨은 중국과의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을 살펴본 경과,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이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약간 더 많은 돈을 받긴 했지만 잃어버린 소득을 상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역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지역과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지역을 비교한 결과, 전자의 지역에서 성인 1인당 소득은 549달러나 줄었는데 정부의 이전 지출transfer payment을 통해 받은 돈은 겨우 58달러 증가했다."(153)


"하지만 시장이 크지 않으면 기업 규모가 커질 수 없다. 일찍이 1776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듯이,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범위에 의해 제약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제 교역이 가치를 갖는다. 고립된 공동체에서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기업이 존재하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나라가 철도가 놓이면서 지역 간 장벽이 극복되어 국가 단위의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대대적인 경제 변화를 경험했다." "국내 시장이 잘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경제의 경직성은 더 심해진다. 그러면 국내 각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제 교역의 이득을 누릴 수 없게 되거나 오히려 손해를 입는다. 가령 도로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최종 재화와 중간재 모두, 운송 수단이 열악하면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비용상의 장점이 상쇄된다. 이런 면에서, 국내 시장의 연결을 향상시키면 국제 시장에 통합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164-5)


4장 좋아요, 원해요, 필요해요


"1977년 노벨상 수상자이자 시카고 학파의 거목인 게리 베커와 조지 스티글러는 〈취향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경제학자는 사람들의 선호를 구성하는 기저 요인들을 파고들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만약 어느 두 사람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도 바닐라가 더 좋은지 초콜릿이 더 좋은지, 북극곰을 구해야 하는지 아닌지 등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각자의 자아를 구성하는 내재적인 무언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말에 따르면 선호는 변덕도, 실수도, 사회적 압력에 의한 반응도 아니며, 사람들 각자가 무엇을 가치 있게 보느냐가 반영된,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베커와 스티글러는 물론 늘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고자 할 때는 선호를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이자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180-1)


"그런데 베커와 스티글러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선호가 '합리적'일 뿐 아니라 '안정적'이라고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선호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한다. 학교도, 부모의 잔소리도, 광고판과 화면에 나오는 메시지도 우리의 '진정한' 선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렇게 가정하면,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거나 동료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의사결정을 하는 가능성(다들 하니까 나도 문신을 한다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히잡을 쓴다거나)은 배제된다. 물론 뛰어난 사회과학자인 베커와 스티글러는 선호가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불합리해 보이는 선택을 설명해야 할 때 그것이 사실은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들을 고찰하는 것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논리에는 완전히 마음을 닫고서 단순히 그것을 '집합 히스테리'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접근 방식이라고 보았다."(183-4)


"물론 개개인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그 결과가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군중 행동herd behavior은 '정보 폭포informational cascade' 현상을 낳는다. 처음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토대가 된 정보가 이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에 이뤄진 한 실험은 첫 번째 사람 '단 한 명'의 무작위적인 행동으로도 그러한 폭포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는 레스토랑 등 서비스업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웹사이트와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다. 이 웹사이트에 사용자가 평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그 평에 대해 '좋아요'나 '싫어요'를 누를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약 10만 개의 평 중에서 일부에는 평이 올라오자마자 '좋아요'를, 일부에는 올라오자마자 '싫어요'를 눌렀다. 어떤 평에 대해 최초의 반응이 '좋아요'이면 다음번 사용자도 '좋아요'를 누를 가능성이 32퍼센트나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185)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공동체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규범이 스스로 강제력을 갖는다고 해서 그 규범이 꼭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규범이 부과하는 규칙이 반동적, 폭력적, 파괴적인 대의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1992년의 한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실제로는 아무도 인종이나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차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무도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성관계나 결혼에서 카스트의 경계를 넘으면 '잡혼'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배제된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미래의 결과를 숙고해 결정을 내리는 한, 그리고 결혼이 하고 싶은 한, 이 규칙만으로도 '잡혼'을 하지 않는다는 규범을 모든 사람이 지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모두가 그 규범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충분히 많은 사람이 규칙을 깨기 시작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189)


"오늘날 미국의 흑인들이 1965년에 비해 훨씬 더 교육을 많이 받고 있긴 해도 교육 수준이 비슷한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 사이의 소득 격차는 증가하고 있고 현재는 거의 30퍼센트에 달한다. 이는 인도의 '지정 카스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임금 격차보다도 큰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대선 이래 미국에서 지배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은 흑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분노를 훨씬 넘어선다. 이민자는 〈우리의 일자리〉만 〈가로채는〉 게 아니라 백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범죄자이고 강간범〉이라고 이야기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민자가 적은 주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민자가 거의 없는 주(와이오밍, 앨라배마,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아칸소 등)에서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이민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이 경제적인 불안보다는 '정체성'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195-6)


"자기 차별, 즉 스스로가 자신의 집단을 차별하는 현상이 매우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미국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의 유명한 실험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스틸은 동일한 과제에 대해 '실험용 문제풀기 과제'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 사이에 성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지능 테스트'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현저히 낮은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경우에 자기 차별은 자기 강화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고, 다시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사례들을 보면, 이것의 영향을 받는 집단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자기 실현적 예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은 언제나 전통적으로 불리한 사회집단이었던 사람들이다." "요컨대, 편견을 일으키는 고정관념은 사회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203-7)


"우리의 믿음, 심지어는 우리가 자아에 내재된 선호 체계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상당히 많은 것이 설명된다." "〈동기부여된 믿음motivated beliefs〉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티롤과 베나부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을 너무 문자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감정적인 '필요'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에 감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왜곡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우리를 덫에 걸리게 만든다.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기는 싫기 때문에 타 집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면 그들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아내서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싶어진다."(212-3)


"이것은 '사실 확인'이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는 데(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왜 그렇게 영향력이 없는지도 설명해 준다.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네가 감히 내가 믿는 것들에 도전을 할 수 있는가〉라는 초기의 감정적인 반응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들이미는 것은 사실을 표현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므로, 나의 가치판단을 상대에게 부여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하게 하는 것이 상대의 편견을 줄이는 데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때문에 기술 진보나 무역과 같은 교란으로 일자리가 위협에 처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생존 보장을 넘어서 존엄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 정책은 그들이 자존감의 상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215-7)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잃어 버렸다. 민주주의는 퇴색되었고 마치 여러 부족 간의 합의와 비슷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부족들은 우선순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신중하게 고려하기보다 부족적 충성심에 기반해 투표를 하고 가장 규모가 큰 부족들의 연합이 승리한다. 그들의 후보가 아동학대자인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지른 사람인지 등은 상관없다. 상대편이 집권할 가능성을 지지자들이 몹시 우려하는 한, 승리자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서 공포심에 불을 지피는 데 매진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잡고 나면 그 권력을 이용해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며, 대안적인 목소리를 닫아 버리려 한다. 더 이상 '경쟁'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다른 사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238)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의 자존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개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만이 평범한 사람들이 관용적인 생각에 더 많이 열려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종주의, 반이민자 정서, 정당 간의 소통 부족은 상대방과 접해 본 경험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일찍이 1954년에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고든 올포트는 적절한 여건하에서 타 집단 사람들과의 접촉을 늘리면 편견을 줄이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접촉 가설contract hypothesis'을 제시했다." "접촉 가설이 옳다면, 학교와 대학이 매우 중요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사고가 더 유연한 젊은 시기에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의 룸메이트를 무작위로 배정하는 실험을 한 결과,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과 룸메이트가 되면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를 현저히 더 많이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239-40)


"문제는, 적극적 우대 조치 자체가 오늘날 극단화된 싸움의 소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 간에 접촉을 늘려서 사람들의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는 좁은 목적에서 보자면,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올포트가 제시했던 원래의 접촉 가설은 접촉이 편견을 줄인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몇몇 조건이 만족될 때만 그렇다는 것이기도 했다. 올포트는 특히 상이한 집단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 또 공동의 목적과 집단 간 협동, 그리고 법과 관습과 권위자의 지원이 있는 상태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만 편견을 줄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적대적인 상태로 접촉이 이뤄지면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기 어렵다. 가령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의 좁은 문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느끼고, 더 나쁘게는 경쟁이 상대 집단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상대 집단에 대해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될 것이다."(241-6)


# 편견의 네 가지 시사점

1. 편견을 가진 사람(가령, 인종주의자,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하는 사람 같은)을 경멸하는 것은 세상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데서 나오는 그들의 견해를 더 강화할 뿐이다.

2. 편견은 '절대적인' 선호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 우세주州의 주민들이 오바마 케어 도입에 찬성한 경우처럼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책은 당파적 편견을 이겨내기도 한다.

3. 인종주의 같은 편견에 기반한 투표는 사실 '무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유권자들은 인종, 민족, 종교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발언이 정치적 제스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편견과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직접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안들을 논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5장 성장의 종말?


"1973년(혹은 그즈음)에 모든 성장이 멈추었다. 그 이후 25년 동안 총요소생산성의 성장 속도는 1920~1970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경기 침체는 시작 날짜도 특정할 수 있고 비난을 돌릴 만한 명백한 행위자(석유수출국 정부들)도 존재했던 특수한 경제 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정상 상태)이 되었다." "성장의 둔화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을 무렵, 사람들은 컴퓨터 기술이 추동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곧 도래하리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1995년부터 몇 년간 반짝하던 이 호황은 곧 사라졌다." "논쟁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언젠가는 생산성의 고속 성장이 다시 돌아오고 지속될 것인가? 둘째, (결국 GDP도 상당 부분 추측이 개입되는 지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경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행복과 효용을 GDP라는 지표가 다 포착하지 못해서 지표상으로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262-3)


#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 노동생산성 증가분 중 교육이나 기술 발전 같이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요인들을 다 동원하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


"총요소생산성의 성장은 1995년에 시동이 걸렸다가 2004년에 둔화되었다. 그런데 2004년은 페이스북이 우리 삶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해다. 그리고 2006년에는 트위터가, 2010년에는 인스타그램이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러한 플랫폼들의 공통점은 명목 가격이 공짜이고,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것이 GDP에 잡히는 부분이다)은 그것이 일으키는 후생(혹은 마이너스 후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측정된' 생산성의 성장이 둔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 소셜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한다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여기에서 GDP에 '잡힌 것'과 '잡혀야 마땅한 것' 사이에 격차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봄직하기 때문이다. 혹시 진정한 후생의 증가라는 면을 GDP 통계가 통째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268-9)


"(1956년에 이미 장기 성장률의 둔화를 예측했던) 솔로우는 국가들 사이의 균형 성장률이 왜 차이를 보이는지는 각국의 '운'이라고 보기로 했다. 즉, 솔로우는 어느 나라에서 총요소생산성이 향상되는 속도는 해당 국가가 가진 정책 체계의 속성이나 문화 제도적 요인 등과는 상관없고, 우리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이 성장에서 수행하던 역할을 거의 다 해서 자본 투자의 수익률이 충분히 낮아진 다음에는 장기적으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솔로우의 모델이 알려 주는 바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경제학자들은 솔로우의 모델을 '외생적' 성장 모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외생적'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진 요인에 의해 추동된다는 의미이고, 이는 장기 성장률과 관련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장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279-80)


"로머가 제시한 새로운 통찰은, 솔로우 효과[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이윤율이 저하되는) 수확 체감이 발생한다]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전체 자본의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가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별 기업들은 모두 수확 체감 법칙의 적용을 받더라도, 이 개념[경제 전체적인 수확 체증]이 여전히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솔로우의 세계의 기업들과 매우 비슷하지만 한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실리콘 밸리 기업들은 통상 우리가 '자본'이라고 생각하는 것(기계, 건물 등)보다는 경제학자들이 '인적자본'이라고 부르는 것(특화된 전문성 등)에 더 크게 의존한다. 실리콘 밸리의 많은 기업은 시장화시킬 수 있는 뛰어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똑똑한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때로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284-5)


"로머의 이론으로 설명해 보자면, 실리콘 밸리는 아이디어의 교차 수분이 가능한 환경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게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로머는 성공한 모든 산업 도시에서 이와 같은 동학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중반의 맨체스터, 금융 혁신기의 뉴욕과 런던, 오늘날의 중국 선전이나 캘리포니아 베이에어리어 등 모두에서 토지와 노동의 희소성(부분적으로 노동이 희소해지는 이유는 토지가 희소해서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이 유발하는 수확 체감이, 고숙련 인력들이 서로 지식과 영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막대한 활력으로 상쇄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다시 고숙련 인력들이 한층 더 이곳에 모여들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높은 성장률이 영속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솔로우 모델이 상정한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신비로운 요인의 도움이 없더라도 말이다."(285-6)


"종합해 볼 때, 결국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우선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지는 비교적 명확한 듯하다. 초인플레, 극도로 고평가된 고정 환율, 소비에트나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 또는 북한과 같은 종류의 사회주의, 1970년대에 배부터 신발까지 온갖 것을 국영화했던 인도 정부의 정책처럼 민간 기업을 질식시키는 정책 등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 알고 싶어 하는 질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답이 아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지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베트남이나 미얀마가 오늘날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중국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이지, 북한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중국이 매우 시장화된 경제이긴 하지만(베트남이나 미얀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식은 고전적인 앵글로색슨 모델과 전혀 다르고 유럽식과도 다르다는 점이다."(317-8)


"우리는 중국의 경험 중에 정확히 무엇을 따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상대적으로 훌륭한 교육과 의료 시스템이 있었고 굉장히 평등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가난한 경제였던 덩샤오핑의 중국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존 지배 계급의 문화적 특권을 모조리 쓸어 없애고 모든 사람을 평평한 운동장 위에 놓고자 했던 '문화 혁명'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본의 침략을 받아 중국의 자존심이 막대하게 훼손되었던 1930년대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국 5,000년 역사를 처음부터 밟아야 하는가? 일본과 한국을 본받고자 말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접근 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방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부유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면 성장하게 할 수 있을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318-9)


"우리가 알아 본 모든 성장 이론이 토대를 두고 있는 핵심 신조는 가장 생산적인 사용처로 자원이 부드럽게 이동하리라는 것이다. 시장이 완벽하게 기능하는 한에서는 당연한 가정이다." "하지만 때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나라 경제를 보아도 생산적인 기업과 비생산적인 기업이 모두 존재한다." "개도국의 테크놀로지 문제는 수익성을 높여 줄 테크놀로지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접근이 가능한 테크놀로지조차 최선으로 이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테크놀로지뿐 아니라 토지, 자본, 숙련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많고 어떤 기업은 노동자를 충분히 고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기업은 굉장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자금이 없고, 어떤 기업은 딱히 경영을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퇴출되지 않고 계속 시장에 남아 있다. 거시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자원 배분상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324-5)


# 자원 배분 문제가 생기는 이유

1. 미성숙한 자본 시장과 은행 제도 : 생산적인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해, 비효율적인 기업들도 생존한다.

2. 성장 이외의 기업 목표 : 현재의 생산 수준에 만족하거나,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일 등이 기업의 목표인 경우가 있다.

3. 부족한 좋은 일자리 :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구직자의 눈높이와 일자리의 현실이 어긋나는 경우, 취업을 연기하기도 한다.


"자원 배분상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펴보았던 모든 사례가 예외 없이 말해 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추상적인 모델을 넘어서 자원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어느 나라가 자원 배분이 매우 왜곡된 상황에서 출발했다면(가령 공산주의 시절의 중국이나 정부가 극도로 경제를 통제하던 시절의 인도처럼), 개혁을 통해 처음에 발생하게 될 이득은 주로 자원이 더 잘 사용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가는 데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중국 같은 몇몇 나라가 한동안 매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가용한 자원과 인력이 너무나 잘못 사용되던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낭비된 자원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성장이 빠르게 둔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시점 이후부터는 추가적인 자원이 투입되어야 성장이 가능하다. 이 말은 이제는 향상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343)


"경제 성장의 근본 메커니즘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게 언제이든 간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에 초점을 둔 정책을 추진하면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모두 자국 경제 내에서 명백한 낭비 요인들을 없앨 수 있다. 이것으로 영속적인 고도성장에 불을 당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후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성장의 기관차가 다시 달리게 될지, 언제 그렇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읽고 쓸 수 있게 되고, 당장의 절박한 처지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면 성장의 기차에 올라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계화의 승자인 나라 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 시기 동안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중국, 베트남 등)이거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타이완, 한국 등)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352-3)


6장 뜨거운 지구


"더 나은 기술이 온실가스 배출을 상당히 저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너무 낙관적이다. 결국, 사람들의 소비가 줄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물질적 소비를 후생의 척도로 삼는 버릇이 있다. 둘재, 경제학자들은 행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의심스럽게 본다. 선호를 바꾸는 것과 관련될 때는 더욱 그렇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선호를 '조작'하는 것에 대해 철학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선호는 내재적이고 '진정한' 것이며 그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의 깊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행동을 바꾸도록(가령, 소비를 줄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소비를 하도록) 설득하고 확신시키는 것은 그들의 내재적인 선호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본질적이고 일관성 있는 '선호 체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371-2)


"오늘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미래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게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 소비가 중독과 비슷하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담배에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높은 세금이 도입되면 처음에 그 행동을 줄이도록 독려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일단 적절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행동이 조정되고 나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조세를 계속 높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을 덜하는 쪽으로 (따라서 세금을 덜 내는 쪽으로) 다들 습관이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습관'은 그것을 바꾸고자 할 때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에너지를 잡아먹는 재화들에 대해 '미래'에 새금이 급격히 인상될 것이라고 발표하면 그것을 예상해서 미리 익숙해지고자 사람들이 '현재' 습관을 조정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375-6)


"부유한 나라들이 펑펑 쓰면서 저질러 온 일에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하지만 개도국을 기후 위기 대응에서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개도국에 대한 일시적인 유예 조치는 앞으로 한참 동안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기술이 사용되도록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유예라 해도 그 효과는 그렇게 일시적이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개도국에 있을 것이므로 선진국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기후 위협을 차치하더라도 개도국이 현재 수준의 대기 오염을 지속할 (혹은 더 증가시킬) 여력이 있는지다. 개도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현재' 개도국 국민들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또 다른 문제, 즉 긴급한 공중 보건상의 유해 요인으로 자리잡은 대기오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377-8)


"관건은, 이 문제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싸우는 구도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가 조세와 규제로 자국의 탄소 배출을 줄이고 가난한 나라의 에너지 및 기술 전환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한다면 부유한 나라의 경제 성장이 둔화될지도 모른다(물론 둔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을 일으키거나 저해하는 요인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이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그로 인해 지구에 득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경제학자들은 자원이 재분배될 수 있으며 재분배되리라고 믿고서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덫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가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불평등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이것이 세계 전역에서 폭발 직전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숱한 악영향을 야기했다는 사실이다."(384-5)


7장 자동 피아노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이번의 자동화 파도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도 자동화의 파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처럼, 과거의 제니 방적기,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칩, 컴퓨터 기반 학습 기계와 같은 기술 모두가 자동화를 불러왔고 인간 노동력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다들 예상하시는 바대로다. 몇몇 직무에서 인간 노동자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자동화는 강력한 대체 효과를 일으켰다. 노동자가 불필요해졌다. 숙련된 장인이었던 직조공과 직물공 등이 산업혁명 시기에 정면으로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들은 기계에 밀려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초의 러다이트들은 숙련된 장인으로서의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기계를 부수며 직물 산업의 기계화에 저항했다." "그들이 속했던 직군에서는 정말로 기계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졌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냐고들 말하지만, '장기'는 정말로 긴 기간이다."(394-5)


"기업이 생산성이 매우 높은 테크놀로지를 도입하면 그 때문에 이 기업에서는 노동자가 대체된다 해도 생산성의 향상이 새로운 영역에서 수요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기술은 '그저 그런' 정도의 자동화 기술이다. 왜곡된 조세 혜택이 있을 경우에 도입되어 노동자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는 생산적이지만 전체적인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산적이지는 않은 기술 말이다. 오늘날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자원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줄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 개발보다 '기존의'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한 머신러닝이나 빅데이터 기법 개발에 들어간다. 노동자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주는 재정적 이득을 생각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학자, 공학자, 연구자들의 노력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혁신 쪽으로 쓰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쏠리게 만든다."(399)


"성장이 여전히 굼벵이 걸음이던 1980년대에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토마 피케티와 이메뉴얼 사에즈의 뛰어난, 그리고 각고의 노력이 들어간 연구 덕분에 이제 우리는 1980년 이래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1980년은 레이건이 당선된 해이자 미국에서 국민소득 중 상위 1퍼센트에게 가는 몫이 50년 동안 하락세를 보이다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해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가 끝날 무렵이던 1928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퍼센트는 미국 전체 소득의 24퍼센트를 가져갔는데 1979년에는 이 숫자가 3분의 1로 줄었다. 그런데 2017년에는 다시 1929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소득 불평등의 증가는 부의 불평등 증가를 수반했다." "더구나 이 수치들은 〈세전〉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즉, 소득이 얼마나 재분배되었는지가 감안되어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세율이 낮아졌으므로 1979년 이후 세후 소득 불평등은 세전 소득 불평등보다 심지어 더 크게 증가했으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406-7)


"하이테크 혁명의 가장 성공적인 발명 중 많은 것이 '승자 독식' 제품이다. 전 세계가 페이스북을 쓰는데 나 혼자 마이스페이스에 남아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내 트윗을 리트윗해 주지 않는다면 트위터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술 혁신은 첨단 산업뿐 아니라 기존의 산업에도 변혁을 가져왔고, 요식숙박업이나 운수업처럼 전에는 하이테크 분야와 거의 관련이 없어 보였던 산업에도 도입되어 커다란 이득을 창출했다." "그 결과 승자가 독식하는 (전체는 아니더라도 거의 다 독식하는) 경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기업의 집중도가 더 높은 업종에서는 매출 중에서 임금으로 가는 몫의 비중이 더 감소했다. 독점 혹은 준독점이 된 기업들이 더 높은 수익을 올리면서 그 수익을 [노동자보다는] 주주들에게 분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집중화의 심화는 임금의 상승 속도가 GDP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410-1)


"이같은 '슈퍼스타' 서사는 금융 분야에는 잘 맞지 않는다. 금융은 팀 스포츠가 아니다. 흔히 금융에서는 시장을 왜곡하고 있는 특정한 불합리를 예리하게 짚어 내거나, 다음번의 구글, 다음번의 페이스북이 될 싹수가 보이는 곳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는 개인적인 천재성과 안목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평범한' 펀드매니저가 매년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이유가 된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액티브 펀드'는 '패시브 펀드'보다 대체로 실적이 좋지 않다. 미국에서 뮤추얼 펀드는 평균적으로 주식시장보다 성과가 저조하다. '개인의 능력'이라는 언어만 빌려 왔을 뿐 능력 자체는 가져오지 않은 듯 보인다. 금융 분야 종사자들이 얻는 프리미엄의 대부분은 순전히 '지대'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규정인 것 같다. 능력이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특정한 직업에 안착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415-6)


"가난한 나라에서 정부 일자리가 갖는 지대처럼, 금융 종사자들의 지대도 노동시장의 전체적인 기능을 왜곡한다." "이것이 우려할 만한 일인 이유는 어떤 직업이 유용성과 상관없이 프리미엄을 받으면,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일을 하는 기업이 재능 있는 인재들을 활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 빠른 속도로 주식 거래를 하면 수익이 올라갈 수 있다. 거래인이 새로운 정보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응 속도라는 것이 이미 초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떻게 경제에서 자원 배분을 유의미하게 향상시킨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은 금융 기업이 홍보와 마케팅에서 단골로 드는 이야기지만 그 뛰어난 인재들을 데리고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인재들의 역량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그들은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거나 췌장암을 치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416-7)


"한 회사가 CEO에게 보수를 더 많이 지급하면 금융 회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회사들 역시 자사의 뛰어난 CEO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만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보수를 더 지급하지 않으면 우리 회사의 CEO가 자신이 함께 골프를 치는 다른 CEO들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금융 회사 CEO의 높은 보수는 다른 영역으로도 전염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 분포 스케일상에 있으면 CEO가 자신의 보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임금도 함께 올려야 한다. 하지만 스톡옵션이 있으면 기업 내에서 아래 쪽의 임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건비를 포함해 비용을 쥐어짜야 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직원들에게 기업에 대한 충성도를 요구하는 대신 직원들을 챙겨 주었던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거대 기업의 특징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온정주의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최상층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되었다."(417-8)


"우리는 레이건-대처 혁명의 기저가 된 '인센티브' 서사가 부유하지 않은 사람 상당수에게 초고소득자의 천문학적인 보수가'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면이 있다고 본다. 아마도 세금 인하는 이러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반영하는 한 가지 징후였을 것이다.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세율의 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다. 자신이 받는 돈이 '노력을 들여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은 채로 스스로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센티브' 개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이러한 서사를 퍼트리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서사는 계속 확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명백히 분노하면서도 자원이 꼭대기 쪽으로 점점 더 많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이민자와 자유 무역을 비난한다."(421)


"이매뉴얼 사에즈와 동료들이 소득세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사람들이 노동에 기울이는 노력은 최고세율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세율에 반응하는 것은 노동에 들이는 노력이 아니라 세금을 포탈하거나 회피하려는 노력이었다. 1986년 레이건 행정부가 세금을 감면했을 때 과세 대상인 개인 소득이 한 차례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즉, 일하려는 의욕과 노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전에는 소득을 숨겼던 사람들이 세제가 유리하게 바뀌면서 이제는 소득을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기업은 가장 좋은 경영자를 원하므로 막대한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되는가? 세금이 높아도 그것이 가능할까? 답은 '그렇다'이다." "세율이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한,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는 여전히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424-5)


"불평등에 맞서는 방안으로서 막대한 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의 장점은, 그 부를 소유하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그 막대한 부에서 발생하는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뿐 아니라 (가족 소유의 트러스트 등에 재투자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 축적한 부에서 새로운 자산 소득이 발생하면 그 소득의 대부분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진다. '매우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도록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유세 개념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유세를 경제 매체나 정치인들이 종종 말하듯이 부유한 사람들이 사회에 부를 '환원'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부유세는 그들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그 소득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행정적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편리하게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428-9)


"최고세율 인상의 어려움은 정치적인 어려움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면서 그들은 사회를 현 상태로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할 수 잇는 자원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최고위소득자들의 세율을 낮추도록 의원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고 로비를 하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부상한 것은 어느 면에서 여기에 대한 백래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역량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느낌이 깔려 있다. 이러한 느낌은, 언제나 결정은 저 먼 곳에 있는 엘리트 계층이 내리고 어쨌거나 그 결정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 생각 자체가 옳든 그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그의 엄청난 부와 엘리트 계층 인맥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이제까지의 방식을 뒤흔들겠다는 약속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432-3)


8장 국가의 일


"더 많은 공공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는 개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개입이든 간에 정부의 개입 자체에 매우 회의적이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레이건 시절 이래로 미국 사람들은 〈현재의 위기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줄기차게 들어 왔다." "정부의 행동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이야말로 정작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대의 제약 요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본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이 '무엇에 비하여' 나쁘다는 것인가? 가령 태풍이 닥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거나,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는 등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주체가 현실적으로 손댈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정부의 존재 근거 중 하나다."(452-5)


"정부에 대한 의구심은 정부의 부패에 대한 강박적인 우려와 관련 있다. 하지만 의지만 있으면 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부패의 근원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대해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 시장이 손대지 않는 일을 정부가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 일이 부패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오염에 벌금을 부과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물론 오염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기업이 오염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벌금을 무마하려 하는 경우가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리 기업이 이 일을 맡으면 그 문제가 나아지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리 기업 종사자라고 돈을 덜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조세 징수 업무를 민영화했던 '조세 징수 도급tax farming'의 실제 역사가 잘 보여 주듯이, 민간 조세 징수 업자가 엉뚱한 사람들에게까지 조세(혹은 벌금)를 과도하게 뜯어내려 할 인센티브가 생길 위험도 있다."(457-8)


"정부가 무능하거나 부패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보는 인식은 악순환을 일으킨다. 정부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매력적인 진로로 여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만 정부에 들어오게 되면 능력이 부족한 정부가 되고, 이는 다시 유능한 사람들이 정부로 가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정작 시민들이 정부의 부패에 무덤덤해지게 된다. 그래서 선출직 정치인들 사이에서 뻔뻔하고 노골적인 부패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도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넘어가게 된다. 워싱턴 D.C.부터 예루살렘, 모스크바까지 모든 곳에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그와 다른 모습을 기대하도록 학습되어 있지 못해서, 더 이상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부패에 대해 과도한 강박이 '거대한' 부패가 횡행할 여지를 만들어 주는 뒤틀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461-3)


"남미에서도 빈곤층에게 소득을 이전해 주는 프로그램은 정치적인 반대에 부닥쳤고 명목상의 이유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주면 도덕적,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복지 담론이 '복지 프로그램이 오남용과 게으름을 유발한다'는 우려로 점철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멕시코에서 저소득층 대상 소득 이전 프로그램인 '프로그레사'를 고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제학 교수 산티아고 레비는 우파의 탄탄한 지지를 얻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마땅한 보상'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수혜자가 받는 혜택이 분명하게 조건부로 제공되게 했다. 수혜 가구는 자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학교에 보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해당 가구는 자녀의 건강과 교육 면에서 더 나은 지표를 보여줬다." "우리에게 자원은 부족하지 않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불화와 불신과 분열의 벽을 뛰어넘게 해 줄 아이디어다."(466-8)


9장 돈과 존엄


"현재의 담론을 보면, 한쪽 끝에는 시장 경제에서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현금을 주고 그다음에는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손 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알아서 할 능력이 없으므로 운명대로 살도록(즉 비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그들의 삶에 매우 세세하게 개입해서 그들의 선택지를 제약하고 그 제약을 벗어날 경우에는 응분의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은 공공 정책 수혜자들의 자존감은 우리가 고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그들의 자존감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그들이 공공 정책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존감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존중받고 싶다는 욕망이야말로 사람들이, 특히 그 프로그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474-5)


"오늘날 보편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은 사회 복지 프로그램계의 '잇 아이템'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밀턴 프리드먼 이래로 대개의 경제학자들 역시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는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정부 관료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지 수급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는 그들이 알아서 결정하게 두는 것이 명백하게 옳은 일이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는 게 제일 좋을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 먹을 것을 사는 게 합리적이라면 그들은 먹을 것을 살 것이다. 옷을 사는 게 더 유용하다면 그들은 옷을 사기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SNAP(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 '푸드 스탬프'라고 불렸던 저소득층 영양 보조 프로그램) 같은 제도는 지급 받는 돈으로 식품만 살 수 있게 정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수급자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다."(475-6)


"보편기본소득에 저항하는 가장 간단한 한 가지 이유는 돈이다. 보편 프로그램은 수혜 대상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매달 모든 미국인에게 1,000달러를 주려면 연간 3.9조 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다 합한 것보다 1.3조 달러나 많은 것이고, 연방 정부 예산 전체, 그리고 미국 경제 규모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국방, 공공 교육 등 전통적인 정부 기능을 줄이지 않으면서 이만한 자금을 조달하려면 기존의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없애고 '추가로' 미국의 세금을 덴마크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적은 액수를 지급하고 소득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보편' 기본소득은 아니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상 집단을 설정하고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갖는 모든 단점들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483-4)


"가난한 나라의 정부도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을 지급하는 보편초超기본소득universal ultra basic income에 더해 매우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더 금액이 큰 소득 이전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후자의 프로그램을 예방적 의료 및 아동 교육과 연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 조합으로 보인다. 후자의 선별 프로그램에서 조건 이행을 너무 엄격하게 강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로코에서 '용도 독려 현금 이전labeled cash transfer' 방식의 프로그램을 평가한 결과, 프로그램의 목표[자녀의 교육]를 명확히 밝혀서 지급받는 돈을 자녀의 교육비로 쓰도록 '독려'는 하되 이행을 엄격하게 강제하지는 않아도 전통적인 조건부 현금 이전 프로그램만큼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 효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행정 비용을 낮추면서도 정작 가장 취약한 가구를 의도치 않게 배제하게 되는 위험도 피할 수 있다."(506-7)


"보편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그러나 본인이 가난하지는 않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기본소득을 새로운 경제 구조에서 비생산적인 인력이 되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될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돈을 지급함으로써 완화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보편기본소득이 있다면 그들이 굳이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실증 근거로 볼 때 이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연간 1만 3,000달러의 보편기본소득이 조건없이 주어지면 당신은 일을, 혹은 구직을 그만두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87퍼센트가 아니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그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일이 목적의식, 소속감,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고 고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직업을 자아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더 크다."(509-10)


"개념적으로 보편기본소득은 실직한 노동자들이 기본소득을 받으면 힘겨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것이라고 상정한다." "불행히도, 실증 근거들에 따르면 '노동 시스템' 외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구조화된 노동 환경에서 제공되는 모종의 규율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자동화에 대해 사람들이 매우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64퍼센트가 사람들이 로봇과 경쟁하도록 내몰린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실제로, 시간 여유가 더 많아진 사람들(은퇴자, 실직자,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등)은 전일제로 일하는 사람보다 자원봉사 활동을 할 가능성이 더 낮았다. 즉 자원봉사는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에 더해 '추가로' 하는 일이지, 일상적인 활동 '대신에' 하는 일이 아니다."(512-3)


"전환의 시기는 정부가 그 전환으로 고통을 겪는 노동자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기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기존과 비슷한 정도의 자부심을 주는 일자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을 바꾸는 것과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 모두 굉장히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경제에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 개인에게도 자신의 재능과 일자리를 더 잘 연결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노동자 다섯 중 넷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일자리를 전환할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에 대해서만 보편 권리를 보장하는) 보편기본소득과 달리 일자리 전환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사회적인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모두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져야 한다."(532)


"인도에서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과 시카고 남부 빈민가의 젊은이, 그리고 방금 해고된 50대 백인 남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고 그들 자신으로 여겨질 권리가 있다. 개도국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우리는 희망이야말로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늘 목격한다. 그들을, 사람 자체를 그들이 가진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상황'을 '본질'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희망이 들어설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스스로를 그 정체성으로 꽁꽁 감싸는 것이고,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모든 해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더 많이 알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한,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545-6)


에필로그 좋은 경제학과 나쁜 경제학


"개발경제학자로서 우리는, 지난 40년이 보여 주는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변화의 '속도'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은 쪽으로도 그렇고 나쁜 쪽으로도 그렇다. 공산권이 붕괴했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했고, 전 세계 극빈층이 반으로, 그리고 또다시 반으로 감소했고,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HIV가 맹렬히 확신되었다가 수그러들었고, 영아사망률이 대폭 감소했다. 또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널리 퍼졌고, 아마존과 알리바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등장했고, '아랍의 봄'의 희망이 중동을 휩쓸었고, 전체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었고,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의 위협이 닥쳤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지난 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목격한 변화의 매우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내린 정책적 선택의 결과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책은 강력하다. 정부는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엄청나게 해악을 끼칠 힘도 가지고 있다."(552-3)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말이다. 〈자신은 실용주의자라서 사상 따위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대개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하늘에서 계시를 듣는다는 미치광이 권력자들도 몇 년 전에 어느 학자가 끄적거려 놓은 글에서 자신의 망상을 뽑아낸다.〉 사상은 강력하다. 사상은 변화를 추동한다. 좋은 경제학만으로 우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제학이 없다면 우리는 어제의 치명적인 실수를 반드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쁜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중하게 살피고, '자명'해 보이는 것의 유혹에 저항하고, 기적의 약속을 의심하고, 실증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복잡성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함이 없다면,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담론은 단순한 슬로건과 이미지로 환원되어 버리고,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한 정책은 돌팔이의 해법에 밀려나 버릴 것이다."(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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