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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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과 ‘사회’의 3가지 주제 중에서 저자가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은 바로 ‘사회’史이다. 저자의 의도는 ‘문학’과 ‘예술’의 변천과 전개 양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닮은 듯 다른 렌즈에 비친 시대별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예술 관련 책들과 달리 도판이 거의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이런 저자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사회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설의 미학이다. 과거에 전개됐던 과정들이 기시감처럼 반복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한 사회가 가꾼 토양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새싹들이 옛 제도와 관습을 해체한 후 새로운 사회의 기반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게 부단히 요동치는 역설의 파도가 인간의 창조력을 자극하고 예술을 잉태한다.

예술은 종교적 의식(儀式, 意識)에서 비롯했지만, 작가의 자의식이 깨어났을 때 종교의 기반을 잠식한 것은 바로 예술적 창조력이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폐단을 속속들이 체험한 귀족들에 의해 수립됐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자신의 설계자를 추방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최대 맞수였던 절대 왕정을 키워낸 것은, 부르주아들이 보급한 화폐 경제였다.

선악(혹은 미추)는 천사의 날개 속과 악마의 뿔 위에서만 선명하게 나뉘어 숨쉰다. 인간은 그저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갈대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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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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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엮인 한 개인(또는 가문)이 극적인 슬픔을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주력한 두 선배와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비극에 전통을 회의하기 시작한 당대의 진단 세 가지를 덧붙였다.

아아,
인간의 종족도 신들을 저주할 수 있다면!
(힙폴뤼토스 1414행)

1) 호메로스 서사시부터 비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뜻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벗어난 영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방종을 일삼고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신들을 향한 신뢰와 복종을 거두어들인다. 신은 더 이상 경배의 대상만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
(메데이아 1078행)

2) 따라서 격정에 휩싸인 인간의 행동은 신과 무관하다. 오이디푸스 왕은 결국 신이 쳐 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극적인 항의의 몸짓을 보였지만, 메데이아의 복수극은 신의 눈길을 벗어나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정이다.

그래요, 군중은 무서운 재앙이지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359행)

3)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중무장 보병으로 전쟁에 참전한 대다수 시민계급의 활발한 참여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전성기는 곧 쇠퇴기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제국의 영광에 도취된 민주주의는 합리성을 상실하고 중우정치로 변질되어 갔다.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을 설계했다. 소포클레스는 비극을 완성했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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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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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필록테테스 502행)

흔히 동양의 사유는 음양의 조화, 화복(禍福)이 순환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격언으로 대표된다. 반면 서양의 사유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격함, 절대자 앞에 선 단독자라는 관념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타자를 재단할 때 수시로 이분법의 잣대를 활용하지만, 현실은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양자가 융합된 상황이 대부분이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우지만 생명체의 마음에 담긴 본성의 일부이며 사이코패스의 뇌만 떼어내 진공관에서 배양하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우리가 서양의 사유라고 콕 집어 말하는 직선적 세계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헬레니즘적 세계관은 이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무게를 체감하고 행복과 불행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음을 놓치지 않았다. 이들이 중국적 사유와 다른 점은 인간을 닮은 신의 섭리를 긍정했으며, 그 뜻에 부합하여 살 것을 주장한 대목이다. 동양 사유의 ‘천(天)’에도 인격적 신의 개념이 일부 들어있지만, 세상의 질서나 운행 원리라는 형이상학적 속성이 더 짙게 배어 있다.

그리스 비극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풀기 위해 신의 개입-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라는 다소 허술한 요소를 도입한 것도 바로 꼬일대로 꼬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을 이러한 신적인 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기에 자신과 닮지 않은 그리스도교와의 기나긴 동거를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어온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오늘, 저 사람에게는 내일
즐거움이 쓰라림으로, 그러다가 다시 사랑으로
변하니까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608행)

처음과 마지막을 예비해주는 신의 음성과, 삶의 희로애락을 주관해주는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던 시대는 행복했었다. 과학이 진리의 동의어가 될수록 가속화되는 자아의 분열은 신을 갈구하면서 역설적으로 신의 음성이 지워진 시대를 조립해냈다. 완전한 긍정의 끝에서 내달린 길은 완전한 부정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머무를 자리는 기나긴 사잇길의 어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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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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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니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아가멤논 218행)

미망이 씨를 뿌린 자리에 오만(hybris)이 알알이 맺힌다. 열매를 거둔 자의 두 손은 매번 핏빛으로 얼룩진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가 절망과 분노, 대결과 살육의 즙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 미망과 오만의 인형놀음을 주관하는 운명(Moira)의 여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굴복하는 자와 거스르는 자 모두가 운명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하는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진창에 빠질 때마다 이것은 정해진 길이라고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가? 올림푸스의 신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싸우는 인간(클뤼타임네스트라)을 벌하고, 따르는 인간(오레스테스)에게 상을 내리는 물리지 않는 유희(遊戱)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쓸모 없는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 주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낼 수 있는 용기를 부어준다. 그는 ‘미리(Pro) 아는 자’로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형벌을 가져올 지-카우카소스 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거기에 맞설 수 있음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고통으로 운명을 넘어서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의 이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75행)

비극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인간은 그것을 온 몸으로 겪어냄으로써 무의미한 일상을 깨고 나온다. 죽을 때까지 되풀이되는 이 고갯길을 넘어가는 행위가 바로 카타르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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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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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단락 글쓰기>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표면적으로 육체적 시련의 과정이지만 그가 짠 바닷물을 삼키면서 단련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자세이다. 그는 선악과 호오가 뒤얽힌 인간 군상의 속내를 무던히도 많이 관찰한 끝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에 걸맞는 같은 마음을 더욱 갈구한다. 페넬로페의 같은 마음이 여전히 고향을 품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흔쾌히 미소 지으며 긴 여정에 함께 오른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전이나 전쟁의 와중에는 그저 꾀가 많고 영리한 사람이었던 오뒷세우스는 귀향 길의 간난신고 속에서 정말 많이도 떠돌아다닌 자로 거듭난다. 이 거듭남은 각종 시련영웅적으로 이겨낸 흥미만점 여행기의 주인공이 발산하는 호방함이 아니라 이전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자가 느끼는 ‘발견의 환희에 바탕을 둔다. 이제 오뒷세우스는 고향의 평온함에 묻혀 살던 자신을 끌어내어 폭풍우 속으로 내친 신들의 주사위 놀음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같은 마음이라는 정신적 귀향에 대한 열망을 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 궁극적인 목적지로서의 고향은 근심 없던 과거의 이상향으로의 귀환이 아니다. ‘같은 마음을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한 인간의 소망(素望)이 집약, 질적으로 고양된 장소이다.

 

지난한 고민이나 관찰을 동반하지 않고도 같은 마음을 본능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전장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갯길에서 10년 간이나 몸을 부대낀 전우들 사이에서는 굳이 같은 마음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전리품을 배분하는 자리에서 탐욕을 드러내고, 귀향선에 올랐지만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동료들의 태도에서 오뒷세우스는 같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되었다. 칼륍소의 유혹과 키르케의 환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놀라운 기회이었지만,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반자의 포옹이 아니라 일방적인 초대에 불과했다. ‘다른 마음을 가진 타인의 존재같은 마음에 대한 향수를 더욱 진하게 불러온다. ‘같은 마음은 신체적 친밀함이 아니라 영혼의 교감을 요청하는 행위가 된다.

 

같은 마음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치는 타인이 필요하다. 타인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그 모양을 읽는 기술을 갖춰야만 세계 일반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세계 이해의 관문을 거치고 돌아온 사람의 내면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파악했던 예전의 내면과 겉모양만 같을 뿐 본질이 다르다. 순환하는 여정을 겪은 사람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고, 자신 psyche를 돌보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조화를 깨달은 사람은 육체의 부대낌을 넘어서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절차는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고 다시 모순이 싹트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페넬로페의 같은 마음을 확인한 오뒷세우스는 이제 그 여정을 흔쾌히 미소 지으며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칼륍소의 호의를 뿌리치고 신이 되기를 거부한 것은 같은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루노 스넬의 말처럼 신은 지상에 현현(Epiphanie)하기 전에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공동체 안에서 껍질을 깨고 ‘발견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부여 받는다. 신의 언어에 없는 같은 마음을 향한 줄기찬 탐구는 인간의 고유성을 고양하여 역사의 씨앗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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