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운명에 엮인 한 개인(또는 가문)이 극적인 슬픔을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주력한 두 선배와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비극에 전통을 회의하기 시작한 당대의 진단 세 가지를 덧붙였다.

아아,
인간의 종족도 신들을 저주할 수 있다면!
(힙폴뤼토스 1414행)

1) 호메로스 서사시부터 비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뜻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벗어난 영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방종을 일삼고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신들을 향한 신뢰와 복종을 거두어들인다. 신은 더 이상 경배의 대상만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
(메데이아 1078행)

2) 따라서 격정에 휩싸인 인간의 행동은 신과 무관하다. 오이디푸스 왕은 결국 신이 쳐 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극적인 항의의 몸짓을 보였지만, 메데이아의 복수극은 신의 눈길을 벗어나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정이다.

그래요, 군중은 무서운 재앙이지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359행)

3)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중무장 보병으로 전쟁에 참전한 대다수 시민계급의 활발한 참여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전성기는 곧 쇠퇴기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제국의 영광에 도취된 민주주의는 합리성을 상실하고 중우정치로 변질되어 갔다.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을 설계했다. 소포클레스는 비극을 완성했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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