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스타일 - 우리 시대 모든 프로페셔널의 롤모델
진희정 지음 / 토네이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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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려움을 모르는 국민 대변자, 손석희가 좋은 방송인인 이유

 

  1950년 상원의원 조 매카시는 미국 국무성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1954년까지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이끌며 숱한 정치가와 예술가, 시민들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했고 ‘매카시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웠던 사람들은 침묵했고 매카시즘으로부터 달아나려 애썼다. 그 무렵 침묵을 그치고 진실을 보도했던 언론인 에드워드 R. 머로는 “역사를 부정할 수는 있겠지만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면서 공포의 시대에 제동을 걸기로 결심한다. 


<굿 나잇 앤 굿 럭>은 에드워드 R. 머로를 통해 공포를 무기삼아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이 지배했던 시대에 언론은 무엇을 했어야만 하는지를 물은 영화다. 무엇보다 불편한 진실을 피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에게 던져주는 사회적 의미가 컸다. 에드워드 R. 머로는 언론의 진정한 힘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매일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마주할 때면 이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가 생각난다. 주간 가장 이슈가 되는 화제의 인물들과 벌이는 인터뷰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른 아침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촌철살인의 질문들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코멘트는 개운한 하루에 청량감을 더한다. 손석희에게 인터뷰이들은 사건과 이슈의 당사자일 뿐이다. ‘국민이 듣고 싶은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한다’는 그에게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그는 거침없이 묻는 사람이다. 그리고 국민을 대신해 질문에 답을 얻어내는 사람이다. 매력적인 대변자인 손석희를 말하는 <손석희 스타일>을 읽었다.


 <손석희 스타일>은 방송작가와 기자 출신의 작가가 유명하면서도 정작 잘 알려지지 않은 아나운서 손석희의 이모저모를 끌어모았다. <100분 토론>과 <시선집중>의 방송내용과 언론매체들과의 인터뷰 등을 참고로 손석희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스타일(저자는 ‘아우라’라고 표현했다)을 설명했다. 나아가 지금의 손석희를 있게 한 여러 가지 스타일을 동서공금의 세계적인 리더들의 스타일과 비교해 그가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세상 사람들이 관심이 있어 하는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매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시작부터 손석희에 대해 ‘찬사’를 마음껏 던질 준비를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을 충분히 끌어모아 담담하게 써내려갔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마치 세 계단 위에 있는 손석희를 올려다 보며 읽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정작 자신은 있는 사실에 대해서만 인터뷰를 하는 인물인데, 자신의 스토리가 사실보다 과장되거나 ‘미화’되었다면 어떨까? 지나친 묘사와 분석은 그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불편함을 더했다.

  책의 주인공인 손석희 본인 역시 이 책이 써진 것에 대해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가십거리로 남을 법한 그에 대한 에피소드 조각들을 한데 모아 ‘인간 손석희’를 잘 묘사하고 분석했다. 그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들을 이 책을 통해 많이 해소했다. 객관적 관점을 놓치지 않고 읽는다면 그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진 독자가 일독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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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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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천공항에서 일주일을 머물러 볼까나? 

  한 사내가 공항에 꼼짝없이 갇혔다.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공항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되돌아가는 것 마저 조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귀국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9개월여를 공항에서 지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톰 행크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세 번째로 손을 잡았던 영화 <터미널The Terminal>의 줄거리다.

  동유럽의 가상국가인 크라코치아의 국민,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는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국 크라코치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공식적으로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여권과 입국 비자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미국으로 입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국경이 봉쇄된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된 빅터는 공항 터미널에서 생활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카리미 나세리Karimi Nasseri 라는 이란 남자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1976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왕정 반대 시위 경력 때문에 추방된다. 그는 필사적으로 망명지를 찾아 헤맸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88년 샤를 드골 공항에 주저앉고 만다. 1999년 프랑스 정부는 보다 못해 그에게 망명자 신분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그가 거부했고, 스필버그가 [터미널]을 만들면서 준 저작권료 30만 달러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공항에서 살기를 고집했다는 후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한 사내가 터미널로 걸어 들어가 일주일 동안 살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항공사의 달콤한(?) 제안에 의해 ‘자발적 구속’을 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블로그 마케팅을 위해 파워블로거에게 제안을 한 것일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파격적이고 거국적이다. 세계적인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은 다름 아닌 세계적인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에게 제안한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가 세계적인 공항에서 일주일을 머물렀고, 그 결과물로 한 권의 책이 탄생했으니, <공항에서 일주일A WEEK AT THE AIRPORT>(청미래)이다.



 

    공항은 드나듦이다. 공항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그래서 알고 싶은 세상으로 나가는 플랫폼이고, 더 이상 알 필요 없이 이미 익숙한 것으로 돌아오는 귀착지다. 드나듦은 중요한 말이다. 공항에 떠남만이 있다면 무의미해지고 슬퍼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기에,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남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여행이 행복한 이유는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공항은 왠지 어색하고 공허하다. 크기가 너무 큰 때문일 것이다. 드넓고 천정 높은 그곳을 들어가면 빨리 떠나야 될 것 같고, 배웅을 하러 갔다면 얼른 보내고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낯설고 불편한 그곳에 알랭 드 보통은 일주일을 있었단다. 그리고 책을 폈단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의 사건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어느 날 항공사로부터 받은 제안은 이랬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회사가 최근에 문학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 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름도 멋지게 히드로의 첫 상주작가로 불릴 이 작가는 공항 시설의 전제적 느낌을 살핀 뒤, 출발 대합실의 D 구역과 E 구역 사이에 특별히 배치한 책상에서 탑승객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본문 11쪽

  이 글을 읽으며 상상되는 모습은 대합실 통로의 한 가운데 컴퓨터, 그리고 필기도구가 놓인 책상에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아 공항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글을 쓰는 알랭 드 보통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의 목에는 공항의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허가증’ 패찰이 걸려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에게 이러한 제안을 한 항공사도 멋졌지만, 성큼 받아들인 작가도 멋지다. 우리 같았으면 작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동이고, 항공사의 얄팍한 상술이라며 또 한동안 난리가 났을 법할만한 사건을 이들은 쿨하게 제안하고 쿨하게 받아들였다. 저자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가 책에 들어 있었다. 

  “이 정신없는 시대에 보통의 경우라면 항공기 착륙 요금이나 유실물 관리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다국적 기업이 이런 드높은 예술적 야망에 기초한 기획을 승인할 만큼 문학이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전화로 나에게 매혹적인 만큼이나 막연히 서정적 태도로 말했듯이, 어쩌면 세상에는 오직 작가만이 적당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본문 11-12쪽



 

   여행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여행의 기술>(이레)이라는 책 한 권을 쓸 만큼의 능력을 지닌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이런 멋들어진 제안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역시 여행차 공항에 있을 때면 자신의 비행기가 온갖 이유로 비행기가 늦어지기를 갈망한 적도 많았던 터라 더할 나위 없었다(차라리 불가항력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공항에서 뭉그적거릴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 진실은 본임 말고는 모른다. 그가 실제로 항공사의 예술적 야망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그 기획에 대한 보수에 감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박학다식한 그가 자신의 소양을 유감없이 토해낼 만한 대상으로 공항이 적합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가 성큼 수락을 했고 말 그대로 유감없이 자신을 공항 속으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 엄밀하게 말하자면 ‘알랭 드 보통이 만들어낸 한 권짜리 팜플렛’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공항의 이모저모와 공항에서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가는 여행객들을 살피며 생각나는 바를 적은 두꺼운 책자다. 원래 영화나 소설이 대박을 내서 유명해지면 배경이 되는 곳도 유명해지는 법,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자그마치 일주일을 머물며 그곳을 적었으니, 책이 출간된 후 얼마나 유명해졌을까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책을 그런 상업적 기획력의 소산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팜플렛 치고는 읽는 글맛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의 문학작품에도 룸서비스 메뉴만큼 시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을 돌풍이

아사마 산 위

돌들을 따라 불어간다.

일본 에도 시대에 하이쿠 형식을 완숙 단계로 끌어올린 마쓰오 바쇼의 이런 시구조차 소피텔의 케이터링 사업부 어딘가에서 일하는 익명의 장인이 지은 시구에 비하면 단조롭고 환기하는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햇볕에 말린 크렌베리를 곁들인 연한 채소,

삶은 배, 고르곤촐라 치즈

진판델 비네그레트 소스로 무친 설탕 절임 호두“ 본문 27 쪽

 

  식당의 메뉴에서 천정까지, 검색대의 청원 경찰에서 매점의 아가씨까지, 그리고 숱하게 드나드는 생면부지의 여행객들까지 알랭 드 보통의 눈에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글이 되고, 그만의 표현으로 된 글은 내 눈에서 다시 눈에 선한 그림이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난 한 발 한 발 히드로 공항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부분을 발견했다. 지인인 영화번역가 이미도가 부산에서 집필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책의 한 부분을 예를 들었는데, 그곳을 발견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끔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로 딱 적합한 구절이다.

  “나의 고용주는 제대로 된 책상을 하나 놓아주겠다고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곳은 일을 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런 곳에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오히려 그런 ‘어려운 작업 환경’이 글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 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본문 77쪽



 

   여행은 여행객에게 있어 환기이고 각성이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오감이 살아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은 글쓰기에 좋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 때문이다. 대합실 통로에 책상을 놓고 철저하게 제 3자가 되어 공항이라는 작은 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는 일주일의 온전한 그 순간이 여행이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은 그의 공항 예찬론이자,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기도 하다.

  “혼돈과 불규칙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부터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호 관계성에서부터 여행을 로맨틱하게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본문 16쪽 

  이 책을 읽었다 해서 그가 본 공항을 눈에 보듯 내가 그릴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내게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던 곳이 그곳이라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정반대인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떨까? 영화 <인 디 에어> 속 주인공인 해고대행업자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처럼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이 느끼는 공항은 어떨까? 내가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논현역 3번 출구처럼 들어서면 설레고 나오면 집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푸근한 마음이 드는 그런 정류장 같은 그런 곳이 아닐까? 

  책장을 덮으면서 시간을 내어 하루 동안 인천국제공항에 머물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가 머물렀던 히드로 공항 아니더라도 책 속의 구구절절을 대신 찾아 느껴보고 싶어졌다(이 정도면 공항을 두려워하는 내게 있어서는 큰 발전이다). 여행을 앞두고 있어 곧 공항에 가야 한다면, <여행의 기술>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알랭 드 보통과 함께 동반여행을 하는 기분을 제공할 것이다. 

PS: 남을 따라하는 기분은 들지만 김영하, 박민규, 김연수 같은 소설가가 똑같은 기획으로 인천국제공항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책을 써보는 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더 멋진 글이 나오지 않을까? 과연 인천국제공항이 그만한 예술적 감각이 있을 것이며, 그 작가들은 쾌히 승낙을 할까? 생각만으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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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0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치님 안뇽?...ㅋㅋ저 여기에 별장 하나 있어요. 리치님이 여기에도 계신 줄은 몰랐네요. 즐겨찾기서재로 꾹 눌렀으니 가끔 올께요~.

리치보이 2010-04-14 14:11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마기님. 온라인 서점에는 모두 있답니다.ㅎㅎㅎ 온라인서점의 요청으로 만든 곳도 있고요, 다른 곳은 없어 허전해서...ㅋㅋㅋㅋ 암튼 반갑습니다. 여기 저기 보시면 아는 체 해주세요~ ^^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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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싶다면, 하루 몇 번이라도 감탄하면서 살아라!   



누군가 내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헛헛함을 덜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헛헛함은 심심함도 될 수 있고, 무료함도 대체될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더 깊은 무엇이 담겨 있다. 헛헛함이란 단어는 얼마 살지 않은 내 평생을 쫓아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단어이고 내게 변화를 추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헛헛함이란 뭘까? 이를테면 바쁘게 보낸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노라면 헛헛함을 느낀다. ‘나름 바쁘게 오늘을 보냈는데, 내게 돌아온 건 조금 더 늘어난 내일 할 일과 통장잔고란 말인가?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바로 헛헛함이다. 뭔가 어제와는 다른 하루여야 할텐데 다르지 않을 때 마치 오늘을 헛산 것 같을 때 ‘헛헛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 아침과 같고, 대입시험을 치룬 날 저녁을 닮았다. 이런 기분이 들면 괜히 ‘울컥’해지고, 지금의 기분을 당장 떨쳐내려고 당장 뭔가 변화를 시도해지고 싶어진다. 젊은 시절엔 이런 기분이 들면 술을 찾았다. 친구를 부르고 한데 어울려 ‘으쌰 으쌰’하다 보면 ‘헛헛함’은 어느 샌가 모르게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로 떨쳐내려는 시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술로 잊은 헛헛함은 텅 빈 지갑 쓰라린 위를 부여잡고 더 헛헛한 아침이 만나게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그런 날이면 책을 읽었다. 뭔가 궁싯거린다는 기분을 갖기에 독서보다 더 손쉽고 경제적인 방법이 또 없다. 부러 절대고독의 순간을 만들어 글을 읽고 나면 ‘느끼고 배웠다’는 소득의 느낌은 포만감으로 다가온다. 안단테 콘 모토 Adante con moto, 즉 느리게 그러나 활기차게 책장을 넘겼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면 등이 뜨듯해진 것 같고, 5밀리미터 정도는 키가 커진 듯한 느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분명히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만든 기분이 든다. 헛헛함을 덤과 동시에 매일 조금씩 크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하지만 난 여전히 점프해야 2미터 남짓이다) 내가 지금까지 눈꺼풀이 잠기는 순간까지 책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심리를 다룬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와 같은 책을 만나면 그런 기분은 최고조로 달한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한 친구를 만나 밤을 새워 술을 마신 기분, 이 책을 읽은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다. 



 

    처음엔 황당하고 무모한 제목(아니 위험천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어떤 도발적인 내용이 있을까 무척 궁금했지만 애써 읽지 않았다. 누군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다면 ‘아내에게 불만이 가득한 유부남’으로 보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급기야 TV에서도 책제목을 언급하며 ‘요즘 남자의 심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저자인 김정운 교수가 ‘잘 나가는 스타강사’로 불리는 것을 보고는 집어들 때임을 짐작했다. 책을 집어든 후 이름마저도 김정일의 후계자와 같아 엄청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내 선입견은 채 몇 장을 넘기지 않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저자 양반이 한마디로 골 때리게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심리학책으로 평가한다면 잘못 본거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자가 자신과 함께 주위를 둘러싼 가족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자서전이기도 한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이에 빗대어 오늘날 중년 남성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병리현상을 조목조목 잘 짚어내고 있다.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에 슈베르트가 낀 듯 한 안경을 뒤집어 쓴 두툼하고 둥근 저자의 외모는 결코 한국형 남성의 표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자신의 이야기와 심리는 정도만 다를 뿐 딱 나였고 주위에 있는 선후배들 이었다. 소제목의 앞 뒤 마다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멍청한 듯한 말들은 어쩌면 그리 내 마음과 닮았던지...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책의 재미는 처음부터였다. 책의 프롤로그부터 저자의 다소 위험한 고백은 앞으로 펼쳐질 대단한 고백들을 짐작하게 한다. 책의 제목을 재미있게 설명한 부분은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한 결정적인 이유기도 하다.  

  “책의 제목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로 했다고 하자, 이내가 묻는다.

당신, 진짜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나는 약간 주저하다 대답했다.

응, 가끔...

아내는 잠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로 몸을 내 쪽으로 항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만족하는데...

내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데, 아낸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내 가슴을 깔끔하고도 깊숙하게 찌른다.

아주 가끔...

이렇게 ‘가끔’ 후회하는 남편과 ‘아주 가끔’ 만족하는 아내가 함께 사는 집이 우리만은 아닐 것이다.“ 프롤로그 8~9 쪽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남성들이 갖는 고민들을 잘 대변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버금가는 맛깔 나는 글맛도 좋지만, 그들(한국남성)이 갖는 고민이 결코 그 만의 것이 아니며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의 문제점임을 밝히며 위로하고 있다. 나아가 심리학적 근거와 해결책을 제시하며 ‘별 것 아냐’라고 등을 토닥였다.

 



 

   이를테면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정말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호텔의 침대에서 잠을 잘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알기에 집에 있는 침실에서도 ‘백열등 부분조명’과 ‘하얀 침대시트’를 ‘조작적’으로 설치한다면 굳이 호텔에 가지 않더라도 매일 잠자리에서 만큼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위적인 행위’를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 내가 내 집, 내 침대에서 행복하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오히려 나 역시 호텔 침대에서 자면 ‘편안하다는 기분’이 듦을 새삼 깨달았다. ‘백열등 부분조명’과 ‘하얀 침대시트’가 다음 쇼핑의 ‘must buy list'에 있는 건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저자는 매일 아침의 갖 볶은 커피를 갈아마시는 행위를 통해 아주 사소하지만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준다고 말한다. 내가 그 날 기분에 따라 향수를 바르고 문 밖을 나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그런 즐거움임을 배웠다.

  또한 그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후회를 한다면서 어차피 해야 할 후회라면 짧게 하는 편이 낫다고,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말까를 망설인다면 일단 저지르고 후회하는 편(그것이 저지르지 않고 후회하는 기간보다 짧단다)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조언한다. 이 조언은 피끓는 젊은 시절 내가 품었던 연애관과 일치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 말을 건네지 못해 밤새워 애태우기 보다는 차라리 망신을 당하더라도 일단 말은 건네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을 무던히 지켰던 터라 뺨도 많이 맞았고, 남의 집 앞에서 서성거린다고 파출소에 잡혀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불리고 싶었던 변강쇠라는 닉네임 대신 껄떡쇠라는 오명을 대학기간동안 안고 살았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적재적소에 박혀 있었던 심리학적 근거 때문만은 아니다. 망사스타킹을 신은 여자가 좋아 물고기를 잡는 그물만 봐도 심장이 벌렁대고, 나이가 들자 가슴이 풍만한 김혜수가 좋아지고, <엄마가 뿔났다>를 <엄마가 미쳤다>로 기억하고 불렀다가 망신을 당하고, 처칠처럼 자신만의 트레이드를 갖고 싶어 ‘나만의 양복’을 맞춰 입었지만 사람들이 ‘교복’으로 본다는 저자의 고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구술은 독자들을 자신의 스토리텔링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저자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고, 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후덕하게 잘 생긴 구봉서보다 배삼룡이 더 웃기고, 이상해보다 이주일을 더 좋아하는 것과도 같다.

  촌철살인은 독자들을 스토리텔링에 빠지게 한 그 다음에 있다. 내(남자들)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지를 심리학 이론들을 근거로 나 혼자만의 심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떨쳐낼 수 있는 해결책도 함께 제시한다. 

  그가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말은 단 한가지다. 바로 매일 매일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책과 강연을 통해 남들에게는 ‘재미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고 말했으면서도 스스로는 재미없는 하루를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결국 그도 쉽게 화내고, 자주 좌절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짜증부터 내는, 아주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 남자였음을 절절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노는 만큼 성공한다>의 그의 전작의 제목처럼 매일을 놀 듯 살아간다면 재미있는 하루가 되고 행복한 하루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좋은 일을 해야 하며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내 안의 심리적 상태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행복하기 위해서는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쉰다는 것은 ‘내면의 나’와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휴식(休息)이 라는 한자는 그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보여준다. 휴식의 한자를 풀어보면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스스로自의 마음心을 돌이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쉬는 것이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중략)

  논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나 스스로를 망각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정말 놀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잘 논다는 것은 이렇게 나를 망각하고, 말 그대로 정신없이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이렇게 정반대의 과정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내면의 항상성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본문 270~271 쪽 정리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가끔 아내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 때는 과연 언제 일까? 모두 읽고 책장을 덮을 때 알게 된다. 바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자신이 죽어라 골프장에 가는 이유를 들어 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산꼭대기까지 죽어라 오르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건강하려고 산을 오른다면 중간까지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정상에까지 올라가는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산 꼭대기에 올라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우와~!”하며 감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보고 끝없이 반복해서 해준 그 감탄이 그리워서다. 나이가 들수록 아무도 나를 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감탄한 일도 없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이 죽어라 골프장에 가는 것이다. (중략)

  감탄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프장에서는 감탄이 된다. 그것도 네 시간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골프에 그토록 미치는 것이다. 허나 그 다양한 삶과 문화의 영역을 제쳐두고 오직 산비탈 한구석에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감탄을 주고받는 것처럼 소외된 삶은 없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음악회도 열심히 가야 하고, 미술관도 아내와 팔짱 끼고 가야 하고, 축구장과 야구장에 아이들 손잡고 가야 하는 것이다. (중략) 감탄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으나, 삶의 가장 궁극적 경험이 우리에게 와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감탄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감탄으로 양육한다. 감탄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285-288 쪽 정리



 

   저자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하루에 몇 번 감탄하는가에 있다고 말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하루에도 몇 번의 감탄이 쏟아진다면 그곳은 행복한 가정이고 행복한 직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함께 사는 이유는 감탄하고 감탄 받고 싶어서, 우리가 사는 이유 역시 감탄하려 산다는 것이다.

  정말 명쾌한 삶의 이유였다. 하루가 재미있고, 즐겁고 나아가 행복해지려면 감탄해야 한다. 내가 나름 치열하게 책을 읽는 이유 역시 저자의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세상과 공감하고, 동감하며 감탄하려 책을 읽고 있다. 저자의 말과 글에 감탄했기에 리뷰도 쓴다. 읽고 쓰는 시간을 모두 더한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이 짓(?)을 만약 누가 돈을 주고 시킨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감탄하며 즐거워한 피드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자잘한 읽는 재미와 심리학적 유익함이 잘 배어있는 책이다. 사십 끝줄의 저자가 자신을 말한다지만 그가 갖는 고민은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이미 하고 있거나, 곧 하게 될 고민들이었다. 자신을 낮춰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은 웃음 뒤에 페이소스를 느끼게 했다. 책을 읽는 동안이 마치 노는 듯 즐거웠다. 게다가 감탄을 자아내는 가르침도 있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라는 독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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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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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액션과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 언제부턴가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건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부으며 영화를 보면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정말 김빠지는 못된 버릇’이다.다름 아닌 주인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죽던지, 살던지, 이기던지, 지던지, 복수를 하던지, 결국 영웅이 되던지 온 신경을 쏟으며 주인공에 주목해야 온당할진대 어느 때부터 엑스트라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다고 해서 절대로 따라하지 말기를...그러면 영화는 정말 혼란스러워지고, 재미없어진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이 함부로 쏘아댄 총질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총알을 받고 최대한 절규하며 스러져가는 이름 모를 악당들을 보면서 ‘저 이도 남의 집의 귀한 자식이고, 아버지일텐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허구의 이야기를 배우들이 영상으로 찍은 것’이라는 본질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비교적 영화에 동화되어 주인공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지만, 다만 악당들을 쓰러뜨려야 할 상대가 아니라 ‘그들도 사람’이라는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100 분이라는 상영시간을 채울려면 주인공은 당연히 살아야겠지만, 그 사이에 죽어가는 악당들, 아니 사람들에게 연민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웅은 이름 모를 수많은 희생을 밟고 일어선 자‘라는 말도 있듯이 일반적이라면(평범하다면) 살아남은 영웅에 주목해야 하거늘, 영웅의 발 알래 밟혀있는 사람들에 포커스가 가더란거다. 이 일반적이지 못한 관점은 액션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급격하게 떨어뜨렸다. 나아가 총알에 스치거나 악당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에게는 혀를 차면서도, 되도록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이 나며 죽어가는 악당에게는 박수를 치며 시원해하는 내 감정이 과연 옳은건가 의심하게 되었다. 이 정도쯤 되면서부터 그런 류의 영화는 볼 짱 다 봤고, 오랫동안 누리던 작은 즐거움이 사라져버렸다.

  오래 전 무슨 사건을 접했다. 아마도 식사를 하면서 뉴스를 보던 중 그 일로 몇 명이 희생되었다는 보도를 들었던 것 같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듯 들어왔다. 아래는 그날 밤 블로그에 적은 몇 글자다.

죽음을 지켜보는 마지막 증인인 가족이 함께 함은

저승의 문턱에 있는 '곧 죽을 자'에게는 큰 위안이 될 듯 하다.

반면에 지켜보지 못한 가족에게는 죄스러움과 아픔이 되어

자신의 주검까지 남겨지겠지.



곧 다가올 죽음에 무언가 꼭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충분히 다 주지 못한 자신의 사랑이 아쉬워서 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살던 중에 갑자기 닥친 자신의 죽음을

깨닫기도 전에, 알리기도 전에 차마 눈감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수많은 영정들에게 유감스럽다.



나와 내 가족을 그 자리에 앉혀놓자니

끔찍하기가 그지없다.

..........



배고픔을 알고, 시장기를 속이는 자리에

비극의 소식들이 계속된다.



속이 상해 '밥알이 곤두설까' 전원을 끄자니

죄송함과 간사함이 교차한다.



살아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어제와 오늘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만 불쌍하다.'

  탄생과 죽음은 동일선상에 있다. 지금 이 시간 어느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듯 누군가는 죽는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삶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래서 나와 내 주위의 사람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삶도 채 인식하지 못했던 철부지 시절에는 결코 없었던 생각, 요즘 들어 들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었다고 느낀 것일까. 텐도 아라타天童荒太의 <애도하는 사람 悼む人>(문학동네)이 눈에 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지 모른다. 제목을 읽는 순간, ‘지금의 나’를 위한 책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애도하고 있습니다....당신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걸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사내가 일본 전역을 돌며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애도하고 있다. 죽음에는 이유도 필요 없고, 경중도 없다. 사내가 펼쳐 본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누군가의 부고(訃告)가 눈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 사내의 애도를 받는다. 사내는 그 어떤 꾸밈도 없이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일본을 돌며 그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왜 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것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 텐도 아라타는 무슨 생각에서 이런 소설을 쓰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나아가서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묵숨에 대해서도 경중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죽음도 차별이나 구별 없이 그저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했고, 거기서 희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젊은 사내 시즈토는 성직자도, 어느 종교단체의 회원도 아니다. 그냥 직장을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다. 단지 여섯 살 때의 기억, 태풍으로 땅에 떨어져 죽은 새끼 직박구리 새의 주검을 대한 기억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죽어서 둥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새의 주검을 엄마(준코)와 함께 땅에 뭍고난 후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 알아. 베란다에서 내내 지켜 봤었거든....이 아이, 아빠랑 엄마 쪽으로 목을 길게 뽑고 울었어....하지마 지금은 여기 잠들어 있어...그걸 아는 건 나하고 엄마하고 이 아이 엄마하고 아빠뿐이네...우리가 잊으면, 이 아이의 엄마하고 아빠밖에 기억하지 못하겠네....(중략)... 어떻게 해야 좋을까...어떻게 하면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중략)...(두 손을 가슴 앞에 가져와 심장으로 밀어넣듯이 포개며) 여기에 넣어둘꺼야...잊지 않도록. 이 아이, 여기에, 넣어 둘 거야.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걸...내 안에 넣어둘 거야.” 본문 123-124 쪽 

  탄생이 듦이면 죽음은 낢이다. 없고 난 이후의 사람을 애도함은 기억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망각을 위한 동물인지라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무모하리만치 엉뚱한 시즈토의 행보가 바보스러우면서도 보기 좋은 우리네 명절을 쇠기 위한 고향 방문을 닮았다. 바로 굳이 함께 기억하고 싶어서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은 조상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제상을 놓고 절을 한 후 조상이 음식을 드시는 동안 편히 드시라고 뒤를 돌아 등을 지는 순간은 바로 조상을 기억하는 순간이다. ‘내 기억 속에 남겨진 조상’을 서로 추억하는 순간,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시즈토가 인상적인 것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애도하는 것이다. 죽은 이들에게 경중을 두지 않고, 제가 아는 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려 했다. 애도하는 것은 결코 즐겁지 않은 일, 오히려 고통스러울 법 한데 오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의 애도하는 법 때문이다.

  “고인을 기억할 때 죽음의 비참함과 비애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만 기억하기로 했다고 한다. 긍정적인 면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르겠지만, 몇십 명, 몇백 명이나 되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떤 인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 가지 요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본문 265 쪽

  이름을 불러 꽃이 되듯, 없는 이는 기억하매 가슴 속에서 되살아난다. 내가 그(녀)를 기억함은 사랑을 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매개는 결국 사랑이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소설이 일본에서 큰 상을 받고 많은 반향을 일으킨 것은 유독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일본사회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밀려 인본주의가 점차 자리를 잃고 있는 경향은 그 어느 곳이든 매한가지다. 자연재해로 수많은 목숨이 잃어가는 현장 앞에서, 가난과 기근으로 숨을 헐떡이는 모습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밥상을 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가져가는 내 모습이 어찌 일본사회를 폄하할 수 있을까.

  비록 허구지만 시즈토가 반가운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이기적인 내가 저자의 말대로 ‘한 명쯤은 있으면 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를 쫓으며 동감하고 위로받았다. 문학의 목표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끝끝내 나는 시즈토처럼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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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해 사는 법 - 삶과 죽음의 은밀한 연대기
기타노 다케시 지음, 양수현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인생 뭐 있어? 너 답게 살다 가란 말이야, 바보야 !

  남의 장례식葬禮式을 가는 것은 책 열 권 읽는 것보다 낫다. 단 한 가지, ‘오래동안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새삼 솟구치기 때문이다. 고인故人의 영전에서 ‘잘 사는 삶’을 추구한다니 이기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이보다 더 생생하게 얻을 기회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잘 사는 삶’이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다가 가는 삶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직 장례식장을 가보지 못한 자가 던진 질문일 것이다. 무엇인가 얻고자 두 주먹 불끈 쥐고 태어난 것이 인간의 탄생이라면, 운 좋다면 두 손 곱게 펴서 염하고 삼베 수의壽衣 하나 걸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죽음임을 알게 되는 것이 장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잘 사는 삶’의 욕망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죽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다 완쾌되거나, 사고를 당해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라면 ‘잘 살고 싶다’고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이유이든 ‘죽다가 살아난’ 경우는 더욱 절실해진다. 제 과실로 위험에 이르렀으면서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감사하고 또 감사해진다. 문제는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가는가 하는 것이다. 1년? 6 개월? 한 달? 잘 나가는 일본의 코메디언이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자신이 ‘상처투성이에 얼굴도 찌그러진 인형 옷’처럼 느껴질 만큼 크게 다친 그는 사고 후 삶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병상일기를 썼다. 그 코메디언은 우리에게는 영화 <하나비><기쿠지로의 여름>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다. 그의 책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이젠 거슬러 1995년에 쓴 책까지 나왔다. 의미심장한 제목, <죽기 위해 사는 법>을 읽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에서는 독설가로 유명하다. 차이는 크지만 이해를 돕자면 우리나라의 김구라의 큰형 정도라 해야 할까? 마치 야쿠자나 된 듯 고압적으로 상대를 나무라고, 심지어 주먹질까지 해서 보기에 심란할 지경인데,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인지 내재된 가학적 폭력성의 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국의 시청자(일본인)들은 눈물을 빼고 웃는다. 독특한 캐릭터는 책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까칠하다 못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책에서는 레디컬radical하다고 표현했다) 문장들은 좀처럼 글로 만나지 못한 것들이라 통쾌하기까지 했다(대상이 일본이 아니던가?). 하지만 남는 건 없다.

  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건질 만한 부분은 전반부인 ‘1부 죽기 위해 사는 법’이다. 큰 사고나 병으로 말 그대로 ‘죽다가 살아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병원의 입원생활이란 것이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흰색이지만) 누렇게 탈색된 플라스틱 그릇에 고기반찬이 들어 있으면 ‘횡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단순한 병원생활에 굳이 고무적인 것이 있다면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 병원에 누워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내다보면서 내일을 다짐하는 생각들에 공감이 많이 갔다. 

  "그 전까지 나는 삶이라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소리까지 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는 자살욕구와는 다르다. 딱히 제 발로 기꺼이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에서 언제 해방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구사일생이라 할 만한 상태에서 살아 돌아오고 보니 '간단히 자기 짐을 내려놓고 죽을 수는 없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나.

그래서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아도 가치는 있다. 살아 있다는 가치 말이다. 그렇게 다행이라거나 행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 실패하면 다시 살아난 의미가 없어진다. 끊임없이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본문 17 쪽 

 

  덤덤하게 말하는 재생再生의 변辯에는 죽을 때 까지 ‘잘 살겠다’는 다짐이 뭍어 있다. 어차피 죽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살고 있기에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은 안면이 함몰되고,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통해 얻은 대오大悟였다. 

  다케시는 사고 전 자신은 한마디로 ‘망나니’였다고 말했다. 성의 없이 방송을 하고 많은 돈을 받아서는 ‘언니’들의 품을 찾아다니며 밤을 새워 술을 마셨고,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팬이나 언론에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독설을 퍼붓는 바보 같은 망나니였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면서 강한 척 했지만, 걸레 같은 몸뚱이가 되어 남의 손을 빌어 밥을 얻어먹고, 용변을 해결하는 ‘단순한 동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바라봤을 때 ‘나 역시 사람 위에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국내에서 소개된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은 교통사고 이후의 모습이다. 가끔 안면이 씰룩거리고 약간은 밸런스를 잃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사고 이후의 후유증이다. 지인들과 의사는 그에게 안면신경 수술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온전히 의사가 하자고 한 대로 ‘마음대로 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는 듯 해 싫었다고 했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사건을 평생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이 교통사고를 재산으로 삼고 살아갈 의지가 있었다. 안면신경이 낫지 않아도 딱히 관계없다. 어느 정도라면. 수술하면 흉터도 남지 않는다. 예전처럼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정신도 옛날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건 싫다고 말했다. 기껏 이런 사고를 당해서 생각도 바뀌었고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게 되었는데,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정신도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건 싫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생각이 다시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대로 흔적으로 남기고 싶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신경수술은 고사하기로 했다.” 본문 29 쪽

  이 대목은 내게 ‘발상의 전환’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인생을 살면 반드시 찾아오는 ‘아픔과 슬픔, 사고와 괴로움’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그런 경험이 있기 전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인 듯 안 그런 척하고 살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생에 찾아온 것들이라면 그 역시 ‘내가 감싸 안고 살아가야 할 몫’인거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온전히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안고 살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삶에 있던 일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런 일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게 나인 것을 누가 어쩔거냔 말이다. 멋들어진 이 한 마디가 이 책에서 건진 ‘나를 흔든 한마디’였다.

  나머지 부분은 ‘살아남은 자가 바라본 우스운 세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원래 독설가인 그인지라 표현은 무식하고 살벌하다. 말도 콩도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고, 모순덩어리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따라 읽다 보면 통쾌한 무엇을 발견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늘 속으로 하던 말들, 정말 허물없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한다면 술의 힘으로 거침없이 배설하고 싶은 ‘독설들’이었다. ‘네 나라도 별 수 없구나’ 싶어 위로가 되고, ‘네 말이 내 말이다’ 싶어 공감을 했다. 하지만 읽고 난 후엔 뱉어낸 담배연기마냥 흩어져버렸다. 원제목도 ‘다케시의 죽기 위해 사는 법’이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다케시의 나답게 죽기 위해 나답게 사는 법'이 더 어울린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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