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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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니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아가멤논 218행)

미망이 씨를 뿌린 자리에 오만(hybris)이 알알이 맺힌다. 열매를 거둔 자의 두 손은 매번 핏빛으로 얼룩진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가 절망과 분노, 대결과 살육의 즙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 미망과 오만의 인형놀음을 주관하는 운명(Moira)의 여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굴복하는 자와 거스르는 자 모두가 운명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하는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진창에 빠질 때마다 이것은 정해진 길이라고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가? 올림푸스의 신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싸우는 인간(클뤼타임네스트라)을 벌하고, 따르는 인간(오레스테스)에게 상을 내리는 물리지 않는 유희(遊戱)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쓸모 없는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 주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낼 수 있는 용기를 부어준다. 그는 ‘미리(Pro) 아는 자’로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형벌을 가져올 지-카우카소스 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거기에 맞설 수 있음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고통으로 운명을 넘어서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의 이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375행)

비극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인간은 그것을 온 몸으로 겪어냄으로써 무의미한 일상을 깨고 나온다. 죽을 때까지 되풀이되는 이 고갯길을 넘어가는 행위가 바로 카타르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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